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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국 목사
예배는 신앙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일은 마땅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의 전부가 그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배하는 형식이나 태도가 어떠하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는 예배자의 믿음과 신앙 사상이 어떠하냐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이해나 오해는 이상스러운 예배 형식을 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우리 자신 스스로의 유익들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목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태도와 방법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들을 중점으로 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예배의 형식이 자신들의 느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서, 그리고 본인들의 유익을 위하여서 드리도록 각본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에 삼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그분께 드리기 위한 예배를 만들려고 한다면, 우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기도와 말씀들, 그리고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는 순서들로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의 공로나 행위 또는 아름다운 음성들을 칭찬하고 기리는 그러한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초점을맞추며 그분의 분부하심을 듣고 알기 위하여 드리는 순서로 바뀌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배가 없는 그리스도인 삶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도 하늘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리며 감사하는 것처럼, 그리고 부모님들이 기쁘고 보람 있어 하시도록 자주 찾아 뵙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삽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요?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새롭고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찾아갑니다.
어떤 절간에서 한 여승이 간절한 마음으로 100일 기도를 드리다가 신내림을 받았는데 그 여승은 그날부터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고 고양이처럼 행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목도한 신자들은 그 여승이 부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여승을 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승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도 그런 은혜가 내려지기를 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지금 기독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생애의 빛은 이번 기사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편집실-
부흥회
어떤 교회의 목사가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10리 길을 마다 않고 그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죄 사함을 받고 기쁨에 넘쳐서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초대 교회의 오순절을 생각하였다. 그 교회의 청년 하나는 방언으로 교회의 어른들에게 설교했는데 완고한 노인들도 그 능력에 압도되어 죄를 회개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교회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 중에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비상한 것들이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 학자의 마음을 가지고 그 교회의 부흥회를 찾아갔다. 내가 그 교회에 들어서자 두세 형제들이 나에게 와서 속히 성령을 받을 것을 권하였다.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 진지하고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따라서 울게 되었다. 부흥회를 참석하는 동안에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부흥사의 말에 의하면 하늘에서 불길처럼 뜨거운 것이 내려와서 신도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것인데 그러한 하늘의 은혜를 받은 신도들은 이상한 변화를 느끼면서 갑자기 죽을듯한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등줄기에 뜨거운 것을 느끼기도 하다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느낌 속에서 죄 사함과 구원받은 기쁨이 일시에 몰려와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올리고 황홀한 표정으로 기도하며 찬송하고 심지어는 껑충껑충 뛰는 신도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항상 진리는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균형진 판단력과 양심의 음성을 통하여 접근하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 혹시 내가 그 동안 잘못 생각했던 것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지금 내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여기 있는 교인들처럼 마음의 고통과 영적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내가 받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부흥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나도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면 이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내게 임하여 마음속의 죄는 사라지고 근심의 구름이 걷히어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생애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나는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하루를 기다려도 은혜는 내리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마음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 교회의 목사를 찾아가서 물어 보았더니 당신의 열심과 기도가 부족한 탓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애써 울면서 기도하고 부르짖으면서 은혜를 간구하였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을 구하심같이 저도 구하여 주옵소서! 나의 간절한 절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효험이 없는 애씀과 노력 끝에 나는 마침내 실망하고 말았다. 내 죄가 다른 사람의 죄보다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하늘에서 받은 특별한 은혜로 서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데 오직 나만 고아처럼 버림받은 자식처럼 감사할 은혜도 느끼지 못하고 나타낼 기쁨도 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으로 우울에 우울을 더하는 생애를 살게 되었다. 의심과 회의가 전보다 열 배는 증가되었다. 다른 신도들의 눈에 나는 믿음이 없는 자로 보이게 되었고 회개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은 죄를 숨기는 자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여기 저기서 나를 손가락질하여 소근거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인들과의 교제를 피하게 되었고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나를 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께서는 심령의 변화를 식물의 성장에 비유하여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막 4:28-29). 성경은 결코 사람이 갑자기 변화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먼저 씨를 땅에 묻어야 하는데 씨앗은 그곳에서 썩어서 죽는 경험을 먼저 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서 싹이 나오는데 그런 다음에도 시간과 절차에 따라서 이삭이 나오고 서서히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매가 맺기까지 필요한 양분과 경험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경험이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던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변화되어 은사를 받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은 급진적인 변화와 열매를 부인한다.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반복하여 설명하셨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1-33). 겨자씨같이 작은 존재가 먼저 나물로 성장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새들이 날라와 머물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모두 사람이 급진적으로 하루 아침에 변화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변화와 열매 맺음을 말한 적이 없다.
예언서인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는 교회의 탄생과 투쟁과 승리의 과정을 모두 2천 년 이상으로 예언하고 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의 심령 변화와 교회의 성장 기간을 하룻밤 사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지진대와 산맥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형성된 것처럼 사람이 변화하는 과정에도 필요한 경험과 시간이 반드시 요구된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그리고 날마다 마시는 물처럼 진리의 효과는 확실하고 분명하지만 그 작용은 눈에 띄는 현격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는 약초와 같은 것이지 당장 효과를 나타내는 화학 약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겨자씨가 성장하듯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가서도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진짜 경험을 할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바울 역시 일정한 기간 동안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영적 투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서 죄 사함을 받는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개신교회를 일으킨 마틴 루터의 경험도 그렇고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루터로 하여금 루터가 되게 만든 것은 단순히 그의 스승 스타우비츠가 전해 준 한 마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3,4년 동안 수도원 안에서 홀로 사색과 기도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며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감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존 번연의 경우도 그가 죄 사함의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후에 오히려 1,2년 동안 베드퍼드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단련의 과정이 필요하였다.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내가 그것을 느끼든지 않든지를 불문하고 나의 신앙적 경험과 성장이 진일보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상관없이 아무리 울고 절규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며 눈물을 흘려보아도 그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값싼 감정에 불과하다.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양심의 결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어떤 부흥회나 집회도 무가치하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변화와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진리 위에서 부흥하는 일이 필요하다. 감정적 부흥을 조장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요한 웨슬리와 휘트필드의 부흥회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데, 감리교회의 선구자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부흥사가 아니었다. 요한 웨슬리는 매우 논리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사였다. 그는 진리와는 상관없이 소리만 지르는 감정적 설교가가 아니었다. 그가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감리교회가 오늘날까지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그의 후예들이 그의 가르침을 땅에 내려 놓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참된 부흥은 이성과 양심이 진리를 심사숙고한 이후에만 올 수 있다. 진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감정적 부흥회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부흥회를 오용하고 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부흥회를 찾아가 절규에 가까운 통성 기도와 시끄러운 음악을 통하여 황홀한 무아지경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텅 빈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감정적 확신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현대의 생리학자들은 오늘날 부흥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감정적 변화들을 극단적인 신경 작용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사회심리학자들은 부흥회를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감정적 기쁨과 행복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부흥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유
사람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될 자이면서도 죄를 짓는다. 깨끗하게 살아야 할 의무와 그렇게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함을 잃어버린다. 천사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짐승의 수준까지 떨어져서 헤맨다. 올라가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내려가면 지옥의 자식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무한한 영광과 무한한 타락 이 둘 중 어느 것도 인간이 이를 수 있는 형편이다.
내려가기는 쉽게 생각되고 올라가기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그러나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양심의 가책이 있고 후회와 불행이 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결코 쉽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 성경 말씀의 뒷받침이 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이 있고 간간히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지만 육체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고 세상이 유혹을 던지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도 쉽다고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두 길 모두 어려운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바는 행하지 않고 자꾸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게 되는 경험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모두 두 개의 나 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는 또 하나의 나와 늘 싸우고 있다. 참으로 인생은 전쟁과 투쟁의 연속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세네카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전쟁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투쟁이 너무나 길고 힘들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투쟁이 힘들고 전쟁에서의 패배가 싫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잊어버리기 원한다. 성령께서 양심을 괴롭혀 주는 것이 싫고 다가오는 유혹과 육체의 욕심에 맞서서 싸우기가 싫기 때문에 쉬운 구원을 찾아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다닌다. 이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소위 말하는 부흥회이다. 그곳에는 죄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계명도 없고 순종도 없으며 극기와 인내도 없다. 오직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만 그곳은 내려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는 넓은 길이다. 육체와 유혹이 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넓은 길이다. 존 번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가끔 개와 고양이의 신세를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개나 고양이에게는 사람이 겪어야 할 선과 악의 싸움과 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존 번연 역시 두 개의 내가 싸우는 전쟁이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구원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선과 악의 전쟁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면 거기서 구원의 평안과 승리가 얻어진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3-24).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때문에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선택할 것이며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좁은 길은 감정적인 길이 아니다. 그 길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다음 인내와 극기로서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진리가 있고 죄를 버림으로써 얻는 평안이 있으며 은은한 성령의 인정하심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심령의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주저 없이 좁은 길을 걷기로 선택한다
거듭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에는 위대한 진리가 선언되어 있다. 거룩한 산이나 성전을 찾음으로써만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외형적인 형식과 의식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예배는, 바로 거듭난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지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이다. 그들의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등록되어 있고, 교인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님께 마음을 다 바친 적이 없고, 주님과 산 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며, 영적으로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실상은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참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표면상으로 교회에 나와 몸이 예배 시간에 참석하여 앉아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모두 온전하게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실재로 존재하는 분이시며, 성경은 신뢰할 만한 책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으로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어떠한 공언을 하든 간에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로써 심판을 받는다. 우리의 품성은 우리의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된 여부를 보여 준다. 진리가 마음속에 심어져야 한다. 진리가 마음을 지배하고 애정을 통제해야 한다. 우리의 온 품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쳐져야 한다. 육신은 죽고 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임재하셔서 모든 것을 통제하셔야 한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생애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들, 곧 온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로 충만한 사람들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종교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게 되고, 정신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며, 그때에 참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즐거이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참된 경배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신 열매이다. 어디서나 영혼이 하나님을 구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여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
죄에 대한 승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사람이 매일 반복하여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그리고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없이, 또 완전히 자신이 죽는 경험이 없이, 변화되지 않은 똑같은 생활을 살면서, 그리고 그냥 은혜로 죄를 다 덮어주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기만 아래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승리의 생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함께 어우러져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 죄를 승리하게 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8).
칭의와 성화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을 때,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은, 죄를 미워하는 새 마음까지 함께 받는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범하면서도 그분의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과 공로를 굳게 붙들고 죄 짓기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매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다. 우리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를 통하여 의롭다 는 칭함, 즉 칭의를 받는다. 그런데,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에 성화의 역사가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칭의는 한순간의 역사이고, 성화는 일생 동안에 일어나는 역사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칭의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화란 무엇인가? 성화란 칭의를 계속 지속시키는 것, 즉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따라 살아가며,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말한다. 성화는 매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남김없이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굴복을 말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는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운 침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계속적으로 굴복시켜야 하며 말씀대로 매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성화되는 것은, 즉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것은, 복음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일과, 하늘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영혼을 남김없이 굴복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행실이 그가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2)고 말하였다.
기쁨과 찬송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과 권능에 대하여 말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찬송과 감사의 표현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분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시 50:23)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송과 감사는 향기처럼 하나님께 올라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경배할 때,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의 도우심으로 죄를 승리하고 극복한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의 온 생애가 찬송의 생애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그의 도를 땅 위에 알 (시 67:2)려지게 하고 그의 구원을 만방 중에서 알리 려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이 마련하신 구원의 큰 경륜의 가치와 구속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인식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고상한 특권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루하루 기쁨에 넘친 새로운 생애로 당신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우리를 돌보시는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겼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사의 표정을 보고자 하신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감사가 우러나오는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들에게 우리가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감사히 여기며, 동시에 그분의 다함이 없는 충만하심에서 더욱 큰 축복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경험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귀중한 사건들에 대해,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베푸신 인자하심과 기이하신 역사에 대하여 간증하고 감사하고 찬양을 드림으로써, 우리의 예배는 더욱 성령의 감동하심이 충만한 예배가 될 것이다.
삼 년이 지나, 다시 아합 앞에 나타난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을 갈멜산 위에 모이도록 해서, 자신과 바알과 아스다롯의 선지자들과 만나 대결하도록 요구하였다.
아합은 신속히 사자들을 온 나라에 보내어 바알과 아스다롯의 선지자들에게 엘리야를 만나러 오라고 소환하였다. 모든 성읍과 촌락에서는 백성들이 정한 시간에 모일 준비를 하였다. 정해진 장소를 향해 여행할 때에 많은 사람의 마음은 이상한 예감으로 가득 찼다.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갈멜산으로 모이라고 하겠는가? 또 어떤 새로운 재난을 이 백성과 이 나라에 내리려는 것일까?
갈멜산에서의 대결
예정된 날 아침 일찍부터,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고조된 기대를 가지고 산꼭대기 가까이에 모여들었다. 이세벨의 선지자들은 당당한 행렬을 지어 행진해 올라왔다. 왕은 당당하고 화려한 행렬로 나타나 사제들 앞에 자리를 잡았고, 우상 숭배자들은 그를 큰 소리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사제들은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 땅에 삼 년 반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염려하였다. 저희가 신뢰하는 신들은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그들의 광란의 부르짖음,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 그들의 겸비, 그들의 매우 역겨운 의식과 끊임없이 드리는 값진 제물에 대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이상하게도 무관심하였던 것이다.
아합 왕과 거짓 선지자들을 대해 마주 선, 모여든 이스라엘 군중에게 둘러싸인 엘리야는 여호와의 영광을 옹호하기 위하여 나타난 사람으로서 오직 혼자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 위와 주위에는 보호하는 무리 곧 힘센 천사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선지자는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인식하고 군중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서울 만큼 엄숙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리야는 먼저 허물어진 여호와의 제단을 바라본 다음에 군중들을 향하여 나팔 소리 같은 분명한 목소리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왕상 18:21)고 외쳤다. 백성들 중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
이스라엘 백성이 갈멜산 위에서 의혹을 품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엘리야의 음성이 침묵을 깨뜨렸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왕상 18:22-24).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용감하고 담대해 보였으나, 그들의 간악한 마음속에는 공포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겁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며, 제단을 준비하고 그 위에 나무와 제물을 놓은 후, 그들의 예배에 사용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고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들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은 산림과 인근 산에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쳤다. 사제들은 저희 제단 주위에 모여 서서 뛰고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고 머리털을 뜯고 살을 베면서 저희 신에게 도움을 간청하였다.
아침이 지나고 정오가 되었으나 바알이 그의 추종자들의 부르짖음을 듣는다는 증거가 없었다. 아무런 음성도 없고 그들의 광란의 기도에 대한 응답도 없고 제물도 살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이 격앙된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교활한 사제들은 제단에 불을 질러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불이 바알에게서 온 것처럼 믿게 할 어떤 방법을 고안하려고 계속 노력하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모든 동작을 철저히 감시하였고 사제들은 속일 수 있는 요행의 기회를 바라면서 그들의 무의미한 의식을 계속했다. 울부짖음으로 인해 목이 쉬고, 자해한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옷이 더러워진 사제들은 마침내 자포자기하였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피곤하고 지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 사람은 이렇게 하자고 제안하고 다른 사람은 저렇게 하자고 제안하다가 마침내 그들의 노력은 끝나고 말았다. 그들의 비명과 저주는 그 이상 갈멜산에 반향되지 않았다. 절망 중에 그들은 시합에서 물러났다.
백성들은 하루 종일 헛수고를 하고 있는 사제들의 하는 짓들을 목격하였다. 백성들은 마치 사제들이 저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타는 광선을 움켜 집을 듯이 제단 주위에서 난폭하게 날뛰는 것을 바라보았다. 백성들은 사제들의 무시무시한 자학 행위를 공포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으며, 그로 인해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모인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거짓 이교의 신을 섬기며 하는 짓들에 지쳐서 이제 깊은 흥미를 가지고 엘리야의 거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야의 예배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되어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내게로 가까이 오라 고 명하였다. 백성들이 떨면서 가까이 나아 왔을 때에, 엘리야는 한때 사람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예배하던 허물어진 제단으로 가서 그것을 보수하였다. 그에게는 이 폐허의 무더기가 모든 이교도의 장엄한 제단보다 더 소중하였다. 선지자의 침착한 행동은 바알의 추종자들의 열광적이고 무의미한 흥분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제단을 다 쌓은 후 선지자는 그 주위에 도랑을 파고 나무를 차곡차곡 얹어 놓았다. 그 다음에 송아지를 준비하고 그것을 잡아 제단 위에 올려놓은 다음, 백성들에게 제물과 제단 위에 물을 부으라고 명하였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분노를 격발시킨, 오래 계속된 배도를 상기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저희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저희 조상의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내린 저주가 물러가게 하도록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양손을 하늘을 향하여 든 다음 간단하게 기도를 드렸다. 바알의 사제들은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비명을 지르고 거품을 내뿜으며 뛰놀았으나, 엘리야가 기도할 때에는 뜻도 없는 비명이 갈멜산을 울리지 않았다. 엘리야는 마치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고 그 광경을 목격하시고 그의 호소를 들으시는 것을 아는 것처럼 기도하였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거칠고 조리 없이 기도하였다. 엘리야는 간단하고 열렬하게 하나님께서 바알보다 위대하심을 보여주셔서 이스라엘로 당신께 돌아오도록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여 불로 내게 응답 하옵소서!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번갯불의 빛나는 섬광과 같은 불꽃이 하늘로부터 쌓아 올린 제단 위에 내려와 제물을 사르고, 도랑의 물을 핥고 제단의 돌까지 태웠다. 타오르는 불길의 화광이 산을 비추고 군중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행해지는 일을 마음 졸이며 바라보고 있는 아래 골짜기에서도 불이 내려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홍해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군대로부터 분리시켰던 불기둥과 흡사하였다.
산 위의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부복했다. 그들은 감히 하늘이 내린 불을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불에 삼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저희 조상의 하나님 곧 저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음은 아주 분명하게 온 산에 울려 퍼져서 산 밑의 평지에까지 메아리쳤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다. 마침내 백성들은 저희가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 욕을 돌렸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바알 예배를 참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합리적인 예배와 비교해 봄으로 그 예배의 성격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저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기까지 우로를 거두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
엄숙하고 경건하고 조용하고 감동적인 엘리야의 예배와 소란하고 흥분적이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한 감정적인 바알의 예배는 현저한 대비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예배는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참 예배이고 무엇이 거짓 예배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태도와 방식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참 예배가 되든지, 아니면, 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드렸던 이방신을 섬기던 것 같은 거짓 예배가 되든지 하는 것이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경건하고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낮추고, 바치며, 경배하는 가운데 드려야 한다. 예배는 성령 안에서, 올바른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방식으로 드려야 할 것이며, 진리 안에서 이성적으로, 복음이 가르치는 바에 맞게, 참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참된 회개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게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음악과 함께 드리는, 스스로의 감정에 빠지게 만드는 현란한 축제식 예배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못한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심을 감사할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며 드리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만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굴복하는 참된 회개 없이, 똑같이 반복하는 죄에 대한 불편함을 감정적인 음악과 분위기로 덮어버리는, 그리하여 거짓 안위와 평안을 조장하는 축제식 예배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런 예배 방식이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고 새 삶을 살게 만들지는 못한다.
어쩌면 지금 기독교는, 옛날 타락한 이스라엘의 바알을 섬기던 선지자들이 드렸던 것 같은 이방 예배 방식들을 답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거짓 제단에 사단에게서 가져온 이상한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축제식 예배는 이상하게도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산 제사가 되도록 하자!
수산물은 감염성 질환의 저장고이다. 해마다 미국 내에서 나오는 수산물에 의한 식중독이 약 113,000건이나 보고되고 있는데, 이 수치는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숫자보다 15배 이상이나 높은 수치이다.
수산물의 감염도 위험하지만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강이나 바다의 오염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문제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수질은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오염되어서 이제 생선은 더 이상 안전한 식품이 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오염된 물에서 자란 생선은 물에서 받아들인 독소를 지방 조직에 농축하여 저장하게 된다. 이들 독소에는 살충제, 염화탄화수소, 다이옥신, 클로데인, 수은 등이 있다. 현재 미국의 47개 주에 있는 생선소비 자문위원회에서는 특정한 종류의 생선을 먹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생선에 대한 경고 중에서 가장 공통된 문제는 생선의 지방 조직에 함유되어 있는 수은이 태아와 어린이의 뇌와 신경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점이다. 참치, 황새치, 상어 같은 큰 생선의 수은 함량은 매우 높다. 과일과 야채가 살충제에 의한 오염 때문에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 FDA의 연구 결과는 수산물의 살충제 함량이 과일이나 곡류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오염된 생선은 오염된 물에서 나온다.
식품의 오염도를 논할 때 살충제는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살충제의 종류는 900가지가 넘는데 미국에서는 약 600여 종의 살충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물에 있는 생선이 살충제에 노출될 수 있을까? 가장 큰 원인은 농업용 폐수이며 하수 처리물, 배에서 나오는 폐기물, 그리고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폐수와 쓰레기가 수질 오염의 주범이다. 오늘날의 생선은 오염도에 있어서 50년 전의 생선과는 전혀 다르다. 미국 오대호에 사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에서 종양이 발견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메기류는 약 30%가 간암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 암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생선의 종양이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암 사망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수질 오염도가 높은 수자원의 침전물을 생쥐의 피부에 발랐더니 피부암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해마다 수많은 물고기 떼가 수질 오염으로 인하여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살충제와 중금속 등에 의하여 오염되어 병든 생선들이 어부들에 의해 그물에 잡혀서 시장에 나오면 그것을 신선한 건강 식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약간 오염된 물은 심하게 오염된 생선을 만든다.
살충제와 다른 독극물에 의하여 오염된 물의 위험성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한다. 아주 낮은 오염도의 수질이라고 할지라도 물고기나 생선이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동안 살충제와 독극물은 체내에 축적되어서 결국에는 엄청난 위험을 가져다 주게 된다. 사람에게 장기간 동안에 걸쳐서 엄청난 위협을 가져다 주는 독극물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특색이 있다; 1) 생물학적 축적 2) 생물학적 확대. 생물학적 축적은 인간의 장기나 다른 유기체(동물이나 생선)에 서서히 독극물이 축적되는 과정이고, 생물학적 확대는 먹이 사슬의 단계를 올라갈수록 독극물의 농축도가 점점 더 올라가는 과정을 말한다.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의 북쪽에 있는 클리어 호수에서 있었던 조사 결과를 살펴보도록 하자. 호수의 인근에 있는 농경지에서 해충들을 없애기 위하여 DDT보다 약한 DDD(살충제)를 여러 번 살포하였었다. 살충제는 부분적으로 호수 위에도 직접 떨어졌지만 주로 빗물에 씻겨서 유입되었다. 살충제를 뿌린 결과 호수에 사는 생물이나 물고기에 다음과 같은 오염이 발생하였다.
호수의 살충제 농도는 겨우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인 0.2ppm이었는데, 이것은 호숫물 1억 방울에 DDD 2방울이 섞여 있는 농도를 말한다. 생리학적 확대로 인하여 호수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에는 DDD(살충제) 농도가 5ppm으로 증가되었는데 이것은 호숫물보다 500배나 높은 농도이다. 더욱이 먹이 사슬이 올라감에 따라 DDD 농도가 2500ppm까지 올라가는데 이것은 호숫물의 오염도보다 125,000배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환경보호국(EPA)에서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물 속에 사는 생물체는 환경 오염 물질을 물에서 감지되는 농도의 100만 배 이상으로 축적할 수 있다.
환경의학 부문에서 탁월한 연구 결과를 갖고 있는 미시간 주립대학의 케네트 로즈만 박사는 공장이나 화학물질에 접촉하지 않는 일반 대중이 중금속에 노출되는 경로는 생선의 섭취에 있다 고 발표하였다. 생선의 섭취에 의하여 유입되는 중금속이나 다이옥신은 혈청 콜레스테롤과 중성 지방의 수치를 올릴 뿐 아니라 남성의 정자 수와 불임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오염 물질들은 태아의 성장을 해치며 지능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대기 환경이 오염되어서 산성비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생선이 독성 무기질에 오염되는 정도가 올라가고 있다. 미국의 메인 주에서는 이러한 심각성을 주민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하여 임신할 나이의 여성들과 8살 이하의 어린이들은 연못이나 호수에 서식하는 물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물고기의 수은 함량 때문에 큰 물고기는 일년에 6마리, 작은 물고기는 22마리 이하로 섭취를 제한하고 있다. 또한 미시간 주에서는 이보다 확대된 제한을 주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생선의 인공 양식은 안전한가요?
사람들은 수질을 관리하는 인공 양식장에서 자란 생선은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먹을 것을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하다 보니 비양심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나온 인공 양식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떤 인공 양식장에서는 생선을 보다 신선하고 돋보이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인공 색소를 불법으로 사료에 첨가하고 있다. 항생제를 정기적으로 사료에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때때로 살충제를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는 사료에 따라서 생선에 함유되어 있는 오메가 3 지방산의 함량이 자연산에 비해서 낮아질 수 있다.
오염된 식품은 그것이 생선이든지 고기이든지 간에 장기간에 걸쳐서 만성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질병의 원인을 추적하기 쉽지 않다. 오염에 의한 문제가 드러나기까지 적어도 수년이 걸리며 증세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 원인이 되는 독소나 화학물질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야채나 과일도 살충제를 뿌려서 재배하기 때문에 생선이나 고기보다 더 위험한 식품이 아닌가 라고 질문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거의 모든 의사나 식품 학자들이 야채와 과일을 최적의 식품으로 추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실제로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있어서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은 수많은 임상 실험에서 분명하게 밝혀진 바이다. 과일과 야채가 비록 살충제로 키워졌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를 암의 위험에 노출시키기보다는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꽤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생선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많은 기사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건강에 좋은 생선을 먹은 사람의 콜레스테롤이 왜 올라갈까? 이 상반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각종 신문과 방송 매체들은 생선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주고, 심장 질환의 확률을 낮추어 준다는 식의 정보를 대중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생선의 소비량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1985년에 생선에 대하여 연구한 세 가지 보고서가 권위 있는 뉴 잉글랜드 의학 학회지에 기고되었는데, 그 중에 한 보고서는 네덜란드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로서, 날마다 1온스의 생선을 섭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장 질환 발병률이 50% 이상 감소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두 번째 보고서에는 생선의 기름은 콜레스테롤과 트라이글리세라이드 수치를 낮추어 준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으며, 세 번째 보고서에는 생선의 기름과 백혈구의 기능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 보고서 때문에 소고기나 돼지고기(red meat)를 먹던 많은 사람들이 생선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다량으로 섭취하던 선진국 사람들이 생선으로 방향을 전환한 다음, 콜레스테롤 수치가 어느 정도 낮아지고, 심장 질환에 유익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에서 생선으로 전환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지에는 생선과 생선 기름의 사용에 대한 경고의 글이 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생선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면
생선이 가지고 있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예를 들었던 케이스처럼 생선을 섭취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콜레스테롤의 상승은 어떻게 된 것인가? 제인의 경우를 살펴 보도록 하자. 제인은 지난 몇 년 동안 채식을 해왔는데, 친구로부터 생선이 심장 질환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몇 달 전부터 식단에 생선을 추가하여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채식을 하던 사람 즉, 콜레스테롤이 매우 잘 조절되던 사람이 생선을 섭취할 경우, 그 사람의 콜레스테롤은 평상시보다 상승하게 된다. 최근에 나온 보고서들은 생선의 기름을 섭취했을 경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도 LDL 콜레스테롤은 상승된다는 사실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러한 보고서들은 생선이 식품으로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점
생선은 동물성 식품이기 때문에 콜레스테롤을 포함하고 있다. 콜레스테롤 자체를 놓고서 살펴볼 때, 생선에 포함되어 있는 콜레스테롤과 다른 동물들 즉,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등에 함유되어 있는 콜레스테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콜레스테롤 함량을 비교해 볼 때, 생선 기름과 소의 T bone 스테이크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생선 기름을 섭취한 사람들의 콜레스테롤이 상승되는 것이다.
소의 T bone 스테이크 (3.5 온스) : 79 mg
청어 기름 (15g) : 115 mg
연어 기름 (15g) : 73 mg
정어리 기름 (15g) : 106 mg
대구 간 기름 (간유, 15g) : 86 mg
두 번째 문제점
두 번째 문제점은 불포화 지방과 관련된 문제이다. 일반 고기와 비교해 볼 때, 생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불포화 지방에 대한 복합 포화 지방의 비율(P/S ratoio)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식물성 식품에 비교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소고기나 닭고기를 주로 먹는 사람들은 생선으로 대치함으로써, 콜레스테롤 수치를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식물성 식품의 우수성에 비교할 수는 없다.
몇 해 전 네덜란드에서 생선이 심장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을 현저히 낮춰 줄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생선이 심장 질환에 유익하다는 언론사들의 발표를 듣는 사람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생선을 먹는 사람과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 사이에 있어서 콜레스테롤 수치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만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생선의 섭취가 어떻게 심장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을 낮추어 줄 수 있다는 발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메가-3 지방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오메가-3 지방산과 심장 질환
연어, 정어리, 고등어와 같은 몇몇 특정한 생선에는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이들 생선에 들어 있는 오메가-3 지방산은 심장에 특이한 유익을 주는 EPA라는 산을 함유하고 있는 복합 포화 지방산이다. EPA라는 물질은 혈액의 끈적거리는 현상과 덩어리지는 현상을 감소시켜 준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혈액이 끈적거리거나 뭉치는 현상이 감소된다는 말은 혈관이 막히거나 심장 마비의 확률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메가-3 지방산은 혈압을 조금 낮추어 주는 역할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지방을 섭취함으로써, 트라이글리세라이드가 실제적으로 낮아지는 경험을 한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오메가-3 지방산은 동맥 경화에도 유익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심장 마비가 일어났을 경우에도, 심장 마비로부터 초래되는 근육 파괴(muscular damage)를 감소시켜 준다.
이러한 증거들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우리는 심장 질환 발병률을 낮추기 위해서 생선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와 관련된 두 연구 보고서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실험 결과에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끊고 생선을 먹는 사람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red meat)를 먹는 사람들에 비해서 심장 질환 발병률이 50% 정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채식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장 질환을 조사해 본 결과, 발병률이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86% 이상 낮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두 가지 실험 결과에서는 당연한 결과이다. 몸에 해로운 육식을 하던 사람들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끊고 생선을 먹었을 경우에는 심장 질환의 발병률이 낮아질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도 어느 정도 낮아질 수 있다. 그러나 육류를 끊고 생선을 섭취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 비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육식을 하던 사람이 일반 육류를 끊고 생선만을 유일한 육류로 섭취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을 수 있지만, 채식을 하던 사람이 생선을 식단에 추가했을 경우에는 건강에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건강을 위한 최적의 식사법은 채식임에 틀림없다.
결론
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식물성 식품들에서 우리는 충분한 오메가-3 지방산을 얻을 수 있다. 오메가-3 지방산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에는 단순한 지혜가 요구된다. 돼지고기와 비슷한 정도의 콜레스테롤을 포함하고 있으며, 오염된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으며, 발암 물질에 대한 위험을 감수한 채 생선을 통하여 오메가-3 지방산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신선하고, 아무런 부작용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질병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채소와 과일에서 오메가-3 지방산을 얻을 것인가? 선택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지성에 맡긴다. 최고의 오메가 3 공급원은 아마씨이다!
기분이 좋을 때나 행복할 때 사람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슬플 때도 노래를 부르면 곧 그 감정이 해소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래는 우리의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노래는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 영혼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항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감정을 대표하는 노래들이 생겨나곤 하지요. 당신은 요즈음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당신의 영혼에서는 오늘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나요?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노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꼭 부르기를 원하는 노래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꼭 가르치시고 싶어하는 노래를 가지고 계십니다. 구속함을 받아 새 하늘에 가서 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노래를 반드시 배워야 한답니다. 그것이 무슨 노래이냐고요? 그것은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노래인데, 특별히 이 노래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 14: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5:3).
구원을 받아 하늘에 가서 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이 노래를 배워야만 합니다. 이 노래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찬양한 모세의 노래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법을 배운 십사만사천이 부르는 경험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구원을 받아 하늘에 올라가서 살 사람들은 자신만의 경험의 노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살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셨던 그 기이한 섭리에 대하여 가슴 속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감동과 감사의 노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노래는 하늘에 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무리 찬양대인 십사만 사천이 우주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부를 간증의 노래이기 때문에, 그때 그 찬양대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지금 이 땅에서 자기만의 간증과 경험의 노래를 꼭 배워야 한답니다.
시련 속에서 배우는 노래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의 주인은 자기 새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노래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래를 가르치려고 해도, 밝은 대낮에, 그리고 주인의 목소리 외에 여러 다른 소리들이 들려오는 동안에는, 그 새는 주인이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노래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어쩌다 주인이 가르쳐 준 노래의 한 절씩을 여기저기에서 떼어내어 짤막하게 부르는 흉내를 낼 수는 있었지만, 결코 혼자서는 그 노래의 완전한 곡조를 다 부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주인은 매우 검고 두꺼운 천으로 새장을 덮고, 그 새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곳에 두고 그 노래를 가르친답니다. 외롭고 단절된 곳, 고독하고 고립된 어두움 속에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로지 주인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고요한 곳에서, 그 새는 주인이 가르쳐주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새는 주인의 노래를 배워 완전한 곡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그 새를 밝은 곳으로 내어 놓으면, 그 새는 비로소 자기가 배운 노래를 부른답니다. 아무리 다른 소음들이 들려와도, 그 새는 오직 주인이 가르쳐준 그 노래만을 부르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세상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들려오는 동안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노래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시련의 어두움 속에서, 뼈아픈 고통의 그늘에서, 모든 것이 떠나버린 뒤의 소외감과 외로움의 빈 둥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배워주시려고 하는 노래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때에야만이 오로지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하니까요! 그리고 고통 속에서 아픔을 이기며 배운 노래여야만이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고 부를 수 있으니까요!
감사함으로 부르는 노래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노래의 주제들을 만들어 줍니다. 어려운 시련을 하나하나 견디고 겪을 때마다 우리에게는 노래의 제목들이 하나 둘 더 늘어납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서 배워주시려고 하는 공과들을 잘 배웠을지라도, 감사함으로 그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 노래를 완전히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 노래가 감사함으로 충만한 멜로디가 되기 전에는 완전한 곡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하는 일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택해 주신 것으로 늘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일이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든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무 불평 없이&&.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진흙이 묵묵히 있듯이&&.
토기장이는 도자기나 그릇을 만들 때에 진흙을 가지고 자기의 뜻대로 형체를 만들지요. 그는 진흙을 떼어서 빚다가, 또 그것을 누르고 뭉쳐서 물로 축이고 말립니다. 또 얼마 동안은 손을 대지 않고 그 진흙 덩어리를 그대로 놓아두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진흙 반죽이 완전히 말랑말랑해지면, 그것으로 그릇 만드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모양을 만든 다음, 다시 깎고 다듬은 후에 그것을 햇빛에 말리고 솥에서 굽습니다. 그런 모든 성가신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사용하기에 알맞은 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빚어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손에 가만히 놓여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토기장이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 토기장이 되시는 예수님에 의하여 꼴 지어지는 일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때는 우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계획과 의도를 버리는 것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정말 좋은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바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은, 하늘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쓸 데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랍니다.
우리가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리라는 요구를 받을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훌륭하고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인생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길을 한숨과 비탄에 찬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삶 속에 예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속에 거하는 사람들은 밝고 맑고 행복하고 감사한 표정으로,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 갈 것입니다.
장차 오는 생애에서는 이 땅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실망하게 했던 신비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는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던 우리의 기도와 좌절당했던 희망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길을 노래로 넘치게 하십시오! 더 많은 가사와 주제들을 만드십시오! 머지않아 하늘에 가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찬양하는 경험의 노래를 부르게 될 때, 더 많은 곡들이 있게 하십시오. 지금 당신은 그 노래를 배우고 계십니까? 요즈음 당신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