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오에 대한 언급은
오로지 사도 명단에만 나온다.
마태오 복음 10장 3절에 보면
열 두 사도 중
필립보 다음으로 여섯 번째로 이름이 나온다.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 ‘톨로마이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요한 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요.’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5-47).
여기서 우리는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거의 항상 필립보 사도와 함께 나타나고
예수님께서는 바르톨로메오,
곧 나타나엘을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르신 것을 알 수 있다.
나타나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좋은 이름이다.
그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그는 진실된 사람으로서
속과 겉에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께로부터 첫 번으로 불림을 받은 사도들에 속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처음부터 일찍 믿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주님의 사도가 된 바르톨로메오는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결국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가 되었다.
아르메니아, 인도, 메소포타미아, 에티오피아와
인근 나라 등지에서 왕성한 복음 전파 활동을 벌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와
시리아의 에프렘 부제의 증언에 의하면
바로톨로메오 사도는 리카오니아까지 갔다고 한다.
그래서 2세기 말,
인도에는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하였고,
그곳에서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히브리어로 된 마태오 복음서를 전달하였다.
외경인 안드레아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동반자가 안드레아 사도였다.
외경인 필립보 행전에 의하면
바로톨로메오 사도는
에집트의 오아시스에서 활동을 하였고,
그곳의 왕 폴리미우스 왕의 개종을 이끌었다.
그의 순교는 페르시아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끔찍하게도 살아있는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한 후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다른 사도 순교자들도 전구의 힘이 강하지만
특별히 ‘두 번 죽임’을 당한 바르톨로메오의
전구의 힘은 더욱 강하고 빠르다고 많은 신자들이 믿었다.
그러므로 유럽에서는
열 네 명의 “구급(救急) 성인들”속에
바르톨로메오가 들어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 천장에
그의 유명한 최후의 심판을 그렸는데,
심판관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자신의 살가죽을
두 팔로 봉헌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유해는
507년경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1세가
메소포타미아의 다라스로 모셔왔다.
그 후 최종적으로는
983년 오토 3세 황제에 의해 로마로 모셔왔고
(티베르강 섬 위에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성당이 지어짐),
그의 두개골은 123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모셔져와
그곳에 바르톨로메오 대성당이 세워졌다.
그의 축일은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6월 2일에 지내고,
라틴 서방교회에서는 8월 24일에 지낸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시골에서 특별히 목자들과
수많은 수공업자들의 주보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그는 특히 기후에 도움을 주는 분으로
또한 신경통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청주주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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