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호텔에서 만난 오빠의 눈빛이 마치 암흑 속에 있는 동물의 눈처럼 이상하게 빛났는데, 무언가를 호소하려는 그런 눈빛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습니다”재일교포 2세 오페라 가수 전월선 씨는 올해 초 자서전 『해협의 아리아』를 통해 '재일교포북송사업'으로 빚어진 가족의 비극사를 털어놨다.
도쿄에서 출생한 전 씨는 조총련계 학교를 졸업하고, 도호학원 음대를 거쳐 1983년 일본의 대표적 오페라단인 니키가이(二期會)에 입단, 성악가로 데뷔했다.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프리마돈나로 성장, 일본을 비롯해 미국, 유럽은 물론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공연을 개최했다.
전 씨는 자서전을 통해 북한으로 귀국한 4명의 오빠가 모두 북한의 요덕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아들들의 참혹한 상황을 알게 된 전 씨의 어머니가 북한의 인권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헌신했던 이야기를 공개했다.
올해 초 일본에서 출간된 전 씨의 수기는 출판사 ‘쇼각칸’(小學館)이 제정한 제13회 논픽션 대상 우수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 비극의 씨앗…재일교포북송사업전 씨의 어머니는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뒀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오빠들의 존재를 몰랐던 전 씨는 어느 날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보게 된다. 어머니는 고등학생이 된 전 씨에게 비로서 북한으로 간 (이복)오빠들에 대해 얘기를 꺼내 놓았다.
재일교포 사회에 북송 사업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1959년, 전 씨의 오빠들도 ‘지상낙원’에 대한 희망찬 기대를 품고 ‘만경봉호’에 몸을 실었다.
북으로 간 오빠들은 얼마되지 않아 연락이 두절됐고, 어머니는 전 씨의 아버지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1971년에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북한으로 건너간 어머니의 친구가 보낸 편지에는 ‘아들들이 수용소에 수감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담겨 있었다.
전 씨의 어머니는 당시만 해도 북한 사회와 조총련, 그리고 김일성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소문이 계속 들려오자 어머니는 아들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1980년 북한을 방문했다.
어머니는 평양의 한 호텔에서 세 명의 아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게 된다. 둘째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어머니를 놀라게 한 것은 아들들의 건강 상태였다. 수척한 얼굴에 건강도 좋지 않아보였다. 또한 어머니는 아들들이 무엇인가에 잔뜩 겁을 먹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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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씨의 어머니와 오빠들의 사진 <사진=해협의 아리아> | | |
감시원이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세 명의 아들들은 차마 믿겨지지 않은 얘기를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다. 자신들은 10여 년간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풀려났다고 전해줬다. 고문이 일상화 돼있는 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공포스럽게 살았다는 고백이었다.
아들들이 말하는 수용소는 사람들이 고문과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고, 도망가다 붙잡히면 공개처형을 당했으며, 아이들까지 매일같이 죽어나가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그 후로 어머니는 북한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두 번째 방문했을 무렵 아들들이 수용소에 가게 된 경위를 듣게 됐다.
1969년 여름 아들들은 ‘남조선 스파이’란 죄목으로 북한 당국에 체포돼 일반 감옥에 수감됐다는 것이다. 이후 1970년 요덕수용소로 이송됐고, 1978년 풀려나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왜 수용소에 수감됐는지 정확한 죄명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예술을 좋아했던 첫째 아들이 ‘미켈란젤로를 존경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끌려온 것 같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 北 현실 알면서 체제 찬양 노래 부를 수 없었다일본에 돌아온 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때부터 북한 수용소를 증언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치게 된다. 그때만 해도 교포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에 북한의 실상을 알더라도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한국식당에 오는 손님마다 북한의 실상과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고, 이 증언을 발판으로 일본 내에서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회’라는 NGO 단체도 발족하게 됐다.
전 씨와 오빠들의 첫 상봉이 이뤄진 것은 1985년 무렵이었다. 전 씨는 4월 15일 김일성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조총련 문화국으로부터 ‘봄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받게된다. 북한을 방문한 전 씨는 김일성 앞에서 혁망가극 ‘피바다’의 아리아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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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에서 공연하는 전 씨 <사진=해협의 아리아> | | |
전 씨는 공연이 끝난 후 호텔에서 오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 본 오빠들과의 사이가 처음에는 어색하고 긴장도 됐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족의 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큰 오빠는 전 씨에게 그동안 몰래 써오던 편지를 어머니에게 전해달라며 건네주었다. 편지에는 북한에서 살아온 그동안의 고통스러운 생활과 김정일에게 복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 씨는 그 후에도 방북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오빠들이 당하는 현실을 알면서 그 체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차마 부를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 1990년 큰 오빠가 사망했고, 2001년에는 셋째 오빠도 세상을 떠났다.
전 씨는 1995년 일본을 방문한 강철환 씨를 만나 오빠들에 대한 얘기를 또다시 듣게 된다. 강 씨는 오빠들과 요덕수용소에서 인연을 맺게 됐다고 한다. 강 씨가 탈북할 당시 오빠들은 일본에서 어머니가 보내준 옷까지 줬다고 한다.
책에는 또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대한 역사의 어두운 기억이 생생히 담겨있다.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교포들은 북한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 속에 살아야만 했다. 어머니는 전 씨에게 “귀국사업 때문에 아이를 보낸 부모들이 많았는데, 우리처럼 비참한 운명이 된 사람이 많았다“고 말해줬다.
일본의 가족들은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더라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들을 보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재작년 세상을 떠난 전 씨의 어머니는 이러한 귀국사업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어머니의 ‘고독한 싸움’은 북한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일본의 시민단체들을 통해 계속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