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9 - 쩐왕조는 제3차 30~40만 몽골군의 침략에서 승리해 기세를 떨치다!
오정환이 지은 428페이지에 달하는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 중국 천년전쟁” 이란 책에... 베트남은 세계
최강 몽골군의 침략을 당해 3차례 모두 몽골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하는데 제목으로는 1차 침공은
“인내의 승리”, 2차 침공은 “기사회생” 그리고 3차 침공은 “대역사의 완성” 이라는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1257년 몽골군의 1차 침공은 쩐투도의 지휘아래 쩐 구옥뚜안의 맹활약으로 물리쳤는데 1278년에
송나라의 항복을 받은 원나라 쿠빌라이는 젊은 시절 운남성의 대리국을 정벌해 명성을
얻었는데, 그 군대가 베트남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수 없었으니 다시 베트남을 침공합니다.
1284년 7월 21일 대원의 황제 쿠빌라이는 9째 아들 토곤(脫歡) 을 진남왕(鎮南王)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20만
대군으로 광동(廣東) 에서 바다로 베트남 중부 점성(占城 참파)국을 공격하니 다이비엣(대월)은 군대와 함선
을 보냈지만 몽골군 수게투는 도반(阇槃) 에 상륙해 점성국을 정복하니 원나라군은 남북에서 협공할수 있게 됩니다.
흥도왕 (興道王) 쩐 구옥뚜안은“적이 오면 목숨을 걸고 타격하고, 보이지 않으면 산 속에 숨은뒤
투항해서는 안 된다.” 식량을 파묻거나 불태우는 청야작전을 채택하며 토곤의 1로를 막았고
2로는 나시르 웃 딘이 운남(雲南)에서 오자 쩐 태종의 아들 소문왕(昭文王) 쩐 냣두앗이
그외 3로는 점성국 수게투가 올라오니 원나라군은 30만~50만이고 베트남군은 20만~ 30만 입니다!
베트남군은 깔리(可里)에서 패배했고 쩐 구옥뚜안은 반끼엡(萬劫) 으로 퇴각해 원의 우마르 수군에
1차 승리했으나 이후 포위당하자 쩐 성종이 원군을 보앴고, 토곤은 부교로 즈엉강을 건너
수도 탕롱으로 들어갔지만 청야작전으로 텅 빈 폐허 뿐인지라 다이 비엣(대월) 의 황제를 추격합니다.
1285년 4월 7일, 수게투 군대가 진격하자 두 황제는 남쩌우강 (南兆江) 에서 배를 타고 피해
타인호아로 달아나니 토곤의 원나라군은 풍토와 더운 날씨, 폭우와
풍토병으로 고생하자 쩐 구옥뚜안은 홍강의 원나라군 진지를 점령하고 탕롱 공격을 준비합니다.
1285년 6월 24일 쩐 구옥뚜안이 공격하자 수게투는 해안가로 달아났으나 사살되었고 우마르는 타인호아
로 들어갔으며, 쩐 꾸앙하이는 북으로 진격해 응우옌(원나라) 군의 기지들을 점령하자 원나라군내
한인 병사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니.... 숨었던 쩐군은 쩐 꾸앙하이의 진격에 합류해 원의 함선을 탈취합니다.
쩐 꾸앙하이는 홍강의 원나라군을 공격해 전함을 불태우는데 수게투가 패해 퇴각했다는
소식에 토곤은 군을 물리니, 1285년 6월 24일, 쩐 인종이 토곤의 군대를 공격하니
원나라 군은 패배해 사상자를 냈으며 우마르는 작은 배에 몸을 실은 채 바다로 달아납니다.
쩐 구옥뚜안은 2만을 모아 홍강 북쪽 원나라 군을 공격하자 원나라 군은 필사적으로 달려서 탈출했으며, 원군
이항은 쩐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후위에서 쩐 꾸옥니엔(陳 國巘)이 이끄는 쩐군과 마주쳤으니
독화살을 맞고 전사했으며 나시르 웃 딘이 이끄는 몽골군은 운남으로 철수하면서 베트남은 대승리를 거둡니다.
1258년 몽골의 제1차 침공과 1283년 제2차 침공 두 번의 대월(越) 원정을 실패한 쿠빌라이칸
은 분노를 삭힐 수 없었으니..... 기어이 1287년에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는 토곤등 10만
몽골군에 송나라 출신 수군을 합쳐 3번째로 침공하니 박당간 전투로 격전 끝에 물리칩니다.
박당강 전투 (Trận Bạch Đằng 陣白藤)는 1288년 오늘날 베트남 할롱만 근처 박당강에서
벌어진 원나라와 쩐흥다오가 이끄는 대월군 간의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대월(大越)이 승리함으로써 베트남 역사에서 외세에 대항한 빛나는 승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쿠빌라이는 아들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0만에 가까운 정예군과 이외에도 2만 1천명 수군에
수백척 전선과 장문호 장군이 이끄는 수십만석의 식량을 운반할 선단도 갖추었는데
출병에 즈음하여 쿠빌라이는 토곤을 불러 “소국이라 하여 교지(交趾) 를 만만히 보지 말라” 는 충고를 합니다.
1288년 베트남은 하노이에 해당하는 수도 탕롱에서 관민을 소개(疎開)한후, 대월의 총사령관
쩐흥다오 장군은 몽골군과의 결전을 다짐하고, 박당강 근처에서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했으니 박당강은 옌훙 지역과 투이응우옌 지역을 지나 바다에 도달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350년 전인 938년에 응오꾸옌(吳權)이 오대십국 중 하나인 남한(南漢)의 지배에 대항
하여 일전을 벌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1288년 3월부터 전투를 준비한 쩐응다오
장군은 응오꾸옌이 구사한 것과 같은 방식의 전술을 준비했으니 그는 조수간만의 차를
분석하여, 썰물 때 바닥에 말뚝을 심어두었으며, 복병을 배치하는 등 전투를 치밀하게 준비합니다.
운남에서 출발해 수도 탕롱을 점령한 몽골군은 식량부족에 시달렸으니 보급 선단이 오지 않으니
토곤은 군대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고 반끼옙까지 퇴각시키자 이 때를 노려
베트남군은 몽골군이 장악한 지역들을 다시 탈환하기 시작하니 민병과 유격대들이
퇴각하는 몽골군을 괴롭혔고 큰 손실을 입히자 토곤은 그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다시 퇴각합니다.
4월 초순 오마르가 이끄는 보급함대가 하이난을 지나 접근해 강을 거슬러 오르자 베트남군은 다리와 도로를
파괴했고, 몽골군에 전투를 도발하는 가운데 몽골 수군(옛 송나라인)이 박당강 근처에 도달하니 베트남
소함대가 거짓 후퇴하는척 하자 몽골 해군은 열심히 베트남군을 추적했으며 그들이 쳐놓은 함정에 걸려듭니다.
둑에서 잠복하고 있던 대월 함대가 나타나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니 갑작스런 맹공에 몽골군은
패닉에 빠져 바다쪽으로 후퇴하려 했지만 미리 심어놓은 말뚝과 목책에 많은
함선들이 침몰하기 시작했고 양 둑쪽으로 도망가려 했던 몽골군은 쩐흥다오 장군과 왕이
대기시켜둔 대군과 다시 맞딱뜨려야 했으니 몽골 함대는 모두 전멸하고, 오마르는 사로잡힙니다.
해전에서의 완승과 더불어 육지에서도 대월군이 쿠빌라이의 아들인 토곤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를
대부분 전멸시켰으니 토곤의 군대는 랑선까지 후퇴합니다. 대월 이외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던 베트남 남부의 진랍왕국과 중부의 참파왕국은 쿠빌라이칸에 고개를
숙인 반면에 대월의 승리는 초강대국에 맞서 자주독립을 지켜낸 위대한 승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막강한 기마군단 세계 최강 몽골군을 맞아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투쟁해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나라가 베트남
말고도 둘 더 있으니 45년간이나 싸운 송나라와 29년간 (실제 전투는 11년) 버틴 고려왕국 이니.... 전 세계는
작은 나라임에도 1차에서 9차 침공까지 29년간이나 끈질기에 항전하며 버틴 고려국을 대단한 나라라고 칭송합니다.
1231년 오고타이 칸은 살리타에게 3만을 주어 압록강을 넘어 의주와 철주를 함락시켰는데, 당시 20만명
몽골군 주력은 금나라로 진격했고 고려를 침공한 3만 기병은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니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끄는 1만은 안주에 머물고, 북로군 1만은 귀주성으로 보냈으며 남로군
1만은 개성으로 남진시키는데 대월(베트남) 을 침공한 40만에 비하면 고려 정복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9월 황주와 봉산이 함락되자 고려 조정은 채송년이 이끄는 중앙군인 3군을 출격시키게 되는데 동선역에서
승리후 안주의 안북성에 이르자 몽골군은 청천강을 건너 포위하니 대장군 채송년은 공성전을 주장했으나
우군진주(右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이 싸우자고 주장해 고려군은 성 밖에 나가는데, 다른 진주(陣主)
들과 지병마사(知兵馬事)는 성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고 이를 본 대집성은 혼자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1만 5천 몽골군은 고려군 2만이 성 밖에 진을 치자 공격을 감행하니 지도부가 성에서 나오지도 않은 고려 3군은
우왕좌왕하다가 학살당하고 일부만 성안으로 도주해 고려 중앙군이 궤멸되니 살리타이는 극소수 병력만
안북성에 주둔시킨후 개경으로남진하자 고려 고종은 스님 3만명을 개경으로 모아 밥을 먹이며 기도를 시켰습니다.
부처님은 기도에 응답이 없고 몽골군은 흥왕사에 방화를 저지르며 약탈을 일삼자 고려 조정은
회안공 왕정을 살리타이에게 보물을 바치고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으니, 귀주성
박서도 항복했고.... 몽골군은 개경과 평안도에 감독관 다루가치를 72명 배치하고 철수합니다.
고려는 몽골과 강화했지만 무사정권 최우는 1232년 6월 수도를 강도(江都)로 옮기고 장기항전을 하니 살리타는
7개월만에 대군을 이끌고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한양)을 공격한후 한강을 건너는데 고려군은 강화도에
숨어서 나오지 않고, 처인성(處仁城 : 용인) 을 공격하다가 살리타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자 몽골군은 철수합니다.
1235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중 당올태(唐兀臺)에게 군대를 주어 고려를 치니 개주(介州 개천)·대흥(大興 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으니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 도
이때 파괴되니 고려는 1238년 김보정(金寶鼎) 보내니,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합니다.
귀위크 칸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며 아모간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나
몽골은 칸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이 즉위하게 되자 1253년 예케를 시켜
고려에 침입하니 충주성에 이르렀는데 고려는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하니 철수합니다.
몽케 칸은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며 1254년 7월 자랄타이 (車羅大) 를 정동원수로
5천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니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때 보다 심해 몽골에
잡혀간 포로가 20만 6천 8백여명, 살상자는 부지기수(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라 했습니다.
이듬해 몽케 칸은 또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강화도를 공격할 기세를 보였지만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했으며....
1259년 3월 박희실 (朴希實) 은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28년간의 싸움 끝에 고려는 항복합니다.
몽골에 몽케 칸이 급서하고 왕위 계승을 놓고 아리크부카가 이끄는 유목계 본지파와 쿠빌라이
가 이끄는 농경계 한지파(漢地派)가 대립하던 대에 원종이 쿠빌라이를
찾아가서 항복하였고 이것은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몽골이 대월(베트남)을 침략한 병력은 1차 5만, 2차 30~50만, 3차 40만인데 비해 고려를 침공한
숫자는 1차 3만, 6차 1만 그 외는 2만 정도로 보니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중앙군은 1차 때 안북부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로는 강화도에 숨어
내륙으로 나오지 않으니 몽골군과 전투는 없었고 지방군이나 백성들이 성에 웅거하여 항전했습니다.
대월(베트남)은 국왕과 왕족에 귀족이며 장군등 지도층이 목숨을 바쳐 전투에 임했고 특히 황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에 나타나 원나라군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피로하게 하고
적이 지치면 월남군이 기습하는등 모범을 보인 반면에 고려왕과 최씨 무신정권과
귀족들은 강화도에 숨어서 전투라고는 모른채 격구를 즐기고 잔치를 벌이는등 편하고 안락하게 살았습니다.
강화도에서 국왕과 실세 최씨며 대신과 장군들은 큰 저택을 짓고 호화로운 연회를 열고 화려한 팔관회
불교행사를 벌이면서.....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 사신을 보내고 물러가면 약조를 어기고
대도에 입조하지는 않으면서 생활 비용을 조달해야 하니, 몽골군이 물러가면 비로소
육지로 나와 백성들의 등가죽을 벗겨 세금을 쥐어짜는데... 반란이 일어나면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2곳만은 진압하지 못했으니.... 1258년 조휘와 탁청은 함경남도 영흥에서 고려 관리를 죽이고는
항복하니 원나라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1269년 서북면의 최탄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평양)
등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개성은 몽골에 바치니 원나라는 동녕부를 설치해서 직접 통치합니다.
반면에 베트남은 몽골 대군에 수도 탕롱(하노이)이 함락돼도 항복하지 않고 후퇴해 계속 싸웠으니,
국왕은 이리저리 도망치며 몽골군을 끌고 다녀 지치게 만든 다음에 대신과 장군들은
흩어진 병사들을 한곳에 집결시켜 몽골군을 공격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고 고려는 항복했지만 베트남은 끝끝내 싸워 3번 모두 대승리를 거둔게 다른 점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