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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아카데미 설립 452주년/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과정(박경수 교수)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 정식 개교
박경수 (장로회 신학대학 역사신학 교수)
*주석은 생략됨
제네바 아카데미가 설립되기 이전의 상황
중세 시대의 교육은
라틴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삼학(三學)과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사과(四科)가
기본 교과목이었다.
철학적인 흐름의 견지에서 보자면,
중세 전반기에는
보편성을 강조하는 실재론(realism)이 강조되다가,
중세 후반기인 14-15세기에 들어와서는
개별적인 실제를 보편적 본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유명론(nominalism)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대두로
교육에 있어서도 고전에 대한 관심과
수사학에 대한 강조가 더욱 더 두드러졌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파리 대학, 오를레앙 대학에서 인문주의 교육과 법학 교육을 받았다.
1532년 출판된 칼뱅의 처음 저작인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 주석』은
칼뱅의 인문주의적 성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서문에서
인문주의자의 왕자였던 에라스무스를 보완하고 정정할 것이라는
당찬 포부를 밝히면서,
이 책을 통해 인문주의자로서의 자신의 명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프랑수아 방델(Francois Wendel)이 지적하듯이,
분명히 1532년 칼뱅은 인문주의자였다.
이것은 이후 제네바 아카데미가
인문주의적 교양을 강조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1536년 제네바로 오게 된 칼뱅은
처음부터 기독교적 교리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신앙과 삶에 있어서
대단히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육은 종교개혁의 완성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확신하였다.
1537년 1월 16일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한
칼뱅의*『제네바 교회와 예배의 체제에 관한 조항들』에는
(*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
파문과 성만찬의 시행, 시편을 노래하는 것,
결혼에 관한 규례와 더불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교육시킬 학교에 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당시 제네바에는
1536년 5월 21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직후 세운
‘콜레주 드 라 리브’(College de la Rive)가 있었다.
라틴어를 중심으로 가르치던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은
앙투안 소니에(Antoine Saunier)였다.
하지만 다음 해인 1537년에는
칼뱅의 스승이었던 마튀랭 코르디에(Mathurin Cordier)가 교장을 맡았다.
학교의 상급반에서는
파렐이 구약을, 칼뱅이 신약을 가르쳤다.
그러나 1538년 코르디에가 칼뱅과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축출되면서
학교의 기능도 사실상 마비되었다.
그러다가 1541년 칼뱅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면서 학교는 문을 열었고,
칼뱅과 함께 온 세바스찬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가 교장 직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쫓겨난 후
스트라스부르에 3년 정도 머물렀는데(1538-41),
그는 거기서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와 장 슈트름(Jean Sturm)과 함께
지내면서 교육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부처와 슈트름은 참된 경건은 무지에서 결코 나올 수 없다고 확신하고서
스트라스부르에 젊은이들을 가르칠 김나지움과 아카데미를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슈트름은 1537년
“sapiens atque eloquens pietas”(wise and eloquent piety)라는
모토를 가지고 교육체계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6살 미만의 어린이들을 위한 유치원,
6-15살까지의 청소년들을 위한 김나지움,
16살 이상의 젊은이들을 위한 고등전문학교로 세분하였다.
김나지움에서는 언어학적 소양,
특히 라틴어에 대해 강조하였고,
고등전문학교에서는 실제적인 과목들,
예를 들면 그리스어, 히브리어, 철학, 수학, 물리학, 역사, 법학, 신학
등이 강조되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르는 동안
고등전문학교에서 강의하는 기회를 가졌다.
슈트름의 계획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충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칼뱅을 통해 제네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 칼뱅은
9월 26일 소의회(Small Council)에
『교회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제출하였다.
『교회법령』은 교회의 네 직분,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 교사의 임무는
“신자들에게 건전하고 참된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복음의 순수성이
무지나 그릇된 사상들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교회법령』은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가 황무지 같은 곳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하며,
자녀들이 목회직과 시민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학교를 설립해야만 한다.”
고 못 박고 있다.
이처럼 1541년 『교회법령』에서
이미 고등교육 기관의 필요성을 명백하게 했지만,
그 계획을 실제로 실현시키는데 18년이 걸렸다.
1541년부터 1555년까지 제네바에서는
칼뱅을 지지하는 개혁교회 진영과
리버틴파(Libertines)나 로마가톨릭주의자들(Romanists)과의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칼뱅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교육제도의 발전에 힘을 기울일 여유나 여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555년
칼뱅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1557년 칼뱅이 스트라스부르를 다시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네바에도 본격적인 학교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과정
다행스럽게도 1550년대 후반의 상황이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555년 칼뱅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득세하게 된 점,
제네바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피난민의 수가 급증한 점,
1558년 로잔 아카데미의 불화로 인해
테오도르 베자(Theoldore Beza)를 비롯하여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교수들이 제네바로 몰려 온 점 등이
아카데미의 설립에 청신호를 밝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을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먼저
학교의 부지를 정하고 재원을 모금하는 것이 숙제였다.
1558년 1월 17일
소의회의 구성원들이 새 학교의 부지를 찾기 시작하였다.
3월 25일 부지가 선정되었다.
부지는
리브(Rive)와 앙투안(St. Antoine) 거리 사이의 언덕 위에 위치한 곳으로
좋은 전경을 가지고 있었고
신선한 바람이 잘 통하는 최적의 장소였다.
통풍이 잘 된다는 것은
당시의 골칫거리였던 흑사병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었다.
4월에 곧바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정식 개원을 하기 전에 초등교육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1558년 11월 4일
교사들은 연봉 240플로린(florins)을 받았다.
당시 목회자들이 300플로린을 받았으니
그보다는 약간 적은 급료였던 것이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건축은
당초 예정보다 지연되어 1562년에야 겨우 완성되었다.
건물의 반(半)쪽에
5-6개의 교실과 이층의 강당이 있었고,
다른 반(半)쪽에는
초등과정의 교사들과 학감과 고등과정의 교수들이 살도록 계획되었다.
1562년 6월 4일 소의회는
고등교육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6월 15일에 고등교육을 담당한 교수들의 강의는
지금은‘칼뱅의 강당’(Auditoire)이라고 알려진 장소에서 이루어지도록 조처하였다.
따라서 새 건물은
초등교육 과정에서 전적으로 사용하였다.
행정관들에게는 초등교육 과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새 건물을 초등교육 기관으로 배정하였지만,
사실상 제네바 아카데미의 명성은
고등교육 과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건물 건축비용으로
1558년에 6,000플로린,
1559년에 36,000플로린,
1560년에 11,178플로린이 소용되어,
적어도 53,000플로린 이상이 들었다.
1559년 당시 제네바 시 예산이
200,000플로린 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1559년에 아카데미의 건물을 위해
시 예산의 18%를 사용한 것이다.
다행히도 칼뱅을 반대하던
아미 페랭(Ami Perrin)이 축출되어 베른으로 도망간 후
남아있던 페랭주의자들의 부동산을 처분한 금액이
모두 여기에 사용되었다.
칼뱅을 반대하던 사람의 부동산이
칼뱅의 신학과 정신을 온 유럽과 세계에 알리는
제네바 아카데미의 종자돈이 되었다니
역설적인 역사의 한 단면이다.
페랭의 부동산 대금이
1559년에 30,129플로린,
1560년에 31,582플로린이
제네바 아카데미의 건축비용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제네바 시 예산에는 부담이 없었다.
또한 소의회는 시의 서기들에게
죽을 때에 유산을 제네바 아카데미에 남기도록 유언하도록
제네바의 시민들에게 요청할 것을 결정하였다.
벌금도 제네바 아카데미를 위한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예를 들면 1562년 장 보키(Jean Bochy)가
리옹에서 칼뱅의『기독교강요』를 무단으로 출판했다가
500플로린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제네바 아카데미로 들어온 유산, 증여, 기부, 벌금 등의 내용은
회의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558년 4건의 유산증여로 325플로린,
1559년 17건으로 1,191플로린,
1560년 13명으로부터 1,007플로린,
1561년 12명의 제네바 사람들이 630플로린을
그리고 다른 한 명은 100 오스트리아 플로린을,
1562년에는 12명이 739플로린을
약속하였다.
기부자들은 대체로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 4년 동안의 기부자를 보면
거주자(habitant)는 3명뿐이었고,
20명의 중산층(bourgeois)과 11명의 시민(citizen)이 참여하였다.
[*거주자(habitant)는 제네바에 살고 있지만 투표권이 없는 사람이다.
중산층(bourgeoisie)은 기부를 통해서나 혹은 시에 특별한 공헌을 하여
투표권을 갖게 된 사람이다.
시민(citizen)은 제네바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투표권뿐만 아니라 피선거권도 가진 사람이다.
William Naphy, Calvin and the Consolidation, 127-29.]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을 위해
칼뱅에게 당면한 또 다른 문제는 교사들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기존의 콜레주 드 라 리브(College de la Rive)에서 가르쳤던
교사들이 초등교육 기관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등과정의 상급반인 1학년과 2학년,
그리고 처음 입학생인 7학년을 위한 교사들을
새롭게 충원해야만 했다.
특히 고등교육 기관에서 가르칠 교수들을 찾는 일이 문제였다.
1558년 3월 칼뱅은
히브리어 교수로 처음에
프랑스의 왕립 교수인 장 메르시에(Jean Mercier)와 접촉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1558년 8월에
하이델베르크에서 가르치면서 최근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임명된
개종한 유대인이었던
임마누엘 트레멜리우스(Immanuel Tremellius)와도 접촉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칼뱅의 요리문답을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1554년 제네바에서 출판한 바 있었다.
다행히도 베른의 영내에 있던 로잔의 많은 교수들과
베른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
교수들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갈등으로 인해
1549년 이래로 로잔 아카데미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쳐 왔던 베자가
로잔을 떠나 1558년 10월 27일에
제네바 아카데미의 그리스어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후에 교장의 직을 맡게 된다.
피에르 비레(Pierre Viret)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베자를 따랐다.
그리하여 앙투안 셔발리에(Antoine Chevalier)가 히브리어 교수로,
프랑수아 베로(Francois Beraud)가 그리스어 교수로,
장 타곳(Jean Tagaut)이 철학과 기초교양 교수로,
그리고 장 랑동(Jean Randon)이
초등교육기관의 상급반인 1학년 교사로 임명되었다.
고등교육기관 교수들의 연봉은 280플로린으로
목회자와 초등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교사의 중간이었다.
건축과 교수 및 교사 수급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마침내 1559년 6월 5일 생 피에르 교회에서
행정관, 목회자, 학생, 제네바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제네바 아카데미가 공식 개원식을 가졌다.
칼뱅의 기도가 있은 후,
소의회의 서기였던 미셀 로제(Michel Roset)가
제네바 아카데미의 정관과 규정과 신앙고백을 낭독했다.
그런 다음
초대 교장을 맡은 베자의 개원 연설이 있었다.
그는 거룩한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성(聖)과 속(俗)의 학문을 나누려는 시도에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신학이 아닌 학문들도
경건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베자는 제네바 아카데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하나님의 군병을 양성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여러분들은
헛된 레슬링 게임을 구경하려고 체육관으로 몰려갔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시시한 게임에 참여하려고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과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으로 잘 준비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높이고
여러분들의 조국을 영광스럽게 하고
여러분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위대한 지휘관의 거룩한 군병으로 소집되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제네바 아카데미가 경건과 학문으로 무장되어
교회와 국가에 봉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낼
하나님의 일꾼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지향적인 신학교육 기관임을 천명한 것이다.
개혁교회의 요람이 된 제네바 아카데미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출처: 박경수 교수의 논문
‘개혁교회의 요람 제네바아카데미(1559)에서 배우는 신학교육의 이론과 실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