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옷 같은 캐릭터 만나 '신경쇠약 과부' 김혜수와 호흡 119분 '깔깔' 마지막 1분은'…'
올해의 가장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가 '시라노:연애조작단'이었다면, 가장 등골 서늘하고 유쾌한 코미디는 손재곤 감독의 '이층의 악당'(25일 개봉)일 것이다. 불과 한 달 남짓 남아 있는 2010년이 '올해의'라는 수식어를 조금 부담스럽게 만들기는 하지만, 아기자기한 재미와 긴장감으로 똘똘 뭉친 이 매력적인 코미디는 이런 지지와 옹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의형제' '아저씨' '이끼' '악마를 보았다' 등 액션과 스릴러가 득세했던 올해의 충무로 메뉴에 지친 관객이라면, 한층 즐거운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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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석규와 김혜수의 조합은‘닥터봉’(1995) 이후 15년 만이다.
이야기의 뼈대는 단순 명쾌하다. 20억원짜리 골동품이 숨겨져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된 밀매업자 창인(
한석규)은 자신을 소설가라 속이고 '그 집' 2층에 세를 든다. 하지만 졸지에 남편을 잃은 데다 우울증·불면증까지 있는 여주인 연주(
김혜수)와 사춘기 딸 성아(지우) 모녀는 사사건건 말썽. 2층의 악당은 곤란을 겪고, '물건'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온다.
'이층의 악당'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영화가 충무로 전통에서는 아직 희귀한 서스펜스 코미디라는 사실 덕이다. 누가 범인인가를 쫓는 영화가 아니라, 범인의 시점에서 범인이 애를 먹는다는 설정도 매력적이다. 장편 데뷔작인 '달콤, 살벌한 연인'(2006)으로 이 장르를 개척했던 손재곤 감독은 자신의 장기가 코미디와 스릴러를 맞춤한 비율로 섞는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감독 스스로도 이야기하듯 유년시절 읽었던 앨러리 퀸·셜록 홈스류 추리 소설과 히치콕·우디 앨런 영화도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손재곤의 창의가 고안해낸 기발한 대사와 생생한 디테일은 그동안 이 장르를 낯설어했던
한국 관객들을 폭소와 긴장의 코너로 박진감 있게 몰아붙인다. 특히 골동품 지하창고에 갇힌 창인이 겨우 빠져나오려 할 때마다 다시 갇히기를 반복하는 시추에이션 코미디는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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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서울의 달’에서 순수하면서도 비열했던 청년 홍식이 중년이 됐다면 이렇게 변했을까.‘ 이층의 악당’은 전성기 한석규의 매력을 떠올리게 만드는 서스펜스 코미디다. /싸이더스 FNH
그동안 한석규의 부진 혹은 소모(消耗)를 아쉬워했던 관객이라면 '이층의 악당'을 추천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자신의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던 이 배우는 꼼꼼한 재단사가 며칠 밤 공들여 바느질한 것 같은 캐릭터를 만나 전성기 시절의 활력을 보여준다. 순수하면서도 사악하고, 세련되면서도 허점투성이인 창인에게서 드라마 '서울의 달'(1994) 시절 청년 한석규의 매력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신경쇠약 직전의 과부 역을 맡아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김혜수와 엄마의 히스테리를 그대로 빼어 닮은 중학생 딸 역 지우의 연기 앙상블도 좋다. 사사건건 참견하는 옆집 아줌마 역 이용녀의 존재감 역시 자칫 가볍게만 흐를 수 있는 이 코미디에 묵직한 안정감을 싣는다.
하나 아쉬움이 있다. 이 영화의 결말은 대중영화로서는 지지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막연하고 무책임한 해피엔딩은 감독의 자의식이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119분 동안 상업영화의 발랄하고 경쾌한 화법을 유지하다가 나머지 1분을 남기고 예술영화의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다. 손 감독의 세 번째 작품에서는 스스로도 동의할 수 있고, 대중도 만족시킬 수 있는 매력적 엔딩을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