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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한없이 자애로웠던 스승, 그 소중한 만남 제주 약천사회주 혜인큰스님 나는 이 세상에 와서 참으로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매운 겨울을 지내보지 못한 사람은 봄바람의 훈훈함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우리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허락을 받기까지, 열다섯에 출가한 후의 여러 해들은 아마도 추운 겨울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내가 출가수행의 길에 자애로운 어머니와도 같은 스승인 일타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저 행자시절 한 노 보살님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리 복된 출가자로 서 있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행자시절 이야기를 두 분의 이야기로 대신하고자 한다. 내가 열다섯에 출가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우리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새롭게 재출가한 것은 스무살 초엽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열아홉, 동화사 선방에 방부를 들이고 있을 때였다. 스님은 그때 태백산에서 다섯해 동안 홀로 수행하시다 막 나와서 선방에서 수좌들에게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설하시는데 얼마나 진지하고 재미있었는지, 나는 그때를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스님의 세수 서른둘. 스무 살에 팔만대장경을 독파해버린 데다,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서 부처님께 공향한 분으로, 이미 서른 전에 비구․비구니를 막론하고 제방에 대단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었다. 스님에게 강의를 들었는데,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정확하고 명쾌했던지 신심이 절로 나면서 스님께 광장히 좋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 후 해인사 선방에 와 같이 살면서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절에 들어오던 첫날로《천수경》을 그 자리에서 다 외워버릴 만큼 명석하고 불연이 깊은 스님은 강원에 들어가서도 바로 문리가 났으니, 아마도 필시 생이지지한 분이었을 것이다. 일가족 마흔한 명이 모두 출가할 만큼 불심이 깊은 집안으로, 아마도 우리 불교사에 그런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스님처럼 자애로운 분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수행자로서 빈틈없이 검약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따스하게 대하셨는지, 나는 지금도 더도 덜도 말고 우리 스님처럼만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스님은 스승이기 이전에 나에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다 가면 되는가를 보여준 분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모질게 말씀하는 법이 없었고 남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눈으로 보지 못했다. 행동과 마음과 말씀이 언제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자애로웠다.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였다. 스님께서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는 옷을 입고 계셔서"어디에 두셨다가 이렇게 곰팡이가 슬은 옷을 입으셨습니까?"했더니, 그때 스님 말씀이, "수좌들이 입다가 수각에 버린 옷이 장마에 썩어버리게 된 것을 빨아 입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런 분이었다. 속옷도 당신은 언제나 낡은 것을 입었고 새것은 상좌들에게 나눠주었다. 내가 출가해 살아보니 그게 쉬운 것 같아도 그리 자연스럽게 되기 어려운 일인데, 스님은 언제나 그랬다. 지족암에 문안드리러 가서도 저녁에 얘기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 때면 이불을 손수 내려 주셨고, 용돈을 조금 드리면 그냥 받지 않았다. 붓글씨 쓴 것 하나라도 내놓으며 "일하다 보면 필요한 거야."하고 주었지, 상좌도 용돈도 그냥 받는 법이 없었다. 스님은 열다섯 살 어린 상좌가 스님과 레슬링 한다며 급소를 걷어차 정신을 잠깐 잃어도, 팔씨름을 하다가 진 것이 부아가 난다며 당신의 팔뚝을 깨물어버려도, 예의 그 자애로운 웃음으로 한결같이 따뜻한 모습이었다. 세속적으론 무례하다고 나무랄 수도 있으나,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스승처럼 그렇게 천진스럽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한번은 상좌 하나가 장가를 갔다. 많이 배우지 못한 그가 처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해서 산지 두세 해가 지났는데도, 스님께선 승적을 정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아무개가 애기 낳고 잘 살고 있는데 아직 승적이 정리 안 되었습니다."하고 좀 언짢은 소리를 하니, "그렇지만 말이야, 집안 좋고 많이 배운 그 아이 처가 내 상좌와 얼마나 살런지 걱정이 된다. 한두 해 더 두고 봐서 잘 살면 정리하고, 만약 돌아오면 받아줘야 하지 않겠니. 불쌍한 그 애가 혹 버림받으면 오갈데 없이 불쌍하지 않느냐?" 하시지 않는가. 제방에서 대율사로 존경받고 있는 스님에게 때로 누가 될 수 있는 일이 발생해도 스님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상좌들의 장래를 염려하고 기다려 주었다. 나로선 상상할 수도 없던 스승다운 거룩한 모습이었다. 또 한번은 태백산에서 스님을 모시고 살 때의 일이다. 문세광이 사형을 당하던 날, 스님께선 그를 위해 영가천도 축원을 해주시는 것 이었다. 그래서 내가, "스님, 한 국가의 국모를 죽인 사람을 천도하십니까?" 했더니, "그래도 오늘 사형당하는 날인데 불쌍하지 않나. 사상에 얽매이고, 사람 죽이면 큰 혜택을 준다고 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텐데, 피어보지도 못한 한 젊은 청년의 인생이 불쌍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오른손 손가락 네 개가 없지만 붓글씨나 노트에 쓴 글을 보면 그 필체가 그리 좋을 수가 없다. 타고난 명석함도 있지만, 스님은 촌음도 그냥 보내지 않고 매사 노력한 분이다. 필체만 봐도 한두 해 연습해서 된 그런 실력이 아니다. 스님은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서 불법에 사무치고 사무친 마음을 부처님께 바쳤다. 그때 이미 과거의 모든 업장을 다 태워버리고, 몸을 다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불법에 추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신심을 평생 잃지 않았다. 출가자는 머리를 깎을 때 이미 세상에서 추구하는 부귀영화의 오욕락을 버린다. 성불 이외에는 출세나 오욕락은 흐는 강물과 같은 것, 해서 머물 가치가 없는 것이다. 송광사의 구산 스님의 조계총림의 방장으로 스님을 추대하고자 했을 때, 스님은 "내, 이미 연비할 때 모든 벼슬과 지위를 떠났는데, 방장 자리에 앉아 양심을 속이는 법문은 하고 싶지 않다. 조용히 살다가겠다."며 사양하셨다.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로웠으나 결정적일때 스님은 연비했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간혹, 어떤 이들이 나를 보고 스님과 음성이 닮고 언행도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다. 내가 어찌 어느 누구에게나 한없이 자애로운 언행으로, 그리고 연비정신으로 일관했던 나의 스승을 백분의 일이나마 쫓아갈 수 있겠는가. 대인관계에 있어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비로웠던 스승을 떠올리며 닮으려고 애쓸 뿐이다. 행자님, 아무리 힘들어도 그만두면 안돼요(2) 약천사 회주 혜인 큰스님 관음성 보살님은 내가 수행자의 길을 놓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자비를 행하는 위대한 마음은 유식 무식에 있는 것이 아닌, 수행에서 나온다는 것, 그래서 그 수행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그분을 내가 만난 것은 힘들게 행자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착하고 모범적이던 누나가 추가를 해서 잠깐 집에 다니러 왔을 때, 삭발한 누나의 모습을 보고 울었던 내가 언젠가는 누나 곁에 살았으면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생각이 출가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불연이 깊었는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불교학생회를 조직해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금강경》《초발심자경문》《천수경》을 배우면서 출가에의 기초를 다졌다. 중학교 1학년 때, 수계를 받으면서 스님이 된다는 생각을 늘 가졌으므로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다. 언젠가는 고기기름으로 튀긴 도너츠를 먹고는 백일기도 회향 날에 밤새도록 울면서 참회기도를 했으니, 3학년에 올라가자 미련 없이 교복을 벗어던지고 절로 들어온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렵사리 어머니의 승낙 도장을 받아 윗옷 양쪽 주머니에 공처럼 둥글게 만 양말 한 켤레씩을 넣은 채 집을 나섰다. 그렇게 양말 두 켤레만을 가지고 집을 나서 이순의 나이를 넘겼으니 출가의 세월이 어언 쉰 해에 가깝다. 중학시절에 가르침을 주었던 혜철 스님에게 갔다가 고향인 제주도 시내에 있는 한 포교당에서 채공을 하며 행자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나보다 두세 살 위인 공양주 행자가 심심하면 꿀밤을 먹이고, 미처 찬이 준비도 되기 전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을 쳐버리고 하는 등 어찌나 애를 먹이는지 어린 마음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다. 하루는 같이 국수를 먹다가 또 심정을 상하게 해서 울면서 그에게 국수를 뿌려 버린 적도 있다. 좌우지간 그와 맞지 않아 고통을 당하고 있던 어느 날,중노릇을 때려 치우더러라도 저놈을 한번 손보고 말리라다짐을 했고 그를 골탕 먹일 궁리를 사흘 동안 한 끝에, 엉성한 판대기로 만든 문 위쪽에 옹이진 장작을 놓았다. 문만 열면 장작이 떨어질 터였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부엌에서 찬간으로 올라가는 문에 하나, 찬간에서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이렇게 무려 세 개의 문에 장작을 끼워 놓고 나무 위에 올라가 공양주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공양주 행자는 나타나지 않고 노보살님인 관음성 보살님이 나타나 부엌문을 여는 것이 아닌가. 문을 살짝 건드리자 큰 장작이 떨어졌고, 곧 아이고하면서 노보살님이 쓰러졌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는게 아닌가. 그런데 웬일인지 노보살님이 일어나 다시 찬간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등허리에 장작이 살짝 내리쳤다. 부엌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벌써 피가 많이 흘러 있었다.죽을죄를 지었습니다.고 사죄를 하니 노보살님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면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 계속 솟아나오는 피를 누르면서 하는 말씀이, "행자님, 절대 이런 장난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세요. 오늘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겁니다. 빨리 바닥의 피를 닦아버리세요 저는 집에 가면 됩니다." 하면서 욕 한 마디는커녕 눈 한번 흘기지 않고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루도 거름 없이 조석예불을 드리러 오던 노보살님은 그 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내 가슴이 얼마나 탔겠는가. 그런데 한 스무 날쯤 지나서 노보살님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에 내가 "보살님 치료비 많이 드셨지요? 제가 저희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부담을 좀 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그 보살님이 "저는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요. 잊어버리세요."했다. 그래도 내가 부담이 되어서 안 된다고 치료비를 드리겠다고 우겼더니 노보살님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주시겠어요? 그럼 제가 치료비를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행자님, 행자생활 하는게 힘들죠?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그만두면 안 됩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큰스님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부처님 법음을 전하며 존경받고 인정받는 좋은 스님 되세요. 이것이 행자님이 제게 주어야할 치료비입니다. 나는 그때 부처님 법이 정말 위대한 것을 알았다. 한 촌로에 불과한 할머니에게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며 그리 생각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떤 고난이 와도 결코 그만두지 않으리라 새로이 발심했다. 그후 출가의 길에서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노보살님과의 약속을 상기하곤 했고, 노보살님의 당부처럼 지금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방을 누비고 다니며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으니, 내게 그분은 분명 선지식이었다. 그때 공양주 행자가 다쳤더라면 나는 아마 세속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때 노보살님은 예순을 넘긴 나이였는데 구십이 넘어 돌아가는 날까지 낮에 방바닥에 등을 대는 적이 없었다. 앉아서 졸지언정 결코 누운 적이 없을 만큼 수행을 잘 하셨던 그분은 내게 출가듸 길에서 마난 인로왕보살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잘 한 것이 별루 없는데, 달랑 양말 두켤레 들고 나와 이리 행복한 수행자로 살아가는 걸 보면 전생에 공덕을 좀 지어 놓은 것 같다. 서른 살 때의 일이다. 군대에 가 있을때, 하루 5천배씩 20일 동안 10만배 기도를 하면서, 나이 서른이 되면 그간 알고 모르고 지은 죄, 몸과 마음으로 지은 죄를 한번 완전히 청산하리라. 죄업청산과 부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리라는 발원을 했었다. 그리고는 나이 서른이 되자, 백련암의 성철 스님을 찾아뵙고 "100만배 기도를 한번 해보겠습니다."했더니, 이렇게 내게 힘을 실어 주는 말씀을 했다. "절? 좋지. 그런데 하다가 중간에 그만둘 바에는 시작하지 말고 끝장낼 작정이라면 한번 해봐라." "하겠습니다." 하는 내 결심을 듣고, 스님은 이렇게 큰스님다운 말씀을 했다. "명심해라. 지금까지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더라도 지옥은 안 간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시작했으면 멋지게 회향해야 한다." 그러나 해인사 장경각에서 시작한 죄업청산의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중간 중간 코피를 제일 많이 쏟았다. 그럴 때면 장경각에서 들어가 하늘로 고개를 쳐들어 코피를 삼키고 말리고 나서 다시 절을 했다. 무릎에 고름이 들었으나 무시하고 절을 하다 보니 나중에 저절로 없어져 버렸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절을 시작한 지 한달정도 되었을 때였다. 방석 밑에 송곳이나 못이 들어 있어 찌르는 것처럼 무릎이 아팠다. 그런 과정이 너무 괴로웠는데 어느 눈 깜짝할 순간, 아픈 것이 더는 올라갈 것이 없을 만큼 고통의 결정을 느꼈다. 나는 그때 고통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걸 봤다. 그렇게 확실히 고통의 절정을 느낀 후부터는 전연 고통스럽지 않았다. 절을 하는 거나 안하는 거나 똑같았다. 중간에 물론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어도 지옥은 안 간다는 성철 스님의 한 말씀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누군가에게 "그놈 해 낸다."하셨다고 한다. 그 말씀이, 그 믿음이 큰스님께서 내게 내린 법력이었고 2백일 만에 100만배를 무사히 마치고 수행자로서 거듭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출가의 길에서 내 자성불을 찾고 생각하고 또한 항상 그리워하고 있는 난 누가 뭐래도 늘 당당하다. 돌아보면 순수하기만 했던 나의 행자시절은 이리 떳떳하고 당당한 나의 출가수행자의 길을 훤히 열어 준 고마운 시절이었다. 출처: 월간 해인 (www.haein.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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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