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박희순 루치아(1801-1839, 동정 궁녀, 기해박해 때 참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박희순(朴喜順) 루치아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해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 15세 경 어린 순조(純祖)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었다. 30세 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한 후 궁녀의 신분으로는 천주교 봉행이 어렵게 되자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와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3월 말 박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전경협(아가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배교했으나 박희순만은 언니, 전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희순은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는 언니.
-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 성녀 전경협(全敬俠) 아가타와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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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를 배반하고 같은 교인들을 대라는 포장의 명령에 "천주는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주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또한 사람을 해하는 것을 금하시니 교우는 고발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고 순교한 박희순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아름다움과 총명함이 널리 퍼져 궁(宮)으로 불려 들어갔다. 그녀는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 차츰 높은 지위에 올랐고, 한문과 국문에도 능해 궁녀들을 가르쳤다. 당시 궁녀들에게는 왕의 관심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궁녀 박씨는, 그의 매력에 끌려 유혹하는 순조를 비상한 지혜와 용기로 물리쳤다. 박씨는 서른 세 살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입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박 루치아는 조카의 식구들과 함께 같은 궁녀였던 전경협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4월 15일 그들이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 즈음에 포졸들이 급습하자 루치아는 태연히 "이는 천주의 성의(聖意)이다" 하고 말한 후 옥으로 끌려갔다. 포장이 "너희는 궁인으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사학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이냐?"고 하자, 루치아는 "저희들은 사학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고 말하였다. 며칠동안 계속된 혹독한 고문을 모두가 용감히 참았지만 오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배교하고 박 루치아와 그의 언니 그리고 전 아가타만이 꿋꿋하게 견디다가 형조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모진 혹형과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 몸이 되었지만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믿음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 루치아는 5월 24일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경향잡지, 1996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