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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를 나온뒤로 이런 저런모임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났다 헤어지곤 했지만 늙으막에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는 이가 있다는 것은 그 만남의 목적이 어디에 있든 불가에서 말하는 특별한 인연이 맺은 인간관계임에는 틀림이 없어보인다.
먼저 소개할 친구 최귀조 회장, 그와의 인연은 초창기 신문사 재직중엔 조우할기회가 없었지만 1965넌 신아일보 창간후 많은 인재들이 신생신문 신아로 모일때 그도 70년대초 대전일보에서 신아로 직장을 옮겨 한솥 밥을 먹었고 그후 경향신문사에서 역시 한솥 밥을 먹는 입장이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그런가하면 나중에 안일이지만 육군기갑하교 교재실에서 차트를 전담하고 있을때 나는 인사행정처에 근무하며 오다가다 옷깃을 스쳤을테니 서로 알고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 또한 우연한 인연은 아니다.
신문사 재직시는 서로 하는 일이 달라 만날기회가 없었으나 얘기를 나누다보니 1963년 1년은 한솥 군대밥을 먹은 사이다. 본격적인 만남은 역시 대한언론인회산악회 행사에서였다. 부지런하고 친화력 또한 남달라 초창기 산악회행사에서 최귀조 총무의 활약은 크게 돋보였다. 고김재영 산악회 회장때로부터 시산제 행사는 물론
모든 산행때마다 항상 중심에서 산악회를 이끌어왔다. 말하자면 대한언론인회 산악회의 산증인이다. 산따라 45년은 곧 그의 족적이면서 대한언론인회 살아있는 역사나 다름 없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대한언론인회 편집주간까지 맡으면서 다양성 있는 기사 발굴과 아기자기한 편집스타일로 많은 회원들의 기호를 충족시켜주었고 평화언론포럼회장으로 평화대사 신문을 여러해 제작한 경력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구들의 해외여행까지 주선하니 그의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포럼을 주도적으로 운영할때 여순감옥을 들러 광개토왕릉을 비롯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고 백두산 정상에서 포효했던 일은 일생일대의 보람이요 희열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때를 회상하니 만감 이 교차한다.
최귀조 회장은 어려서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전주 한옥마을 외가집에서 보낸 어린시절 한때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유학의길을 택했지만 얼마 못가 고향 전주에서 고교시절을 보내고 고대 졸업후 대전일보 기자로 언론계 진출 사회부 편집부기자로 맹활약중 신아일보 기자로 스카웃되었지만 그의 유능한 신문편집실력은 다른 중앙 언론사가 틈만 있으면 유혹의 대상이었다. 대전일보시절엔 운정 김종필씨와 하 께 일요화가회 멤버로 활악할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잉선도 몇번한 경력이 있다.
그가 자신의 언론행로를 리얼하게 묘사한 글 ,편집은 예술이다,를 읽으며 다시한번 지난날 그와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체감한다.
"편집은 예술"이다
(최귀조 회장 미니 회고록)
<대한언론인회 2012년 발행 ,'실록 언론인의 길' 제 2권에서>
사회부 안하고 편집부 할랍니다.
1967년 9월, 대전일보 수습기자로 발령이 났다. 말이 수습기자이지 수습하는 기자가 아니라 월급을 조금 적게 주고 부려먹으려는 꼼수도 숨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곧바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최귀조씨는 사회부가 어때?" 당시 안세영 편집국장 말이다.
"사회부요? 거기서 무얼 하는데요?"
"그야 사건사고 같은 걸 취재하는 일이지."
“전 사회부 안하고 편집부 할랍니다."
"편집부? 거긴 내근인데?"
"내근이든 외근이든 편집부로 보내주십시오.""허어, 외근을 싫다하고 내근을 고집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눈치도 없이 윗사람의 호의를 무시한 나는 편집부에 배치되어 지나간 신문지 위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머리기사의 자리와 중간기사의 위치 그리고 나머지 기사의 사진을 배치할 그림(레이아웃)을 떠올리며 지면을 구성해 나갔다.
* 학생 포스터 공모전에 입상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또 곧잘 그렸다. 국어산수 등 다른 공부는 제쳐두고 심심하면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교 때는 미술부에 들어가 선생님으로부터 본격적인 지도를 받았다.
공부보다는 그림에 더 열중하는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님께서 어느 날 내 손을 붙잡고 "에미는 네가 그림보다는 공부를 더 잘했으면 한다. 그림을 잘 그리면 밥을 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을 도우며 살기에는 부족하니 공부를 열심히 하여라"고 당부하셨다.
사실 어머님의 말씀은 속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나의 외가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분이 많았다. 4형제분 외숙 모두 그림에 능하셨고 셋째 외숙이 국전창설멤버였던 금릉(金陵) 김영창(金永昌) 화백이셨다. 어머님께서도 그림에 조예가 깊으셨다.
그러니까 나의 그림 솜씨는 외탁에서 온 것이 틀림없고 어머님께서는 그림 그리는 사람의 궁핍함을 아시는 터라 나에게 이르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림공부가 재미있어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인권선언일 기념 전국학생포스터공모전에서 문교부장관 표창을 받는 등 여러 차례 입상하면서 그림에 대한 집착이 더욱 커졌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도 그림공부를 쉬지 않았다. 그림은 나에게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그냥 즐거움 자체였다.
이런 이유로 신문사에 들어가서도 그림솜씨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 편집부를 택했던 것이다. 현직에 있던 37년 동안 한 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으며 편집은 예술이다' '신문은 집이다' 라는 신념으로 편집기자로서의 자긍심을 지켰다.
* 충남도전 특선 두번, 한때 유명세
대전일보 시절은 참 아기자기했다. 나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편집으로 항상 주위와 마찰을 빚었으며 미적 감각을 앞세운 지면제작으로 눈총을 받기도 했다. 아마 이 시기가 "편집은 예술이다"라는 신념의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젊음을 주체할 수 없는 시기여서 시간이 날 때마다 화필을 잡았다. 일요일이면 캔버스를 들고 산과 들로 나섰다.
자연스럽게 동호인끼리 모이게 됐고 국전초대작가 이인영씨가 중심이 돼 대전일요화가회를 결성해 동호회원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나는 충남도전 서양화부문에서 특선을 두 번 하고 입선을 한 번 해 충남도전 작가가 되었다. 현직 일선기자가 충남도전의 작가로 활동한다는 내용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상당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이인영 씨가 화구를 챙겨 나오라 하기에 부리나케 나갔더니 다짜고짜 동학사로 향했다. 거기에는 다른 일행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낯 익은 사람, 그 사람은 운정 김종필 (金鍾泌)씨였다. 두툼한 눈두덩이 안의 눈빛이 익살스러움을 잔뜩 담고 있었다. 그분은 유머가 좋고 해 동행을 할때마다 곧잘 웃기고 편안케 해주었다.
운정의 그림 솜씨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폭포의 물줄기와 바위에 부서지는 포말을 잘 그렸다. 마치 내면의 분노가 솟구치는 느낌을 풍겼다. 그가 폭포를 즐겨 그리는 것은 아마 바위에 부서지는 포말을 그리기 위함인 듯했다. 얼마 후 국무총리 취임을 위해 서울로 떠나면서 그는 꼭 다시 만날 것을 다짐했다. 나도 곧 서울로 떠났다. 1975년 10월 6일 경향신문사 편집부에서 와달라는 얘기가 있어 응했던 것이다.
* 부끄럽지 않은 '제작거부' 불참
편집기자는 외근기자처럼 그렇게 패턴 변화가 심하지 않다. 처음에는 간지 편집을 하다가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문화면 편집을 하고 이력이 붙으면 사회면을 맡는다. 종합면인 1면을 맡으면 달인의 경지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다. 이때부턴 마음에 여유가 생겨 옆집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신문사 밖의 환경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1980년대 초, 당시의 경향신문사에는 좋은 기자들이 많았다. 논설진도 탄탄했다. 야당지라는 세간의 평가에 합당할만한 편집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군부의 언론장악 기도가 노골화되면서 경향신문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사가 혼돈에 빠졌다. 사전검열이 장기화되자 기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른바 제작거부였다.
기자들이 제작을 거부한다고 해서 신문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논설과 편집부만 있으면 어떻게든 신문은 나온다. 기사내용? 통신을 찢어 넣으면 된다. 일부편집? 공무국에 맡겨도 흉내를 낸다. 윤전기만 작동하면 일간신문의 명맥은 유지할 수 있다. 제작기부에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발행인과 편집국장 정도다.
경향신문 기자들도 뒤지지 않고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신문을 제작할 손발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편집부장과 차장이 통신 기사를 내 문선에 넘기는 게 고작이었다. 신문이 제 시간에 나오지 않으면 부는 이를 핑계 삼아 발행을 취소할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 다급한 사람은 편집책임자인 편집국장이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대희 편집부장과 박광웅 차장(작고)을 도와 제작에 참여했다. 그래서 신문이 제 시간에 나오는 데 일조를 했다. 동료 기자들의 제작거부에 동참하지 않고 홀로 제작에 참여한 이 사건은 후에 엄청난 후폭풍으로 밀려왔다. 먼저 동료 기자들의 눈 흘김이었다. 제작거부를 기회로 삼아 발행인과 편집국장의 환심을 사려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라며 비난이 거세었다. 그러나 이는 훗날 경향신문의 명맥을 유지하는 생명선이 되었으며 당시 편집국장이던 이규행(李揆行)씨의 출세빌미가 되었다. (고 이규행 씨는 훗날 한국경제신문의 사장으로 발탁되어 전두환 정권이 경제안정정책을 실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이단아, 배신자,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괴롭기는 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제작거부는 능사가 아니다. 싸울 일이 있더라도
신문은 제작하면서 싸워야 한다. 그것이 신문기자의 본분이다. 어금니를 무는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3일 만에 제작거부가 끝나고 기자들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채로였다. 이때 이규행 편집국장이 나를 불러 “고맙다. 내가 언론계에 있는 한 당신의 신문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겠다" 며 격려해 주었다.
* 이규행 사장과 인연을 맺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이규행 씨가 한국경제신문 사장에 취임하면서 나를 불렀다. 편집부장을 맡으라 했다. 내가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보람을 느끼며 일하는 시기였다. 초고속 윤전기와 CTS 기술이 도입되면서 지면이 늘어나고 컬러페이지 제작이 빈번해지자 편집부의 활약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이때가 바로 '신문은 편집이다' 라는 신념을 구체화하는 시기였다.
1983년 ‘프레스’ 논단에 '신문제목의 패배와 승리' 라는 글을 발표했다. '편집자가 시대 역사를 꿰뚫는 작가의식을 포기하거나 외면하면 제목이라는 뉴스의 이름표는 상처받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제목의 기교는 한두 번 용인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성을 잃고 만다'는 주장은 그 시절 편집기자들에게 회자된 화두였다.
신군부 시절 문공부는 잘 길들여진 신문을 다독거린답시고 이러저러한 모임을 자주 열었다. 1984년 봄, 전국신문방송 편집기자 세미나를 제주도에서 연다며 초청했다.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 주제발표를 의뢰했다. ‘오늘의 경제면, 경제면 편집' 이라는 주제로 '기자는 산업화시대의 경제문제를 다룸에 있어 표출된 사안보다 경제 전반의 흐름과 연계된 측면을 주시해야 한다'는 요지를 발표했다.
참석자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배신자 최귀조의 진면목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휴식시간에 마침 동석했던 허문도 문공부 차관이 어깨를 두드리며 훌륭했다고 칭찬했다. 그는 후에 나에게 유럽을 순회하며 무역관 중심으로 수출시장 환경을 취재해달라는 부탁 겸 선심을 베풀어 제법 느긋한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된 편집기자가 쓴 취재기사 '상사 전문화돼야 시장확산' 시리즈는 뜻밖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경제신문이 미주와 유럽에 특파원을 파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편집부장으로 잘 나가던 즈음, 1988년 5월 갑작스레 지방경제부장 발령을 받았다. 20여년을 내근직인 편집부에서 종사한 나에게 빛 좋은 개살구 격인 외근부서 지방경제부를 맡으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종합편집부장을 노리던 인사가 나를 경쟁자로 여기고 술수를 부려 벌어진 사단이었다. 당시 박용정 편집국장(작고)은 사장의 생각이라며 시치미를 뗐다. 나는 꾹 참고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로 결심했다.
* 물먹은 사람끼리 특종 양산
부원은 외근기자 출신 3명과 내근기자 출신 2명 등 고작 5명이었다. 우선 경기 인천 지역의 지역경제를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부원을 인천시청과 경기도청에도 파견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지역공단을 돌면서 살아있는 현장경제를 살피도록 했다. 나는 이때 최병요 차장을 만났다 심정이 곧고 입바른 소리를 잘해 박용정씨 같은 사람에게는 이유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방경제부로 소위 물을 먹였던 것인데 나와는 손발이 잘 맞았다.
두뇌회전이 빠른 몸놀림까지 날쌘 그는 전국 곳곳의 기업체 활동을 손금 보듯이 헤아리고 있었다. 연일 대문짝 같은 기사로 1면을 장식했으며 '인천 송도 개발 같은 기사를 특종 보도했다. 지방경제부가 어느새 시쳇말로 뜨고 있었다. 이때의 현장취재 경험(일손이 모자라 부장도 현장을 뜀)은 나에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했다. 기사의 행간만으로 제목을 뽑았던 옹졸함에서 벗어나 현장의 숨소리가 배어나오도록 하는 멋을 터득했던 것이다.
지방경제부에서 단련한지 7개월 만에 편집부로 다시 복귀했다. 남들은 화려한 외근을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을 묻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편집은 영혼을 불사르는 작업' 이라는 자긍심으로 대꾸한다. 1996년 현직을 떠나 70을 넘긴 지금도 신문 편집이라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든다.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감사가 넘치는 세월이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아들 최덕현이 서울경제신문 편집부 부장으로 나의 대를 이어가고 있는 것과 며느리도 한국일보에 근무하고 있어 언론인 가족이라는 명예를 가꾸어가고 있는 점이다. 큰딸 최영아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 했다.
* 다음은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는 안종우 회장, 그의 인생역정도 파란만장, 긍정적으로 사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 안종우
(전 연합뉴스 이사대우 전산제작국장)
내가 안종우회장을 만난것은 최귀조회장덕분이다. 그로부터 산악회 회장직을 인계맡은 것이 인연이되어 산행때마다 조우하니 어언 20여년 과묵하고 소탈한 성격에다 친화력도 그정도면 수훈일등 언제 만나도 다정다감하게 닥아온다. 청양이 고향이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온뒤 대전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인의 길을 걸어왔다. 연합통신기자가 양에 안찼겠지만 끈기있게 산 흔적이 여러면에서 녹아난다.
월사금을 못내 온갓 수모를 겪어야 했던 어린시절 보리고개는 항상 그의 굶주림을 채워주지 못했다며 상념에 젖곤한다. 한말
독립운동가(홍성 의병대장 안항식 옹이 그의 증조다)
의 후손으로 지금도 연금을 받고있지만 열심히 산 보람으로 생활은 윤택한편 가끔 통크게 쏘는 기분파다. ROTC출신이라지만 특이사항은 별로 없어 보인다.
회원수첩에 39년생으로 돼있어 연하라했더니 족보까지 복사해 굳이 38년생임을 증명해 보이니 나보다 생일이 먼저라 만날때마다 좌장대접을 하고 지낸다.
열심히 걸으며 당뇨를 이겨낸 끈질김 그가 틈틈이 쓴 시가 가슴에 와 닿은다.
아직도 사랑일 리야
사무친 그리움
훨훨 털어 버리려도
견디며 옹알이 앓는 뜻은
아직도 마음속 깊이
사랑 괴어있기 때문일 리야.
기나긴 한의 세월
추스르고 잊으려다가도
두 주먹 불끈 쥐는 뜻은
아직도 굳어 있는
사랑의 응어리 때문일 리야.
차디찬 욕망 더미
한증 열탕에 녹이려도
서리 내리는 오싹함은
정녕 내 가슴속에
얼어붙은 사랑 때문일 리야.
반백의 포로 되어
주눅 든 채 살면서도
가슴 두근거림은
아직도 피 끓는
사랑 남아있기 때문일 리야.
그가 쓴 100여편의 시를 읽으며 안종우의 아호가 덕촌인 까닭을 마음껏 감 상하니 몇해전 사랑하는 부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그의 애잔한 마음이 여러행간에서 묻어나 눈물이 앞을가린다.
언젠가 백두신 정상에서 정상주를 나누며 포효하던때가 엊그제 깉다.
동행할 때마다 항상 앞장서 성큼 성큼 걸으니 백수는 따논당상이 아닐까.
이름하여 ,편우회, 1주일에 두번은 꼭 만나니 가족보다 더 가까운 친구들이 아닌가.
* 장 옥 (전경향신문 뉴스메이커 부장, 경향사우회 부회장)
장옥회장과의 만남도 가족이상으로 빈도가 잦다.
신아일보에서 동고동락한 인연도 인연이지만 경향사우회를 역동적으로 운영해온 장본인중 둘째가라면 서러울정도로 활동적이다. 한동안 투병생활로 고생은 했지만 의사 못지않은 처방으로 얼굴에 화색이 도니 만날때마다 하느님 보우하심에 감사한다. 함께한 산행기록도 만리장서 경향산악회는 항상 그가 중심에 있었다.
타계한 지용우선배와 이상호 회장이 눈에 아른거리는 가운데 지금도 오랫동안 함께한 영화모임이 한편의 대서사시를 쏟아낸다. 최귀조 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우리가 감 상한 영화 수백편이 머리 속을 맴돈다.
얼마전엔 점심을 같이하고 파묘를 감상했다.
장옥회장은 신아맨중 가장 장내가 촉망되는 인재였다. 장기봉사주의 조카로 유난히 사랑을 받았던 신아의 동량,
신아가 폐간되지 않았다면 그의 역동적인 추진력으로 보아 일찌기 최고 경영자 자리를 굳히지 않았을까. 많은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망언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