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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사찰자료실 스크랩 동화사 비로암(桐華寺 毘盧庵)과 신라 44대 민애왕(閔哀王)
소윤당 추천 0 조회 28 14.01.04 16: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화사 비로암(桐華寺 毘盧庵)과 신라 44대 민애왕(閔哀王)

 

 

 

대구 팔공산 동화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이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해 대가람이었으며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동화사사적기'에 따르면 493(신라 소지왕 15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4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던 심지가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대사(永深大師)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온 후 불골간자를 모실 절터를 찾기 위하여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지으니 곧 동화사 참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어 심지를 그 개조로 보기도 한다

 

 

경내 곳곳에 달려있는 소원 성취 등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렸으며, 1608(광해군 1년) 절을 중건할 때 화주(化主) 학인(學仁)이 미륵전을 재건했고, 1725(영조 1년)에 다시 중창했다. 그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보물 제254), 금당암3층석탑(보물 제248), 비로암3층석탑(보물 제247),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보물 제243), 석조부도군 등이 있다.

 

 

 

동화사 비로암(毘盧)

   

눈 덮힌 동화사 비로암

 

동화사(桐華寺) 경내 주차장의 남쪽 바로 아래에 비로암이 있다

그러나 주차장과 비로암 사이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잘 보이지 않으므로 대개 둘러보지 않고 동화사 대웅전과 통일대불쪽으로 바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이 암자(庵子)는 신라시대 민애왕과 관련이 깊은 암자로서 보물인 비로암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이 있는 곳이다

'동화사사적기(桐華寺寺蹟記)'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 표기(表記)돼 있으며, 선조 25(1591년) 서일 화주(瑞一 化主)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남아 있는 성보(聖寶) 유물로 볼 때 창건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동화사(桐華寺)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암자(庵子)의 사역(寺域)은 동쪽으로 난 입구로 들어서면 넓은 대지 위에 대적광전(大寂光殿),선당(

禪堂), 요사(寮舍-毘盧비로암)체 2곳, 대광명전(大光明殿) 등 당우(堂宇) 5곳과 삼층석탑 1가 자리해 있는데, 비로암(毘盧庵)의 주불전(主佛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며 이 전각 안에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적광전 앞에는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입불상 1기가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암의 주전 대적광전

 

대적광전 앞의 돌로 만든 입불상

 

이 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맞배지붕형식을 한 다포계 건물로서 18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하며 이들 전각 안에는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봉안된다. 반면 비로전(毘盧殿) 또는 화엄전이라 할 때는 비로자나불만 모신 것이 일반적이며, 비로자나후불탱화가 봉안되기도 한다

 

비로자나불은 대개 지권인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있다. 고려 말부터 지권인이 변형되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오른손은 부처의 법을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한다. 불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비로암 대적광전에는 신라 흥덕왕 때 심지 대사가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보물 제244호 석조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암 비로자나불좌상

 

 

 

 

 

동화사 비로암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보물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높이가 293cm. 불상높이는 129cm이다.

이 불상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의 1층 탑신석에서 출토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해서 863년에 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석불상으로 나발의 머리 위에 얹은 육계는 나지막하여 뚜렷하지 않으며 머리의 중앙과 정상부분에는 각각 계주가 있는데 후대에 만들어 넣은 것이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는 양끝으로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와 낮고 넓적한 코, 작은 입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렇게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이것은 9세기경에 유행한 불좌상 형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광배 윗부분의 삼존불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으며 2줄의 선으로 구분된 두광과 신광에는 연화무늬·보상무늬·당초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또 경계선을 따라 8구의 화불(化佛)이 배열되어 있다. 그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 형태의 화불을 안치했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팔각형이며 연꽃을 새긴 받침돌을 대좌받침 위에 놓았다.

대좌받침 중간의 각 면에는 사자와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이는 화엄경에 비로자나불은 연꽃이 가득한 연화장세계의 사자좌 위에 앉아 있다고 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조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조각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편년자료가 된다.

 

 

신라 흥덕왕 때 조성한 보물 제247호 삼층석탑

 

 

 

 

대적광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물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371cm이다.

1층 탑신에서 나온 납석제 사리호의 표면에 '敏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로 시작되어…… '時咸通四年 歲在癸未無射之 月十日記'로 끝나는 명문이 있어 863(경문왕 3년)에 신라 민애왕이 왕위다툼으로 억울하게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심지대사가 863년에 조성한 석탑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려진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가진 탑이다.

하층기단은 4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탱주와 우주를 표현했는데 특히 갑석 위에 굄을 만들고, 아래는 잘록하게 안으로 파여져 있어 마치 다른 돌을 끼운 듯한 형태는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석탑양식이다.

상층기단도 마찬가지로 4매의 돌에 탱주와 우주가 각각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개와 옥신은 다른 돌로 만들었으며 옥신에는 우주만 간략하게 표현했고 옥개석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보주만 남아 있다

 

탑신부는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되며 지붕돌의 밑면 받침(옥개받침)은 모두 4단이다

 

 

 

 

 

 

탑의 꼭대기 상륜부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복발(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의 장식), 보주(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탑의 각 층의 비례가 뛰어나며 각 기단의 괴임돌을 여러 개 두고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림 정도가 크지 않아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통일신라말기에 사용되던 형식으로서 기단 갑석의 윗면에 굴곡이 있는 삽입식 받침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탑은 1966년 도굴로 인해 상층기단 일부와 탑신부에 이상이 있어 1967년 해체 보수를 하였는데 1층 탑신 윗면의 사리공에서 금동합 밑바닥과 금박이 부착된 작은 나무탑 등이 나왔으며 나머지 유물은 모두 도굴이 된 후였다. 그 후 도굴되어 사라졌던 석재사리항아리가 수습되었는데 사리항아리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탑의 조성배경이 밝혀졌다.

 

이 탑에서는 사리함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리구멍과의 틈사이에 송진을 부어넣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음이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해체 복원 당시 공사중에 발견된 금동제사방불경판과 사리장치는 현재는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이 되어 있다

 

 

금동사리함의 조각불상 

 

 금동사리함선각사방불

 

 

 

 

 

금동사리함의 각면에 새겨진 선각 불상

 

 

비로암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사리함금동선각사방불은  사리기의 금동판에 선각된 사방불상으로 각 면 크기 세로 14.5cm, 가로 15.3cm이다

4개의 금동판에는 천개 밑에 좌상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서 있는 삼존형식의 불상이 각각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본존불은 각각 지권인(智拳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합장인(合掌印), 그리고 약항아리를 들고 있는 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사방불은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각 상의 도상적 명칭을 정확히 밝히기가 어렵다고 .

그러나 북방에 위치한 지권인의 상은 비로자나불을 나타내며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도상과는 달리 보관을 쓴 여래형으로 표현되었다. 약함을 든 상은 약사여래로 생각되나 금동판의 연결구조로는 남방보생여래로 볼 수 있고, 촉지인은 동방의 아촉여래 (동방세계 묘희국에 주재하시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기쁨과 안락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부처님-흔들리지 않는다는 뜻), 합장인은 서방의 아미타여래로 각각 추정된다.

 

얼굴은 생동감이 사라져서 무표정한 모습이며 탄력감이 줄어든 몸체 위로는 U자형의 옷주름이 내려오면서 양 다리를 덮고 있다.

본존을 향하여 몸을 약간씩 틀고 있는 두 보살상도 거의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리기의 선각사방불상은 함께 발견된 납석제 사리호의 명문에 따라 86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신라 사방불상 표현의 한 예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민애왕 석탑 사리호-보물 741

 

 

 

민애왕 사리호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어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는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

 

납작한 납석제의 항아리인데 아가리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은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며 이 사리호는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렸으며 밑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씩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명문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 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또한 탑을 만든 시기가 경문왕 3(863)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1967년 비로암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에는 이미 사리구가 도굴 당한 뒤였으며 남아있는 밑바닥 동판과 여기에 조각된연화문 및 금동판을 고정시켰던 송지(松脂)의 남은 상태가 이 사리호와 함께 출토되었다는 사방불 금동함의 크기와 일치함으로써 이 사리호는 이 석탑에 있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 송지(松脂)란 석탑의 사리공에 사리함을 넣고 이를 고정시키기 위해 사리구멍과의 틈사이에 부어넣는 소나무의 송진을 말한다. 

 

 

 

경주 망성리에 있는 전(傳) 민애왕릉

 

 

원수를 기리는 탑을 세운 경문왕

 

신라 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 43대 희강왕은 김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결하고 말았다. 김명이 왕위에 오르니 44대 민애왕인데 그 역시 재위 1년만에 반란군에게 패해 도망가 숨어살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민애왕은 반정왕으로서 피살이 되었으나 군신들이 왕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왕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건립을 발원한 48대 경문왕은 희강왕의 손자로 민애왕이 할아버지의 원수였으나 분열된 귀족사회를 화합하기 위해 민애왕의 명복을 비는 탑을 세웠다.

당나귀 귀로 유명한 경문왕은 귀족들의 반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재위 내내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신라 말기의 혼란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재위 15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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