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제
김영미
’이 여자는 어떤 마음으로 불을 지르고, 지붕 위에 올라가 춤을 췄을까,
왜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관리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정말 정신이상이었을까’
아주 오래전에 『제인 에어』를 읽으며 주인공 남자의 부인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지금까지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주인공 남녀보다 그 부인에 관해 더 집중했던 거 같다. 줄거리는 가정교사와 성주인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다. 남자에게는 부인이 있는데 정신병자로 성의 어느 방에 갇혀 있다.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시대적으로 여자가 결혼하면 본인과 그 재산은 남편이 관리한다는 것을.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정치, 식민, 종속, 경제 등등으로 확장되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책을 읽으면 궁금증도 생기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있다. 특히나 어린 시절에는 단어 확장의 득을 보았다. 글을 읽다 보면 ‘왜 그럴까’로 나타나는 물음표들이 생겨나고 나만의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다. 난 그 시간을 즐거워했다. 아마도 다른 재밋거리를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것 자체가 좋았다. 책을 받아서 들었을 때의 그 두께와 무게감.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 콧속을 알싸하게 만드는 그 냄새도 좋았다.
전문적인 지식 글이 아니라면 글의 행간이 주는 느낌이 있다. 무엇인가 궁금한 경우에는 검색해서 글로 읽었다. 영상이나 그림으로 전해지는 것보다 그 행간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다. 누군가가 요약해서 해주는 것은 숨겨진 맥락을 놓칠까 봐 거부하였다. 그런데 종영된 드라마의 결말이 궁금할 때는 결론만 간단하게 듣는 것을 좋아했다. 주저리주저리 늘어지는 사족 섞인 설명은 장렬히 사망한 언어의 나열이다.
여러 책 중에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고르기 쉽지 않다. 제목, 첫 문장, 첫 단락, 첫 페이지의 끝 문장을 읽기까지, 이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할지 덮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중에 제목은 맘에 드는데 도입부가 맘에 들지 않아 목차를 보고 맘에 드는 소제목의 부분만 읽고 덮는 경우도 있다. 마음에 드는 부분만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책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속도는 내 마음대로다. 이야기는 책이 풀어내지만, 어느 지점에서 멈출지 어느 부분은 지루하니 대충 넘길지 말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표현이 정말 좋아서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멈춰 골똘히 생각하기도 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는 필수이다. 그러는 동안에 이야기는 기꺼이 나를 기다려준다.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다.
2000년대 초쯤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의 목록 작성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난 그 목록에, 전에 읽었던 <고전문학 다시 읽기>를 적었다. 영화도 다시 보면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이런 이유로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을 다시 정독하고 싶었다. 삶의 경험치가 쌓인 나는 여러 가지를 더 이해할 수 있겠다고 여겨졌다. 더 풍부한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시작은 첫 장부터 읽기는 예전에 탈출했다. 노안도 모자라 망막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이다. 집중해서 보게 되면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 따라서 책은 반드시 글로 읽는다는 것도 씁쓸한 편견이 되었다.
때마침 과학은 반가운 기술을 내놓았다. 오디오북은 사람이 읽어주는 책도 있고 인공지능이 읽어주기도 한다. 사람이 읽어주는 이야기는 내가 읽는 것처럼 성에 차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이야기는 나만의 속도에 맞는 생각과 상상을 저 뒤로 물러나게 한다. 읽는 책에 익숙해져 있거나 듣는 책에 적응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덕분에 눈이 피로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다행이다.
내가 정말 원한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 본다. 누렇게 얼룩덜룩 변해버린 종이의 빛깔과 거친 면들, 퀴퀴한 오랜 종이 냄새, 그 사이에 코를 묻고, 형제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정성 들여 읽으면서 앞의 이야기를 까먹어 중간쯤에서 덮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니체의 문장들을 끝까지 읽겠노라 인내를 키웠던 어이없던 치기.... 『장미의 이름』을 읽을 때는 금서를 읽은 신부들이 독살을 당한 추리를 이어갈 때, 나는 아주 오래전 중세 시대 어느 수도원의 컴컴한 곳에서 몰래 금서를 보고 있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그 페이지를 넘기면 나도 독살당할 거 같은 심장의 미세한 떨림이 함께 했었다. 그리고 두껍고 이미 여러 겹의 테이프로 수선된 거친 표지와 가볍지 않은 책의 무게에 대한 그리움이었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