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ller with Kamikaze, circa 1938
Helen Adams Keller(1880년 6월 27일 ~ 1968년 6월 1일)는
미국의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그녀는 인문계 학사를 받은 최초의 시각, 청각 중복 장애인이다.
헬렌 켈러의 장애로 인해 가지고 있던 언어적 문제를
앤 설리번 선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유년시절을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로 인해
그녀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많은 집필 활동을 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여행을 자주 다녔고
또한 전쟁에 대해
미국이 전쟁 가담의 구실로 내세운 민주주의 옹호론을
“인종차별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말인가?”
라고 논박함으로써
반대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여성의 선거권과 참정권,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
헬렌 켈러는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의 아이비 그린 이라는 이름의 한 농장의 저택에서
남부 동맹의 전직 사무관인 아서 H. 켈러(Arthur H. Keller)와
로버트 리 남부 동맹 총 사령관의 사촌이자 전직 남부 동맹 장군이었던 찰스 W. 애덤스의 딸인
케이트 애덤스 켈러(Kate Adams Keller)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스위스에서 왔다.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생후 19개월 후에
의사로부터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위와 뇌에서의 급성 출혈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평생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 때는 가정 요리사의 6살 난 딸이자
그녀의 수화를 이해하는 아이인 마르타 워싱턴과 대화가 가능했었다.
헬렌 켈러는 7살 때부터
집안에서 60개가 넘는 수화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했다.
소련의 시청각 장애 심리학자인 A. 메스체리코프에 의하면,
마르타과의 교제와 그녀의 가르침은
헬렌이 나중에 발전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한다.
1886년,
헬렌의 어머니 케이트 켈러는
찰스 딕슨의 《American Notes》라는
시청각 장애인인 로라 브릿맨에 대한 성공적인 교육에 관해 쓰여진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곧 그녀는 공문을 헬렌과 그의 아버지를 동행하게하여
눈, 귀, 코, 목에 관련한 전문가인 J. 줄리안 치솜을 찾아 조언을 얻기위해 볼티모어로 보냈다.
그는 이어서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그녀의 가족을 연결시켜주었다.
벨은 보스턴 남쪽에 위치해있고
브릿맨이 교육을 받은 학교인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연락해보라고 조언하였다.
그 학교의 교장 선생인 마이클 아나가노스는
시력 감퇴가 있는 20살의 학교 졸업생 앤 설리번에게
헬렌의 가정 교사가 되는 것을 물어보았다.
이 일은 49년간 이어지는 인연의 시작이다.
곧 그녀는 헬렌의 가정교사가 되고
나중에는 그녀의 동반자로써 함께하게 된다.
앤 설리번은
1887년 3월에
헬렌의 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헬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헬렌이 단어의 스펠링을 그녀의 손에 적어주는 식으로,
그녀가 헬렌에게 선물로 가져온 'd-o-l-l'(doll, 인형)의 스펠링으로 시작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헬렌이 의사소통 방식에서 큰 발전을 보였는데,
그녀가 헬렌의 손에 차가운 물을 틀어주고
'물(water)'이라는 단어를 손바닥에 쓰면서 연상시켜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헬렌은
설리번과 세상의 다른 흔한 사물들을 익히는 데 시간을 쏟았다.
오른쪽 눈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헬렌은 사물의 윤곽을 형상화시키며 배웠다.
그녀의 양쪽 눈은
의학적인 이유와 외관적인 이유때문에
유리 복제품으로 대신 교체되었다.
정규교육을 받다
1888년 5월 초,
헬렌은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등록하였다.
1894년에는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이
라이트 휴머슨 청각 장애 학교와 호레스 만 청각 장애 학교를 다니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다.
1896년에는
매사추세츠로 돌아가서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다녔다.
그 후로 1900년,
헬렌은 레드클리프 대학교 입학을 허가받았다.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마크 트웨인은
스텐다드 오일의 그의 아내와 함께
헬렌의 교육비를 지원해준 헨리 H. 로저스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1904년에 24살이 된 헬렌 켈러는
레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면서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은 시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동반자인 설리번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 일이 끝난 뒤에도
계속 동반자로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앤 설리번은 존 메시와 1905년에 결혼했고
그녀의 건강은 1914년경부터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폴리 톰슨이 집을 지키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젊은 여성으로
시청각 장애인에 관한 경험들이 전무하였다.
그녀는 비서처럼 일할 만큼 발전했고,
결국에는 헬렌 켈러의 평생 동반자로 남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퀸스의 포레스트 힐즈로
앤 설리번과 남편 존 메시와 함께 이사했고,
집을 미국 시각 장애 재단의 지지를 위한 노력의 거점처럼 삼았다.
1936년,
앤 설리번이 사망하고 나서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은 코네티컷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여행을 다녔고
또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기금을 늘렸다.
톰슨은 1957년에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발작을 일으켰고,
곧 1960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1957년에
원래 폴리 톰슨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온 간호사인 위니 코베리는
톰슨의 죽음 이후로도
헬렌의 집에 남아서 그녀의 남은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라고 하면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여성으로 생각하지만,
역사 속의 헬렌은 사회운동을 실천한 사회주의 지식인이었다.
헬렌 켈러는 29세 때인 1909년
미국 사회당(Socialist Party of America, 1901년 창당)에 입당하였으며,
공개 서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발표와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인권운동
헬렌 켈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연설가로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녀는 불리한 신체조건 등 많은 장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지지 및 옹호로 많이 기억된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론자이자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반대자였으며
또한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에 여성 피임 지원자였다.
1915년,
헬렌 켈러와 조지 케슬러는
'헬렌 켈러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비전과 건강, 영양 연구에 열심이었다.
1920년에는
그녀가 미국 자유 인권 협회(ACLU)의 설립을 도왔다.
미국의 도덕주의 비판과 민중운동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라고 선언하자,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도덕주의(Moralism)가
얼마나 표리부동한지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헬렌 켈러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고발했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
사형 폐지 운동,
아동 노동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실천했다.
그녀의 이러한 활발한 사회참여에 대해
보수주의 언론들은
"헬렌 켈러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 라며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헬렌은
“ |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 빈민가에도 방문했다. 볼 수 없을지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 |
” |
|
— 헬렌 켈러 |
저서
헬렌 켈러의 가장 오래된 집필 활동중 하나는
그녀가 11살일때 작업한
서리 왕(The Frost King) (1891)이다.
이 작품은
마가렛 캔비의 서리 요정(The Frost Fairies)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는
헬렌 켈러가 잠복기억 같은 경험이 있었다고 폭로하였다.
헬렌 켈러는 캔비의 이야기를 읽고서 잊어버렸으나
무의식적인 기억속에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22살에는 헬렌 켈러가 그녀의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 (1903)를
앤 설리번과 설리번의 남편 존 메이시와 함께 출간하였다.
이 자서전은
그녀가 21살까지 자라온 이야기를 담았고
그녀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썼다고 한다.
헬렌 켈러는
그녀가 어떻게 세계를 느끼는지 알게 깨닫게 해주는
내가 사는 세계를 1908년에 집필하였다.
어둠의 바깥이라는
사회주의에 대해 쓴 에세이 시리즈는
1913년에 출판되었다.
그녀의 영적인 자서전인
나의 종교는 1927년에 출판되었고
내 어둠속의 빛과 같이 다시 이슈가 되었다.
이 자서전은
논란이 많은 신비주의 신학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지지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과 예수의 부활에 종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에는 스데벤보리아니즘이라고 이름이 붙기도 한다.
헬렌 켈러는 총 12개의 책을 출판하였고 많은 기사들을 썼다.
설리번과 헬렌 켈러(8세)
1897년의 앤 설리번
설리번(Anne Sullivan)
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1866년 4월 14일 ~ 1936년 8월 20일 )은
흔히 앤 설리번(Anne Sullivan)으로 불리우며
헬렌 켈러의 선생님으로 유명한 미국의 교육가이다.
유년시절
1866년 매사추세츠 주 피딩힐스에서 태어났다.
앤 설리번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으며 간혹 그녀를 학대하였다.
그러나 앤 설리번은
아버지로부터 아일랜드의 전통과 풍속을 이어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그녀가 여덟 살 되는 해 죽었다.
앤 설리번은 친척에게 맡겨졌는데,
나중에 그녀의 친척들은
건강한 그녀의 여동생만 돌보기로하고
그녀와 남동생은 매사추세츠 주립 병원에 버려졌다.
앤 설리번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결핵에 걸린 남동생을 간호하였으나,
남동생 지미는 죽고 말았다.
시력 상실과 회복
앤 설리번은 이미 다섯 살 때 트라코마에 감염되었고
해가 갈수록 시각에 이상이 왔다.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이 질병은
자칫 시각을 상실하게 할 수 있었다.
후일 인근 병원에서 사목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바바라 신부는
그녀를 그의 병원에 데려가 재 수술하였다.
그러나 수술 전 마취를 위해 그녀의 눈에 코카인을 주입한 게 화근이 되어,
그녀의 시력은 더욱 나빠졌다.
바바라 신부는
보스턴 시립 병원으로 그녀를 데려가
두 번의 재 수술을 하였으나
그녀의 시력은 사물을 흐릿하게 볼 수 있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앤 설리번은 1880년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에 입학하였다.
시각장애인학교 재학시절
그녀는 다시 한 번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하였고,
1886년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식 때 그녀는 졸업생들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였다.
헬렌 켈러와의 만남
1887년
퍼킨스 시각장애학원의 교장이었던 마이클 애나그너스는
앤 설리번을 헬렌 켈러의 교사로 위촉하였다.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에게
손바닥 위에 알파벳을 쓰는 방법으로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8년
앤 설리번과 헬렌켈러는
퍼킨스 시각장애학교에 함께 등교하였으며,
래드클리프 대학에 함께 진학하였다.
헬렌은
설리번의 추천으로
조지 웰스의 《신세계(New World for Old)》를 읽으면서
사회주의에 눈이 떴다고 말했다.
1936년 10월 20일
뉴욕주 포레스트 힐에서 영원히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