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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티벳족과 라마불교
티벳족 전체 인구
티벳족은 중국에서는 '칭장까오위엔(靑藏高原)'이라고 부르는 티벳고원에 살고 있다. 중국어 표현으로는 티벳족을 장족(藏族)이라고 한다. 티벳족 스스로는 자기들을 보(博)라 부른다. 전 세계적으로 티벳족의 전체 인구는 약 700만 정도이다. 이들 중 중국에 거주하는 티벳족이 673.6만명(중국민족통계연감, 1997)이고, 나머지는 네팔에 6만 명, 인도에 10만 명, 부탄에 3000명, 기타 미국, 대만, 유럽 등지에 소수가 살고 있다.
티벳족의 유사성과 동질성
한편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유사성과 동질감이 있다. 바로 '종교'와 '문자'이다. 위의 4집단은 모두 라마불교를 믿는다. 종교는 그들의 세계관을 비슷하게 만들고 있다. 티벳인 모두의 정신적 고향은 티벳불교의 성지인 라싸이다. 티벳인들에게 동질감을 강화시키는 다른 요소는 바로 '티벳문자'이다. 전체적으로 글자나 문법은 같지만 각각의 종족집단별로 어휘나 발음에 차이가 난다.
티벳족의 지리적 분포와 집단별 특징
1. 중화인민공화국 내 티벳족 거주 지역 분포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 내 티벳족 250만 명
*사천성(四川省) 내 티벳족 127.4만 명
아패(阿覇) 장족강족자치주 57.8만 명, 아패주 총인구의 72.3%
감자(甘孜) 장족자치주 69.6만 명, 감자주 총인구의 81.0%
*청해성(靑海省) 내 티벳족 99.7만 명
해북(海北)장족자치주 14.8만 명(자치주 총인구의 58.6%)
황남(黃南)장족자치주 17.5만 명(92.2%),
해남(海南)장족자치주 24.3만 명(63.7%),
과락(果落)장족자치주 11.5만 명(91.9%),
옥수(玉樹)장족자치주 24 만 명(96.5%),
해서(海西)몽고족장족자치주 7.6만 명(24.6%),
*감숙성(甘肅省) 감남(甘南) 장족자치주에 34.3만 명(54.3%),
*운남성(운남성) 적경(적경) 장족자치주에 27.7만 명(4.2%)
2. 중국내 티벳족 하위종족(집단)의 특징
1) 암도인 : 감숙, 청해성 자치지역과 사천성 아바자치주 북동부 지역(阿覇, 若爾盖, 紅原 등)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암도인은 외모가 잘 생겼고 언어도 제일 고급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이다. 그곳은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 양과 야크 소를 키우는 목축을 하고 있다. 소외되고 고립된 지역이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일부 저지대의 평원에는 농업과 공업단지가 최근 조성되었다. 암도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약3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2) 캄바인 : 티벳 자치구의 동쪽에 있는 창도를 중심으로 자치구의 동부와 사천성 서부 간즈자치주 지역(주로 甘孜, 德格, 康定, 理塘지역), 및 운남성 장족자치주지역에 살고 있는 캄바인은 과거 숙련된 전사들로서 지금도 붉은 줄을 꼬아 머리에 쓰고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닌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고원지대로서 메콩강 양쯔강 살원강이 시작되는 발원지이지만 강수량이 255mm밖에 되지 않아 건조하고 춥다. 그들은 티벳어군의 캄어를 사용한다.
3) 라싸인 : 라싸인은 라싸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데 이곳은 티벳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이다 이곳의 언어는 크게 보아 라싸시와 산남지구를 중심으로 한 전장(前藏)방언과 시가체(日喀則)지구를 중심으로 한 후장(後藏)방언으로 나눌 수 있다.
4) 짜롱인 : 짜롱인은 주로 사천성 아바자치주와 간즈자치주 일부지역에 살고 있다. 이들은 산악지대에 살면서 주로 반농반목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이 사는 곳은 비교적 굴곡이 많은 산악지역이어서 지역별로 방언의 다양성이 크다. 어떤 사람은 약 18개의 방언으로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사는 곳은 간즈자치주의 丹巴, 道孚 등지와 아바주의 金川, 小金, 黑水, 馬爾康, 汶川, 理縣등의 현이다. 이들 중 평야와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는 짜롱족은 일찍부터 강족이나 한족과 같은 민족들과 교류를 하며 생활하였다. 고도가 낮은 지역 가까운 교외지역에 살고 있는 짜롱족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 지리적인 환경
티벳족들은 평균 해발 3000m 이상의 고산지역에 주로 살고 있어, 선교사들이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며 생활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칭하이나 라싸 등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보면 산소 결핍으로 사역자들이 건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족의 적응 자녀교육 등 선교사의 복지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매우 열악하다.
2. 중국 정부와의 정치적인 갈등과 긴장
티벳족은 역사적으로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과 다르게 독립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해외에 망명중인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중심의 종족이므로 이로 인해 중국의 중앙 정부와 늘 긴장상태를 이루고 있다.
3. 라마불교의 세계관
티벳족은 라마 불교라는 종교로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된 종교집단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유난히 종교적인 세력이 그들의 삶과 의식구조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됨으로 인해 다른 사상이나 세계관과의 접촉기회가 없어 그들의 종교적 세계관은 오랫동안 강화되어 왔으며 타 종교가 이를 헤치고 들어갈 공간이 상대적으로 비좁다고 판단할 수 있다.
4. 사회적인 결속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티벳족도 종교지도자나 종교기관이 지역사회의 중심에 놓여있고 사회관계의 중심이 위치하고 있다. 티벳인들의 거주지에 가보면 라마사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활불'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부터 죽은 부모의 장례법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일생의 모든 일들을 라마승과 상의하여 결정한다.
또 공산화 이후 현재까지 그 수가 줄어들어 있더라 하더라도 각 가정마다 거의 한 두명은 라마승려이다. 이들을 통해 모든 티벳인은 자연스럽게 라마교와 연결되어 있다.
Ⅲ. 라마불교 이해
1. 라마교 이전의 티벳 종교와 라마교의 탄생
1) 라마의 의미
라마(喇徥)란 티벳어의 음역으로서, "높은 스승", "교사"를 의미하는 말이다. 보통 이들의 학문은 깊이가 있어, 사람들이 사표(師表)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예로서 달라이 라마와 빤찬 라마를 들 수가 있다. 라마가 아닌 보통 승려들은 통상적으로 "짜바(札巴)"라고 불렀다. 티벳인들은 "라마 스승이 없이, 어떻게 석가모니에 가까이 할 수 있는가?"라고 하여, 곧 라마를 천상(天上)의 석가모니에 현현(顯顯)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티벳에서는 라마교 사원의 지도자와 고승을 "라마"라고 통칭하여 부르고 있다.
라마교는 티벳지역 불교의 속칭이다. 이 때문에 티벳인들은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싫어한다. 티벳인들은 자기네 종교를 일컬어 "상결등파(桑結登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로 불교를 의미한다. 그래서 라마교 대신 "티벳불교"라고도 한다. 티벳 지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기원(AD) 7세기경이다. 이 때 중국 내지와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는데, 불교의 전래 이후로 원래부터 티벳 지역에 존재하던 전통 종교인 "본교(本敎)"와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갈등과 융합의 과정을 거쳐 10세기경에 독특한 티벳 불교를 형성하게 된다.
2) 토착종교 - 본교
본교는 일종의 다신(多神)적 종교로, 티벳 고원의 옛 민간 자연 숭배에 기원한 종교이다. 우주 만물에 정령이 있다는 정령(精靈)신앙이다. 본교의 특징은 기복(祈福)에 있다. 이 종교는 복을 불러들이고 재앙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한 민족 종교로서 부족 시대 당시 원래 "무"부족에게서 "챠"부족에게로 계승되어 전해졌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생명신 "라"를 숭배하였으며, 병에 걸리면 각종의 악마를 물리치고, 죽음에 즈음해서는 희생으로 바쳐진 가축을 이끌고 영원한 죽음의 나라에 이르러, 조상의 영력과 함께 끝없는 휴식을 누릴 것을 염원했다.
본교의 무사(巫師), 무당(巫堂)은 신과 통하는 선지자로서, 그 최고 대표자를 "시엔루어미빠오(賢若米保)"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재앙을 해결해주는 해결사였으며, 귀신 신의 대표자였다. 당시에 각종의 무술, 무당 행위가 많았는데, 심지어 인간의 혼인, 장례, 질병 등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본교의 무사, 무당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며, 그 권력 또한 막강했다. 후에 투르판 왕조 시대에 이르면 "짠푸"의 장례식 및 새로운 "짠푸"의 임명 등에 본교의 무사, 무당이 주관을 하게 된다. 이 때에 이르면, 본교 무사의 지위가 자연적으로 노예주 귀족으로 전환이 된다.
본교의 급속한 발전은 투르판 왕조 체제를 위협하는데 까지 이르는데, 특히 본교 교의의 원시 평등제 등이 강력한 왕권 권립에 악영향을 미치고, 본교가 왕권 신수설과 왕권의 지고 무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즉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본교가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정신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적합하지 않게 되어 가던 바로 이러한 때에 불교가 티벳 지역에 전래되었다. 불교는 불교가 가진 "인과 응보", "생사 윤회", "순종", "인내", "지옥과 천당 설" 등 본교에 비해 왕실의 집권과 통치에 강력한 힘이 되었다. 또한 비교적 높은 정신적 차원의 욕구를 만족시켰기에, 당시 투르판 왕실에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불교와 본교의 갈등은 결국 전통 종교를 숭배하던 무사와 각 씨족 부락의 귀족들이 투르판 왕조의 불교 옹호에 위협을 느껴, 자기의 세습적인 권력의 유지를 위해 불교와 이후 수백 년간 투쟁을 벌이게 된다. 후에 불교는 다신교인 본교의 많은 부분을 양보하여, 본교의 수많은 신과 본교 의식을 대량 흡수하였다. 본교의 우주관과 신관을 살펴보면 오늘날 티벳 불교와 유사한 많은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본교에서는 우주를 신, 인간, 마귀로 나누어 각각 이들이 통치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신은 천상의 높은 곳에서 천신과 여섯 형제,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고 믿는다. 최고의 신은 "쓰빠(什巴)"이다. 한편 인간세계의 통치자는 "짠푸(贊普)"라고 불렀는데, 바로 천신의 아들이다. 짠푸는 천신의 위탁으로 인간을 통치하는데, 일단 그의 임무는 완성했기에, 하늘 사닥다리를 타고 천계(天界)로 돌아갔다고 믿고 있다. 그 후 인간은 천신의 보호 아래 있다고 본다. 한편 지하와 자연에도 각종의 정령, 용(龍), 악마가 있다. 용신은 바닷가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재산과 부를 가져다주며, 인간의 질병을 주관하는 신이다. 이 밖에도 "연신(年神)"은 모든 나무와 돌에 살면서 자연 재해를 다스리는 신이다. 또 지신(地神)은 토지신이며, 이외에 집, 장막신, 부뚜막 신 등 모든 인간 생활이 신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인도의 밀교인 탄드라 불교의 대사 연화생(蓮華生)이 티벳에 신비한 무술(巫術), 주문 등을 본교와 융합시켜 전파시켰다. 이를테면 본교의 가장 기본 의식인 화제(火祭)의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전승되어 오던 축귀(逐鬼) 등 의식과 익숙하던 신령(神靈)이 불교의 옷을 입고 재등장하였다. 티벳인들은 이로 인해 불교에 대한 이질감과 거리감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 불교의 "자비", "중생", "평등" 및 "인과 윤회", "극락세계" 등의 개념이 고달픈 현실 생활로부터 평민과 노예들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0세기경에 이르면 티벳화된 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형성이 되게 된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라마교는 불교의 교의를 기초로 전통적인 티벳 지역의 본교의 형식, 의식과 혼합이 되어 형성된 새로운 불교 종파로서 이후 티벳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2. 라마불교의 발전과 영향
1) 7세기 쏭짠깐부왕의 불교 수용
라마교는 7세기에 강성했던 투르판 왕조의 쏭짠깐뿌(松贊干布) 때에 불경을 티벳어로 번역하고 지식인과 귀족들에게 교육 및 소개로 투르판에 널리 퍼지게 된다. 쏭짠깐뿌는 네팔, 인도 등에서 많은 학자들을 초청하였을 뿐 아니라, 180개의 사원을 세웠다. 이후 8세기 중엽 이후, 투르판 왕실의 지지 하에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779년에는 쌍예사(桑耶寺)를 건립하여, 이후부터 티벳인들 가운데 출가승 제도가 시작되었다. 당시 처음으로 쌍예사에 출가한 귀족과 평민은 모두 7명이었는데, 이들 승려의 비용 전부를 왕실에서 제공했다. 이후 라마교는 티벳의 투르판 왕조가 9-11세기에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됨에 따라, 각 교파들이 각지의 봉건 귀족 할거 정치 세력들과 긴밀하게 연합한 정교 합일의 현상을 보이면서 발전을 하게 된다. 라마교의 대표적인 교파는 닝마파(寧瑪派), 까당파(厊當派), 까쥐파(厊擧派), 및 겔룩파(格魯派)이다. 이중 닝마파는 다른 파와 달리 당시 유행하던 신법(新法)의 다른 교파와 대립하고 있어서 큰 사원 집단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다른 파중에서 밀교를 중시하던 까쥐파의 경우는 라마교 중 가장 먼저 활불(活佛)제도를 채용하여, 자기 교파의 권력을 강화시켜 나간 것이 특징이며, 낡쟈파의 경우는 라마교의 가장 큰 특징인 정교 합일 정권의 시작이기에 그 의미가 있다.
2) 쫑카바의 종교개혁과 이후 겔룩파의 발전
한편 현재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파는 당시 티벳 통치자들의 라마교를 이용한 강력한 봉건 통치의 필요에 부응했을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라마교 각 파의 전횡과 횡포에 대한 염증도 치료하면서 등장했다. 쫑카바의 「종교개혁」(1357-1419)으로 창건된 파이다. 겔룩파는 1409년에 라싸에 간덴사를 건립하여,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며, 1415년 이후 중앙의 왕조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면서, 사원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전 티벳적으로 정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다른 교파를 압도하게 된다
이후 겔룩파는 1546년에 까쥐파의 활불제도를 도입하여, 달라이 라마와 빤찬 라마 및 다른 상층 라마의 전세제(轉世制)를 통해 독특한 권력과 기득권의 세습 및 백성들에 대한 계속적인 설득력과 믿음을 사게 된다. 현재까지 전세제를 통한 달라이 라마와 빤찬라마는 각각 제14세, 제11세에 이르고 있다. 먼저 달라이 라마의 전세 계보를 야마구치 즈이호의 「티벳불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야마구치 즈이호, 1995:186).
현재까지 달라이 라마는 제 14세 까지 이르고 있다. 인도 망명 정부의 달라이 라마가 14세 달라이 이다. 1세- 겐둔 骓빠(1391∼1474), 2세- 겐둔 강쪼(1475∼1542), 3세- 소남 강쪼(1543∼1588), 4세- 융텐 강쪼(1589∼1616), 5세- 카왕 로상 강쪼(1617∼1682), 6세- 린첸 짠얀 강쪼(1683∼1706), 카왕 예셰 강쪼(1686∼1725), 7세- 로상 겔상 강쪼(1708∼1757), 8세- 로상 쟘팰 강쪼(1758∼1804), 9세- 로상 룬툭 강쪼(1805∼1815), 10세- 로상 뽩팀 강쪼(1816∼1837), 11세- 로상 께둡 강쪼(1838∼1855), 12세- 카왕 로상 틴레 강쪼(1856∼1875), 13세- 카왕 로상툽텐 강쪼(1876∼1933), 14세- 카왕 로상 예셰 텐징 강쪼(1935∼).
한편 빤찬라마의 전세 계보는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 판첸 라마는 11세에 이르고 있다. 중공에 호의적이던 판첸 라마 10세가 1990년에 죽은 뒤 판첸 라마 11세 옹립을 놓고 티벳 망명 정부와 중국이 각각 판첸을 옹위하여, 서로 진짜 판첸 이라며 주장하고 있다. 1세- 게렉 펠상뽀(1385∼1438), 2세- 소남 촉키 랑뽀 (1439?∼1505?), 3세- 로상 돈둡(1505∼1565), 4세- 로상 츄키 겔뵅(1570∼1662), 5세- 로상 예셰 펠상뽀(1663∼1737), 6세- 로상 펭덴 예셰(1738∼1780), 7세- 로상 펭덴 텐뽀 니마(1782∼1832), 8세- 로상 펭덴 츄키 탁뽀 펭페 왕츄크(1855∼1882), 9세- 로상 츄키 니마 게렉 남겔(1883∼1937), 10세- 로상 틴레 룬둡 츄키 겔뵅(1938∼1990).
겔룩파의 유명한 사원으로는 짜이붕사(쓰레풍사), 세라(色拉寺), 간덴사, 타쉬룸포(瑬什倫布), 라부렁사(拉卜楞寺), 타얼사(塔爾寺) 등이 있다. 티벳에서의 이후 라마교 사원은 막대한 승려 조직과 독립적인 사원 경제를 바탕으로 그 권력을 확대화 시켜 나갔다. 어떤 평가에 의하면 중앙과 남부 티벳에 있는 땅의 43%가 사원의 소유라고 추정했다. 당시 대사원의 부(富)에 대해 로버트 오어의 글을 인용해 보면 사원의 권력과 힘이 막강했음을 알 수가 있다(1987: 122).
당시 대사원의 부(富)는 짜이붕사의 소유지에서 평가될 수 있다. 라싸 근처의 이 사원은 1950년 당시 세계에서 제일 넓었고 거기에서 25, 000명의 농노들이 일을 한 185개의 장원 소유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재붕사는 또한 16, 000명의 목동을 필요로 한 30개의 목장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에 소작농들과 목동들은 지주에게 생산물의 대부분을 내어 주고 여러 형태의 강제 노동을 해야 하는 농노와 같았다.
따라서 사원이 소유한 43%의 이외의 땅에 대해 35%는 티벳 정부에서 소유하여 소작농들에게 빌려준 반면 귀족은 22%를 소유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부(富)와 토지 소유로 인해 티벳 봉건사회를 지탱해 주던 귀족과 라마교 사원의 권력유지가 가능했다. 각 사원 내부에는 엄격한 봉건적인 교리와 계층이 있어서, 지위가 높은 상층의 라마는 특수한 영주 계층화하여, 세속 봉건주인 농노주, 귀족, 사대부 층과 상호 결탁하여 티벳 사회에서 정권과 신권(神權)을 밀접하게 결합시켰다. 당시 라마교 사원의 승려계층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각종 종교적인 훈련과 직업 훈련을 받고 사람들의 생노병사(生老病死)와 길흉상혼(吉凶喪婚) 등을 주관하는 승려들이 있었다. 이들은 "까이상빠(蓋桑巴)", "둔상빠(鈍桑巴)" 등으로 불렸다.
2) 경전을 배우는 라마로, "뻬이치아와(貝恰氃)"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상층 신분으로 상승하는 부류로써, 라싸의 3대 사원 승려들의 정통이자, 티벳 사회의 중요한 지식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라마"라고 했다.
3) "공예승(工藝僧)"들로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인재들이 있었다. 조각, 동상 주조, 회화, 인쇄, 수학 등의 기술을 갖춘 자들이 있었다.
4) "잡역승"과 "군인 승려"가 있다. 이들은 각 종 육체 노동, 노역에 종사하는 승려들로서, 군인 승려는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사원의 재산과 안전을 위해 전문적으로 무술을 단련했다. 이들은 유사시에 사원 무장의 기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출신 성분이 낮고 집안이 가난해서 주로 육체 노동에 종사한 부류들이다.
5) "집사승(執事僧)"이 있다. 이들은 사원의 집사 역할을 했던 자들로, 행정, 사법, 재무, 총무, 경제 등을 담당했다. 권력이 막강했으며, "꺼꾸이(格貴)" 혹은 속칭 "티에방(鐵棒: 철방망이)" 라마라고 불렸다. 금은으로 장식된 철방망이를 자신의 권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승려의 기율을 담당했다.
6) 소위 "활불(活佛)"이라 일컫는 달라이와 빤찬 밑에 있는 상층 계급의 승려들이 있었다. 이들 활불들은 모두가 "전세(轉世)"제도를 채용, 세습을 했다. 모든 전세된 활불들은 라싸에 있는 3대 사원에서 경전 학습과 토론, 질문 등을 통해 새로이 지위를 확정 받아야 했다. 전체 승려 가운데 상층부의 승려와 라마들은 라마 총수의 4%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라마교 사원은 티벳 지역의 3대 영주중 하나였다. 공산화 전에 전체 티벳에 모두 2, 700여 개의 사원이 있었는데, 이들이 실제 경작지의 39%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400여 개의 장원과 9만 명의 농노가 있었다. 사원에서는 지세(地稅)와 가축세, 고리대와 상업적인 착취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핍절하게 했다. 사원의 특권으로 사람들을 착취할 수 있었던 세금의 종류를 로버트 오어는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당시에 티벳 농노들은 매우 가혹한 세금을 내야 했다. 세금의 종류도 많아서, 이발세, 창문세, 새로 낳은 송아지세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종교 예식에 대한 징수까지 총 45개의 세금들이 라마교 사원에 의해서 징수될 수 있을 정도였다. 공산화 직전에 티벳에는 모두 12만 여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이는 전체 티벳 인구수의 10%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시에 부분적으로 심한 가난의 원인도 있어서, 많은 평민의 아들들이 심지어 1950년에는 전 티벳 남자들 중의 20-25%가 라마교 사원에 들어갔다. 라마교는 겔룩파의 종교개혁 이후 계속적으로 승려들의 결혼과 자녀를 갖는 것을 금지했기에, 공산화 전 시기에 이르면 전 사회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 인구가 적었다. 이에 반비례하여 종교 활동이 너무나 많아서, 당시 티벳의 사회 생산력은 매우 저조 낙후된 상태였다. 티벳에 있어서의 중국 공산당의 무력 통치가 너무 지나쳤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면서도, 공산화 전의 티벳에서의 라마교의 발전과 그 기득권의 세습으로 인해 이 부분에서 그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농노와 평민들이 공산화 초기시기에 공산당을 지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로버트 오어의 다음 글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티벳 통치에 대한 긍정 점이자, 바로 중국 공산당 자신이 티벳을 봉건 낙후에서 해방시켰다고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말이므로 참고로 인용한다. 로버트 오어는 일곱 가지로 중국 공산당의 티벳 통치의 긍정 점을 기술하고 있다.
1) 1951년 경 중국 공산당은 티벳의 상당수의 농민들의 환심을 산 것과, 사원들과 달라이 라마의 전통적인 권력 구조를 약화시킴으로 인해 티벳에서의 완전한 세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 티벳에서의 불교 세력을 파괴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공의 무력이 지나쳤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어쨌든 새로운 사회질서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3) 토지가 라마교 사원들과 관리, 지주에게서 몰수되어 농노들에게 나누어졌다.
4) 공중 보건 프로그램과 설비들이 지저분하고 간단한 위생 설비 마저 갖추고 있지 못하던 시(市)들에 도입이 되어 사회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5) 전기를 가설했다.
6) 철강의 생산과 석탄 채굴 등 산업 발전을 시작했다.
7) 티벳의 시골 지방을 6천개 이상의 인민 공사로 재편성하여, 경작지의 80% 까지 관개시설을 증대하였다.
Ⅳ. 라마불교의 인생관과 그 영향
1. 현실보다 내세 지상주의
한편 라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서는, 모든 인간의 현실 세계를 "고통"으로 보고 있기에 이 세계를 떠난 "열반(涅槃)"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선 빈 마음으로 부처를 예배하고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며, 고통스러운 수도(修道)를 연마해야만 가능했다. 또 만약 금생(今生)에 선(善)을 행하면 내세(來世)에 복(福)을 누리며, 금생에 악(惡)을 행하면 내세에 지옥에 간다고 주장한다. 티벳인들이 신봉하던 윤회설이 얼마나 티벳인들에게 영향이 많은지를 티벳에서 7년 동안 살았던 하인리히 하러는 자기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989: 238).
"티벳인들은 윤회설을 신봉하였기에, 파리나 지렁이 같은 미물도 죽이지 않았다. 찻잔에 파리가 빠지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법석을 떨며 파리를 안전 지대로 대피시킨다. 겨울이 되면 티벳인들은 개울의 물고기가 죽을까 걱정하여 얼음을 깨고 물고기들을 건져 봄까지 양동이에다 키운다. 그들은 죽은 부모 형제나, 조상들이 여러 가지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윤회설은 일상 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일에도 적용된다. 특히 달라이 라마가 참선을 하던 3년 동안, 전국의 건축업자들에게는 산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애벌레와 곤충들이 건축 공사 때 죽기 쉽다는 이유로, 공사를 전면 금지시켰던 것이다. 훗날 공사 감독을 맡은 나는 인부들이 땅 속의 벌레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삽질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2. '오체투지'등 행위중심의 구원관
라마교의 중심지는 티벳의 수도인 라싸이다. 라싸는 티벳어로 "신의 땅"이란 뜻이다. 이 곳은 티벳족 사람들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 일뿐 아니라, 바로 정신세계의 중심지로서 성지(聖地)로 여기고 있다. 멀리 윈난(雲南), 쓰촨(四川), 칭하이(靑海) 및 깐수(甘肅) 등지에서 티벳족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이 곳에 찾아온다. 이들은 재산이나, 험산 준령을 마다 않고 라싸에 오는 것을 일생 최대의 영광이라고 여긴다. 라마교의 중심지인 티벳 라싸로의 종교 행렬에 관한 다음 두 글들은 종교 신앙이 어느 정도 티벳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불교 속에 살아 숨쉬는 티벳인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조캉사원을 돌아봐야 한다. 당태종의 딸 원싱(文星)공주가 송짠깐뿌 왕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온 불상과 불경을 모시기 위해 창건한 조캉사원은, 이 절에서의 참배가 평생 소원일 만큼 종교적으로 가장 신성시되는 곳이다. 순례 객들은 수천 킬로미터(km)떨어진 서쪽 끝이나, 북쪽의 칭하이성, 서남쪽의 네팔, 심지어 인도에서까지 몇 개월, 몇 년이 걸려서라도 이 곳을 찾는다. 그리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 "(중앙일보, 1996. 8. 29)
"탐사 팀은 딩칭으로 가는 산길에서 우연히 오체투지를 올리며 라싸로 향하는 순례자 한 명을 만났다. 이름은 쒀바(索巴, 28세). 칭하이성에서 목축업을 하는 티벳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고향을 떠나 풍찬 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여덟달째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라싸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먼 거리를 절을 하며 가기 위해 몸 앞에는 양가죽을 대고 양손에는 양철과 가죽으로 만든 보호 대를 낀 모습이었다. 절을 할 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가 머리에서 내려오는 손이 입술을 한번 건드리고 가슴서 멈춘다. 무릎을 꿇은 뒤 두 손으로 바닥을 밀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땅에 밀착한다. 두 팔을 머리 위로 곱게 편다. 세 발짝 걸어가 절 한 번하고 일어날 때마다 내걸음씩 전진하는 의식이 반복된다. 두팔을 쭉 뻗어 넙죽 엎드리며 이마가 땅에 닿는 오체투지례를 올릴 때마다 진지함과 경건함이 배어 나왔다.…언제쯤 순례 목적지인 라싸 조캉사원에 도착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앞으로 1년쯤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사흘 뒷면 라싸로 들어갈 예정인 탐사 팀에게는 그의 고행 길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갔다. 그는 오랫동안 노숙을 한 탓에 몸에서 쉰내가 나고 지친듯한 모습이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아마도 순례를 통해 갖게 된 종교적 확신이 표정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엄청난 종교적 정열을 이끌어 내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이 죽으면 사십 구일 안에 환생한다는 라마교의 교리가 이들이 힘겨운 오체투지 순례에 나서게 하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즉 순례 여행을 통해 내세에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중앙일보, 1996. 8. 22).
3. 일상 생활에 미친 영향
한편 티벳인들은 일상생활 가운데 불교 의식이 생활화되어 있어서 티벳인들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마니퇴라는 손으로 돌리는 "기도 바퀴"를 들고 다니면서, 경전을 암송한다. 이 마니퇴는 오랜 세월 동안 라마교의 일상화된 기도 기구이다. 사람들의 의(衣), 식(食), 주(住), 행동, 결혼, 생로병사에 라마교는 또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라마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의복을 입었다. 라마들끼리도 서로 다른 계급과 교파에 따라, 승려 복과 승려 모자 색깔이 달랐다. 보통의 라마들은 자홍색(紫紅色)의 다리가 드러나는 긴치마를 입고, 상의로는 조끼를 입고, 그 위에 자색(紫色)의 가사(袈裟)를 둘렀다. 닝마파의 승려들은 붉은 색의 모자를 썼으며, 겔룩파는 누런 황금색의 모자를 썼다. 티벳의 사품 이상의 승려 관리들은 황포(黃袍)를 입고, 붉은 구름이 수놓인 신을 신었다. 또 사품 아래는 자색 혹은 남색의 긴 도포에다, 남색 구름을 수놓은 신을 신었다.
또한 일반 티벳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무론 하고, 대부분 몸에 호신용의 부적인, 불상이나, 불경 경문, 사리(舍利), 옥, 비단 등을 지니고 다녔는데, 이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라마교는 티벳인들의 음식에도 많은 금기(禁忌)를 가했다.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티벳인들은 물고기, 새우, 닭과 달걀을 먹지 않는다. 한편 활불(活佛)라마들은 식사 전에 먼저 꼭 경(經)을 외우며, 일반 신도들은 밥을 먹기 전에 술이나 차(茶)를 세 방울을 떨어뜨려 부처에 대한 예(禮)를 표했다. 주거하는 주택도 라마교의 영향으로 부유한 집은 집집마다 경문통(經文桶: 큰 마니퇴를 가리킴)을 가정마다 비치해 놓았다. 경문통의 크기도 각각 다르며, 종류도 나무, 소가죽, 동(銅)으로 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또 모든 가정마다 지붕에 경문 깃발과 색색의 헝겊으로 된 라마교 깃발을 걸어 놓은 모습을 볼 수가 있다.
Ⅴ. 라마불교의 특성
라마교를 언급할 때 가장 큰 특성은, 티벳 사회의 변혁이 항상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의해, 그 중에서도 특히 티벳 국내뿐만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변혁이 초래됨에 따라 라마교의 변용이 그런 변혁에 대응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산화 이전 시기의 티벳과 공산화 이후의 티벳 역사에서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즉 과거 투르판 왕조 성립 이후 지금까지 티벳의 국내외적인 변화에 따라 라마교가 그에 대응하여, 자기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전 공간을 확대시켜 왔음을 볼 수가 있다. 각 시대에 따라 티벳 사회가 변모하는 모양에 의해 라마교가 변용을 취하게 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라마교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티벳인들은 언제나 너그럽게 그 불교를 받아들여 한결같이 그들의 생활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바로 여기에 티벳에서의 라마교의 전통과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라마교의 큰 특성으로 먼저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라마교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를 모태로 하는 불교이면서도, 원시 불교는 물론 동남 아시아 일대에 전파된 소승 불교나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진 대승불교와 전혀 다른 형태로 독특하게 전개 발전하였는데, 풍토로서의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로서 알려진 불교로 탄생되었다. 둘째, 몽고, 때로는 중국 본토 및 인도, 캐시미르 주의 라다크 등으로 확산되어 번지기는 했지만, 여하튼 티벳 고원이라는 폐쇄 사회에서 생겨나고 성장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셋째, 티벳 내부에서는 물론, 몽고 등을 포함한 총괄적인 라마교 권에 있어서는 정치와의 결탁이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 비해 훨씬 심하다는 점이다. 넷째, 활불사상이 존재함으로써, 라마교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다른 나라의 불교와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런 특성에 입각하여 티벳에서의 불교가 라마교라고 불리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면 우선 첫째로, 티벳에서의 불교가 가진 주술(呪術)적인 성격 때문이다. 종교 일반에 있어서 주술이란 신앙하는 자가,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 믿지 않는 자가, 현실 생활 속에서 "양재초복(攘災招福)"을 모종의 신령한 능력을 가진 자에게 기대하는 데서 생긴다. 따라서 주술을 부릴 줄 아는 자는 당연히 특수한 "영능자(靈能者)"이어야 하는데, 티벳인들은 이러한 능력을 갖춘 자를 "라마(즉 활불)"라고 생각한다. 티벳 불교는 인도 불교의 밀교사상의 영향을 직접 받아서, 주술성이 농후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티벳인들 자신이 종교적인 주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도 묵과할 수 없다. 즉 주술 등을 좋아하고 샤만을 믿으며, 때로 마술적인 것까지도 좋아하는 민족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티벳에 도입되기 이전에 먼저 티벳에 존재해 오던 전통 종교 본교의 특성이기도 하다. 원래 본교에서는 본교의 무사가 신통한 능력을 갖춘 자로서, 귀신과 대화하며, 이들을 쫓기도 하는 능력 있는 자로 신봉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문, 부적, 신비한 무술, 제사 등을 중요시 여겼다. 이런 티벳 민족의 종교적 경향으로 인해 티벳 사회는 전근대적인 모습과 후진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종교현상이란 그것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사회의 반영이라고 보는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시점에서 티벳 사회의 후진성은 곧 라마교 그 자체의 후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둘째로 티벳인들의 라마에 대한 광적인 존숭(尊崇)이 티벳 땅에 라마교를 탄생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불교에서의 "삼보귀의(三寶歸依)"주장에 대해, 라마교에서는 라마보(寶)를 추가한 "사보귀의(四寶歸依)"가 행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라마는 삼보와 신앙자간의 중개자로서 숭배되며, 영원한 진리인 법(法)도 스승인 라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자와 결부될 수 없다. 따라서 라마 교도에게 있어서 라마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이다. 즉 원래 라마란 스승, 선지식(先知識) 또는 선우(善友)의 뜻으로 교법을 신앙자에게 교시하는 자였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본래 인격, 인간 자체였던 인간이 삼보의 총합 체로서, 삼보 이상의 존재로 승화된 것이 라마교의 특성이다.
셋째로 라마 내지 라마 보에 대한 특이한 신앙이 결국은 라마교의 독특한 활불사상으로 까지 발전이 되었다. 활불사상은 라마 교도들이 삼보 이상으로 존숭하는 라마 보의 당체(當體)인 라마가 비밀 탄트라의 관법에 다라 자기의 영혼을 그 육체에서 쉽게 버리고 자유로이 다른 육체에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전생이 활불사상을 낳은 사상적 배경이다. 티벳에서는 일반적으로 덕이 높은 라마가 죽은 뒤 그 영혼이 유아(幼兒)의 육체에 전생(轉生)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그 육체를 제공하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됨으로, 활불 라마로 지정된 유아 및 그 친족이 받는 과보는 매우 크다. 전생 능력은 많은 수행을 쌓은 라마, 즉 성직자에게만 인정되는 것으로, 속세에 사는 사람이 쉽사리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넷째로 활불사상의 사회적 구현으로서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였다. 달라이 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법왕제(法王制)는 티벳의 독특한 통치 형태로서 라마 교도들에게 널리 신봉되었다. 야마구치 즈이호가 티벳 불교를 연구한 글에 의하면 활불사상과 티벳 불교사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라마 불교에 활불사상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로서 우선 티벳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그 땅에 토착하고 있던 본교의 영향이 컸음을 지적할 수 있다. 중앙 아시아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일종의 샤머니즘인 이 본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주간에는 무수한 영혼이 떠다니고 있으며, 이 세상의 길흉화복은 모두 이들 영혼의 작용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 이 영혼들을 달래고 "양재초복(攘災招福)"하려면 덕있는 수행자의 작법(作法)이 필요한데, 활불사상도 이러한 본교의 영향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둘째로, 티벳인의 국민성 중에 종교적인 영위(靈威)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즉 티벳인의 장례법이나 세습법 등의 의식을 볼 때, 티벳인의 사상 중에는 영적인 존재를 강하게 긍정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국민성이 활불의 존재를 낳는 결과가 되었다. 셋째로, 현실적인 이유겠지만 14세기 말 쫑카바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 승려의 육식, 대처 제도 등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상층의 덕망 높은 라마의 경우에는 그 때까지 세습에 의해 승적(僧籍)을 계승하던 것이 후계의 선정으로 고심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활불사상이 곧잘 이용되었다고 한다. 티벳 불교에서 활불사상이 존재한 이유로 제시한 위의 설은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각기 수긍할 만한 점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라마 불교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알 수 있는 것은 라마 불교가 각 시대의 지배자나 권력자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이다. 즉 티벳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것은 쏭짠깐뿌에 에 의해서였고, 그 후 약 200년간 티벳 불교는 번창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티송 데뵅 왕의 시대를 전성기로 하여 랄파첸의 약불(溺佛)의 시대를 지나 랑다마에 의한 폐불(廢佛)사건에 이르른다. 그후 수백 년에 걸쳐 왕통의 단절로 인한 전국시대가 펼쳐지면서,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이 코르레 왕에 의해 일시적으로 왕통이 되살아나고 린첸 상뿌의 노력으로 비밀 교의 부흥이 이루어지면서, 나리 지방의 호족인 예셰우의 초청으로 아티샤가 티벳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원조의 쿠빌라이 칸에 의해 티벳의 통치권이 팍파에게 넘겨짐으로써 싸쨔 왕조가 세워지고, 원 명의 정권이 교체될 무렵 쫑카바에 의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또한 15세기 말 이후에는 달라이라는 최고위자를 중심으로 한 법왕제가 확립되었고, 중국이 티벳을 자치구로 만드는 1959년까지의 500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법왕으로서, 티벳을 통치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더듬어 볼 때, 티벳 불교의 형성자, 즉 라마교를 담당한 사람은 그 당시의 권력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라마교가 발전할 수 있는 정점으로서 역할을 했다. 원래 어느 나라의 불교를 막론하고 그 역사를 보면 그 나라의 불교가 통치권자의 생각과 사고에 따라 변천해 왔음을 알게 된다.
모셔온 자료
“라싸에 있었던 스님들은 2008년 3월 일어난 독립 봉기 사태로 라싸와 이웃한 중국의 ‘청해성’(靑海省)에 있는 불교 교육관에서 정신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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