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난→비행 청소년' 악순환 끊으려면
19살 은주의 경우… 담임교사가 "도와주겠다"
음악레슨 받고 수능준비, 음대에 수시 합격
"가수의 꿈 이뤄보겠다"
"오늘 사진수업 주제는 '나는 ○○을 기다린다'야. 다들 자기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게 뭔지 적고 사진으로 표현해보자."사진가 고현주씨가 노란색 체육복의 10대 소녀 10명에게 종이와 카메라를 나눠주었다. 아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운동장으로 나오자 다른 반 소녀들이 햇볕 아래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19일 오후 2시 경기도 안양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 10대 소녀 130여명이 최장 2년까지 머물며 중학교 과정 수업과 직업훈련(제빵·피부미용·헤어디자인·텔레마케팅)을 받는 곳이다. 숲에 둘러싸인 교정(校庭)부터 화장품·종이학이 데굴거리는 개인 관물대까지 흔한 풍경이지만, 여느 기숙사제 학교에는 없는 시설이 세 가지 있다.
- ▲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는 사진·미술 등 7개 인성치료 과목을 가르친다. 사진반을 지도해온 고현주씨는“아이들이 놀라운 재능과 미감을 보여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했다. 사진은 사진반 김지혜(가명) 학생의 작품.‘ 사다리’의 꿈이 담긴 듯 하다. /사진가 고현주씨 제공
첫째, 교무실 옆에 학생들의 문신을 지우는 '레이저시술실'이 있다. 둘째, 본관·교육관·생활관을 잇는 통로에 보안카드로 여닫는 유리문이 설치돼 있다. 셋째, 교무실 벽에 '학생 현황'을 적은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다. 성(性) 관련 비행 10명, 절도·특수절도 등 재산 비행 8명, 특수강도·강도상해 등 강력비행 9명, 폭력 22명….
◆가난이 만든 비행 청소년
학교의 옛 이름은 '안양소년원'이다. 범죄와 비행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다가 범죄 쪽으로 미끄러진 소녀들이 법원에서 2년 이하 보호처분을 받고 이곳에 온다.
김태섭 교감은 "가난으로 비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가난을 빼고 비행에 빠진 과정을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학생 대다수가 '부모의 생활고→가정불화→자녀 방치→학교 부적응→가출·비행'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각종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 13만4992명 중 62%가 하류 가정 아이들이다. 빈곤과 불화에 시달리느라 규율도, 목표도 없이 성장해 어른이 되면 부모처럼 곤궁한 삶을 반복하는 악순환이다.
오는 29일 퇴원하는 은주(가명·19) 역시 '음대 입학'이라는 꿈이 좌절된 뒤 나락에 떨어졌다.
은주 어머니(55)는 동대문시장에서 조그만 옷공장을 운영해 은주와 은주 언니(23)를 키웠다. 서울 개봉동에 마당 딸린 방 세칸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을 때 파국이 왔다. 아버지(56)가 '짝퉁 명품' 제조업체를 차렸다가 망한 것이다.
은주 어머니는 다시 동대문에 돌아와 하루 18시간 넘게 미싱을 돌렸다. 그 사이 은주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 매일 밤 동대문 일대를 쏘다니며 '즉석 노래자랑' 이벤트 무대에 오르고 자정 넘겨 귀가했다.
놀기만 하던 은주는 고1 때 달라졌다. '음대 실용음악과에 진학해 가수가 되겠다'는 목표가 생긴 덕분이었다. 한 번도 개인 레슨을 받지 못했지만, 노래 실력만은 자신 있었다.
착실한 생활은 1년 만에 끝났다. 이듬해 은주 아버지가 사업 스트레스로 쓰러져 자리에 누운 것이다. 음대 진학을 포기한 은주는 결국 단순 비행의 선(線)을 넘었다. 은주는 또래 3명과 짜고 카드 도박을 벌여, 다른 친구들로부터 2000만원 넘는 돈을 뜯어낸 혐의로 작년 5월 이 학교에 왔다.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은주는 "여기서 만난 담임교사가 '수능에 도전해보라. 도와주겠다'고 말해 희망이 생겼다"고 했다. 꿈이 생기자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은주는 1년 4개월 동안 꾸준히 자원봉사자들로부터 음악 레슨을 받고 인터넷 강의로 수능을 준비해 지난 9월 A음대 실용음악과에 수시합격했다.
은주의 내년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 것, 음대 재학 중에 프로듀서 양현석씨가 운영하는 기획사에 들어갈 것…. 은주는 대학생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은주 어머니는 "부모가 중간에 가난해져도 아이들은 하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많아지면 좋겠다"고 했다.
◆"애정으로 보듬으면 달라진다"
비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레이저시술실'이라면, 비행 뒤에 숨은 가난과 방치를 보여주는 것이 충치였다. 직업훈련 담당교사는 "어금니 네 개가 다 썩은 아이, 이(齒)가 뿌리만 남고 다 삭아 없어진 아이 등 일반 가정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태가 많다"고 했다.
이곳에 온 지 10개월 된 수정이(가명·15)도 충치가 많았다. 수정이는 "나쁜 일을 해서 이곳에 왔지만, 여기 와서 처음으로 아빠와 소통하게 됐다"고 했다.
막일하는 수정이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자식 4남매 중 가운데 둘을 입양 보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큰 오빠(24) 품에서 자란 수정이는 아빠로부터 "일어나라" "밥 먹어라" 이상의 살뜰한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가출을 반복하다 마침내 법정에 서게 됐을 때, 수정이는 함께 불려온 아버지에게 모기만한 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침묵하다 "아니, 네가 여기 오게 만든 건 아빠다. 너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수정이는 "그 순간 아빠의 진심이 느껴졌다"고 했다.
10년 경력의 이 학교 교사(44)는 "아이들은 교사와 가족이 애정을 갖고 '할 수 있다'고 격려하면 어느 순간 정말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고 했다.
이날 사진수업에서 수정이가 적어낸 글은 '나는 아빠와 다시 만나길 기다린다'였다. 수정이는 "오빠가 면회 와서 '아빠가 요즘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다'고 했다"며 "아빠에게 부담이 될까 봐 집에 가도 학교 대신 검정고시를 볼 생각이지만, 아빠가 '학교 다니라'고 하면 '예'하고 열심히 다니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