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3.31 중국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다
| 1959년 3월 말,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는 국경 근처의 조그만 마을 망망에서 사흘을 머물러야 했다. 그는 이미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에게 망명을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이후 몇 십 년 동안 돌아오지 못할 고국을 떠나야 했기에 그의 몸과 마음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며칠째 앓고 있던 열병은 이질로 발전하였다. |
|
티베트에서의 마지막 밤 보내고, 설산을 넘어 인도로 가다
1959년 3월 31일, 국경을 앞에 두고 달라이 라마는 일행 중 일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달라이 라마의 경호원과 군인들, 몇 명의 고위 관리가 티베트에 남기로 한 것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정든 사람들과의 이별은 너무 아팠다. 마음의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몸까지 병든 달라이 라마는 말을 타고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는 등이 넓은 소에 올라탔다. 소 등에 올라탄 그는 피로와 깊은 병, 비탄에 젖은 채 티베트 국경을 지나 인도로 넘어갔다.
소를 타고 국경을 넘어오는 달라이 라마의 모습은 어쩌면 평범한 군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군인이 소를 타고 가는 일은 좀체 드물었을 터, 그러나 기이하다기보다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그나마 달라이 라마에게 2년 전에 만난 적 있는 인도군 장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자그마한 위안이었다. 장교는 일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봄딜라라는 도시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받았다고 말했다.
달라이 라마의 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일개 국가의 지도자를 넘어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는 계기가 바로 그의 망명에 있었다는 것이다. 망명 이후 그는 눈부신 지도력과 놀라운 인내심으로 티베트 난민의 희망이 되었고, 티베트 불교 정신을 널리 전파했으며, 마하트마 간디 이후 다시 한번 비폭력 평화 정신을 구현한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1년여에 걸친 떠돌이 생활 끝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인도 북부 히마찰프라데시 주의 다람살라에 정착하여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다. |
|
| 달라이 라마는 2009년3월11일 인도 다람살라에서 열린 티베트 반중 봉기 50 주년 기념식에서 중국통치하에서 티베트인의삶은'이승의 지옥'이라고 열변했다. |
|
달라이 라마는 다람살라에서 정부의 체제를 정비하고 완전한 민주화를 실현했다. 그는 망명정부를 통해 인도로 피난 온 난민들의 정착을 도왔으며, 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아울러 티베트로 돌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비폭력 투쟁을 전개했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를 거점으로 세계에 퍼지게 되었고, 티베트의 뛰어난 승려들이 세계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결국 달라이 라마의 망명은 대단히 슬픈 일이었지만, 운명은 그에게 티베트만이 아닌 세계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
|
외양간에서 태어난 아이, 그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었다
1935년 7월 6일, 티베트 동북부 암도 지구 탁체르의 가난한 농가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외양간 짚 위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렸다.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라모 톤둡’이라고 지었다. 보통 아이는 세상에 나올 때 눈을 감은 채 태어나지만, 이 아이는 특이하게 눈을 뜨고 태어났다. 가족들은 특별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가 바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되리라고는 짐작하지도 못했다. |
|
새로운 달라이 라마가 되어 지혜의 바다라는 뜻의 '텐진 갸초'로 명명된 어린시절(왼쪽), 십대의 달라이 라마(오른쪽) |
|
| 탁체르에서 한 영특한 아이가 태어날 무렵 티베트 정부는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찾기 위해 분주했다. 주지하다시피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가 종교적 수장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 역할도 하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세습되거나 투표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전임 달라이 라마가 열반하면 그 환생자를 찾아 옹립하게 된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는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직위를 나타내는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달라이 라마 14세’로 표기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제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가 열반하자 1937년 티베트의 섭정관 레팅 린포체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찾기 위해 고승들을 전국으로 보냈다. “다리에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있고, 커다란 눈동자와 활처럼 휘어진 눈썹과 커다란 귀, 어깨엔 두 개의 사마귀, 마치 관세음보살처럼 기다란 두 팔과 손바닥에 조개 모양의 손금이 있는 사내아이를 찾아라.” 툽텐 갸초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환생할지 몇 가지 단서를 남겨두고 떠났던 것이다. 어렵게 고른 몇 명의 후보 중에서 라모 톤둡이 가장 유력했다. |
|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찾기 위한 사절단이 라모 톤둡의 집을 찾았다. 사절단은 라싸의 세라 사원의 주지 케상 린포체를 대표로 했지만, 그는 하인으로 변장하고 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롭상 체왕이 대표로 행세하기로 했다. 라모 톤둡은 케상 린포체를 발견하자마자 그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인 염주를 달라고 했다. 케상 린포체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맞히면 염주를 주겠다고 하자, 라모 톤둡은 사투리로 “세라 사원의 주지”라고 말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두세 살 무렵에 전생을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이가 들면 새로 받은 몸의 기운으로 인해 전생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절단은 라모 톤둡이 달라이 라마의 환생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찾은 티베트 정부는 1939년 라모 톤둡의 가족을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불렀다. 포탈라 궁의 새 주인이 된 라모 톤둡은 ‘잠펠 나왕 롭상 예쉬 텐진 갸초’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다. 이 이름은 ‘성스러운 분, 영광의 수호자, 진리를 설하는 분, 자비의 화신, 믿음을 지켜주는 분, 지혜의 바다’라는 뜻이었는데, 새로운 달라이 라마는 지혜의 바다라는 뜻의 ‘텐진 갸초’를 주로 사용하였다. 1940년 2월 22일, 라모 톤둡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로서 즉위식을 가졌다. 사람들은 그를 ‘쿤둔’이라 불렀다. 쿤둔은 ‘살아 있는 부처’라는 뜻으로 마땅히 공경 받을 만한 분에 대한 존경의 이름이었다. |
|
호기심 강하고 장난기 많은 소년, 운전하다 헤드라이트 깨뜨리기도
어린 시절,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이하 ‘쿤둔’이라 부른다)는 장난기 많고 호기심 강한 소년이었다. 쿤둔이 좋아하는 장난감은 선물로 받은 페달 달린 빨간 차와 태엽 감는 기차 세트, 전쟁놀이를 할 수 있는 납 인형 등이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이런 장난감을 분해했다가 조립하곤 했다. 영특한 소년은 장난하는 가운데서도 은근히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한번은 수행원이 손바닥에 먹이를 올려놓고 앵무새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쿤둔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화가 난 그가 새에게 막대기를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새가 날아가버렸다. 훨훨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새를 보면서 허전해진 그는 억지로 강요한다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통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한가한 시간만을 보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쿤둔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를 위한 교과과정은 불교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승려들의 것과 같았다. 이는 쿤둔이 스스로 지적했듯이 20세기 국가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으로는 여러 모로 부족한 것이었다. 교과과정으로 배울 수 없는 세계를 쿤둔은 특유의 호기심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행동으로 깨우쳐나가기 시작했다. 포탈라 궁에서 수업이 끝나면 그는 지붕으로 올라가 망원경으로 마을을 살펴보았다. 거기서는 쇨 마을의 교도소도 잘 보였다. 쿤둔은 죄수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죄수들도 쿤둔이 자기들을 내려다보는 것을 발견하면 땅바닥에 엎드리곤 했다. 쿤둔은 그들을 모두 알아볼 수 있었으며, 누가 석방되는지, 누가 새로 구금되는지를 확인했다. 마을의 집집마다 뜰에 쌓아놓은 땔나무와 사료 더미를 조사해보기도 했다. 쿤둔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금방 친해졌다. 특히 외국인 친구 하인리히 하러에게 서구의 문물과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
|
| 쇨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포탈라 궁전 |
|
쿤둔은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수입한 석 대의 자동차에 눈독을 들였다. 이 자동차들은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살아 있을 때는 라싸 근방에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사용했지만, 그가 열반한 후에는 사용하지 않아 망가져가고 있었다. 쿤둔은 작동하지 않는 자동차들을 정비하도록 했다. 차가 고쳐지자 쿤둔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차를 차고에서 끌어내 정원 둘레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못해 나무를 받아버렸다. 한쪽 헤드라이트가 박살 난 것을 보고 놀라서 얼른 차를 차고에 돌려놓았다. 운전사는 쿤둔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모른 척해주었다. |
|
열다섯 살에 실질적인 국가 수반이 되었지만,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행복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쿤둔은 불행 속에서도 낙천적인 자세를 잃지 않지만 티베트인 전체의 불행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1950년 10월 7일,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했다. 티베트 정부는 적절한 대응책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늙은 섭정관이 죽자 달라이 라마를 실질적인 국가 수반으로 세울 것을 요구했다. 1950년 11월 17일, 15세의 쿤둔은 세속의 권력을 상징하는 황금바퀴를 받았다. 많은 이에게 축하를 받았지만, 그는 이미 힘을 잃은 정부의 수반이었으며,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지도자였다.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를 해방시킨다는 명목 아래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민중의 불안은 극에 달했고, 귀족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의회도 쿤둔에게 춤비 계곡 지대의 드로모라는 마을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쿤둔은 망설였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야 했다. 9개월의 피난 생활 후에 라싸로 귀환했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1951년 10월 24일, 쿤둔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중국 정부가 내미는 17개 항의 조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티베트는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전개되는 티베트의 불행에 대해서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다. 중국은 티베트의 문화를 말살하려 했지만, 쿤둔은 어떻게든 티베트 문화만은 보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티베트가 독립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자치만은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이 이를 허용할 리 없었다. 중국은 티베트를 완전히 중국 영토로 만들고자 했고, 신앙심으로 형성된 티베트의 독특한 문화와 정신을 공산주의 문화와 정신으로 완전히 바꾸어놓을 작정이었다. |
|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터에서 '비폭력 투쟁'을 결심하다
1956년 말 쿤둔의 인도 방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2,500돌을 맞는 ‘부처님 오신 날’ 경축 행사에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가 쿤둔을 초청했다. 열한 번이나 전보가 오고 나서야 중국은 할 수 없이 쿤둔의 인도행을 허락했다. 델리에서 쿤둔은 마하트마 간디가 화장된 라지가트를 방문했다. 그는 마음으로 간디와 대화를 나누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살아 계셨다면 어떤 말을 해주셨을지 궁금했다. 그분은 티베트인들의 자유를 위한 비폭력 저항을 지지했을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어떤 어려움이 가로막더라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렬하게 비폭력 저항에 대한 신념을 굳혔다.” 1959년 3월 2일 쿤둔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게쉬(불교철학박사)가 되었다. 3월 5일 조캉 사원을 떠나 화려한 행렬과 함께 노부링카로 돌아왔지만, 기뻐할 여유는 없었다. 중국군은 쿤둔에게 이상한 초대를 했다. 3월 10일 중국군 사령부에서 열리는 가무단 공연에 초청한 것인데, 쿤둔의 참석을 비밀로 해야 하며, 경호원이나 동행하는 각료 없이 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티베트 각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는 쿤둔을 베이징으로 납치하려는 계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자 3월 10일 민중 대봉기가 일어나고 말았다. |
|
인도로 망명을 앞두고(왼쪽), 망명을 떠나는 모습(오른쪽)
운명은 차츰 쿤둔에게 티베트를 떠나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중국 점령군 사령관은 쿤둔에게 거처를 중국군 사령부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3월 16일 사령관은 다시 한번 파렴치한 제안을 해왔다. 그는 군중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노부링카 궁을 포격할 예정이니, 지도에 당신이 있게 될 장소를 표시해달라고 제안했다. 그곳을 피해 포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쿤둔은 “인내심을 가지고 소요가 진정되기를 기다려달라”는 요지의 답장을 보내면서 자신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야 함부로 포격할 수 없으리라는 짐작에서였다. 3월 17일 오후 박격포탄 두 발이 노부링카 경내 연못에 떨어졌을 때, 정부의 관료들은 티베트를 구한다는 사명감으로 쿤둔을 피신시킬 계획을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쿤둔은 애초에 인도 국경으로부터 97km 거리에 위치한 룬체종에 자리를 잡고 중국과 협상하려고 했으나, 3월 28일 중국의 저우언라이가 티베트 정부가 해체되었음을 선언했을 때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쿤둔은 중국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룬체종에서 정부수립식을 열어 티베트의 유일한 합법 정부를 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1959년 3월 31일 인도 땅을 밟음으로써 쿤둔의 망명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
|
고통이 계속되고 있지만 항상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는 지도자
망명생활은 고통스런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쿤둔에게 좁은 티베트를 벗어나 세상을 널리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 밖에서 쿤둔의 지도력은 빛났고 티베트인들의 신앙심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쿤둔은 세계를 편력하면서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고 자치를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다. 1987년 9월 21일 그는 미국 의사당에서 중국 정부에 ‘5개 평화안’을 제안했으나, 중국은 쿤둔의 제안을 ‘분리주의’라며 강경하게 비난했다. 티베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티베트 청년들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쿤둔은 다시 한번 비폭력을 강조했다. “우리가 폭력을 행사하면 국제사회도 티베트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이유는 우리의 비폭력 노선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의 많은 시민들이 쿤둔의 비폭력 노선을 지지했고 티베트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쿤둔은 1989년 10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상을 받았으며, 사실상 세계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많은 책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엄한 가치를 발견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을 논했으며, 가난과 환경파괴 등 전 인류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
|
1959년9월7일, 인도 총리관저에서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와 함께(왼쪽),
1989년12월10일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과 메달을 받아 들고(오른쪽)
보통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쿤둔은 늘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로 현대사에서 티베트인들과 함께 가장 억울한 운명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항상 관용과 자비의 정신을 베풀고 있다. 그의 지혜는 어쩌면 시련으로부터 나왔는지 모른다. 시련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훈련을 한 것이다. 중국은 시간이 갈수록 쿤둔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가르침은 계속될 것이다. 쿤둔이 그의 자서전을 마무리하면서 인용한 짧은 기도문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세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때까지 나도 살아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물리치리. |
|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달라이 라마는 많은 책을 썼고, 그에 관한 책도 많다. 이는 그의 생각과 삶이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좋은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어로도 많은 책이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위 글을 쓰는 참고자료로 삼은 대표적인 책 몇 권만 소개하기로 한다. <달라이 라마 자서전>(심재룡 옮김, 정신세계사)은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
|
| |
하는 책이다. 그는 수행승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성적으로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달라이 라마로서 전생에 닦은 공덕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인지 모른다. 이 자서전에서도 보이듯이 그는 확실히 낯선 사람에 대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국가원수이면서도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책 속에는 가장 슬픈 사연이 담겨 있지만, 슬픔 속에 빠지지 않는 굳건하고도 유연한 정신이 함께 담겨 있다. 메리 크레이그가 쓴 <쿤둔>(김충현 옮김, 인북스)은 달라이 라마 평전 중에서도 특이하다. 이 책 속에는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중에 달라이 라마가 탄생하면, 그의 가족들 또한 왕족이 된다. 멸망한 왕조의 왕족이 겪는 슬픔을 직접 겪어본 우리는 그 슬픔의 깊이를 짐작하고 있다. 나라가 망하면서 달라이 라마와 그의 가족들은 한 길을 갈 수 없었다. 결코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아버지, 한없이 강하고도 넓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펼치는 장대한 드라마에 귀기울여볼 일이다. 클로드 B. 르방송이 쓴 <달라이 라마 평전>(박웅희 옮김, 바움)도 주목을 요한다.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쓴 이 책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느낌을 특별하고도 생생하게 전해주는 책이다. 평전이면서도 저자가 여행을 통해 실제로 만난 달라이 라마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다소 문학적인 표현이 많다. “그 박자에 맞춰 수세기에 걸친 순례로 윤이 난 돌들 위로 발길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눈에 익은 14대 달라이 라마의 실루엣이 계단머리에 나타났다.” 이를테면 이 책은 이미지가 풍부한 평전이다. 하인리히 하러의 <티베트에서의 7년>(수문출판사, 1989). 달라이 라마와 오스트리아 사람인 하인리히 하러와의 만남은 특별했다. 하러는 달라이 라마가 만난 최초의 금발머리 서양인이었다. 금발이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달라이 라마는 하러에게 ‘곱세’란 별명을 붙였는데, 곱세는 티베트어로 ‘노랑머리’라는 뜻이다. 산악인이었던 하러는 영국군의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동료인 피터 아우프 슈나이더와 함께 탈출하여 티베트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러는 호기심 많은 달라이 라마에게 바깥 세상의 소식을 들려주곤 했다. 유럽 사회와 전쟁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 달라이 라마에게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었다. 하러는 달라이 라마의 뜻에 따라 영화관을 만들기도 했다. 외국인이 본 티베트의 생활상과 소년 달라이 라마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책이다. |
|
<오늘의 세계인물> 관련글 이어보기ㅣ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에 이어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인디라 간디
비폭력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 글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발행일 2009.03.31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