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강인춘 | ||
이 사건이 있기 직전이던 1940년 4월 감리교신학교에는 신입생으로 예과생 19명과 신설된 전수과생 13명 모두 32명을 받아들여 희망에 찬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당시 변홍규 교장, 정일형 학감, 교수에 빌링스(B. W. Billings, 邊永瑞) 문장욱 김창준 김종만 노리스(J. M. Norris, 羅理壽), 강사에 김호직 류형기 정달빈 등이 수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전단사건이 발생되었고, 사건이 발생하자 얼마 후 신두영(申斗永) 부장의 지휘로 밤 10시경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대가 남자 기숙사를 기습하여 방마다 수색 끝에 10여 명을 구속하였다. 변홍규 교장도 구속, 정일형 학감도 소환 당하였고 어수선한 가운데 6월 중순에 여름방학에 들어갔고 <신학세계>도 8월에 25권 3·4합호로 폐간되었다.
이들에 대한 일제의 구속이유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일본학정을 반대하는 격문을 발포하였다는 것이다. 구속된 학생은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일본의 압제는 노골화하여 드디어 1940년 10월 2일 오후 3시 신학교 안에서 이사회를 열고 ‘신학교는 무기로 임시 휴교함’을 결의하였다. 이때 이동일 학생은 단상에 올라 ‘감리교신학교 만세’ 3창을 부르고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기독백과)
정형권 hkjung@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