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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들이 제각기 돌아간다면 여래선이라는 말을 안했을 겁니다. 외부의 모든 것은 개별적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면도 개별적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구요. 그래서 예전에 선지식들께서는 제자들이 “나는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으니 토굴을 짓고 산으로 올라가야겠습니다.” 하니까 “너 그러면 땅도 짚지 말고 옷도 입지 말고 먹지도 말고 꽃을 보고 좋아하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도록 해라. 토굴을 짓더라도 나무를 꺾어다가 지어야 하는데 왜 남의 것을 갖다가 짓고 공부하려고 그러느냐”는 그런 말씀에 홀연히 깨우쳐서 산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50% 말이 좋고 이론이 좋고 학식이 풍부하다 해도 그것은 반쪽입니다. 안으로 꾸겨 넣을 것은 넣고 바깥으로 내 놓을 것은 내놓고 중용을 할 수 있게끔 해야지 50%만 안다면 보이지 않는 데의 50%가 걸립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타기만 하고 간다면 그 무슨 재밉니까? 그리고 무슨 삶의 보람이 있겠습니까. 차를 타는 것은 내리려고 타는 것이고 내리는 것은 타려고 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유통되어 걸림 없이 차를 타고 내릴 수 있어야지 정상적인 삶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타는 거는 알면서 내리는 건 그렇게 안되는 게 많습니까. 어떤 분들은 얼마쯤 가다 보니까 되는 건 되는데 왜 안되는 게 있습니까? 이러거든요. 그게 정상이죠. 안되는 건 되기 위해서 안되는 것이니 그것을 재료 삼아야지 그걸 업으로 삼고 병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항상 병고 애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생각이 그러하니까 살아오던 습성, 남한테 들은 습성, 습성에 의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땐 한생각이면 그냥 다 벗고 털고 일어나겠건만 깐죽깐죽 붙들고 늘어집니다. 왜 자기 걸어온 발자취를 붙들고 늘어집니까? 그냥 걸어왔으면 걸어올 뿐이지 왜 걸어온 자취를 쥐고 늘어지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하루살이의 턱 놓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삼천 년 전을 바로 일 초로 축소할 수도 있고 일 초를 삼천 년으로 늘릴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모두가 그러하니 우리는 이 껍데기를 벗기 전에 자생 중생들을 화하게 해서, 즉 말하자면 응신이 돼서 뭇 중생들의 마음을 통해서 응해 주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과거에는 부처님께서 수 없는 좋은 말씀을 해놓으셨지만 그 때 용어로 모두 방편으로 말씀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지금 현대 사람들은 그 용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에 감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불교가 발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감지하고 감응이 될 수 있게끔 현실의 용어로 바꿔 놓을 수만 있다면 불교가 얼마나 발전하고 좋겠습니까? 생명의 근본이 불(佛)이기 때문에 풀 한 포기의 생명도 곤충 한 마리의 생명도 전부 불입니다. 불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불이며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말과 말로 통하고 통신으로 통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교입니다. 그래서 불교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과학자든지 의학자든지 공업가든지 정치가든지 막론해 놓고 이 도리를 완전히 습득한다면 심성 천체 물리학이 되고 심성 의학이 되고 심성 천문학이 되고 심성 철학이 되며,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까닭에 하나도 가질 게 없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평등공법입니다. 직접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평등공법이라 하는 것은 그대로 마음이 연결이 돼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그 뜻을 말하고, 한 찰나에 만났다 한 찰나에 떨어지고 하는 그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한 찰나에 붙으면 바로 부가 되고 한 찰나에 떨어지면 자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죠.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느니라. 종정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고 말씀하신 자체가 법을 말하는 겁니다. 법이 공한 것을 말할 때는 바로 둘이 아닌 까닭에 법은 법대로 있고 행은 행대로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찰나에 붙었다 찰나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습니까? “여보” 하고 부르면 “그래” 하면서 대답을 하고 한 찰나에 소켓트가 꽉 끼워지니까 둘이 아니게 불이 일어나서 마음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다가 소켓트가 싹 빠져서 떨어지면 나는 나, 너는 너로 떨어졌다가, 또 아버지 하고 소켓트가 붙으면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돼서 “아버지 뭐 어쩌구…” 이러고 한데 붙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끝없이 돌아갑니다,
세상만사가. 그런데 어떻게 나 혼자 개별적으로 내가 설법을 했다, 내가 잘 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 와서 좋아지고 깨우치고 병도 낫는 등 가지각색으로 성취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낫게 해주고 내가 가르쳐 줘서 여러분이 깨우쳤다고 말 안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여러분이 있으며, 내 몸도 공해서 내가 혼자 한 게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여러분도 그 뜻을 잘 아시고 그저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고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 자유인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세세생생에 남의 모든 마음을 집어넣어서 굴려도 손색이 없고 굴려서 내보내도 손색이 없는 그런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경에 이르고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다스리라고 믿고 질문 있는 분은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스님, 오늘도 마음의 양식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행 중에 의문 나는 점이 있어서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스님께서 관(觀)의 정의를, 안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하여 주인공을 믿는 것이 아니고, 되고 안되고를 모두 맡겨 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뜻이 되고, 산은 산같이 살라 하고 꽃은 꽃같이 살라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뜻을 세간법으로 정치에 비유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정치란 모든 국민의 뜻을 종합해서 민의에 따라 해야지 억지로 하면 언젠가는 불만이 터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불만을 갖고 있는 민중에 의해서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민의 뜻을 읽는 것이 관이라고 하면 그 뜻을 하나로 모아서 인연 따라 행하는 것이 무심으로 업식에 따르지 않는 좌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단이 생기는 것은, 스님께서 안될 때는 너는 할 수 있다 하고 마음을 내라고 하시고 간혹 저도 그렇게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마음을 돌리다 보면 무심관에서 일보 후퇴하는 일심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되며, 억지로 익은 감과 저절로 익은 감의 맛이 다르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생기는 것 같아 수행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스님: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겠죠. 하나는 과거의 부와 현재의 자가 상봉을 해서 둘로 보지 않고 관찰을 하는 것과 무지에서 관찰하는 게 다릅니다. 무지에서 관찰하는 것은 겉만 보고 나쁘다 좋다 하는 거고, 부와 자가 상봉한 사람이 관찰하는 것은 둘로 보지 않는 까닭에 안팎이 동시에 관찰이 됩니다. 여러분은 더 잘 아시겠죠? 그러니 둘 아닌 관찰이라면 한생각했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순간, 바로 손 없는 손이, 눈 없는 눈이, 귀 없는 귀가 찰나에 왕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법으로 행해진다, 즉 말하자면 한 부처님의 마음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거죠.
질문자2: 스님 말씀 들으면 늘 그 말씀이지만 이상하게도 들을 때마다 항상 새롭게 가슴에 와 닿고 해서 참으로 여일하신 설법에 진리는 들어도 들어도 새 맛이 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저는 ‘한마음 주인공’하면 일체 제불이 그 안에 들어 있고 스님도 둘이 아니게 들어 있으니 내가 넘지 못할 산이 없고 건너지 못할 강이 없다고 참으로 당당한 마음으로 이젠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보니 제 주위에 방금 질문하신 것처럼 참으로 어렵고 힘든 그런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속속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같은 학과에서 공부를 하는 친구도 끝까지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부모님의 병환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둘지 모르고, 잘 아는 형님도 그간 아주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나이 오십이 되기 시작하니까 여기 저기 숨어 있던 병들이 나와서 아주 어렵게 지낸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럴 때 제가 배운 바대로 분명히 말씀도 드리고 책도 갖다 드리고 그렇게 했지만 그러던 중에 문득 들었던 생각이, 참으로 나의 마음에 원력이 충만해 있고 내가 아주 참 사람이 됐다면 한 마디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그냥 제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막 치밀어 올라서 참으로 제 자신이 안타깝게 여겨지고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주인공이지 하고 믿고 물러나지 않는 마음은 가졌지만 그런 마음이 들어서 질문은 아니지만 말씀 드렸습니다.
스님: 말 잘 했어요. 내가 아까 얘기했죠. 우주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고 세상만사는 내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고요. 마음자리에다 이 사람 일도 저 사람 일도 맡겨 놓으세요. 또 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그 사람이 소켓트가 바로 꽂혔는지 안 꽂혔는지 알아야 되니 관하는 법을 듣게 하고 책과 월간지도 보게 갖다 주고 맡겨 놓으면 스스로서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생각으로 이것은 멀다 가깝다고 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죠. 그게 어디 둘인가요? 공한 공법으로 생각을 한다면 둘이 아닙니다. 둘 아니게 관찰할 수 있는 다스림의 법이라면 그래도 어지간히 맞아 들어갈 텐데 왜 그래요? 잘 해봐요.
질문자3: 저는 불법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세상을 살았었습니다. 남편이 다리뼈 속에 종양이 생겨서 광주 신도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을 처음 뵙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뼈 속에 종양이 생겨서 무릎 위 9㎝ 아래 9㎝를 잘라내고 관절을 다 들어내고 인공 뼈와 인공 관절로 수술해야 된다고 했었습니다. 남편이 이번 광주 대법회 때 자기 공부해온 과정을 다 말씀 드렸는데 저는 저대로 공부해온 과정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수술이 한번으로 끝나면 좋은데 인공 관절이기 때문에 자꾸 쓰다 보면 닳아져서 십년에 한번씩 재수술을 해줘야 한다고 그래서 도저히 그 수술을 할 수 없었기에 스님께 매달렸습니다. 저는 무조건 스님께 매달렸어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항상 “당신 주인공이 있으니 당신 주인공에게 맡겨 놓으세요.”라고 하셨어요.
저는 처음에 주인공이 무엇인지 너무 몰라 안타깝고 답답한데 스님께서는 뵐 때마다 주인공에 맡기고 관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오늘처럼 셋째 주 법회 법문을 하시면서 “처음 오시는 분들은 제가 하는 줄 알고 저를 믿고 저에게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 믿음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하셨어요.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사하든지 정말 스님만 믿고 스님께 매달렸어요. 그렇게 공부해가다가 나중에는 제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경계를 거기에다 다 놓고 가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안양을 열심히 다녔어요. 그때는 광주지원이 없었거든요.
다닌 지 한 일년쯤 되니까 무릎 바로 밑 큰 뼈에 X-Ray로 보면 동그랗게 종양이 생겨서 썩어버린 그 부분이 저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의 혹이 밖으로 튀어 나오기 시작했어요. 조그맣게. 그래서 “스님, 무슨 혹 같은 게 밖으로 튀어 나옵니다.”고 말씀드렸더니 “놔둬. 그건 안에 있는 나쁜 것이 밖으로 나오느라고 그래.” 그래서 “예,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또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 이 년쯤 되니까 그 혹이 밖으로 완전히 툭 튀어나왔어요. 그렇게 되니까 목발이랑 지팡이를 다 버렸습니다. 아프지 않으니까요. 그 목발 짚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뒤에서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는데 다 버리면서 산이고 어디고 거뜬히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남편이 어제 박사 학위 마지막 종심 잘 받았답니다. 스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드릴 것이 너무 많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친정 동생 네 명이 이상하게 하나같이 아들들이 없어서 걱정을 했었는데 이 공부하면서 스님께 말씀드리고 진실히 믿었더니 모두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을 낳고 또 임신 중이기도 합니다. 큰 남동생과 둘째 남동생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아들을 낳았고, 셋째 남동생은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임신만 하면 유산되더니 이번에는 병원에서도 아주 건강하게 자리를 잘 잡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스님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스님: 자기만이 자기를 살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딴 나무에 기대고 딴 뿌리에 의지하려고 하니까 기복이 되는 거죠. 공덕이 없는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누구나가 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하게 자기 뿌리를 믿고 모든 경계를 맡겨 놓아야 합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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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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