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력來歷 / 이선화 (2025. 01.)
지상으로부터 치뻗은 사다리가 베란다 난간에 걸쳐졌다. 두 사람이 나를 사다리차 적재함으로 옮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앞이 아찔하고 다리가 후들댄다. 자칫하여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라도 하면 그길로 내 생은 끝이다. 천만다행으로 무사히 발을 땅에 디뎠다. 한방에 기거했던 낡은 문갑이 하얗게 질려 동병상련의 눈빛을 보낸다. 덩치 큰 이불장은 해체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우리는 두 대의 트럭에 나뉘어 실렸다.
나는 이래 봬도 번듯한 가문의 자손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붙박이장에 밀려나고 있으나 한때 통영장欌은 여인들이 하나쯤 갖고 싶어하던 세간살이였다. 지금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련한 신세지만 왕년에는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던 몸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장이 아니라 이층 농이다. 몸통은 위층과 아래층이 분리되고 다리에 해당하는 마대가 몸체를 지탱한다. 나뭇결의 곡선이 드러난 적갈색 피부에 백동 장석으로 빼곡히 치장했다. 장석은 보기에 좋을 뿐 아니라 몸의 뒤틀림이나 변형을 막아준다. 상하층 여닫이문에 약과 모양 자물쇠를 달고 같은 무늬의 앞바탕과 경첩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아래쪽에 물고기를 매단 나비를 장식하고 수복강녕壽福康寧 네 글자를 좌우 하나씩 배치했다. 여백에 꽃과 새 문양을 대칭이 되게 꾸미고 모서리에 귀잡이를 붙였다. 누가 봐도 세련미와 기품이 넘친다. 녹의홍상에 활옷 입고 족두리와 드림댕기 드리운 신부와 어울릴 만한 자태라 하겠다.
내 안주인은 혼인할 당시 근동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맏딸이었다. 그녀 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갖은 고초 끝에 장사눈이 밝았던 덕인지 자수성가했다. 의지가지없었던 그는 딸을 가문 좋은 집안에 여의고 싶었다. 바람대로 결혼이 성사되고 혼례를 치르는 날에는 떠들썩하게 동네잔치를 벌였다. 나는 품안에 사시사철 입을 옷이며 비단에다 삼베 모시 등속을 가득 채우고 신행길을 따랐다. 몸에 새긴 장석 문양의 의미대로 그녀가 살아갈 날들이 순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름날처럼 변화무쌍한 게 우리네 생 아니던가. 법도를 운운하는 시집살이는 자유분방했던 그녀를 옭아맸고 장사치 딸이라는 말은 귓가를 맴돌다 가슴속에 박혔다. 대식구를 챙기느라 하루 내내 종종거리고 넉넉잖은 시집 살림에 식구들 배를 채우기 위해 자신은 뒷전이었다. 한편 고달팠던 시집살이 후 분가하여 살림하는 재미를 알게 되고 알토란 같은 자식을 품는 희열도 맛보았다.
나 또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 웃음소리 끝에 묻어나는 따스함으로 봄날 같던 시절이 있었나 하면 집 없는 설움 당하며 자주 이사를 다니는 통에 몸이 찍히고 장석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참사를 겪기도 했다. 삶은 걸림돌 하나를 겨우 넘고 나면 저만치 또 다른 방해물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 경주와 닮았다. 가로놓인 벽을 넘기 위해 긁히고 찢기는 일은 대수였다. 반세기를 동고동락하며 낯빛만 봐도 그녀 기분과 생각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백동 장석을 닦는다. 바짝바짝 타는 속을 다스리고 안으로 삼킨 말들이 울컥 올라오지 않도록 조그만 틈을 내는 중이다.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 물고기 비늘이 번뜩이고 함초롬히 젖은 꽃잎은 향기를 머금는다. 팔과 어깨가 묵직하나 마음은 가볍다. 그녀는 장석만 닦은 게 아니었다. 장석 닦기가 끝나면 농문을 열어 애장품을 꺼낸다. 사주단자가 들어 있는 함과 색색깔의 보퉁이들이다. 딱히 정리할 것도 없건만 물건을 끄집어내어 이리저리 다듬고 다시 보자기를 여민다.
어느 날 그녀가 보퉁이를 풀었다. 오래도록 간직했던 물품을 간추리고 몇 안 되는 패물을 주머니 네 개에 나눠 넣었다. 표정과 동작에 비장함과 결기가 내비친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병원에 간다던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나는 각박한 삶에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간직해 둔 보물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실현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꿈이나 철없던 순수함, 그 시간을 꺼내 보며 깊숙이 묻어 둔 본연의 자신과 마주했으리라. 나를 탐탐히 애만지던 손길이 사무치게 그립다.
바깥주인은 나한테 마음자리를 내주지 못했다. 그녀에게 무심했던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원망의 자리에 연민이 들앉았다. 호기롭던 걸음걸이가 둔중해지면서 나와 함께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적막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그녀의 부재를 쉼 없이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터. 집안 곳곳에 외로움이 내려앉았다. 자식들이 겨끔내기로 음식을 해다 나르고 살림살이를 살폈다. 하지만 안주인의 빈자리를 어찌 메울 수 있으랴.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상대를 할퀴는 바람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비틀거리는 삶을 붙들어 준 장석이 아니었을까. 벚꽃잎 훌훌 날리던 날, 목욕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던 그가 몇 달째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떠나고 나는 남겨졌다.
사람의 훈김이 돌지 않는 내 몸속은 곪아 가고 있다. 곰팡이가 꽃을 피우더니 차츰 영역을 넓혀간다. 백동 장석은 무상한 세월에 제 빛을 내주고 누런 땟국을 얹었다. 이대로 방치되면 무엇도 담을 수 없는 몸뚱이로 버림받을 수 있겠다. 어쩌다 운이 좋아 꽃향기, 저녁놀, 빗방울 소리 같은 무용하기에 더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던 어느 순실한 아낙네와 비슷한 주인을 만난다면 모를까.
폐기물로 내쳐질 두려움에 가슴이 덜컹댄다. 이런 마음을 알 길 없는 차는 속도를 올린다. 지난날들이 스쳐가는 풍경을 따라 뒤로 물러난다. 그녀도 나도 꽃이었던 시절에 생각이 가닿자 생의 덧없음에 마음이 허허롭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어딘가에 멈춰 섰다. 운전하던 양반이 나를 손수레에 싣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 후 철문이 열리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돌돌거리는 소리를 따라간다. 그때다. 낯익은 얼굴이 다가서며 나를 반긴다. 그녀 막내딸이다. 그제야 안도의 긴 숨을 토해낸다.
다시 새로운 길로 걸음을 내딛고자 한다. 내 안에 이미 담겨 있는 것들, 그녀의 온기와 숨결과 기억이 막내를 보듬어 줄 수 있을 터이다. 묵은내 나는 퇴물이 아니라 은근하고 고담한 멋이 배어나는 예술품으로 거듭날 희망을 품는다. 당찬 꿈이 흐뭇했는지 막내 얼굴 위로 그녀가 빙긋이 미소 짓고 있다.
첫댓글 이선화 선생님, '통영장'이 눈 앞에 선합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일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선화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