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될 때 미국은 러시아 경제를 1991년 소련 해체 당시의 백지상태로 돌리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22년 3월 26일 대러 경제제재를 발표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향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지 2년 반도 더 지난 지금 러시아 경제는 미국의 예측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러시아 경제는 서방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2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군수산업 중심지인 툴라에서 연설을 하며 “서방은 러시아의 쇠퇴·실패·붕괴를 예측했지만, 우리는 성장했다”라며 “맹렬한 제재를 견뎌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더 커졌다”라고 자평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은행 자료를 제시했는데 2022년 기준 러시아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5조 5천억 달러로 독일을 앞질러 유럽 1위, 세계 5위가 되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러시아 경제성장률도 주요 7개국(G7)보다 높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정부 지출이 늘면서 물가상승률이 높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의 현금 수입이 그보다 더 늘어 구매력이 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 최대 상업 은행 스베르방크에 따르면 지난 6월 소비자 지출이 전년 동기 대비 20%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실업률도 사상 최저에 근접합니다.
블룸버그 통신은 2023년 11월 16일 “러시아 경제의 핵심 부문들은 제재에 적응했거나 제재 타격으로부터 완벽하게 회복됐다. 서방 국가들의 예상보다 훨씬 회복력을 보였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성원용 인천대 동북아통상학부 교수는 올해 2월 8일 「대러 경제 제재의 역설」에서 “모스크바의 전쟁 수행 능력을 무력화하고 국제 사회의 반러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서구의 제재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그 효과는 의심스럽다”라며 “이변이 없는 한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에 굴복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답답해진 미국은 6월 들어 러시아 제재 대상과 거래하는 외국 금융기관 등을 제재하는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국제금융센터는 7월 30일 보고서를 통해 2차 제재로도 러시아 경제에 큰 타격을 주긴 어렵고 오히려 반미 국가의 연대를 강화해 제재 회피의 축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블룸버그 통신 정치경제 전문 선임기자인 살레하 모신은 미국의 대러 제재가 달러제국 약화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저서 『달러 전쟁』(위즈덤하우스, 2024)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은 자기가 보유한 모든 경제 무기를 과시했지만 세계는 미국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칫하면 미국의 경제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어 달러의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달러가 패권을 잃으면 미국은 과거 국가 재정을 잘못 운영해 무너진 초강대국과 마찬가지로 붕괴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문제는 미국의 주관주의
미국의 예측이 어긋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봅니다. 주관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자기가 초강대국이라서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러시아는 ‘나쁜 나라’이므로 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한 달 전에 대러시아 제재안을 완성하고 G7, 유럽연합(EU), 호주, 싱가포르, 한국, 대만 등과 촘촘한 차단막을 미리 짜놓았다고 합니다. 단기적으론 러시아의 전쟁 재원을 고갈시키는 동시에 반도체 등 첨단기술을 차단해 군사력을 약화하겠다는 목표였고, 장기적으론 러시아 경제의 허리를 끊어 전쟁 전보다 규모가 30~50% 쪼그라들도록 설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자기들만 열심히 제재를 준비했다고 생각했지 러시아가 제재에 대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이 대러 제재를 가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여기에 미리 대비를 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안톤 실루아노프 재무부장관과 엘비라 나비울리나 중앙은행 총재는 국가 주도로 은행 시스템을 강화하고, 추가 지출을 억제하며 공격적으로 대응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재무부장관과 중앙은행 총재의 발 빠른 대처가 제재의 충격을 완화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대러 제재에 대비를 철저히 해뒀던 것입니다.
또 전 세계가 미국 편이 되어 대러 제재에 동참할 거로 여긴 것도 오판이었습니다.
미국의 생각과 달리 세계는 미국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으며 대다수의 나라가 더 이상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유럽과 캐나다, 한국, 일본, 대만, 호주, 뉴질랜드 등 46개국만 제재에 동참했을 뿐 나머지 대다수 나라들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제재에 동참한 나라들도 대부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최소한으로 형식적인 제재만 할 뿐 가능한 러시아와의 교역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국 내 연구소인 국제위기그룹(ICG)의 리처드 고완(Richard Gowan) 유엔 국장은 이런 현상을 두고 “코로나19 백신을 독식한 선진국의 이기적 행동을 지켜본 저개발국들 사이에서 ‘더 이상 서구세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20세기 비동맹운동과 비슷한 흐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가 하나의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미국과 유럽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무시해 온 역사를 생각하면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그전에는 미국, 유럽이 무서워서 눈치를 봤다면 지금은 미국, 유럽의 힘이 약해진 게 눈에 띄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나라들은 중립을 넘어 러시아와 더욱 밀착했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 중국, 인도, 튀르키예, 브라질, 남아공 등입니다. 이들 나라는 대러 제재에 동참한 나라를 대체해 러시아와 교역량을 늘렸습니다. 나아가 대러 제재에 동참한 나라와 러시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해 이익을 얻고 대러 제재도 무력화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브릭스 때문에 러시아가 버틴다며 브릭스 탓을 합니다. 자기가 오판했다는 건 인정하기 싫은가 봅니다.
물론 브릭스가 러시아 경제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요인은 러시아 자체에 있습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러시아는 경제 붕괴에 직면했습니다. 2000년 취임한 푸틴 대통령은 무너진 러시아 경제를 되살리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먼저 석유·가스를 국유화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관료·재벌 부패 카르텔을 척결했습니다. 러시아는 세계 1위 산유국으로 전체 수출의 70%를 석유·가스가 차지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석유·가스 국유화는 러시아 경제 회생의 핵심 수단이 되었습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석유·가스를 봉쇄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려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러시아 석유·가스가 워낙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기에 미국의 봉쇄는 실패했습니다.
또 푸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식량자급률이 50%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듣고 얼굴이 창백해져서 식량안보 증진을 목표로 농업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이후 러시아는 세계 1위 보리·귀리·사탕무 생산, 세계 3위 밀·호밀 생산국이 되었습니다. 또 밀 수출 세계 1위국이기도 합니다. 높은 식량자급률은 러시아가 경제 봉쇄를 이겨내게 하는 버팀목입니다.
소련 시절부터 유명했던 중공업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막대한 물량의 무기를 쏟아붓게 하는 동력입니다. 러시아는 단독으로 나토와 미국의 동맹국이 제공한 무기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무기를 생산하는 괴물 같은 생산력을 과시했습니다.
경제자립도를 높인 덕에 러시아의 무역의존도는 2022년 기준 38.56%로 세계 145위입니다. 이런 점이 대러 제재에도 러시아가 버틸 수 있게 합니다. 이러니 미국이 브릭스 탓을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2024년 2월 29일 러시아 의회 국정 연설에서 향후 6년의 7대 경제 성장 노선으로 삶의 질 향상, 국민 잠재력 실현, 자립경제 구축, 국제 경쟁력 확보, 자연환경 개선, 지역 발전, 교통망 개선 등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자립경제 구축과 관련해 2030년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입 비중을 17%로 낮추고 최소 100개의 과학기술 단지를 추가로 조성해 기술 자립을 이루겠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미국의 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흔들릴 일은 없어 보입니다.
사람이 욕심에 눈이 멀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국가도 과욕을 부리면 주관주의에 빠져 자기 생각대로 상대가 움직이며 자신이 이긴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패권주의와 주관주의는 함께 다닙니다. 미국은 패권에 집착하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