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좋아하는 어떠한 것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참 흥미있는 일입니다.
락을 좋아하시는 여러분께 도움이 되고자 제가 직접 작성한 글을 올립니다.
음악을 하시는 분들께는 많은 공부가 될꺼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곧바로 지적해주십시오.
기타의 탄생
락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설명하려다보니, 먼저 기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기타는 처음에 누가 만들었을까요?
학자들은 기타의 기원을 중앙 아시아로 보고 있습니다만, 현재 발견된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점토로 보고 있습니다. 기타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그려진 이 점토가 기원전 2000년 ~ 15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최소 4000~5000년간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뜻입니다.
▲ 아주 오래전 악기지만 바디와 넥이 있으며 왼손으로 줄을 잡고
오른손으로 탄현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악기들이 고대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 등지에서도 등장하게 되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에서 이 악기를 "키타라(Kithara)"라고 불렀으니, '기타'란 말의 어원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하지만 키타라는 현대 기타의 모양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 후 이 악기들은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라비아에서는 류트(Lute)로 불리는 하나의 완전한 악기로 발전했으며, 그것을 711년 사라센의 침공과 더불어 무어인(Moors)들이 스페인에 들여옵니다. 이것을 기타라 모리스카(Guitarra Morisca)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스페인에도 이미 키타라가 발전한 형태의 악기가 존재하고 있었죠. 이것은 기타라 라티나(Guitarra Latina)였습니다. 두 악기 모두 많은 영향을 미쳤겟지만, 기타라 라티나가 현대 기타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 기타라 라티나와 기타라 모리스카를 연주하는 모습
15세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등장한 기테른(Gittern)이라고 불리는 악기는, 4개의 겹줄 형태로써, 류트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16세기에는 한줄이 추가되 5개 겹줄이 되었습니다. 겹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두개의 줄을 겹쳐놓은 것입니다. 당시에는 음량을 더 크게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비엘라(Vihuela)라는 중요한 악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류트와 비슷한 튜닝을 사용하지만 현대 시대의 기타와 비슷한 모양의 바디와 6개의 겹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타라 라티나가 비엘라가 되고 비엘라가 현대적인 기타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 비엘라를 연주하는 16세기 천사의 모습.
현대 시대의 천사는 어떤 악기를 연주할까요?
▲ 당시 작곡가들은 비엘라 악보를 채보할때 타브악보를 사용했습니다.
이 악보는 1554년 제작되었으며, 빨간색 글씨는 보컬 라인입니다.)
(※ 주의 :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계시는 기타는 당시 비엘라와는 튜닝이 다르므로 연주하려하지 마세요!)
그 후 기타는 드디어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유명한 음악가들이 사용하게 되었고 바로크 시대에는 아름다운 기타들도 제작되었습니다.
기타의 전성시대
18세기들어 기타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류트 역시 발전했으나 류트는 점점 더 복잡해져 현이 24개가 넘어가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기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기타는 드디어 6줄 단현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클래식 기타의 모습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당시엔 기타의 연주 기법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ga) 같은 사람들이 기타 연주 테크닉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다양한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안토니오 토레스(Antonio Torres Jurado)는 기타 제작에 대해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이던 기타의 표준을 완성시켰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제작자들이 토레스의 표준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6현 기타는 점점 널리 보급되어 미국 대륙에도 건너가게 됩니다. 산업혁명으로 운송수단이 발달해 기타 음악이 더 많은 곳에서 알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온 흑인들
그렇다면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보겠습니다. 1619년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흑인들이 미국 남부에 들어오게 됩니다. 강제로 노예로 팔려서 온 것이죠.
그들은 미국에 와서도 고향에서 부르던 전통 음악을 여전히 불렀는데, 이것은 백인 주인들에게도 권장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노래를 부르는것이 생산성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힘들게 일했지만, 노래를 통해 그나마 고통을 덜었습니다. 이것을 노동요라고 합니다.
▲ 반조 악기에 맞춰 춤을 추는 흑인 노예들
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흑인들은 백인들의 문화인 기독교 찬송가, 그리고 유럽 전통음악과 친숙해집니다. 그러면서 탄생한것이 흑인 영가(Negro Spiritual)입니다. 기존 찬송가를 아프리카의 방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미국 내 교회에서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심했습니다. 분리주의자들은 차별에 대항해 아예 흑인교회를 따로 분리시키자는 운동을 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최초의 흑인 집사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은 1801년 흑인들로부터 사랑 받던 찬송가를 실은 책을 발간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그 운동 이후로 흑인 영가들의 출연을 고무시킨것이지, 흑인 영가를 남부의 노예지대에서 일하던 흑인들이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간에 흑인 영가가 흑인들의 전통음악에서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9세기의 미국
19세기 초에는 미국에서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이라는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가지 않던 백인들을 다시 교회로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흑인들은 자신들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영적인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대각성운동으로 탄생한 천막 집회(Camp Meeting) 같은 경우에는 노동의 괴로움과 고립감을 완화시키고 노래에 뜨거운 감정과 가사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 당시의 천막 집회 분위기는 매우 감정적이고 열정적이었습니다.
천막 집회가 중요한 이유는, 19세기가 지나고 1916년에 리틀 원더 레코드(Little Wonder Records)에서 녹음한 <더 캠프 미팅 쥬빌리 The Camp Meeting Jubilee>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We`ve been rocking and rolling in your amrs / Rocking and rolling in your amrs / In the arms of Moses
많은 사람들은 로큰롤(rock`n roll)이란 단어의 기원을 이 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이때는 대학에서도 영가를 부르는 보컬 그룹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1870년대의 '피스크 주빌리 싱어즈(Fisk Jubilee Singers)'는 유럽 순회 공연을 했습니다.
▲ 피스크 주빌리 싱어즈는 현대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1877년에는 레옹 스코트가 만들었던 축음기를 에디슨이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당시엔 실린더형이었다가, 훗날 디스크형태로 발전합니다. 드디어 음악이란 것을 팔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는 흑인 아티스들이 드디어 미국 문화의 주류에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랙타임(Ragtime)이라 부르는 리듬은 피아노를 이용해 기존 서양의 전통 리듬과는 달리 싱커페이션을 구사하였는데, 특히 스캇 조플린(Scott Joplin) 같은 사람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랙타임은 훗날 재즈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 영화 '스캇 조플린(1976)'에서의 랙타임 연주 모습
특히 이 시기는 '할렘 르네상스'로 불릴만큼 많은 미국의 흑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며 다양한 방면에 두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블루스와 힐빌리
1914년에는 W.C. 핸디(W.C. Handy)가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St.Louis Blues>를 발표합니다. '블루스의 아버지'로 호칭되는 그는 많은 블루스적인 흑인 음악들을 실제로 채보하고 정리하고 가사를 붙여 악보를 출판하는 일을 해낸 최초의 인물입니다.
▲ 조 터너(Joe Turner)가 연주하는 W.C. 핸디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블루스(blues)란 슬프고 침체된 감정과 영혼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조지 콜먼의 "Blue Devils, a farce in one act(1798)"라는 작품에서 나왔다고 보여집니다. 노예제도의 폐지로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차별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20년대 블루스는 미국의 대중음악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성 블루스 싱어도 등장합니다. 블루스 음반을 내는 많은 레코드사도 생겨납니다
1922년에 트릭시 스미스(Trixie Smith)는 <마이 맨 록스 미 (윗 원 스테디 롤) My Man Rocks Me (With One Steady Roll>을 발표합니다. Rock과 Roll이 블루스에도 등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컨트리 뮤직(Country Music)이 등장하는데, 1923년 피들린 존 카슨(Fiddlin` John Carson)은 "리틀 로그 캐빈 인 더 레인(Little Log Cabin in the Lane)"을 통해 최초로 컨트리 뮤직을 녹음하는 인물이 됩니다. 당시엔 컨트리 음악이란 용어는 없었고, 힐빌리(Hillbilly)라고 불렀습니다.
힐빌리란 말 그대로 산골 지방의 사람들이란 말로 그만큼 도시가 아니라 시골 농부들에게서 불려졌던 노래였습니다. 그랬던것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블루스가 흑인 전통 음악에서 나왔다면, 힐빌리는 유럽의 전통 음악, 즉 백인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백인들에게는 블루스보다는 힐빌리를 받아들이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버논 달하트(Vernon Dalhart)는 전국적으로 이름있는 첫번째 힐빌리 싱어가 되었으나, 힐빌리 뮤직에 어쿠스틱 기타를 이용한 것은 1922년부터입니다.
따라서 현대적인 컨트리 음악을 정의하고 이름을 날린 진정한 첫번째 컨트리 스타는 지미 로저스(Jimmie Rodgers)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지미 로저스의 <웨이팅 포 어 트레인 Wating For A Train>
컨트리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컨트리 음악적 규범을 확립했다고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곡들을 히트시켰습니다.
델타 블루스와 로버트 존슨
실베스터 위버(Sylvester Weaver)는 레코딩에 처음으로 슬라이드 기타를 도입합니다. 기타 프렛위를 병목(bottle neck) 으로 옮겨가며 연주한 것입니다. 이는 곧 델타 블루스(Delta Blues)의 탄생이 됩니다.
델타 블루스는 그야말로 로큰롤 형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델타 블루스의 대가이자 "로큰롤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이 이때 등장합니다.
그는 27세에 여자친구에게 독살당하기 전까지 겨우 29곡을 남겼을뿐이었고, 30년이 지나서야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곡들은 당시엔 상상도 할 수 없던 곡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미국 예술가들에게서는 전례가 없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곡에 표현했고 심지어는 악마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그의 노래가 <크로스로드 블루스 Crossroad Blues>로써, 교차로에서 악마와 조우한다는 부두교의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파우스트적 모티프가 혼재한 것입니다.
▲ 로버트 존슨의 크로스로드 블루스
그렇다면 로큰롤이란 결국 흑백인종의 문화적 교차로에서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그는 격렬한 보컬과 신들린 기타연주 등 당시 대중음악에서는 그 전례가 없는 혁명적 전환점을 만듭니다.
그가 죽은 후 머디 워터스(Murdy Waters)는 그의 곡을 카피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등 수많은 블루스 연주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켜나갑니다.
따라서 로버트 존슨은 로큰롤을 탄생시킨 인물로써 현시대에 인정받고 있으며, 에릭 클랩튼과 키스 리처드(롤링스톤즈), 지미 페이지(레드제플린) 등 수많은 훌륭한 뮤지션들에게 칭송받게 됩니다.
에릭 클랩튼, "내가 정말 그 정신과 형식 그리고 테크닉을 배우고 싶었던 단 한사람의 기타리스트가 있다. 그 이름은 로버트 존슨이다."
로버트 존슨의 미발표곡이 등장하는 영화 [크로스로드 Crossroads]를 보시면 블루스에 대한 느낌을 많이 받으실 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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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 계속..
2부도 곧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