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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부지 중 살인에 대한 도피성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수20:1~9).”
가. 도피성을 만들어 놓음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살인을 한 자는 죽이게 되어 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이 대신 보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지중에,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살인을 했을 경우에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들어 놓았다. 모든 도로가 그곳으로 통하도록 해서 빨리 달려가서 그 성문에 이르게 되면 살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재판을 받을 때까지, 또 그 당시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서 보호를 받도록 해 놓았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암시되었다. 히브리서에 보면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6:18).”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피난처라는 말이 도피성의 개념이다. 그리고 로마서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는 말이 있는데 이 개념도 도피성 개념이다. 도피성 안에 있으면 누구도 그 사람을 정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죄라고 했다.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가장 큰 죄인데 그것은 알지 못해서 죽였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행3:7).”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자기들은 일부러 죽인 것이다. 예수를 미워하여 결심하고 죽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너희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렸을 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했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은 사람들은 예수를 안다고 해서 죽였지만 예수님은 저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분명히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그리스도 자신을 모르고 하나님 자신을 모르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간 것도 예수를 몰라서이다. 제사장이 예수를 죽인 것도 예수를 몰라서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내준 것도 예수를 몰라서이다. 전부 그리스도를 몰라서 그런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알지 못하면 예수를 죽일 사람이다. 내가 예수를 믿어도 어떤 경우에는 예수를 죽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못 믿어서 죽이는 것이 아니고 몰라서 죽이게 된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다. 몰라서 예수를 죽였다. 모르고 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자기를 알리려고 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한 백성인가? 또 얼마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인가? 그런데 그 하나님 자신을 모르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다. 하나님 자신을 모르니까 막상 그 아들이 왔을 때 죽였던 것이다.
2) 예수를 죽인 것도 부지중에 살인한 것으로 보심
결국 모르면 부지중 살인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도 부지중 살인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여지가 있고 구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정말로 알고 죽였다면 구원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모르고 죽였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죽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전부 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거부하고, 모르기 때문에 죽인다. 예수를 왜 죽였는가? 모르기 때문에 죽였다. 그래서 너희가 무슨 일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하니까, 무슨 악한 일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를 죽였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를 모르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탈출을 했다. 홍해 바다가 갈라져서 그들은 구원을 받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같이 먹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매일 인도를 받았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서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배반했다. 왜 그렇게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의 근원이 됨
여기서 모든 죄가 생겨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죄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와서는 결국 예수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아버지께로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버지께로 온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결국 자기들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그냥 믿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무조건 믿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결국은 자기 생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죄의 근원이 되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다. 거기에서 모든 거역도 나오고 불순종도 나오고 배반도 나오고 우상숭배도 나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신다.
나. 하나님 자신을 아들로 보여주심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들로 오셨다. 하나님이 인격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한 것인데 그 인격을 모르니까 결국 그 아들인 예수를 죽이게 되었다. 인격으로 오신 그분을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나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짓고 있는지 안 짓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지 거역하고 있는지 그것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알리려고 처음에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물 위로 걸어가기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게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저 사람은 참 놀라운 사람이다.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을 하느냐?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서는 저럴 수가 없다.”고 해서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1)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
그런데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 자신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요6:54).”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여줘야 했다. 그래도 보여줄 방법이 없었다. 뒤집어 놓고 보여줄 수도 없고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길로 가셨는데 그 길의 마지막이 십자가였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가지 않으면, 그 앞에 우리 자신도 꼭 그와 같이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른다. 우리도 그런 길로 가지 않으면 그분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이끌고,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십자가 앞으로 가게 되었다. 그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길로 제자들을 이끌기를 원했다. 결국 그분이 가신 길로 가야 그분을 알지 그분이 가신 길로 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모른다.
2) 한 운명 안에서 주님을 발견함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한 운명으로 발견될 때야만 그가 누구인줄 알게 되고 그가 누구인줄 알 때에만 참 인격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때만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알게 된다. 그분 자신이 이런 분이로구나 하고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야, 그런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구나.’ 하고 알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예수가 다시 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가 없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때도 인자로 오실 것이다. 역시 또 사람으로 오신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예수다.’ 하면 알아보겠는가? 그것이 믿어지겠는가? 모르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이천 년 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천 년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또 원위치하게 된다. 그가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고 있다. 예수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다 예수를 죽이는 자가 된다. 우리는 다 부지중 살인한 자가 된다. 우리는 부지중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고 부지중에 우리는 예수를 죽이고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 앞에 가면서 알게 되었다. 십자가 앞에 가서 우리 운명이 발견되어야 우리가 예수를 죽인 사람이었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려고 하면 따라갈 수 없는 내가 발견된다. 내가 예수를 믿을 때는 거부할 마음이 없었는데 그분이 가는 길을 가려고 하니 그분이 거부가 되었다. 그분이 가신 길을 가려고 할 때 내가 그분과 정반대되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거기서 나는 완전히 거역한 사람이고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성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성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 그리스도
부지중에 예수를 죽인 사람들을 위해서 도피성을 마련해 놓으셨다. 여섯 개의 성문이 열려졌다. 강 동편에 세 개, 강 서편에 세 개가 열려져 있다. 그래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졌다. 이제 지성소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졌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그것은 누구든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이 열려졌다는 말이다. 이것은 도피성이 열려졌다는 말과 같다. 도피성 문이 열려졌다.
도피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문을 굳게 잠그고 있다면 우리가 가도 못 들어간다. 굳게 잠겨 있던 지성소의 문이 예수의 육체로 말미암아서 열려지게 되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 요한복음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했다. 이것은 누가 하는 말인가? 제사장이 하는 말이다.
제사장이 결코 내쫓지 못하도록 했다. 보복할 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 살인자를 그들에게 내어주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내가 결코 내어주지 않겠다. 사탄이 와서 정죄하고 우리를 고소하고 고발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결코 내어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이니까 자기가 보호하겠다는 말이다. 이제 예수께로 가는 사람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보호하신다.
부지중 우리가 살인한 자인데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드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우리의 도피성이다. 부지중 살인한 자를 위한 도피성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고 예수를 모르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를 모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를 멸시하고 부지중에 그를 죽이는 자였다. 그런데 그에게로 피하는 사람은 영원히 보호를 받는다.
구약 안에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범죄하고 살인하면 물질적인 도피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신약 안에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 생명 안에, 그 운명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도피성이다. 그 자리는 나도 나를 정죄할 수가 없는 자리고, 하나님도 나를 정죄할 수 없는 자리고, 사탄도 나를 정죄할 수 없는 자리다.
이 우주 간에 아무도 정죄할 데가 없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자리는 참으로 신기한 자리다. 우리는 십자가에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고 사탄이 정죄를 하지 않아도 나 자신이 나를 정죄한다. 아무리 바깥에서 다 용서했고 의롭다 했어도 내가 나를 정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의 운명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정죄도 떠나가고 사탄의 정죄도 떠나가고 자기 자신의 정죄도 떠나간다. 모든 것이 다 떠나간다. 이것이 완전한 도피성이다.
구약의 도피성은 잠정적인 것이고 형상이고 상징이다. 그러나 신약의 도피성인 그리스도는 영원한 도피성이다. 이것은 완전한 도피성이고 온전한 도피성이다. 지금 우리의 도피성이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 안이 바로 도피성이다. 그 인격 안이, 그 운명 안이 바로 우리의 도피성이다. 영원한 도피성이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의 제사장 직분도 영원하다.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 안에서 보호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보호를 받는다.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도피성이다. 영원한 도피성이다. 누구도 거기는 따라오지 못한다. 사탄도 거기는 오지 못한다. 쫒아오려고 해도 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쫒아오려면 거기서 자기도 죽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불구덩이에 들어가 버렸다면 적이 아무리 쫒아오려고 해도 거기는 못 온다. 사탄이 그래서 십자가에는 못 온다. 아무도 거기는 올 수가 없다. 거기는 완전하고도 온전한 도피성이다.
라.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은 우리 가까이 있음
이 도피성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도망칠 수 있는 거리에 뒀다. 너무 멀리 두면 도망치다가 잡힐 것이다. 도망치다가 잡히면 죽는다.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도망치다가 도피성에 들어가기 전에 잡히면 죽여도 상관이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도망칠 만한 곳에 도피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도망칠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너무 먼 곳이 아니고 가까운 데 있다.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신30:14).” 하셨다.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 주님은 우리가 피하기에 멀리 계신 분이 아니고 아주 가깝게 계시는 분이다. 그의 운명은 멀리 있는 운명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바로 가까이 있는 운명이다.
만약 내가 부지중에 살인을 했는데 살인을 하자마자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 꼼짝없이 죽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것은 온전치 못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도피성은 온전한 도피성이다. 바로 그 자리에 우리의 도피성이 있다. 바로 그 운명은 우리 운명이므로 누구도 틈타지 못할 만큼 아주 가까운 자리에 도피성이 있다.
십자가의 운명은 멀리 있지 않다. 도피성도 마찬가지로 심히 가까운 곳에 있다. 절대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이 멀리 있지 않고 그리스도는 멀리 있지 않다. 알고 보면 십자가는 우리 운명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타고 날 때부터 부여받은 운명이다. 바로 우리가 선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고 내가 있는 자리가 바로 내 피난처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다.
우리가 예수께로 가는 길이 먼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깝다.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셨다. 우리는 부지중 살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도피성은 부지중 살인한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고 그 준비된 도피성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바로 우리 앞에 있다. 바로 우리의 운명이지 남의 운명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내가 당당해지려면 십자가를 내 운명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면 눈치 볼 것도 없고 온 세상이 뭐라 해도 그것이 상관이 없다. 너무나 당당하고 합당한 자리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자리로 오기를 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도피성이다. 신약적인 도피성이다. 구약의 도피성은 완전치 않지만 신약의 도피성은 완전한 것이다. 구약의 구원은 온전치 못하지만 신약의 구원은 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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