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두금(馬頭琴)은 몽골의 민속 현악기로써 두 개의 몸통 줄과 활의 현도 말총으로 만들어졌으며 해금과 비슷하나 대체로 중간 음과 저음이 나는 악기입니다. 모래바람 몰아치는 척박한 사막에서 목축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유목민들의 애환과 짐을 지고 끊임없이 사막을 걷는 낙타의 인내심을 연상케 하는 음색입니다. 구슬픈 여인의 구음 소리와 마두금 연주가 인간과 자연, 자연과 동물, 인간과 동물이 대화할 수 있게 하고 서로의 정서를 교감하게 하는 두 줄의 현악기입니다.
사막의 화물선으로 불리는 낙타는 초식동물이며 등에 혹이 두 개인 쌍봉낙타(雙峯駱駝)와 하나인 단봉낙타(單峰駱駝) 2종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사막도 모래로 된 사막과 돌조각으로 된 사막으로 구분되며 모래사막을 걷는 낙타는 단봉낙타요 돌조각 사막을 걷는 낙타는 쌍봉낙타라 합니다.
1860년도에 탐험가 <버크와 윌스>가 인도에서 낙타를 수입하여 대원들과 함께 여러 낙타로 그 엄청난 거리와 험난한 호주의 남북을 종단했다고 합니다.
호주에서 가축으로 길든 낙타의 수는 1922년 2만 2천여 마리에 달했으며 지금도 기르고는 있지만, 자동차가 낙타를 대신하면서 많은 낙타를 방목해주었다 합니다. 사막에서 잘 견디는 낙타라 건조하고 광활한 호주의 붉은 땅에서 낙타만큼 잘사는 동물도 없다 하며 3Km 밖에서 물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2014년 제주도로 들여온 24마리 낙타들은 단봉낙타요 호주에서 나고 자란 낙타이며 적응 기간을 거쳐 제주에서 짝짓기하여 2016년 4월에 7마리를 자연 분만했다고 합니다.
7마리 새끼 중에 제일 먼저 태어난 맏이 새끼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제일 크고 힘도 세며 너무 급하여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함부로 날뛰었습니다. 먹이를 주면 다른 사촌 형제들을 밀어내고 쫓으며 접근도 못 하게 하고 독차지하는가 하면 곧잘 울타리를 넘어 뛰어가 마구간말먹이까지 먹어치우는 먹성도 대단했습니다. 허구한 날 부수고 부딪치고 넘어지고 다치고 울부짖으며 울타리를 넘어 뛰쳐나가 사육사들이 애를 먹었으며 어떻게 길들여야 하는가가 연구대상이었다 합니다.
낙타가 난산하고 너무 고통스러웠던지 젓도 안주고 가까이 다가오면 발길질하며 새끼를 거부하는 어미 낙타를 마두금 연주로 달래주자 눈물을 흘리고 새끼를 품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예부터 몽골에서 마두금연주를 들려주면 낙타의 마음이 안정되고 행동이 온순해진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합니다. SBS TV(동물농장)에서도 제주도에서 마두금 악사들을 초청하여 어미 낙타와 천방지축 그 녀석을 작은 우리안에 데려왔습니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몽골 가수가 전통 민속 노래를 먼저 부를땐 반응이 없었으며 어미 낙타는 오히려 울 밖에 있는 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뒤이어서 마두금을 연주하자 귀 기울이며 한동안 듣고 있더니 어미 낙타가 긴 다리를 접어 무릎을 꿇으니 새끼낙타도 어미 옆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점차 연주가 고조되자 어미 낙타도 새끼 낙타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으며 어미 이전의 옛 전생의 민속곡조인 마두금연주에 젖어 들었습니다.
낙타가 40~50년 산다고 하니 사막의 나라에서 1922년 전에 호주로 이주해왔다면 2014년에 한국으로 수입된 낙타는 3~4대쯤 되겠지요. 어미 낙타는 3~4대에 거쳐 호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새끼는 제주에서 태어났는데도 마두금연주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두 낙타의 모습이 2016년 12월 3일에 방영되었습니다. 낙타의 몸에도 유전적인 조상의 피가 흐르고 유목민들과 같은 애환이 배어있으며 향수와 같은 추억의 모래바람 소리가 잠재의식으로 기억되어있나 봅니다.
그 이후에 새끼낙타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먹이를 독차지하지 아니하고 점차 바른 행동으로 길들어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낙타는 낙타로 환생하며 개개의 업은 개개로 돌아오면서 모두가 함께 짓는 공업(共業)은 공업대로 상호 간에 이어지며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업과 윤회를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태어난 곳이 고향인지, 자란 곳이 고향인지, 조상의 뼈가 묻힌 곳이 고향인지, 오래 살면서 정든 곳이 고향인지?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태어난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병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향에 갈 때마다 많이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나의 옛 추억을 위해 고향이 발전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있지 아니합니다. 고향보다 먼저 자신이 어떻게 변했느냐는 고향에 가보면 거울처럼 되비쳐주며 그동안 고향도 많이 변했지만, 그보다 내가 더 많이 변했음을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조상의 무덤이 내 몸 안에 있다.”
틱낫탄 스님이 고향인 베트남을 40년 만에 찾아가서 우리의 조상이 무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다 .
내 몸을 조상이 물려주었다. 우리의 참 마음이 마음의 고향이며 신체적인 고향이나 마음에 고향이 다 나에게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잘 반추해봐야 한다. 나의 행위와 생각을 깊이 관찰해보면 행복의 열쇠는 나에게 있다.
라고 했습니다.
한용운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時故鄕)
=사나이 가는 곳마다 고향인데
기인장재객수중(祁人長在客愁中)
=얼마나 많은 이가 끊임없이 나그네 시름을 겪고 있는가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天界)
=삼천대천세계를 한소리에 부수고 나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날더라
한용운 스님같이 깨달아야 고향을 알 수 있는 건지 고향 속에서 고향을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의 삶인가 봅니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