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낙랑국과 자명고
강단사학자나 그들에게 배운 학생들은 ‘그럼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는 한사군, 낙랑군 樂浪郡은 무엇이냐?’고 반문 反問한다.
사실성 높아 보이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는?’이라고 되묻는다.
평양의 낙랑은 군 郡이 아니라 국 國이다. 즉, 낙랑국 樂浪國이다.
한 漢나라가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아니라,
염연히 조선의 핏줄을 이어온 순수 동이족의 나라, 낙랑국이다.
한사군의 일개 군장 郡長의 딸(여식. 女息)을 그 누가 감히, 공주 公主라 칭하는가?
일개 군장의 여식을 '공주'로 호칭한다면,
그렇게 부른 사람이나, 호칭을 받은 자나
그 즉시, 반역도 叛逆徒로 처단 處斷 당한다.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강단의 사학자들은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는 자 들인가?
공주는 일국 一國의 왕의 정비 正妃 즉, 왕후가 낳은 여식을 공주 公主라 칭한다.
후궁의 여식은 옹주 翁主,
왕세자의 정비 여식은 현주 縣主,
다음 서열은 군주 郡主, 등으로 엄격하게 차별화시켜 호칭 된다.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가 발해만의 영정하나, 조선하 부근이고, 그곳을 낙랑이라 불렸다.
단군조선의 옛터 즉, 영정하 하류 下流에 자리하고 있던 유서 由緖 깊은,
동이족이 오랜기간 동안 도읍지로 삼아 왔던 낙랑을 되새겨,
단군조선의 마지막 적통자인 최씨 왕족이 한반도 평양에 나라를 건국할 때, 국명 國名으로 인용. 차용 借用하여 사용해 온 것이다.
그러니까,
평양의 낙랑국은 단군조선의 맥통 脈統을 이어온 마지막 조선국이다.
국력은 쇠약해지고 영토도 많이 축소되었지만, 낙랑국 왕 최리 崔理가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 낙랑을 병합시킨 고구려는 낙랑국을 단군조선과 분리시켜 버렸다.
역사를 단절시키고, 영역도 축소시켜, 별 볼 일 없는 조그만 나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야만 고구려가 단군과 부여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나라 즉, 적자 嫡子로 인정 받을수 있으니, 이해는 간다.
광개토태왕비에서는 형제의 나라, 백제를 '백잔 百殘'이라고, 격하 格下시켜 호칭하고 있다.
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표현이다.
그러면,
고주몽의 손자이자 제 2대 유리왕의 아들인, 고구려 제 3대 테무진(大武神)왕의 서자 庶子인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도 대략 이해가 된다.
* 자명고
자명고 自鳴鼓는 무엇인가?
적군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울어 국가의 위급함을 알렸다는 신비의 북이다.
단군의 역사가 유구 悠久한 만큼,
비록 공직 公職은 맡지 아니하였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지사들이 도처에 산재 散在해 있었을 것이며,
이들은 외침 外侵이 있을 때는, 자발적으로 왕궁에 즉각 이 사실을 보고하고,
직접, 국가 수호 방어군 國家 守護 防禦軍으로도 활약했던 것이다.
그들의 조직을 '자명고 自鳴鼓'라 칭하였다.
즉, '자명고'는 조직의 명칭이다.
요즘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자율방범대’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아니, '자율방범대'나 '자율소방대'가 자명고에서 유래된 조직의 명칭이다.
너무 어렵고 거창하게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동차 自動車(스스로 움직이는 수레)
자전거 自轉車(스스로 도는 바퀴)
자명고 自鳴鼓(스스로 우는 북)
사물 事物이나 나타나는 현상 現象에 대한 서술방식 敍述方式이 일반명사 一般名辭로 정착되었다.
같은 표현방법 表現方法이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 史實을 비사실적인 非事實的인 표현으로 묘사 描寫하고,
비현실적인 非現實的인 신화 神話로, 허황 虛荒한 이야기 꺼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뻥’이다. ‘있을수 없는 거짓이다’라고 치부해버린다.
자가당착 自家撞着이다.
실제 있었던 사실을
먼저, 과장 誇張되게 부풀려 서술하고,
나중에는 이를 애매모호 曖昧模糊하게 표현한 후,
결론은 없었던 일로, 신빙성 낮은 한낱 이야기 거리로 전락 顚落시켜 버린다.
우리의 전래되는 소중한 전설이나, 귀중한 민담 民譚이 대부분 그렇다.
자명고 조직.
물론, 조직내에 연락을 담당한 주요 인물이나 최고의 책임자가 있었을 것이며, 낙랑공주는 호국 護國 과 연정 戀情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다, 결국에는 그 수뇌부나 주요 요인 要人을 제거한 것이다.
물론, 수뇌부와 공주 간에 또, 다른 갈등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 排除할 수는 없다.
여하튼 간에 자명고는 민초 民草나 애국지사 愛國志士들의 나라 사랑의 표현이고, 우국 憂國의 외침 소리였다.
이를 은유적으로 북소리(개전 開戰을 알리는 진군 進軍의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민 民이 솔선수범하여 적극적으로 국사 國事(국가의 위급함)에 참여한 것이다.
어찌보면 민주주의의 표본이 될 수도 있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북한에서는 낙랑국 주변의 고분 3,000여 기 이상을 발굴하였으나, 한 漢과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은 전혀 없었으며, 모두가 고조선의 양식이며 고조선의 유물들만 출토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한사군이 한반도 평양을 중심으로 설치된 지도들이 있다.
다른 나라,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오직, 우리나라 남한에만 존재하는 희한한 광경이다.
우리 선조들의 활동무대였던 대륙의 지명들이 사서 史書에 등장하면,
강단의 사학자들은 우선, 한반도 경내 境內에 우겨서 쑤서넣어 놓고 본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들이다.
이름만 비슷하면, 사실 史實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한민족 韓民族에게 불리하게 적용시키는 사대주의 모화사상 慕華思想과 식민사관, 또 그렇게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교과서에 싣는 강단 사학자들...
동해란 지명은 산동성 태산 泰山의 남쪽 해안에 있는 지명이며, 북해는 후일, 등주라고도 하며, 산동성 제남의 동쪽에서 발해만의 남쪽에 위치한 래주만 萊州灣을 끼고 있는 지명이다.
부연하면, 산동성 동해 東海에서 청도 淸島 사이에 일조 日照란 지명도 있다.
일조 역시, 동남향이 황해 바다와 접해있다.
일조 日照와 조선 朝鮮은 같은 의미다.
장영의 긴 설명이 끝났다.
이중부와 한준은 장영의 설명내용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뭐가 뭔지 헷갈리기도 한다.
둘의 표정을 보고 장영은 웃으며 말한다.
“아직은 너희들이 어려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도 있겠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그럼 이곳 발해만으로 유입되는 저 많은 강들이 모두, 우리 동이족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네요?”
“그렇지, 우리 동이족이 태고 太古적부터 오랫동안, 이 발해만과 요동만을 중심으로 목축 牧畜과 어로 漁勞생활을 하며, 세거 世居하였으니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지,”
그리고 ,지금 우리 이주민의 태반이 이곳에 임시로 자리 잡고, 겨울을 지내기로 하였다고 한다.
조선하부터는 요동만을 향해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항하게 된다.
이중부는 한 번 더 조선하의 하구 河口를 뒤돌아보며, 장영의 설명을 되새겨본다.
다시, 한 시진 가량을 운항하면 요하(현재의 난하)가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하를 지나 얼마 되지 않아,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점차 거세진다.
잔잔하던 바다에 풍랑이 일기 시작한다.
차가운 굵은 빗방울까지 돌풍과 함께 쏟아진다.
겨울철에 때아닌 폭풍이 몰아친다.
급변하는 날씨에 놀란, 선장은 급히 해안으로 배를 붙이라고 명령한다.
앞서가던 두 척의 배와 더불어 세 척의 범선이 모두 뭍으로 선수 船首를 돌린다.
이중부가 탄 배가 육지 방향으로 우측으로 선회 旋回하던 도중,
갑자기 멈추어 버린다.
높은 풍랑에 의해 배의 후미 後尾 바닥이 암초 暗礁에 걸린 것 같다.
선체 船體가 움직이질 않는다.
좌초 坐礁되어 버린 것이다.
배를 운항하는 선원들이 두려워하고, 가장 꺼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를 모르고 앞서가던 배가 또 선회 旋回하면서, 큰 파도에 휩쓸러 이리저리 일렁이더니, 이중부가 타고 있던 배의 우현 右舷 선미 船尾를 들이받고 말았다.
‘콰~쾅’하는 우렛소리가 나더니, 그 충격으로 인하여 2호선 배의 좌현 左舷 선수 船首와 이중부가 타고 있던, 3호선 배의 우현 선미 船尾가 부딪쳐 선체 船體의 일부분이 부서져 버렸다.
2호선 배의 충돌 여파로 3호선 배는 다행히 암초에서는 벗어났으나, 두 척의 배는 더 이상 원거리 운항은 불가능한 상태로 크게 훼손 毁損되고 말았다.
탑승자가 모두 선실로 들어가 있던 탓에 다행히 부상자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파도가 칠때마다, 파손된 부위를 통해 바닷물이 선체 船體로 '울컥울컥' 유입 流入되고 있다.
노를 젓던 노꾼 2명이 바가지로 물을 퍼내 보지만 역부족이다.
풍랑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세 척의 범선은 조선하로 되돌려 역주행 逆走行하여 잠시 후, 강어귀의 조그마한 항구로 피항 避港하여 정박 碇泊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 척의 선박 선장들이 그동안 조선하로 서너 번씩 이주민을 태운 경력이 있어, 부근의 지리나 정세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배가 정박한 조선하 하구 河口 포구에서 동이족이 임시거처를 정한 옥전 玉田까지는 30여 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배의 파손된 부위를 수리하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더구나, 이 곳은 항만 港灣이 작아 큰 규모의 수리 시설이 없어, 수리 기술자와 자재가 부족하므로, 선체 수리 修理 시일 時日이 더 지체될 가능성이 크다며, 난감 難堪해 한다.
한 달 이상을 비좁은 선박 안에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장영은 한준의 부모와 탑승자 搭乘者 중, 연장자 몇 분의 의견을 수렴하여 조선하, 이곳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조선하 중류 中流에 있는 옥전 玉田에 먼저 이주하여, 터를 잡은 동이족의 임시거처로 이동하여 합류하기로 하였다.
이틀 후, 바람이 잦아들고 풍랑이 잠잠해지자, 무사했던 1호선 범선은 대릉하로 다시 출항하였다.
조선하에서 동쪽으로 10리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네 명칭은 옥전 玉田이라 부른다.
문전옥답(門前沃畓)이란 우리 말이 있다.
집 가까이에 있는 기름진 논이란 뜻인데, 중국 한자에는 없는 답(畓)자가 재미있다.
밭(田)에 물(水)이 들어가니 논(畓)이 된다는 순수 우리식 한자다.
우리식 한자가 생겨난 이유는
이는, 황하와 장강 가운데에 서에서 동쪽으로 길게 흐르고 있는 강이 있다.
즉, 회수(淮水)다.
중국 대륙은 회수를 기준으로 하여, 남북 南北의 기후와 강우량이 많이 다르다.
회수 이북 지역(중원)은 예전에는 벼농사를 짓지 않아 논(沓)이란 개념이 없어서 그렇다.
우리식 한자 漢字는 또 있다.
돌(乭)이라는 한자 역시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우리식 한자 漢字 글이다.
돌(石)아래에 한글 ‘ㄹ’과 비슷하게 생긴 을(乙)자를 붙여 넣으니 한글식으로 ‘돌’이라 부를 수 있다. 돌 (乭)은 석 (石)에 비해 ‘크기가 조금 작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創製 이후, 16세기 무렵에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여 만들어진 기발하고도 멋진 글자다.
그럼, 우리식 한자를 중국 현지에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답(沓)은 수전(水田)으로, 돌(乭)은 석(石)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동네 이름 자체가 옥전 玉田이니 기름진 땅이 분명하다.
이중부는 어머니와 여동생 슬비와 함께 한준네 식구들을 따라갔다.
한준의 형, 한익이 군에 병사로 있으니, 이런 난리 亂離 통에도 정보가 비교적 정확하였다.
장영 백부장이 거처할 집을 특별히 주선해 준다.
이중부네 가족은 큰길 옆의 동네 한편에 비어 있던 빈집에 짐을 풀었고, 한준은 한집 건넛집에 자리를 잡았다.
중간에 끼인 집은 좁고, 출입이 불편해 보였다.
1년 반 정도 비어 있던 집이라, 마당에는 마른 잡초들이 어지럽게 누워있고, 방안도 엉망이었지만 다행히 벽은 바람을 막을 만하고 지붕은 비가 샐 염려는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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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난 역사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아 하 , 이제 이해되네요.
이토록 쉬운 걸,
감사...
아주 좋은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에 추천 수가 부족하지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