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조경자(마리 가르멜, 노틀담수녀회) 수녀
지난봄 밤꽃향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밤이 떨어지고 있다. 이른 새벽, 안개 자욱한 산을 밤 주우며 걸으니 ‘정말 가을이구나!’ 싶다. 오르다가 내려오는 길에 바닥을 보면 줍지 않은 밤들이 꽤 떨어져 있다. 여기저기서 ‘툭’, ‘툭’ 소리가 난다. 30년 전에 심어진 밤나무이니 동네 어르신들에게는 산 주인이 누구이든지 ‘우리 밤 산’이라는 생각이 있으시다. 추석 명절 즈음에는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밤을 주우러 몇몇 분이 올라오시는데 동네 어르신들은 정말 필요한 만큼만 주워가신다. 어떤 분들은 도토리를 줍기 위해 올라오시는데, 오로지 도토리만 줍지 밤은 하나도 탐내지 않으신다. 주워가시라고 권해도 안 주워가시는 할머니의 유모차에 밤 한 봉지씩 넣어드렸다.
그런데 간혹 몇몇 분들은 산을 관리하는 우리 마음을 어렵게 하신다. 우리 마을에는 도시에서 살다가 마을로 들어와 전원생활을 시작한 몇몇 가정이 있다. 이분들은 우리가 미사에 참여한 사이, 혹은 우리가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산에 올라가 큰 알밤만 쏙쏙 골라 부대에 주워가시는데, 눈이라도 마주칠 양이면 “같이 먹고 삽시다!”라고 되레 큰소리치고 내려가신다. 때때로 아직 새벽이 되기 전에 랜턴을 들고 밤을 주우러 오시는 분들도 있는데 이분들은 아예 차를 대놓고 주워가신다. 마을 어르신들이 아니라 모두 도시에서 오시는 낯선 분들이다. 처음에 우리는 그러려니 하다가 맹렬히 짖는 우리 집 노을이와 땅이 때문에 ‘또 누가 오셨구나’라고 의식하게 되었다. 또, 이분들이 산에 남긴 쓰레기와 무엇보다도 감사를 모르는 자세는 관리하는 우리를 불편하게 했다.
우리 산이라고 생각하는 어르신들은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신다. 그런데 남의 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몰래 와서 자기만을 생각하며 욕심껏 가져간다. 이것은 비단 밤 줍기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산에 고사리며, 산 부추며, 머위며 올라오는 봄에는 나물을 뜯어 풍물시장에 가져가 파는 할머니들이 계시다. 이 할머니들과 마을 어르신들은 다음에 찾아올 사람, 그리고 내년을 기약하며 필요한 만큼을 채취해 가신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다. 뿌리째 뽑아 패대기쳐놓고, 다른 사람이나 다음은 생각지 않는 손길들이다. 오로지 ‘지금’, ‘나’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나는 마치 내 가슴이 할퀴어진 느낌이 든다.
이 모습을 확장해보면 우리가 전체 지구를 생각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을 생각하고, 다음 사람 혹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그러니 아끼고 보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만’ 생각하고 스스로를 주인이 아니라 몰래 거둬가는 존재로 만들어, 다른 사람 그리고 다음 세대에 대한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이들이다. 산업혁명 후 더 똑똑해진 우리 인류의 행보가 이랬다. 그러니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지구시민의식’을 가지라고 우리 모든 인류에게 호소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 앞에서 모두가 거류민이지만 모두가 ‘우리 지구’라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이 거할 수 있도록 열어주고, 다음 세대가 거할 수 있도록 보전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라는 말이 때때로 민족주의적 게토를 형성하며 차단된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다. 그야말로 울타리를 가리키는 의미로 차단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교황님은 이 ‘우리’라는 말을 공동의 의미,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 개방된 의미로 사용하여 ‘우리 공동의 집’ 지구를 돌보는 ‘우리’로 살아가자고 모든 이들을 초대하신다. 나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어떤 ‘우리’에 동의하며 살고 있는 걸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조경자(마리 가르멜, 노틀담수녀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