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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후 :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Ⅱ
분열 후
헤이그 회의 이후 몇 년 동안 두 개의 인터내셔널이 존재했다. 미국의 제1 인터내셔널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맑스는 그 일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건강이 악화하고 있었지만, 독일에서 급성장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연구하고 조언하는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 1876년 필라델피아 회의는 공식적으로 미국 제1 인터내셔널을 해산시켰고, 이들은 불과 며칠 후에 사회주의 노동당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헤이그 회의 직후, 결의안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들은 세인트 이미어(St. Imier) 인터내셔널로 재집결했다.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바쿠닌은 1873년에 공식직함에서 은퇴했다. 말년에 그의 가까운 동지인 기욤(Guillaume)과 카피에로(Cafiero)와 사이가 틀어져 1876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 이미어 인터내셔널은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일부 진출했고, 한동안 미국의 제1 인터내셔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로 주도했지만, 봉기와 개인의 폭력 행위(행위에 의한 선전이라고 불리는 것)의 경로를 따라 지금은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로 회원들의 출혈이 있었다. 1877년 베르비에르 회의가 마지막이 되는 것이었다.
통념과는 달리, 두 경향의 통일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이 중 첫 번째는 이미 1877년 겐트에서 있었다. 이러한 세계사회주의 회의의 대표자 중에는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프란켈(Fränkel), 기욤(Guillaume), 크로포트킨(Kropotkin: 최근에는 아나키스트로 변신하여 곧 주요 이론가가 되었다)이 있었다. 공동 재산과 산업 투쟁에 관한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지만, 그 행위에 의한 국가, 정당, 의회주의, 선전의 주제가 나오자 오래된 주장이 다시 나타났다. 겐트 회의 이후 구체적인 조치는 없었지만, 이는 논쟁하는 용어의 변화를 상징했고, 맑스와 바쿠닌의 추종자들은 이제 각각 사회민주주의자와 봉기주의자가 되었다. 1881년, 전자는 제2 인터내셔널을 결성하기 위한 긴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처르에서 만났고, 후자는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일명 흑인 인터내셔널)를 설립하기 위해 만났다. 사회민주주의가 전국적 기초 위에 노동계급 대중정당을 만드는 데 기반을 둔 것이라면, 봉기주의자들은 기권을 설파하고 폭력적 직접행동에 전념했다. 제2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을 때, 블랙 인터내셔널은 헤이마켓(Haymarket) 대학살의 여파로 해체되었다.
1880년대에는 다양한 반(反)사회주의 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국제 노동계급 운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맑스는 1883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생애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것의 탄생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889년 제2차 인터내셔널 회의가 열렸을 때, 수천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수백 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그것은 전(前)아나키스트자에서 개량주의자로 변신한 폴 브루스가 이끄는 실증주의자와 전 아나키스트에서 사회민주주의자로 변한 쥘 게드와 라파르그가 이끄는 맑스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수반되었다(엥겔스는 이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후자를 지지했지만, 일반적으로 대회에 거의 희망을 두지 않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처럼 파리에는 실제로 두 개의 협회가 있었다. 그런데도 제2 인터내셔널이 태어났으며 헤이마켓 대학살을 추모하여 메이데이를 8시간 동안의 투쟁에서 연례 국제 노동 시위로 선언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현재 그리고 이전의 아나키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그들의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말라테스타(Malatesta)와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터내셔널 내에서 대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3년 취리히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해 아나키스트들을 따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모든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조직과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회당 및 조직으로 회의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행동'이란 노동계급 조직이 가능한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 증진과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해 정치적 권리와 입법 기구를 활용하거나 정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2 인터내셔널 결의안, 1893년)
그런데도 그것은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1896년 런던 회의에서 이 문제는 다시 논의되었다. 말라테스타는 반(反)의회주의 사회주의자들이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고, 그는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웬후이스(Ferdinand Domela Nieuwenhuis),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톰 만(Tom Mann), 키르 하디(Keir Hardie)의 지지받았다. 그러나 장 조레스(Jean Jaurès)와 하인리히 하인드만(Henry Hyndman)은 취리히 결의안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리프크네흐트는 입법과 의회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당과 노동조합만이 다음 회의에 초대될 것이라고 명시한 새로운 결의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통과되었고 아나키스트들의 제명은 이제 공식화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제2 인터내셔널은 맑스주의자의 세계관이긴 하지만, 중앙조직(국제사무국이 설립된 1900년까지)이 없는 강력한 국가 부문으로 구성된 더욱 연방적인 형태의 조직과 비슷한 것이었다.
1890년대와 1910년대 사이에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을 숙청한 사회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선거에서 성공을 거둔 것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 내에서 혁명적 경향이 커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다시 한번 논쟁의 조건이 바뀌었지만, 러시아혁명과 제3 인터내셔널에서 맑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 단순하게 모인 것은 이 기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맑스주의와 아나키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무엇이 맑스와 바쿠닌을 갈라놓았는지 돌이켜보면 원망과 오해, 편견은 물론 추종자들의 부정적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도, 실제 조직과 그 이면에는 정치적 차이가 존재했다.
• 맑스는 노동계급의 모든 경제적 투쟁을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고, 유일한 문제는 어떤 사상이 흔들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정당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그러한 정당은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 선거, 집회 및 결사의 권리, 언론의 자유를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강령을 선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다가올 전투에 대한 훈련과 경험을 제공할 것이었다.
•바쿠닌은 노동계급이 무의식적으로나마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이미 사회주의적이라고 보았고, 그는 정치를 대중을 지배하는 예술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기권을 촉구했다. 대신 그는 모든 노동자가 부문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단일한 보편적 협회로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러한 조직 내에서 소수를 형성하고 비밀리에라도 사회주의 강령을 선전하기 위해 함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맑스는 제1 인터내셔널이 계급투쟁의 발전과 함께 쓸모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반면에 바쿠닌은 제1 인터내셔널이 미래 사회의 배아였다. 바쿠닌은 처음에는 총협회의 권한 이 증대되는 것을 승인했지만, 자치 구역 간의 단순한 통신 및 통계국으로 축소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맑스는 총회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행동을 중앙집중화하는 수단으로 보았고, 우편함에 지나지 않는 총회보다는 총회 폐지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는 그들의 서로 다른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었고 양립할 수 없었다. 맑스와 바쿠닌은 모두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술을 사용했고, 곧 "중앙파"와 "연방파" 사이의 갈등(엥겔스가 공개적으로 거부한 차이)으로 비화되었다. 보기를 들어, 맑스는 비밀 조직(코뮤니스트 동맹)의 일원이었고, 바쿠닌은 선거에 출마하여 부르주아 정당과 전술적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카를로 감부치와 셀소 케레티에게 보낸 편지에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맑스와 바쿠닌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각각 총회와 동맹을 대표하여 서로 권위주의를 비난하였다.
다양한 국가적 관점은 어떤 맥락을 제공한다. 맑스에게 중앙집권화(국가, 자본, 생산수단, 재산, 사람)는 봉건주의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노동계급 운동의 기초를 만든 역사적 경향이었다. 바쿠닌은 이 과정이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본주의 침탈에 맞서 개인, 협회, 공동체, 지구 및 지방의 연합을 옹호했다. 그러나 맑스는 '진보'를 맹목적으로 방어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일단 러시아의 조건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농민 공동체가 코뮤니스트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을 만들었다(그러나 서유럽에서의 차리즘의 몰락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관련해서만). 그런데도 맑스의 사상이 산업화한 서유럽과 자본주의가 거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 남유럽, 바쿠닌의 농촌에서 그들의 거점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쿠닌은 프루동주의와 코뮤니즘을 혼합한 독특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론의 핵심은 그가 자본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 발전을 통해 발생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을 폐지해야 할 주요 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국가를 주요 악으로 간주한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국가 권력이란 지배계급, 지주, 자본가들이 그들의 사회적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제공한 조직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바쿠닌은, 자본가는 국가의 비호에 의해서 그것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국가는 주요 악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없어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스스로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도르 쿠노에게 보내는 엥겔스 편지, 1872년 1월 24일)
맑스와 아나키즘 사이 현대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맑스는 "국가주의자"이고 바쿠닌은 "반(反)국가주의자"라는 주장이었다. 맑스는 바쿠닌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모든 사회주의자는 아나키 상태를 다음과 같은 강령으로 본다: 일단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목표, 즉 계급의 폐지가 이루어지면, 대다수 생산자를 극소수의 착취자, 소수에게 속박시키는 역할을 하는 국가의 권력은 사라지고 정부의 기능은 단순한 행정 기능이 된다.” (맑스와 엥겔스, 인터내셔널의 가상의 분열, 1872)
바쿠닌의 많은 공격은 실제로 맑스가 아니라 독일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요소를 겨냥한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맑스가 바쿠닌이 그를 비난했던 "국가 코뮤니스트들"과 공개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 맑스가 비판한 내용 대부분은 사후에 출판된 친서와 문서에 국한되어 있으며, 바쿠닌에 대해서는 그것을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쿠닌은 또한, 맑스의 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소동이 있었지만, 바쿠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는 비스마르크(Bismarck)는 말할 것도 없고 라살레(Lassalle)의 "인민국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 맑스와 엥겔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란 정치권력 획득과 모든 계급을 폐지하는 것으로 전환을 의미했다. 1848년 혁명의 경험 이후 그들은 이미 오래된 국가 기계의 해체를 수반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지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가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고, 정치 권력을 획득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보기는 파리 코뮌(프랑스 내전, 1871년 맑스)이었다.
• 그와 동시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주창한 전체 혁명계급의 독재를 '혁명을 일으킨 소수'의 독재 그리고, 이전에는 한 명 또는 여러 개인의 독재하에 조직되어 있던 그들 자신의 독재라는 블랑키스트의 입장과 구별했다. (엥겔스, 1874년 파리 코뮌의 변하기 쉬운 블랑키스트 강령)
이미 적시한 바와 같이, 제1 인터내셔널은 항상 불안한 정치적 경향들의 동맹이었다. 이론적으로, 프루동주의자, 블랑키스트, 라살레주의자 등의 메들리 옆에 맑스, 바쿠닌과 그 추종자들이 그 안에서 공존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분열이 되었든 아니든 제1 인터내셔널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들의 개인 편지에서 맑스와 바쿠닌은 곧 이러한 부분을 인식했다. 노동계급 운동이 파리 코뮌에 이은 억압으로부터 회복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다른 세계로 나타났다. 187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제2차 산업 혁명은 세계 노동계급의 성장을 가속했다. 노동자 운동의 무게중심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갔다. 자본주의 대도시에서는 바리케이드 시대가 끝나고 대대적 파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50년 후
제1 인터내셔널 이후 아나키즘은 가끔 모순된 입장을 드러내면서 더 많은 경향으로 분열되었다. 일부는 제국주의 분쟁에서 한쪽을 지지하거나 노동계급이 혁명의 주체라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혁명적 관점을 완전히 포기했다. 바쿠닌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맑스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유물론적 방법의 전부는 아닐지라도)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우리 코뮤니스트를 어떠한 아나키스트들과 결속시키는 것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과 무국적 사회 설립의 목표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가 지지하는 입장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과거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것들은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반사 과정의 산물이다. 맑스는 노동계급 운동에 절실히 필요한 유물론적인 근거를 제공했지만, 그것이 그가 자본주의 초기에 옹호했던 모든 전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맑스와 바쿠닌 사이의 갈등이 15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면 어떤 관련이 있을까?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위기, 전쟁, 혁명의 폭풍을 이겨냈다. 그것은 최근 축적 주기의 진통 속에서 이제 세계적인 시스템 되었다. 그것은 중심지에서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거의 없애고, 세계 인구의 대다수에 임금 노동을 부과했으며, 사회주의 대안이 실행할 수 있는 정도로 생산수단을 발전시켰다. 국가기구가 확장되고, 금융자본이 지배하며, 이제 글로벌 전쟁의 대량파괴를 통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 없이는 새로운 축적 사이클의 시작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경쟁과 환경 악화는 지구상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국가적 관점은 부적절하다. 맑스와 바쿠닌이 독일과 러시아의 국가 발전에 대해 도달한 서로 다른 결론은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해결되었다. 두 나라 모두 자본주의의 우위에 있으며, 더욱이 그들은 제국주의 강국이 되었다. 점진적으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회를 혁명적 호민관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고갈됐다. 현대 민주주의는 조직적인 억압과 방대한 선전 기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의 독재 뒤에 놓여 있는 무화과 잎에 불과하다. 오늘날, 대중 정당과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을 국가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권위와 자유의 진정한 통합은 1905년 노동계급이 발견한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대안인 노동자평의회이다.
이처럼 국제주의, 반(反)의회주의, 계급투쟁의 자기조직화, 노동자평의회 통치는 모두 화해의 잠재적 지점으로 작용한다. 인터내셔널 정치조직이 정치적 나침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분명한 강령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점, 노동자평의회가 독점적인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코뮤니즘으로의 불가피한 과도기적 단계 등 여전히 남아 있는 핵심적인 차이점들은 순전한 의지를 통해 해결될 수 없으며, 역사가 확인하듯이 훨씬 더 첨예한 반대 속에서 똑같은 차이점을 다시 한번 포기하는 통합에 호소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제1 인터내셔널의 분열과 종말이 젊은 노동계급 운동의 후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개량주의에 의해 쇠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하여 붕괴)이나 제3 인터내셔널(제3 인터내셔널, 1920년대 러시아 및 국제혁명의 패배에서 나타난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의 외교정책 부문으로 끝남)의 실패는 재앙이 아니었다. 국가 자본주의 계승자들 모두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반대자로 남아 있지만, 우리는 미래의 인터내셔널 창설에 전념하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스스로 규정한 꼬리표에 근거하지 않고, 그 뒤에 모든 종류의 혼란과 속임수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진보적인 것을 제공할 수 없는 낡아빠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처에 있는 임금 노동자들의 상황을 반영하는 공통의 강령에 대한 합의에 따라 혁명가들을 통합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해답을 가진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쿠닌과 맑스 시대에 여전히 열려 있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계급투쟁, 경제 위기, 전쟁 및 혁명의 굴곡진 역사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강령을 통한 대화에 항상 열린 자세로 임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 인류의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되는 이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우리는 자신을 계급투쟁에 헌신하는 아나키스트로 보는 모든 사람에게 150년 전 이후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향한 그 긴 노정에서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
2022년 6월
다이즈버즈(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2-09-02/150-years-on-the-split-in-the-first-international
<이전 글>
150년 후 :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분열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