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성군(固城郡)
○ 수림서원(繡林書院)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34호(1983. 8. 6)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마암면 화산리 998
- 시 대 : 1856년(哲宗7년)創建
- 제 향 : 배현경(배현경: 諡 무열)
배정지(배정지:號 밀직)
배인경(배인경: 고부군)
배맹관(배맹관: 號 낙포)
배상곤(배상곤: 號 성재)
배 경(배 경: 號 백유당)
나라에 공을 세운분들의 공덕과 학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무열공 배현경.밀직 배정지.고부군 배인경.낙포 배맹관.성재 배상곤.백유당 배경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 철종 7년(1856)에 세웠으며,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하였다가 복원되었다.
수림서원의 건물은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왼편에 방 2칸, 가운데에 대청 2칸, 오른편에 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문인 조제문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강당 전면 오른편에는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의 삼량구조 팔작지붕으로 된 산해정이 자리잡고 있다.
○ 도산서원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35호(1983. 8. 6)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127
- 시 대 : 1623년(仁祖1 癸亥)創建 및 賜額
- 제 향 : 최 균(최 균: 號소호 諡 의)
최강두(최강두: 號 소계 諡 의숙)
조선 인조 1년(1623)에 왜적을 물리친 의공 소호 최균과 의숙공 소계 최강 두 형제의 공을 높이 새기고, 이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이 창건한 사액서원으로 고종 7년(1870)에 다시 세워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맨 뒤에 사당인 숭의사를 두고, 강당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진수재와 홍학재가 있으며 대문인 양지문이 구(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강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양지문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를 가진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양지문 왼편에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홍학재를, 오른편에는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를 가진 진수재를 배치하였다.
○ 갈천서원(葛川書院)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36호(1983. 8. 6 )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 1146
- 시 대 : 1713년(肅宗39 癸巳)創建.
- 제 향 : 이 암(李 암: 號杏村 鐵原府院君 翊祚功臣 諡文貞).
이 교(李 교: 암의弟 號挑村 高麗尙書).
어득강(魚得江: 號灌圃堂 大司諫).
노 필(盧 필: 號墨齋 持平).
이 서원은 고려 공민왕때 문신인 문정공 향촌 이암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이암(1297˜1364)은 고려 충선왕 5년(131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민왕 12년(1363)에는 1등 공신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는 글씨에 능하여 동국(東國)의 조자앙이라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때 회화면에 .금봉서원으로 세웠는데,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고 .갈천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6년(1869)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광복 후 유림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우, 강당, 내삼문과 정문인 불사문이 있고, 사우에는 행촌 이암.묵제 여필.관포 어득강.도촌 이숭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3량구조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가운데 1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방 1칸을 두고 우측방 앞에 누마루가 있다.
정문인 불사문은 앞면 5칸.옆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대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 도연서원(道淵書院)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37호(1983. 8. 6)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마암면 도전리 543
- 시 대 : 1687년(肅宗13 丁卯)創建,
- 제 향 : 허 기(허 기: 號 호은, 諡 정절)
허천수(허천수: 號 천산재)
허 재(허 재: 號 이견와)
이 서원은 조선 숙종 13년(1687)에 정절공 호은 허기, 천산재 허천수, 이견와 허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1920년에 다시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강당, 사당인 추원사, 돈화실, 명성실, 내삼문, 외삼문인 일원문이 있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좌측면에서 방2칸, 대청2칸, 방1칸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청과 후면의 대청마루 후퇴칸 경계부분에 들어열개 삼분합문이 설치되어 있다.
강당을 중심축으로 후면 높은 곳에 있는 추원사는 앞면 3칸, 옆면3칸의 맞배지붕이고, 돈화실과 명성실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정문인 일원문은 앞면 3칸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그 윗부분에 난간을 설치한 누대(樓臺)를 둔 것이 특이하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위계서원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38호(1983. 8. 6)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마암면 석지리 643
- 시 대 : 1844년(顯宗10 甲辰)創建
- 제 향 : 이인형(이인형: 號 매헌 贈禮判)
이의형, 이령, 이현, 이허, 이응성 이제, 이규, 이예형, 이지형
이 서원은 조선 현종 10년(1844년)에 창건하여 나라에 공헌한 이인형, 이의형, 이령, 이현, 이허, 이응성의 충훈과 유업을 추모하기 위한 곳으로, 고종 6년(1869)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6년에 다시 세웠고 서기 1963년에는 이제, 이규, 이예형, 이지형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매헌 이인형(1436˜1498)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김종직의 제자이다. 세조 1년(145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젊은 나이에 벼슬하는 것이 교만한 성품을 기른다 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세조 14년(1468)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예조판서의 직함을 얻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팔작 지붕의 목조와가이다.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방을 두어 배우는 공간으로 훌륭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인 숭덕사, 내삼문, 강당의 전면 좌우에 우진각지붕의 익랑채, 정문으로 솟을대문인 유인문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호암사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39호(1983. 8. 6)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 324
- 시 대 : 年代未詳
- 제 향 : 천만리(千萬里: 明 나라에서 歸化 화산군 諡 忠壯)
이 사당은 중국 노(魯)나라 영양(潁陽) 출생인 천만리(千萬里)공을 모신 사당이다.
사암 천만리 장군은 조선 중기에 명나라에서 귀화한 무신으로, 종북산 천고봉 만인암 밑에 살았다하여 성을 천씨로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 천만리 장군은 아들 상(祥)과 희(禧)와 함께 이여송장군을 따라 조선에 왔고 평양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때 울산싸움에 참가하여 왜적을 섬멸한 공훈이 혁혁하여 조정에서 화산군으로 봉하고, 부조사를 건립케하여 봉향토록 하였으며 고종(1863˜1907, 재위)때 이르러 다시 칙명으로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추서하였다.
공은 왜란이 끝난 후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여 영양 천씨의 시조를 이룬 분이다.
○ 충렬사(忠烈祠)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 시 대 : 1614년(光海6 甲寅)創建 1723년(景宗3 癸卯)賜額.
- 제 향 : 이순신(李舜臣: 三道水軍統制使 壬亂功臣 德昌府院君
贈領議政 諡忠武).
○ 류촌서원(柳村書院)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 시 대 : 1699년(肅宗25 己卯)創建.
- 제 향 : 심광세(沈光世: 號休翁 應敎 舍人).
심광세 (沈光世)
1577∼1624(선조 10∼인조 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덕현(德顯), 호는 휴옹 (休翁). 본관은 청송(靑松).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글을 잘 지었다. 25세 때 명경과(明經科)에 급제, 괴원(槐院)에 들어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다. 당시 광해군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무설(巫說)을 믿으므로 시강(侍講)으로서 이를 간하였으나 광해군은 이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사직하고, 강화(江華)로 내려가 있었다. 1604년(선조 37) 성균전적(成均典籍)으로 등용, 뒤에 지평(持平)·교리(校理)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 고성(固城)에 유배, 10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초 다시 불리어 교리·응교(應敎)가 되었다. 뒤에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성묘하러 고향에 내려갔다가 이괄(李适)의 난을 듣고 돌아오던 도중 부여(扶餘)에서 객사하였다. 1623년(인조 1)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를 건의하였으며, 뒤에 또 안변십책(安邊十策)을 건의한 바 있다.
○ 면곡서원(綿谷書院)
-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 시 대 : 1738년(英祖14 戊午)創建.
- 제 향 : 어 연(魚 淵: 號月亭 縣令).
어변갑(魚邊甲: 號綿谷 直提學).
어효첨(魚孝瞻: 號龜川 判中樞 諡文孝).
이운길(李云吉: 府使).
이의형(李義亨: 云吉孫 號杏軒).
어변갑(魚變甲)
1380(우왕 6)∼1434(세종 16). 시조의 11세손. 자는 子先(자선), 호는 綿谷(면곡). 목사 淵(연)의 아들로 함종어씨를 대표하는 어른이다.
조선 세종 때의 명신으로 1399년(정종 1)에 生員(생원)이 되고, 1408년(태종 8) 式年文科(식년문과)에 장원한 뒤 校書館副校理(교서관부교리)·成均館注簿(성균관주부)를 거쳐 左正言(좌정언)·右獻納(우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충주판관일 때 아버지 연은 하양현감이었는데, 상소하여 부자의 직책을 바꿔달라 하여 태종은 연의 직급을 올려주었다.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이 발족되자 應敎(응교)로서 知製敎(지제교)·經筵檢討官(경연검토관)을 겸임하고 1424년에는 集賢殿(집현전) 직제학)·春秋館記注官(춘추관기주관)을 거쳐 知司諫院事(지사간원사)에 이르렀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 咸安(함안)에 돌아가 노모를 봉양했다. 조정에서 그의 행동과 의리를 아껴 김해부사·사간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마치었다.
그는 평소에 申叔舟(신숙주)의 아버지 申檣(신장)과 친하여 "우리가 충성껏 임금을 섬기고 이름을 세운 후에 고향에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자."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신장은 눌러앉아 벼슬이 참판에 오른 뒤 변갑의 아들 魚孝瞻(어효첨)에게 "일찍이 자네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기로 했었는데 혼자서 약속을 저버렸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세."라고 하며 쓸쓸해 했다고 한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고성의 綿谷書院(면곡서원)에 제향되었다. 魚變甲 墓(어변갑 묘)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22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