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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장~50장까지와 출애굽기 1장~2장의 의미분석 | |
언약자손들의 형통 | 자손의 생육과 시련 |
46장~47장 야곱 가족의 이거 48장~49장 야곱의 축복과 예언 50장 요셉의 위로와 약속 | 1장 자손의 생육과 애굽의 학대 2장 모세의 출생과 광야의 시련 |
50장은 야곱의 장사와 형제들을 향한 요셉의 위로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자기 해골을 메고 가라 부탁하고 죽게 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1절에서 3절 내용은 야곱이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향하던 도중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언약의 말씀인,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6장4절)의 성취 내용입니다.
요셉은 죽은 이스라엘의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을 맞춥니다(1절). 그리고 요셉은 수종드는 의원에게 장사 준비를 명합니다. 야곱의 장사 준비가 사십 일이 걸린 것은, 애굽의 풍속에 따르고 또한 먼 길을 가야 했으므로 시신이 썩지 않도록 몰약과 같은 향 재료를 온 몸에 넣는 기술을 활용하므로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이 죽은 야곱을 향하여 칠십 일 동안을 곡한 것은, 야곱이 요셉의 부친으로 귀족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2,3절). 당시 애굽 왕이 죽었을 때 큰 소리를 내며 우는 공식 애도 기간이 칠십이 일이었습니다.
위 본문에서 시체에 향 재료를 넣어 썩지 않게 보존하는 관습은 히브리인의 관습은 아닙니다. 여기서 ‘향’에 대한 히브리어 ‘하나트(חגט)’는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 기간이었던 본문에서만 나옵니다. 이때 사용되는 ‘향’은 ‘향료’를 말하는데 이는 시체의 부패 방지를 위하여 특별히 제조된 몰약과 비슷한 물질입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혼이 다시 몸으로 돌아와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는 사람의 시체를 잘 보존하는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이 특별히 발달합니다.
4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야곱의 유언에 따라서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장사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궁에 다시 돌아올 것을 말하며 바로로부터 겸허히 간청하고 승낙을 받습니다(4~6절).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센 땅에는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남겨 놓고서,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함께 가나안 땅 막벨라 굴로 향해 올라갔으며 그 떼가 심히 컸습니다(7~9절).
위의 본문에서 요셉이 바로의 궁에 요청하는 표현들 중 원문을 통해 보다 상세히 몇 부분을 확인해 보면, 먼저는 4절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입니다.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만일 이제 내가 너희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으면’입니다. 총리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모시고자 이같이 부드럽고 신중하며 겸허하게 바로의 궁에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5절의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입니다. 이를 원문을 통해 직역하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맹세로 나 자신을 묶다’입니다. 즉 자신은 아버지의 맹세에 묶여 꼼짝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맹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맹세를 지키는 방법밖에 없음을 밝힘으로써(49:29), 요셉은 바로의 신하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으로 보내주기를 간절히 간청한 것입니다. 이는, 언약 백성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떠하든지 본향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꼭 알아야 할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5절의 ‘올라가서’입니다. 물론 가나안이 지리적으로도 북쪽에 위치하여 애굽보다 높은 지역이기도 하지만, 이 단어는 영적으로 언약의 땅인 가나안을 높여서 표현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43:5, 46:3). 즉 요셉은 자신이 지금 풍요를 누리고 있는 애굽보다 비록 척박하나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본향인 가나안 땅을 더 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장례 행렬의 행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동한 경로와 일치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동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10절상)에서 확인됩니다. 즉 요단강 동편을 통해 가나안 땅을 들어간 이스라엘과 같은 노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장례의 길은 출애굽을 한 이후 이스라엘이 이동하는 길의 모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큰 장례 행렬은 애굽을 떠나 요단강 동편 아닷에서 칠 일 동안 애곡을 하였는데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기를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고 하였습니다(10,11절).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땅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로 삼은 곳”입니다(12,13절). 아버지를 장사한 요셉은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옵니다(14절).
야곱이 비록 시신으로 왔으나,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고 십칠 년 만에 다시 본향으로 온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그리고 긴 세월 십칠 년 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을, 약속의 땅이요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이 사놓은 막벨라 굴에서 조상들과 함께 눕도록 하셨습니다. 즉 야곱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열조에게 말씀하신 약속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 보면, *야곱은 왜 자신의 시신을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49:29)고 명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주시기로 언약하신 땅이며 그에 대한 표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하심은, 여호와께서 언약자손인 이스라엘을 언약대로 형통하게 하여 주시는 섭리이다 하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 13절에서, 원문에서는 있으나 한글 번역본에는 빠진 단어 하나를 찾음과 동시에 그와 관련된 내용의 해석을 해야 합니다. 빠진 단어는 ‘바나우’(בגיו)입니다. 뜻은 ‘그(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13절 앞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그를 가나안 땅으로 그의 아들들이 메어다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죽은 야곱의 관을 그의 아들들이 직접 메고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아버지의 시신을 안치했다는 뜻입니다.
15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형들의 염려를 듣고 너그럽게 위로하여 주는 내용입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온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15절)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본문에서, ‘다 갚지나 아니할까’라고 하는 표현을 다른 번역본에는 ‘반드시’가 들어가서 ‘우리가 그에게 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지나 않을까’(바른 성경),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으리라’(킹제임스 흠정역)고 되어 있습니다. 즉 형들의 마음에는 요셉이 과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반드시 보복할 것이다고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찾아가 아버지 야곱이 살아생전 남긴 유언이라 핑계를 대며 말을 전달하는데, “당신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습니다(16,17절).
그리고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라고 말을 합니다(18절).
형들은 지난날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려다가 애굽에 팔았던 잘못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가 죽은 후라서 동생 요셉의 보복이 두렵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아버지를 핑계 삼아서라도 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범죄는 처벌받기 전까지는 마음의 고통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동생 요셉에게 용서를 빌게 되고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으며 그리고 형들을 위로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19~21절)
사실 요셉은 일찍이 용서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의 핑계에 울며 그들을 도리어 위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므로 요셉의 형들의 악행도 선으로 바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만사도 부분적으로나 지엽적으로 살펴보면 참으로 악한 것도 있고 불행한 일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과 부분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들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는 내용을 펼쳐 상세히 정리해 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하는 이 요셉의 대답에는,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어찌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대신 형들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표면적 현상적으로는 형들이 자신이 죽이려고 하고서 결국에는 상인에게 팔아넘겼지만, 실제 원인자요 인도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보호하시고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는 섭리 과정에서 요셉 자신을 그와 같은 길로 이끄셨다는 것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형님들이 나를 해하려 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고 위로합니다. 여기서 ‘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제아무리 꾸미며 술수를 부리면서 자기들의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뜻을 ‘하나님의 선’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교훈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본문에서 ‘선으로’는 원어로 ‘레토바’(לטבה)입니다. 여기서 ‘ה’는 어떤 ‘방향’이나 ‘장소’를 향한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레토바’는 ‘선한 방향으로’란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역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시간과 공간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시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뜻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선’으로 형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선을 이루실 것에 대한 언약입니다. 요셉은 언약대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닫고 되새기고서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의 계획과 행위는 ‘그 뿐이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가는 ‘길’을 몰라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일을 몰라서 불안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자로서 나의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셨습니다(잠16장9절).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6). ‘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현재부터 미래의 모든 시간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길을 모르고 갑니다. 깜깜한 가운데 걸어갑니다. 보이지 않으므로 인간은 두려워하고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길’이시다는 것은 그분 자체가 밝음이요 빛이요 보임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게 되면 내 인생이 갈 길을 몰라 서성대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며 내일을 향하여 마음 놓고 편하게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과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나의 ‘길’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한 하나의 이치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찾고자 종교를 가지고자 하고 살아갑니다. 오직 ‘참 이치’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이라 하십니다. ‘생명’은 인간의 궁극적인 소원이요 몸부림이요 절규인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 해답이 바로 당신 자신인 ‘예수’라고 증거하십니다. |
따라서 언약자손인 성도들과 교회는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택한 백성 곧 언약 자손은 겁날 것이 없습니다. 어느 누가 해하려 하여도 그 해로운 것을 하나님께서 선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가치 기준인 진(眞),선(善),미(美)를 초월하신 거룩한 자이십니다.
22절부터 마지막 26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애굽을 떠날 것을 예언하고 죽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일백십 세를 살며(22절) 자손이 번창하였습니다(23절). 그리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반드시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예고하며(24절) 자기 해골을 메고 올라갈 것을 맹세하게 하고(25절) 백십 세에 죽게 됩니다(26절).
본문에서 22절과 23절 말씀은, 21절에서 요셉이 형제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한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고 애굽으로 돌아온 후의 긴 세월에 대해서 성경은 단지 50장 22절에서 26절의 짧은 내용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 다섯 구절의 내용에서 애굽의 총리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이 형제들과 가족들을 돌본 말씀의 내용과 죽기 전 형제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과 유언이며 그리고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22절과 23절 두 구절의 내용, 즉 요셉이 형제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한 결과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하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은 요셉이 그의 아버지 즉 ‘야곱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여기서 ‘야곱의 가족과 함께’ 했다는 것은 약속대로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는(20절)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이스라엘 모두를 기르고 돌보았다(21절)는 뜻입니다.
그리고 23절은 22절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써,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장자 므낫세에 대해서는 이렇게 소개하는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길’은 므낫세의 첩인 아람 여인이 낳은 아들입니다(대상7:14). 이는 요셉이, 아들들의 처의 아들들 뿐만 아니라 첩에게서 낳은 자녀까지도 직접 보살폈다는 것을 저자 모세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돌보았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내용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 예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를 찾아 보호하시며 기르셔서, 예비된 아버지의 나라 천국에 들이실 것에 대한 모형입니다. 요셉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 예수님의 모형이며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까지도 찾으시는 것입니다(눅15:8-9. 19:10).
요셉은 십칠 세 소년 시기에 애굽으로 팔려와서 삼십 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일백십 세가 되도록 산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족이 처음 애굽으로 내려올 때에는 칠십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칠십여 년이 지난 후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이스라엘 자손이 번창한 상태입니다.
요셉이 그 자손들에게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24절)고 예고하고 그들에게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는 맹세를 하게 합니다(25절).
이는 요셉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리라는 여호와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족장들의 믿음의 전승입니다.
위의 24절에서 ‘돌보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파카드’(פקד)이며 뜻은 ‘돌보다’, ‘계수하다’, ‘살피다’ 등인데, 이를 직역하면 ‘반드시 마음에 두고 살피실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인도하여 내사’는 사역형으로 하나님께서 누군가(종/모세)를 통해 시켜 불러 낸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문 24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두고 확실히 계수하시며 살피시다가 때가 되면 택한 자를 시켜 그 백성을 한 명도 빠짐없이 불러내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 형제에게 자신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에 올라갈 것을 부탁한 것은 출애굽기 13장 19절에서 성취가 됩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 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라” 이 요셉의 맹세의 부탁이자 예언은 요셉이 죽은 후 400년 후에 성취된 것입니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26절)는 말씀은 아버지 야곱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후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던 왕도 죽은 후에 요셉을 모르는 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320년이 흐른 후의 이스라엘 상황에 대한 내용이 출애굽기 1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