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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그물 쳐도 구름은 달아나고
가슴에 못 박아도 미련은 꿈틀댄다
뒤늦게 피는 꽃들이 더 곱다고 했던가
무릎이 다 닳도록 빌어도 용서 못할
기억 속 벼루에다 슬픔을 곱게 간다
붓 끝이 닿기도 전에 물이 드는 그대여
인연은 거미줄에 매달린 뼈인 것을
감겨서 앙상해진 우리의 삶인 것을
갈대여, 우리 별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어디를 돌아봐도 손 끝은 어둠이다
넘을 수 없는 벽이 가시로 막아서도
서로가 켜는 촛불이 길을 열고 앞선다
이제는 함께 가자 물처럼 섞여 살자
외마디 내지르며 울다가 잠들어도
기어서 멍든 강물과 함께 떠날 줄이야
이렇게 고운 새가 내 속에 살 줄이야
삼십 년 진흙 속에 묻혔던 내 꿈 새알
합장한 연꽃 속에서 함께 살고 싶었다
시월의 들길에서 손톱을 물들이고
반지도 없는 삶에 단풍이 대신 붉다
애증의 씨를 받아서 곱게 싸는 기다림
햇살은 바람으로 들판을 빗고 있다
하얗게 이가 슬어 가려운 그리움에
이별은 꽃잎 흔들며 들국화로 서 있다
한곳에 모여 사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풀이 살 맞대고 더불어 피는 마을
한 줄기 저녁 연기로 열반하는 그대여
1. 스님과 주님의 경계에 연꽃이 핀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휴일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혼자 여행을 했다.
나는 가출이라도 하듯 새벽에 집을 나섰다. 공기는 신선했지만 마음은 착잡했다. 나이 어린 연년생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 2,500여 년 전 카필라왕국에서도 새벽에 이런 심정으로 출가한 분이 있었다. 마부 찬나는 혼자서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버텼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마부를 설득했다. 인생이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것이다. 독생독사(獨生獨死)다. 어찌 동반자가 있겠는가.
나는 첫 번째 오는 버스를 무작정 탔다. 그 당시 내게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 ‘독생독사(獨生獨死)’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 그러니 나도 홀로 간다. 휴일에도 자식들 봐주지 않고 가출하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만과 아이들의 원망이 드높았다. 양심의 가책에 업혀 함께 뒤따라오는 가족들의 환영을 쫓아버리려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 실마리는 00스님 뵈러 절에 간다는 제자 학생들이 제공해 주었다. 문득 '스님'의 명칭이 궁금해졌다. 성당에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 교회에서는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절에서는 왜 ‘스님’이라고 할까?
골똘히 사색하다가 불현듯 감이 잡혔다. 인생은 경제현상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도 마찬가지다. 솔나무가 소나무로, 딸님이 따님으로, 활살이 화살로 발음되고 인정받아 표준어가 된 것과 같다. ‘님’이야 명사 뒤에 붙는 ‘존칭 접미사’다. 그렇다면 ‘스'만 해결하면 간단하다. 우리말에 ’스‘라는 명사는 없다. 어떤 명사에서 받침이 탈락한 것이다. ’승(僧)‘이다. 받침을 탈락시키면 ’스님’이 된다. 발음이 부드럽고 편리하다. 언어의 경제현상이다.
한자어인 ‘승(僧)’을 우리말인 ‘중’으로 바꾸면 어떨까. 중국 문화를 숭상하던 시대가 끝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짧은 낱말에 한자어(승)와 우리말(님)이 혼용되었다. 앞 자만 바꾸면 다정하고 친숙한 우리말이 된다. ‘중님’이 되는 것이다. 앞뒤에 모두 받침이 붙어 있어 발음하기가 불편하다. 언중들의 불편함을 편하게 해주는 것도 자비다. 앞 자의 받침을 떼어 내면 발음하기가 훨씬 편하고 부드럽다. 그러면 ‘중님’이 ‘주님’이 된다. 한 쌍의 원앙처럼 다정해 보인다.그리고 ‘스님’에 비해 개념과 이미지가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 세계에서 1인자라는 뜻이다. 스님과 주님 경계에 아름다운 연꽃이 핀 연못이 생긴다.
2. 정신을 미치게 하는 옴
한글이 아닌, 라틴어로 된 성경이라면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을까. 목숨을 건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으로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라틴어 바이블이 일반 신도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부패를 공박한 그의 95개 조항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촉진시켰다. 그의 사상과 저술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운동은 개신교를 낳았으며, 사회·경제·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이런 종교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도 여전히 중국 문자인 한자와 고대 인도어인 범어가 혼용되어 있다. 해설 책이 있지만 불교 신도들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사극에 나와 유행했던, ‘옴 마니 반메 훔’의 뜻이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임을 아는 신도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 불교 경전은 2,200년이 훨씬 넘은 한자어 사용으로 온통 한자로 표기돼 있다. 불교 용어도 이런 역사적인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도 읽지 못하는 중국 고대 한자가 지금 우리나라에는 왕족의 미라처럼 잘 보존되어 있다. 온통 외래어가 범람해서 우리 의식에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옴이 된 사례가 무수하다. 길거리 상점이나 물건 이름만 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본질에서 너무 멀리 가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문화가 범람한 상태다. 이런 곳엔 창조적 해가 뜨지 않는다. 해가 뜨지 않으면 생명이 제대로 살 수가 없다. 결국 진드기가 창궐해서 병이 들고 시들어 버린다. 진드기는 주로 습하거나 잘 보이지 않는 비밀스런 곳을 좋아한다. 악의 습성과 닮았다. 진드기에 의해 생기는 병을 옴이라고 한다. 옴은 방치하면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가렵다. 이른바 미치는 것이다.
1980년 봄, 남쪽 지방에서 강력한 진드기가 창궐했다. 3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발병 원인과 진상을 규명하는 역사적 작업이 새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적폐 청산이라는 칼날로 썩은 부위를 도려내서 새살을 이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해 늦가을, 숲속에 투입된 강력한 진드기에 의해 발병한 옴 때문에 참혹한 수난을 당한 스님들의 망가진 불심과 자존심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숲속에서의 옴은 적폐가 아닌가? 세금을 내지 않아서인가? 옴은 신기하게도 악의 속성과 닮았다. 옴은 진드기(Scabies mite)에 의하여 발생되며 그 증상은 밤에 심해지는 가려움증이 특징적이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에 생기는 옴이다. 독재자의 권력이다. 스님들은 중생들의 고되고 아픈 마음을 달달하게 해주는 붓다이다. 춥고 불편한 토굴에서 꿀을 생산하는 성직자다. 그런데 벌꿀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동물이 있다. 바로 벌꿀오소리다. 수백 마리의 벌들이 쏘아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집을 들쑤시는가 하면,코브라 머리를 물어뜯다 독이 퍼져 기절했다가도 한두 시간 후에 다시 일어나 남은 몸통을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개념 없는 초원의 깡패’로 불린다. 이 벌꿀오소리 때문에 1980년 10월 27일, 많은 스님들이 강제로 붙잡혀 가서 온갖 고문을 당해 정신적인 불구자가 되었다. 당시 벌꿀오소리 우두머리가 간접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치타나 표범 같은 천적을 만나면 벌꿀오소리도 죽는다. 국민이 바로 치타나 표범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만이 벌꿀오소리를 퇴치하고 통제할 수가 있다. 이제 국민이 빌려준 보검을 뽑았으니 법난의 진상이 규명되고 주범은 죄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리고 바닥을 친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계를 떠난 100만 명 남짓 불교 신도들이 돌아 올 수 있다. 아울러 자존심과 영혼까지 멍들거나 미쳐버린 피해 스님들이 제 자리로 돌아 올 수 있다. 또한 스님들이 쌓아온 불력과 인고의 에너지가 축적의 시간을 거쳐 ‘스케일 업’ 되어야 한다. 10․27법난으로 받은 상처는 단기간에 아물지 않는다. 다양한 시행착오와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치밀하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계가 자비와 용서의 자세로 도전적인 목표, 공감의 축적 그리고 범국민적 네트워킹을 통해 이뤄내는 '스케일 업'의 가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그래야 스님들이 다시 매미가 될 수 있다.
3. 옴! 금선탈각의 울림
매미가 성충으로 사는 기간은 7일 또는 길어야 30일 남짓이다. 그런데 매미가 되려면 적게는 6년, 많게는 17년간 애벌레 과정을 견뎌내야 비로소 성충이 될 수 있다. 차갑고 어두운 땅속이나 썩은 나뭇등걸 속에서 그 오랜 시간을 살다가 성충이 되어 탈각을 한다. 애벌레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매미로 대변화를 한다. 매미는 나무 위에서 우아한 금빛 날개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짝을 찾고 삶을 노래하는 대변신을 감행한다. 금선탈각의 비상, 축복 받은 스님만 옴! 하며 대오의 노래를 할 수 있다.
옴은 불교의 진언(眞言)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음이다. 작은 매미에게서 어떻게 그런 웅장한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생존과 번식 본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전해 주고 떠나려는 깨달음의 울림이 아닐까. 법난의 진실과 화해의 길을 찾아 만행길을 떠나라고 소리치는 부처님의 죽비소리가 아닐까. 화장대 위에 누워 한 줌 재가 될지라도 불의에 항거해서 삼보를 지켜내라는 관세음보살님의 목탁 소리가 아닐까.
누구나 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축복받은 사람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누구나 매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마저 벗을 수 있는 자만이 금선탈각의 비상을 할 수 있다. 세상을 향해 진실과 화해의 진언, ‘옴!’을 외칠 수 있다.
4. 연꽃, 그 위대한 용서의 합장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기록된 붓다의 게송이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 어디서 올라오는가. 진흙에서 올라온다. 진흙이 있어서 연꽃이 올라온다. 그래서 번뇌가 스승이다. 진흙과 연꽃은 둘이 아니다. 둘 다 내 마음의 꽃이다. 내가 째려보면 불꽃이 되고, 내가 바로 보면 연꽃이 된다. 편견을 걷으면 연꽃이 왜 진흙에 물들지 않는지, 바람이 왜 그물에 걸리지 않는지 알 수 있다. 진흙과 연꽃, 그물과 바람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상대를 하나로 보면 물듦도 없고 걸림도 없어진다는 게 붓다의 깨달음이다. 모두가 내가 만든 꽃이다. 법난의 아픔과 상처도 마찬가지다. 옴도, 벌꿀오소리도 내 인연의 업보가 뿌리내리고 있는 진흙이다. 이렇게 보면 한 몸이 된다.
법정 스님은 “용서는 가장 큰 마음의 수행이다.그리고 상처의 가장 좋은 치료약은 용서하는 일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도 “살면서 얼마나 많이 용서했는가에 따라 하느님은 당신을 용서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살아있는 붓다라 일컬어지는 달라이 라마의 평생 화두는 용서다. 어느 날 빅터 챈이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적을 용서하는 것이 한 사람의 영적 성장에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달라이 라마가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일이며,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을 바꿔 놓을 수도 있습니다. 미움이나 또 다른 파괴적인 감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의 감정들을 키워야 합니다. 자비와 친절이 그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강한 자비의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용서는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용서는 이런 긍정적인 감정들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의 이런 말씀이 있다. 독 묻은 화살이 날아와 허벅지에 박혔을 때 먼저 그 화살부터 빼는 게 급선무라고 말씀하셨다.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 있는데도 독 묻은 화살을 쏜 사람이 어느 계층인지, 왜 쏘았는지, 누가 사주했는지 따지다 보면 알기도 전에 그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 분은 가슴에 박힌 화살은 뽑지 않고 무엇을 구하려고 가족을 떠난 것일까.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또 궁금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부인과 갓 태어난 자식을 뒤로 한 채 싯다르타는 왜 출가를 했을까. 그는 무엇에 목이 말랐을까. 무엇이기에 그토록 절박했을까. 아소다라의 가슴에 남는 피멍과 라훌라가 성장하며 감당할 ‘거대한 원망’을 뒤로 하고 수행자가 돼버렸다. 아소다라는 원망과 분노 대신 용서를 택했다. 용서는 과거를 잊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고통이 양쪽 모두의 편협한 마음 때문에 일어났음을 자각해야 한다.
붓다가 남긴 진짜 사리는 과연 무엇일까. 사리는 우리 몸의 기운이 막힘없이 흐를 때 생기는 골즙의 결정체라고도 한다. 즉 막힘이 없는 흐름의 결과물이다. 붓다는 그걸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면 붙들게 되고, 붙들면 막히게 된다. 그럼 흐르지를 못한다.“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했다. 경전에는 인간사의 번뇌와 갈등을 녹이는 용광로가 들어 있다. 붓다의 진신 사리, 숨 쉬는 진신 사리는 경전이다. 경전 속의 이치, 진신 사리는 바로 용서가 아닐까. 왜냐 하면 용서는 막힌 걸 뚫기 때문이다. 용서의 의미와 깨달음은 끊어짐이 없는 강물처럼 푸르고 깊게 흘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이 이 지구라는 들판에서 살아남게 한, 이타행이라는 강이다.
종교는 뱀이라고 한다. 뱀을 잡을 때는 머리를 잡아야 한다. 허리나 꼬리를 잡으면 오히려 물리고 만다.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종교는 그냥 뱀이 아니다. 맹독을 품은 독사다. 머리를 잡을 땐 약이 되지만, 꼬리를 잡을 땐 독이 된다.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생명을 죽이기도 한다. 분노를 잡으면 물린다. 용서라는 머리를 잡아야 한다.
붓다의 진신 사리는 우리 안에 있다. (끝)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으네요 잘 보았습니다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
나무 관세염 보살 .... 옴 살봐 못 자놔~~~ 옴 살봐 못 자놔 ~~~ 건강한 삶이 보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