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 23분. 골대와 30미터 거리에 세워진 공 앞에 정우영과 김진수가 섰다. 정우영은 “이번에 내가 한번 차 볼게”라고 말했다. 앞선 프리킥 기회에서 김신욱에게 정확한 택배를 보냈던 김진수도 자신이 있었다. 최종 판결은 벤치에서 내렸다. 신태용 감독은 오른손을 앞으로 강하게 밀며 신호를 보냈다. 정우영에게 맡긴다는 뜻이었다.
5미터 가량을 힘차게 달린 정우영의 오른발 발등을 시원하게 맞고 떠난 공은 신기한 궤적을 그렸다. 솟아오르는 듯 했던 공은 갑자기 중력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떠가며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회전 프리킥이었다. 대표팀 역대급 득점로 회자될 환상적인 골이 78번째 한일전의 승리를 불렀다.
정우영이 긴 시간 기다린 장면이었다. 경기 후 그는 “그 동안 노력한 것이 이 시점에 터질 줄은 몰랐네요”라며 본인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돌아보면 무수한 연습과 도전, 노력이 만든 한 골이었다. 경희대 시절부터 중거리 슛과 프리킥을 자신의 경쟁력으로 만들기 위해 새벽이면 후배인 골키퍼 이범수(경남FC)를 깨워 훈련장으로 나갔던 그였다.
무회전 프리킥은 빗셀 고베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연습했다. 올 시즌 소속팀인 중국 슈퍼리그 충칭 당다이 리판에서 두 차례 무회전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렸다. 대표팀에 본격적으로 발탁되기 시작한 지난 2년 6개월 동안 틈틈이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했고 비난도 받았다. 정우영 보인도 “댓글 여러 번 봤어요. 걔는 맨날 홈런만 차냐고…”라며 웃었다.
정우영은 수비형 미드필더다. 공격적인 전개보다는 하프라인 아래에서의 대인마크와 협력 수비가 주임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우즈베키스탄전이 대표적이었다.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더블 보란치로 나서 헌신적 역할을 해 준 그를 숨은 MVP로 꼽았다. 하지만 대중적인 호평은 거의 없었다.
모로코전에서도 교체 투입된 과감한 몸싸움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11월 평가전에서도 세르비아를 상대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신태용 감독과 코치들이었다. 정우영은 이번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전한 4명 중 1명이다.
그의 가치는 프리킥 골이 터지고서 재평가됐다. 무회전 프리킥의 아이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성공률은 고작 3% 내외다. 수십 차례를 시도해야 한 골이 나온다. 정우영은 지금까지 희생과 헌신에 초점을 맞춘 역할이 그 골이 나오면서 제대로 인정받았다. 그는 “대표팀 선수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왕관의 무게를 이겨야 한달까요? 그래도 앞으로 제가 주로 할 일은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본분입니다”라고 말했다.
진화와 발전은 노력의 증거다. 그라운드 위에서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수들은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한다. 대표팀은 그런 노력으로 키운 실력을 인정받아 가는 곳이다. 대표팀에 선발 된다는 것은 요행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수의 진가를 확인하기에는 소속팀에 비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속팀에서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대표팀에서의 부진 한방에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
김신욱은 긴 시간 대표팀에서 머리 밖에 쓸 일이 없는 선수라는 이미지로 비쳐졌다. K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하고, 긴 시간 동안 꾸준한 득점력을 보여줬지만 대표팀을 중심으로 보는 이들은 키만 크지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선수라고 평가했다. 이번 동아시안컵 전까지 A매치 38경기에서 3골을 넣는 데 그쳤으니 숫자만으로 제시하면 반박하기는 어려운 주장이었다.
왜 대표팀에서 김신욱은 계륵이 됐을까? 그의 쓰임새가 제한됐기 때문이다. 김신욱의 경쟁력 중 극히 일부만을 활용해 왔다. 196cm의 장신에서 나오는 제공권은 경쟁력인 동시에 그의 역할을 한정시키는 고통을 줬다. 팀이 지고 있을 때 투입된 그는 전방으로 날아오는 높은 공을 동료들에게 연결해 기회를 창출하는 일만 맡았다. 브라질 월드컵 벨기에전 이후 3년 6개월 동안 그에게 온 A매치 선발 출전 기회는 단 1번에 불과했다. 나머지 경기는 모두 경기 막판 극히 짧은 시간의 투입, 혹은 상대가 리드를 하며 충분히 수비적 대응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투입이었다.
이번 동아시안컵에서 두 차례 선발 출전한 그는 ‘김신욱은 발 밑도 좋다’던 평가를 증명했다. 소속팀을 중심으로 김신욱을 평가한다면 누구도 반박 못할 부분이지만 대표팀 선수 김신욱으로서 그것을 입증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김신욱은 “솔직히 국가대표로 죽어가던 선수였는데 신태용 감독님이 저를 살려줬습니다”라고 말했다. 신태용 감독은 전술 미팅 때 김신욱을 향해 목적성이 희미한 롱볼을 올리는 걸 자제했다. 다른 공격수들처럼 발 밑으로 주고, 연계를 할 것을 주문했다. 대신 김신욱에게도 수비 전환에서는 적극적인 압박을 강조했다.
자신을 196cm의 장신 공격수로 한정하지 않고, 골을 넣어야 하는 공격수이자 팀의 전술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일원이라는 동일한 잣대를 준 것만으로 김신욱은 긴 시간 누르던 압박감에서 해방됐다. 이번 대회에서 그가 보여준 활약은 기존의 ‘국가대표’ 김신욱에 대한 평가를 180도 바꿔놨다. 그 결과 20년 만에 한일전 멀티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며 역대급 승리의 주역이 됐다.
정우영도, 김신욱도, 그리고 승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 월드컵이 간절하다. 선수로서 최고의 무대에서 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골이 없어서, 승리가 없으면 늘 혼이 나야 하는 게 국가대표의 숙명이지만 이번 동아시안컵과 한일전을 통해 그들은 재평가를 받고 있다.
신태용 감독도 마찬가지다. 축구인이라면 모두가 원한다는 국가대표팀 감독이 됐지만 지난 4개월 동안 가시밭길만 걸었다. 한 감독이 4년 간 겪기도 어려울 무수한 일들이 4개월 동안 벌어졌다. 신태용 감독과 대한축구협회가 빌미를 제공한 것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와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은 비난이었다.
대회 중에는 취재진 앞에서 하소연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결과를 내도 부끄러운 승리라는 표현이 나오니 다 함께 노력하자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상대는 우리에게 지고 싶을까요?”라며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어서는 “리피 감독과 할릴호지치 감독이 하는 말은 품격이고, 제가 하는 말은 다 핑계고 변명이 됩니다”라며 섭섭함도 나타냈다. 결과를 내는 수 밖에 없다며 정리했고, 결국 그 다짐을 지켜냈지만 대표팀 사령탑이 신태용 감독에겐 영광이 아닌 형벌과 같은 자리가 된 것 같아 측은함도 들었다.
신태용 감독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만큼 성장한다. 그는 이번 대회에 상대를 분석하고 철저한 맞춤 전술로 무력화시켰다. 중국전은 경기를 지배했던 전반전에 1골이 더 나왔다면 이번 일본전처럼 됐을 패턴이었다. 북한전이 끝난 뒤 상대였던 예른 안데르센 감독은 “한국의 수비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며 인정했다. 일본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반 2분 이후에는 모든 면에서 한국이 압도했다.
한일전을 이틀 앞두고는 과감한 전면 휴식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코칭스태프가 신중한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전의 한일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휴식이었지만 신태용 감독은 하비에르 미냐노, 이재홍 두 피지컬 코치의 전문적 의견에 귀 기울이고 과감한 선택을 했다. 한일전 이후 선수들은 “긴장감과 압박감을 이완시킨 휴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동아시안컵 우승과 역사에 남을 한일전 대승에도 신태용 감독은 경기 후 헹가래를 자제했다.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우즈베키스탄과 비기며 본선행을 확정한 뒤 헹가래를 했지만 팬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미리 터트린 샴페인은 지금 신태용호를 바라보는 불신의 씨앗이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경기 후 선수들을 진정시키고 성원해 준 팬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경기 내내 골이 터져도 그는 최대한 신중함을 유지하려 했다. 경기 후 그는 “2016년 1월 카타르 도하에서 감독 커리어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정말 큰 자산이 됐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이유를 설명했다. 23세 이하 대표팀 간의 한일전에서 2-0으로 이기다가 2-3으로 역전패를 당했던 그는 두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겼지만 우리의 문제점은 존재합니다. 월드컵이 진정한 무대입니다. 계속 보완하겠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16일 한일전이 끝나고 기자회견에서 나온 신태용 감독의 말이었다. 2017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충분히 기뻐해도 될 결과였지만 그는 차분했다. 압도적인 승리로 불신의 터널을 빠져나왔지만 그는 월드컵이 이 팀을 평가할 진정한 무대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한일전 승리를 끝이 아닌 과정으로 삼고 있었다. 그렇게 신태용 감독도 선수들과 함께 진화하고 있었다.
글=서호정(일본 도쿄)
사진=대한축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