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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 번제와 솔로몬의 기도 / 왕상 3:1-1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기도와 경건 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충격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비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하기도 하고, 겸손하게도 합니다. 세상에서의 인생들의 삶을 보면, 육신적으로는 성공하는 것 같은데, 영적으로 보면 오히려 실패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한 삶을 산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님이 보실 때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한 인생이 처음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실패의 삶으로 인생을 마친 사람을 찾을 수가 있는데, 그가 곧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의 인생 여정을 보면, 영광스러운 생애와 또한 수치스러운 생애의 양면성을 볼 수 있는데, 그의 삶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후대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경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본문 4절에는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본, 솔로몬의 일천 번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4절과 5절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그 정성을 보시고, 무엇이든 구하면 주겠다는 응답을 하셨다고 이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이해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3절까지의 내용은, 솔로몬이 이방인과 인연을 맺어 혼인을 하고, 또 산당에서 제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산당에서 제사하는 것은 이방 풍속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이방 여인과 혼인을 하고, 이방 풍속을 따라 산당에서 제사를 했다는 것은, 왕으로써 행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솔로몬은 왕으로써 행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인데, 그 일에 대한 책망은 하지 않고,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솔로몬에게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죄를 행한다고 해도, 솔로몬과 같은 정성만 하나님께 보이면 된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산당에서 행한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행한 기브온의 산당에는, 여호와의 법궤가 없습니다. 당시 여호와의 법궤는, 다윗에 의해 다윗 성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법궤가 존재하는, 다윗 성에서 제사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기브온의 산당에서 번제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시고, 응답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생각하면서, ‘과연 그렇다. 솔로몬이 잘못한게 있는데도, 왜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받으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가?’라는 혼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이, 일천 번제를 드린 정성을 보셨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정성을 받으신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러면 이방여인과 혼인하고,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성으로 여기시는가?’라는 혼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혼란의 이유는, 인간의 종교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천 번제’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천 번의 제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일천 번제가 천 번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솔로몬은 천 일 동안 매일 제사에 매달렸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솔로몬이 천 일 동안 매일같이 제사 드렸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대하 1:6절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곧 일천 번의 번제가 아니라 천 마리의 희생 제물로 드린 번제였다는 것입니다. 4절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본문 4절을을 보면,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가서 제사한 이유는, 그곳의 산당이 매우 컸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산당이 커야했던 이유가, 천 마리의 제물로 드리는 제사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마치 솔로몬이 천 번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그 정성을 보시고 기도를 응답하신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리고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것을 만들어, 하나님께 정성을 보이라는 것은,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시고,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솔로몬의 신앙이나 일천 번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립니까? 그러면 솔로몬이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지도 않고, 일천 번제 역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입니까? 답은 ‘그렇습니다’입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기도 응답에 조건을 달으시고, 인간의 정성을 요구하고, 그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었을 때 기도에 응답하는 그런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평생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길에서 헤맬 뿐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을 기억합니까? 2:3-4절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다윗의 유언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솔로몬이, 다윗의 유언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1절을 보면 솔로몬은 애굽 왕 바로와 인연을 맺어, 그 딸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애굽과 동맹을 맺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백성들도 솔로몬도 산당에서 제사하였습니다. 물론 2절을 보면, 산당에서 제사하게 된 이유를, 여호와의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여호와의 전이 없다면, 법궤가 있는 다윗 성으로 가서 제사하는 것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산당에서 제사한다는 것 역시,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는 이어 받았지만, 그 신앙은 잊지를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결국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기억하며, 그 유언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에게는 다윗의 유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을 살아간 것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곧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이 지시하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그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가 원하고 나에게 즐거운 나의 인생을 살기를 힘쓰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문의 내용에 대한, 이해하지 못할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산 것도 아닌데, 왜 솔로몬의 기도를 응답하셨을까?’ ‘일천 번제가 산당에서 제사한 것이었는데, 왜 그 제사를 받으셨을까?’ 여러분은 왜 이런 혼란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솔로몬의 행적과 연관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그러한 혼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볼 때, 신앙생활에 철저하고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의 기도와, 신앙생활이 엉터리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까? 아무리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구절을 머리에 담고 있다고 해도, 신앙생활이 바른 사람보다 엉터리인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면, 과연 그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기도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신앙을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을 우리가 본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의 자리에 있고자 하는 악행이기 때문입니다.
3절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 3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였고,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이방 여인과 혼인하고, 산당에서 제사하였다고 해서, 다윗의 모든 말을 어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여호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순종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와 하나님의 응답을, 연관 지어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담긴 정성을 보시고, 나타나셔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과 상관없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결국 기도응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신다는 증표도 아니고, 신앙의 증거물도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누구의 기도라도, 응답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사 그가 악행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안된다면,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실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든가,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라든가, 정성을 보이는 사람 등등, 응답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음을 생각하기에, 제 말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 응답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응답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그와 교통하신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과도 교통하지 않으심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의 기도에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아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 것입니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도,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리스도로 인해 응답하시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행실을 보시고, 그것을 조건 삼아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아간 것처럼, 우리 역시 매일 같이 내 인생을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은 세상이고, 얻고 싶은 것도 세상에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응답하시고,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의 빛이시고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 같이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기를 소망하면서,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는 믿음을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7-10절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은 자신이 다윗을 대신 해서, 왕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합니다. 곧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이 어떤 일을 해야 할 사람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왕이 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을 바라보기에, ‘종은 작은 아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내용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믿음이 좋아서 자기를 위해 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떤 인간으로 고쳐가고, 새롭게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의 재판을 위해, 선악을 분별하게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의 왕위가,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역할을 위해 있는 것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는 자와, 다스림에 있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항상 자신만을 바라보는 인간을,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느냐’를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알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성도의 기도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의 일을 바라본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기도는 모든 것이, 자신의 문제 해결로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일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만 잘되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로 여길 뿐입니다.
11-13절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이렇게 말하지만, 이 말씀을 바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부와 영광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부와 영광을 얻기 위해, 바른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에게 부와 영광도 주시는 것은, 인간의 부와 영광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와 영광을 복이라고 여기면서, 인간의 행위나 기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면, 그리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입은 모든 부와 영광이라는 것도, 결국 들의 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이 구하지도 아니한 부와 영광을 주신 것은, 바른 기도를 한 것에 대한 상이 아니고, 부와 영광이 좋은 것이기 때문도 아니라, 부와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어야 할 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의 기도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에서, 어떤 여러분의 모습을 봅니까?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이,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에 매인 나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를 고쳐 가시고, 새롭게 하시는 흔적이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도의 내용에 날 위한 것이 없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바른 기도를 했다고 해서, ‘나는 바른 성도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역시 자신에게 매어 있는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기도를 했으니까, 나는 바른 성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끝까지, 나 자신을 보지 않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는 솔로몬이 왕이 된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다윗 왕의 자리,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역할을 생각하므로, 지혜를 구하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도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 세상에 복음을 맡기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 세우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역할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G. 웰스라는 사람이 쓴 소설 가운데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한 사람의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도 성전 안에서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소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종교 수양을 쌓는 것과 같은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오냐, 무슨 일이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습관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나 기도할 때, 먼저 내가 지금 누구 앞에 있는가 스스로 질문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말 하나님을 임재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 속에서, 환경의 변화, 조건의 변화만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성실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성실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그 기도응답을 통하여, 성실한 삶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실한 삶을 통해, 은혜를 누리는 모습을 다윗처럼,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후손들이 모델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모델로 나타나 주신, 주님의 성실하신 삶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 주셨던, 성실한 삶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지혜로운 분별을 하며, 온전히 삶의 현장을 청종하는 지혜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때, 성실한 삶을 통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성실한 자는, 공의와 정직을 통해 세상 속에서도 성실합니다. 성실한 자는 하나님의 성실한 은혜를 누립니다. 성실한 삶을 위해,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향한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오니,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의 지혜를 얻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지혜를, 세월을 아끼는 지혜를, 성령 충만함과 찬송과 감사하는, 삶의 지혜를 주옵소서. 지혜와 지식의 근본인 여호와를 경외하며, 주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가족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인생의 본질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사랑하고 인내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