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 15,20-27ㄱ; 루카 1,39-56
+ 찬미 예수님
1950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에, 전 세계 4억 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대표하여 70만 명의 신자들이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1941년까지 80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서명하여 건의한 내용에 대한 교황청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오 12세 교황님은 이미 1946년에 전 세계의 모든 주교님들께 편지를 보내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을 교의로 규정하고 선포해도 좋은지 지혜를 다하여 판단하고, 주교님께 속한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를 원하는지 응답해 주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답변 결과는 거의 만장일치의 찬성이었습니다. 마침내 4년 뒤인 1950년, 교황님은 성모 승천 교의를 반포하셨고, 70만 명의 신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로 이를 환영했습니다.
교황님은 이날 새로운 교의를 반포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오랫동안 믿어오고 기념해 온 바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성모님의 승천에 대한 믿음은 교회 내에 자리하고 있었고, 4-5세기 경부터 축일이 기념되고 있었으며, 이 신비를 기념하는 수많은 음악과 성화가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왜 새삼 이 교의를 20세기에 반포해달라고 청원했던 것일까요? 1950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지난 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 이성에 커다란 기대를 품었습니다. 인간 이성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 보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당연히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킬 것이라 여겼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20세기가 되면 종교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거나 아예 종교가 소멸할 것이라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산업 혁명을 통해 이룬 기술력과 이성의 힘을 내세워 인간이 한 일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를 식민 지배하고, 착취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해 전쟁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나치즘, 파시즘, 일본 제국주의 등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등장했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약 1억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한없는 기대를 품었지만, 이성은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인류는 이제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힘에 의한, 교만스러운 정복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이 우리를 희망으로 이끈다는 것을, 하느님만이 참으로 우리의 희망이시라는 것을,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님을 통하여 발견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미 묵주기도를 바칠 때,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성모님께서 하늘에서 전구하고 계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1858년 프랑스 루르드와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하셔서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모 승천 교의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된 것은 오늘 제1독서인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계약 궤는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던 궤로서,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계약 궤는 성모님을 상징합니다.
제1독서는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꿈을 연상케 하는데요, 해와 달은 요셉의 부모, 열두 개의 별은 요셉의 형제인 야곱의 열두 아들 곧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이 여인은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상징하면서, 온 우주의 창조주인 메시아를 낳으신 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붉은 용은, 가나안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시편 73,13-14)을 연상케 합니다.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붉은 용이 아이를 삼켜 버리려 하고 있는데, 이는 한편으론 예수님이 태어나시자마자 죽이려 했던 헤로데를, 다른 한편으론 묵시록이 쓰일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세력을 상징합니다.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는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졌고, 여인은 광야로 달아납니다. 여기에서 여인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집니다. 이 여인은 메시아를 탄생시킨, 그리고 광야의 길을 걸어간 구약의 이스라엘과, 지상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참 이스라엘의 딸이시면서 메시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신 성모님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왜 ‘계약의 궤’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으신 후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십니다.
사무엘기를 보면, 다윗 임금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긴 계약 궤를 되찾아 오기 위해 ‘일어나’, ‘유다의 한 고을’로 ‘갑니다.’(2사무 6,2; 칠십인역) 복음에서 성모님은 ‘일어나’ ‘유다의 한 고을’로 ‘가십니다.’(원문 직역). 구약에서 다윗은 계약 궤를 찾으러 가지만, 신약에서는 계약 궤이신 성모님께서 직접 오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자 ‘큰 소리로 외쳤’(아나포네오)는데요,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된 이 ‘아나포네오’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의 희랍어 번역본(70인 역)에 다섯 차례 등장하는데, 다섯 번 모두 계약의 궤 앞에서 드리는 전례적인 노래를 의미했습니다.(1역대 15,38; 16,4-5.42; 2역대 5,13) ‘세례자 요한이 태 안에서 뛰놀았다’는 구절은 또한, 다윗이 계약 궤를 모셔 오면서 기뻐하며(2사무 6,12), 춤추었다(2사무 6,16)는 구절과 관련됩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가량 머무는데, 다윗도 계약의 궤가 오벳 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무르게 합니다(2사무 6,11).
이처럼 주님의 참된 계약 궤이신 성모님께서는, 태중에 아드님을 모시고, “하느님께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라고 노래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이라 노래합니다. 이러한 권세와 권력과 권능은, 그리고 성모님께서 노래하신 ‘통치자’들은,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착취하는 나쁜 힘들을 의미합니다.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광복절 미사 중에 이러한 말씀을 듣는 것이, 과연 우연한 일일까요? 성모님의 노래는,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한 독립투사의 노래처럼, 우리 민족의 노래처럼 우리 마음에 울립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5세기 초부터 8월 15일은 성모님의 축일이었고, 9세기에는 오늘을 8부 축일로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모님 축일에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성모님과 우리나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1841년 교황청이,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정해 달라는 앵베르 주교님의 청을 받아들인 이래, 성모님은 줄곧 한국 교회의 주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희망으로 초대하십니다. 성경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입니다. 이집트로부터의 해방, 죄로부터의 해방,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복음입니다. 토마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 투사들의 피와 눈물로 얻은 광복의 날에, 우리가 참된 해방과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귀하게 얻은 해방과 자유를 도로 넘겨주는 일이 없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어떠한 힘도,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성모 승천을 통해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 앞서 하늘에 계시며, 오늘도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는 성모님께 우리 또한 인사드리며 기도드립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https://youtu.be/PJcSyaRU0kc?si=p_sGkI0ojW3aTqzi
영상: 성모 승천 교의 반포, 1950년 11월 1일, 성 베드로 광장, 로마
티치아노, 성모 승천, 1516-1518년
출처: Assumption of Mary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