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체제
성막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예표하며 둘째,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예표하며 셋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단계를 예표하는 요소이다(Chester K. Lehman).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과 동일시 하셨는데(요 2:19) 이 성전은 성막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막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2)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과 같이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섬기신 참 장막은 옛날의 성막보다 월등하였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성소였던 성막은 천국 성소의 그림자이며 모방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막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엡 2:19-22 참고)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인 천국의 성소를 예표한다는 점(계 21:3, 22)에서 고유한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본문의 대제사장 위임식과 더불어 그 회막에서 친히 그의 백성을 만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약속(42-46절)은 성막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충분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 위임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것이며 이것은 제사장직의 신적 권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성막은 구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임재를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 위임식의 주인공이신 하나님
제사장 위임식의 특징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목적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의 영속성을 확립하는데 있다(9절). 이렇게 함으로써 아론의 계열만이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소견에 따라 사사로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할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고유한 업무를 규정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제사의 거룩성을 유지하게 해 준다.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을 자들이 희생 제물이 될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는 의식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비적인 절차였다(10절). 이 의식은 성막 문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만나 주시고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신다. 이 역시 제사장직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회막 문에서 의복을 입고 기름부음을 받고 속죄를 위한 안식과 제물을 온전하게 태우고 그 피를 아론과 의복 그리고 그 아들들에게 뿌리는 위임식의 절차는 철저하게 여호와 앞에서 행하여졌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여호와께서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제물을 받으시는 주인공이시다. 따라서 제사장의 위임식은 살아계신 여호와께서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백성에게 선포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이 의식을 통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속죄제나 위임식에 드려지는 제물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두 차례씩 제단 위에 드리는 제물 역시 여호와의 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38-39절). 이 제물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과 밤이 시작되기 직전인 저녁에 드려졌는데 이것은 하루 일과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에서 시작되며 여호와와 더불어 끝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여호와께서 그들과 친히 함께 일상 생활에 참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드린다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 종교적 제의가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종교적 제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신의 임재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제의는 여호와의 임재를 증거하는 행위인 것이다.
2.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46절)고 하신 말씀에서 성막 예배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예배의 절차와 성막의 집기들은 한결같이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며 나아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만나신다는 외형적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짐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막에서 진행되는 모든 절차와 양식은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성막 예배에 참여하는 백성은 누구나 그들과 함께 계시는 여호와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성막 예배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성막은 처음부터 끝가지 여호와의 임재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45절)이라는 약속은 이 성막을 가리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막 예배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스라엘은 성막 예배를 통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성막 건설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성막을 건설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외형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46절).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막은 시내산 언약의 외형적 증표(seal)가 된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계실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성막의 존재를 통해 여호와의 임재를 늘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계 21:3)고 기록한 요한 사도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막은 하나님의 왕궁과 다름없었다. 하나님은 이 궁정에서 그 백성과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때문에 다른 나라 백성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통치자인 왕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보여준다. 곧 말씀으로 그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앞세워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통치는 전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말씀 통치의 구체적인 구현이 바로 시내산 언약이었다. 이른바 율례와 법도를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에 담아 놓으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힘의 통치가 아닌 말씀의 통치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체(政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형적인 형태의 법률이나 정치 체제를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율례와 법도라고 하는 무형의 법으로 통치되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말씀인 것이다. 또한 여호와는 창조주로서 모든 유형의 체제를 초월하신 분이시다. 영원하시고 자존(自尊)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여호와는 일정한 형태의 왕권을 초월하신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는 영적인 통치를 펼치시며 그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성막이라고 하는 유형의 형태를 그 백성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적 통치를 현상 세계의 백성에게 보여주는 최소의 방편이었다. 하나님은 성막이라고 하는 통치의 방식이나 체제조차도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시지만 그 백성을 위해 성막을 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막의 구조와 역할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계시의 방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 그 백성을 다스리시기로 하신 것이다. 반면에 현상 세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막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구조물보다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궁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스라엘은 성막의 권위를 인정해야 했고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추구해야 했다.
출처: 기독신학공동체 글쓴이: 송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