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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률 목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신령한 교통을 갖게 된다는 것은 매우 복된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인간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로 섬기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9:10).
그는 세상을 살고 간 역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생애를 살았습니다. 지혜와 부귀와 권세와 영 화, 그리고 역사에 남긴 문화적 자취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징적 인물입니다(마6:29).
그런데 솔로몬은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성공의 비결에 대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27:1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고 하였습니다.
2절에는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성공이 자기의 지식이나 수완이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참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삶으로 이어져야 되겠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의탁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분수도 모르고 자기가 다 맡아 하려는 듯이 날뛸 때가 많습니다. 역대의 모든 신앙인물 가운데 승리적인 인물들은 다 하나님께 맡기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맡기기만 하면 다 유익되게 처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Ⅰ. 모든 염려를 맡겨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5: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수많은 염려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끙끙거리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많은 염려를 안고 있습니다.
(1) 물질 문제입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데 있어서 물질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조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사람이 건전한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그것은 수단일뿐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질을 필요로하는 목적이 건전할 경우 그것은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물질문제에 있어서 목적이 좋더라도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물질을 취득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잠언 16:8에는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의롭게 돈을 벌려고 하여도 그것이 잘 안될 때 어려움이 있습니다.
옛날 농경시대 같으면 진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잘 살수 있었지만 세상이 달라지면서부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는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야하고 외부적 환경의 요인에 따라 다른 결과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경제에 관한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보다도 한 나라의 문제이거나 심지어 세계적인 현안으로 더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염려하지 않고 사는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들의 꽃을 입히신다고 하였습니다(마6:26). 그뿐 아니라 염려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마6:27).
(2) 가족 또는 자녀 문제입니다.
가족의 개념도 사회적 변천에 따라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특히 핵가족 시대 이후 가정에 대한 문화는 봉건시대의 대가족 문화와는 달리 가족 공동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윤리나 형제간의 우애는 무엇이든지 편리하게 살고자하는 실용주의적 문화에 밀려나 버리고 오히려 가장 가까워야될 가족 관계가 여러 가지 갈등으로 비취지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청소년들 문제는 모든 가정이 다 겪어야하는 고민거리입니다. 거기에다 부모들의 지나친 욕심이 자녀의 교육이나 성장과 정서에 역기능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염려를 하게 되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담한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살이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부모가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엡6:4).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3:6).
(3) 자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설정한 목적이 있고 추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이를 수 없는 여러 가지 제약된 요소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것이 신체적인 조건이나 건강문제일수도 있고 지식이나 기술이나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될 때 오는 좌절감일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중에 어느 누구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됨이 없이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만이 불행한 것처럼 스스로 욕구불만의 병을 만들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욕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약1:14-15). 사람이 욕심에서 해방되기만 하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며(딤전6:6-8)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감사의 체험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Ⅱ. 원수갚는 것을 맡겨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이 되는 십계명의 원리는 「사랑」을 강령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마22:37-40).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사랑보다 갈등과 다툼이 훨씬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사이에서 원천적인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이웃과의 관계도 사랑과 평화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잠언 16:7에는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강조하시면서 어떤 경우에도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39에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뜻의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9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성도가 이따금씩 낙심을 하게되는 경우는 우리의 사정이 하나님께 가리워져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이사야 40:27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시편 42:3에도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속사정을 모두다 알고 계십니다.
옛날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은 주인 사라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지세웠으나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즉각 자기의 생각을 고쳐 먹었습니다. 창세기 16:13에 보면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 말 못할 어려움을 당하고 억울한 처지에서 속으로 병을 앓게되는 때가 있지만 그때 눈을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알고 계시며 위로를 주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편 139:1-4에 다윗은 노래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하였습니다.
(2) 공의의 척도(尺度)로 다스리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당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곤 합니다.
말라기 2:17에 "…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라기 3:2에는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척도에 따라 행한대로 정확하게 다스리신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시편 73편에 나오는 아삽의 시에는 악인이 형통하고 오만한 자가 잘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악인이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크게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73:16-19에 "내게 심히 곤난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3)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십니다.
성도가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한다면 악으로 악을 갚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이를 도로 고쳐 주시면서(눅22:51) 칼 쓰는 자는 칼로써 망한다고 하셨습니다(마26:52). 잠언 25:21-22에는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이와같은 가르침은 결국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적용되게 하는 것입니다.
Ⅲ. 인생 자체를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본문 말씀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비결이요 또한 승리적 삶의 첩경입니다.
(1)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잠언 27:1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수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약4:13). 사람은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내일 일이 문제가 아니라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도 예측하지 못합니다.베드로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도 예수님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겠다고 장담을 해 놓고는 곧이어서 계집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습니다(마26:69-74). 이처럼 모두가 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갑니다.
히브리서 11:8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
(2)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시편 37:5에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그 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옛날 이삭은 밧단 아람으로 떠나가는 그의 아들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도하였습니다(창28:3). 그후 야곱은 집을 떠나서 삭막한 광야길을 헤매다가 벧엘 들판에서 경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환상으로 그에게 임재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면서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창28:10-19).
사무엘도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하며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상7:12).
(3) 사명을 완수하도록 맡아주십니다.
초대 교회가 산헤드린 공회와 헤롯왕의 박해로 일대 위기에 처했을 때 베드로는 예루살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군사 네명씩 네 패가 지키는 삼엄한 경비망 속에서 내일 일이 어찌될지 모르는채 잠이 들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고 그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밖에까지 나오는 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꿈을 꾸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뒤 한참 있다가 "주께서 과연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고 하였습니다(행12:1-11).
사도 바울도 화물선에 실려서 로마로 가던중 그레데 해역에서 큰 풍랑을 만나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자를 보내 저를 돌봐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사실을 간증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7:23-24에 보면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가는 길에 어떤 난관이 있고 역경에 봉착하더라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수 있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참으로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기만 하면 우리의 경영하는 것을 아름답게 이룰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