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은장아기, 놋장아기. 가믄장아기
여기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에 관한 이야기지요.
옛날 옛적에 강이영성과 홍운소천이 살았다. 두 사람은 각기 윗동네 아랫동네에서 빌어먹으며 살다가 길에서 마주친 뒤 살림을 합치고 부부가 되었다. 부부를 이룬 뒤 첫딸을 낳자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은그릇에 가루를 타서 먹여 주었다. 그래서 이름을 은장아기라 했다. 다시 또 딸을 낳자 사람들은 놋그릇에 가루를 타서 먹여 주었다. 그 아이는 놋장아기라 했다. 부부가 또 딸을 낳자 사람들은 이번에는 나무바가지에 가루를 타서 먹여 주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가믄장아기라 했다.
세 딸이 태어나 자라날 적에 논과 발이 생겨나고 소와 말이 점점 불어나 큰 부자가 되었다. 부부는 높다란 기와집에 풍경을 달아 놓고 딸들과 놀음놀이를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가믄장아기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하루는 비가 촉촉 내리는데 부부가 딸들을 차례로 불러서 문답 놀이를 시작했다.
"큰딸아기 이리 와라. 은장아기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입고 잘 사느냐?"
"하늘님도 덕이고 지하님도 덕입니다만, 아버님 덕이고 어머님 덕입니다."
"큰딸아기 기특하다. 어서 네 방으로 가라."
"둘째딸아기 이리 와라. 놋장아기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입고 잘 사느냐?"
"하늘님도 덕이고 지하님도 덕입니다만, 아버님 덕이고 어머님 덕입니다."
"둘째딸아기 착실하다. 어서 네 방으로 가라."
"막내딸아기 이리 와라. 가믄장아기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입고 잘 사느냐?"
"하늘님도 덕이고 지하님도 덕입니다. 아버님도 덕이고 어머님도 덕입니다만, 내 몸에 복이 있는 덕으로 먹고 입고 잘 삽니다."
그러자 부모가 화가 나서 말했다.
"이런 불효막심한 아이가 어디 있느냐. 어서 빨리 나가라." 이렇게 부모한테 미움을 산 가믄장아기는 검은 암소를 끌고서 집을 떠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연상되는 이 이야기는 제주도에서 구전돼 온 민간 신화 < 삼공본풀이>의 앞부분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민담으로도 널리 전해져 왔지요. <내 복에 산다>로 불리는 이야기입니다. 막내딸이 두 언니와 달리 '내 복으로 산다'고 대답했다가 집에서 쫓 겨나게 된다는 내용이 이야기마다 거의 일치하지요. 이 이야기의 기본 포인트가 됩니다.
어찌 보면 가믄장아기는 불효막심한 딸처럼 보입니다. 부모님이 내내 사랑하면서 보살펴 줬더니 기껏 하는 말이 자기는 제 복이 있어서 먹고 산다니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 했는데, 이왕이면 언니들처럼 예쁘게, 듣는 사람 기분 좋게 말하면 더 좋을 텐데 말이에요.
현실로 보자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맥락과 상징을 봐야 하지요. 따져 보면 저 강이영성과 홍운소천은 꽤나 속없는 부모라 할 수 있습니다. 저런 질문이란 답을 정해 놓은 거나 다름없지요. "너희들 누구 강아지?" "엄마 아빠 강아지!" "그래, 아이고 이쁜 내 새끼! 토닥토탁...," 딱 정해진 순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자식들한테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너희들이 다 내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몸짓이 됩니다. 자식을 아기인 양 품 안에 넣고 감싸고 돌면서 만족감을 찾는 그런 부모가 강이영성, 홍운소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딸들 이름이 다 '아기'네요.) 그래요. 이런 부모들, 요즘에도 참 많지요.
그런 부모한테 거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연히 마음을 상하게 했다가는 자기만 손해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은장아기와 놋장아기는,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의 비위를 잘 맞춰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합니다.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 편안히 머무는 길을 택한 것이지요. 하지만 가믄장아기는 달랐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답 대신 소신껏 자기 의사를 밝혔지요. 그가 "부모님 덕도 있지만 나는 내 덕으로 먹고산다"고 말한 것은 "부모님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나 자신이다"라고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이거 꼭 맞는 말 아닌가요?
그 차이가 은장아기, 놋장아기와 가믄장아기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다르게 갈라 놓습니다. 두 언니는 집에 남고 가믄장아기는 떠나지요. 이야기는 가믄장아기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실상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고 했으니 부모님 품에서 벗어나서, 집을 떠나 바깥세상으로 가는 게 맞지요. 잘되든 못되든, 거기서 자기 복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아니, 그건 누구한테 보이기 위함이 아니겠지요. 그렇게 자기 삶을 살 따름입니다.
길 떠난 가믄장아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바로 '숲'으로 갑니다. 더 정확하게는 깊은 산중으로요. 그는 거기서 낯선 오두막을 발견하고 마퉁이 삼 형제와 만납니다. 그중 막내가 자기 뜻에 맞는 사람임을 발견하고 그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산속에 갔다가 커다란 금을 발견하지요. 다들 돌덩이로 생각했던 덩어리가 황금이라는 사실을 딱 알아낸 겁니다. 그렇게 큰 부자가 된 가믄장아기는 뒷날 큰 잔치를 열어서 장님이 돼 빌어먹으며 떠돌던 부모님을 찾아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는 그렇게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해 보입니다. 아니, 자기 삶을 자기식으로 충만하게 살아 냅니다. 완전한 해피엔딩이지요.
어떤가요? 가믄장아기를 보면서 누구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먼 옛날, 아버지 뜻을 어기고서 길을 떠났던 고구려의 공주. 그래요. 바로 평강공주입니다. 평강공주는 울보이면서 고집쟁이였지요. 자기가 정해 준 좋은 짝을 마다하고 굳이 바보 온달을 찾아가 남편으로 삼으니 아버지 평원왕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을 고구려 최고의 장수로 키워 냅니다. 보란듯이 자기 삶을 살아 낸 것이었지요. 산속에서 작은마퉁이를 만나 큰 성공을 이룬 가믄장아기는 평강공주의 훌륭한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네요. 길 떠난 막내딸이 자기 삶을 이룰 때, 집에 남았던 두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민담으로 이어져 온 <내 복에 산다>는 두 딸이 부모의 재산을 앉아서 다 털어먹고서 함께 거지가 됐다고 전합니다. 또는 재산을 차지하고서 부모를 길거리로 내쫓았다고도 합니다. 둘 다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가진 걸 빼앗았다는 쪽이 좀 더 무섭지만, 앉은 채 거지가 됐다는 것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제 삶을 못 살고 망가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요. 부모의 울타리에 머물기를 선택한 자식의 유력한 행로라 할 수 있습니다.
민간 신화 <삼공본풀이>는 집에 남은 두 딸의 전말에 대해 더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번 직접 볼까요?
<살아 있는 한국 신화>(한겨레출판, 2014)에서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설운 어머니가 부모의 정에 딸자식 보내기가 섭섭하여, "큰딸아기야 나가 봐라. 설운 막내딸아기 식은 밥에 물이라도 말아 먹고 가라고 해라."
큰언니 은장아기가 노둣돌 위에 올라서면서,
"설운 아우야, 빨리 가버려라. 아버지 어머니가 너를 때리러 나오신다."
가믄장아기 말을 하되,
"설운 큰형님, 노둣돌 아래로 내려서면 청지네 몸으로나 환생하십시오."
큰형님이 노듯돌 아래로 내려서더니 청지네 몸으로 환생하여 갔다. 큰딸아기 나가서 안 들어오자 부모님이 둘째딸아기 불러 놓고,
"저 올레에 나가 봐라. 설운 아기 떠나는데 식은 밥에 말이라도 말아 먹고 가라고 해라."
둘째 언니 놋장아기가 올레에 나와 거름 위에 올라서면서,
"아이고, 설운 아우야, 빨리 가버려라. 아버지 어머니가 너를 때리러 나오신다."
가믄장아기가 말을 하되,
"설운 둘째 형님은 거름 아래 내려서면 용달버섯 몸으로나 환생하십시오."
그때 놋장아기가 거름 아래로 내려서더니 용달버섯 몸으로 환생하여 갔다.
부모님이 막내딸을 내보내면서 그래도 마음이 좀 안 좋았나 봅니다. 그래서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 하지요. 그런데 두 언니는 동생이 얼른 사라지게 하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글쎄요. 동생이 떠나면 자기들이 차지할 사랑이나 재산이 더 크다고 생각한 걸까요? 무언가 그랬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 장면입니다. 저 은장아기와 놋장아기가 어떻게 되느냐면 청지네가 되고 용달버섯이 됩니다. 이건 또 뭔가요? 얼핏 보면 이야기는 마치 가믄장아기가 저주를 내려서 두 사람을 변하게 한 것처럼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언니들한테 '청지네 몸으로나 환생하고, 용달버섯 몸으로나 환생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살면 청지네밖에 안 되고 용달버섯밖에 안 된다고 하는 진실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언니가 정말로 청지네가 되고 용달버섯이 되는 건, 그들이 취한 삶이 청지네와 용달버섯의 삶과 다를바 없음을 확인시켜 준 일이었지요.
청지네와 용달버섯은 어떤 존재인가요? 청지네는 풀숲을 음습하게 기어 다니며 먹을 것을 노리는 흉하고 보잘것없는 동물입니다. 용달버섯(혹은 '말똥버섯'이 되었다고도 합니다)은 다른 생명체에 빌붙어서 영양분을 빨아먹는 식물 아닌 식물이지요. 둘 다 제 삶을 온전히 세우지 못하고 남한테 의지하는 기생의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 이야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도록 부모의 품에 머물러 거기 의존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온전한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없다. 그건 차라리 지네나 버섯의 삶에 가깝다."
좀 무서운가요? 하지만, 엄연한 진실입니다
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 중에서
신동흔 지음
첫댓글 앉아서 다 털어먹고 ㅎㅎㅎㅎㅎ
화훼장식기사협회 花이팅입니다.
카페지기 킹왕짱입니다.
빛날 화華, 꽃 화花, 화합 화和!
우리기사님들 막내딸 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