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인 2018.08.10 10:11:49
2010년 1월에 장흥군청 옆 주차장 부근에 봉명정을 재건(再建)하여 현판과 옛 문인의 한시를 서각하여 게첨하였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동정(東亭)은 예양강(현재 탐진강) 동쪽언덕에 세웠다는 기록과 남효온의 조대기(釣臺記:낚시이야기)자료를 참고하여 그 당시
봉명정의 위치를 추측하면서 관련내용을 정리하였다.
■신잠 선생(1491~1554)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원량(元亮)이며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시ㆍ서ㆍ화 삼절로 유명했다. 증조부는 사육신 신숙주(申叔舟)이며 1519년(중종14)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 해 기묘사화로 인해 파방(罷榜)되었고, 1521년 신무사옥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으로 31세에 장흥으로
유배와서 17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 때 <예양강, 억불산, 며느리바위, 보림사, 성불사…> 같은 시문을 노래하고, 시문집
관산록(冠山錄)을 남겼다. 48세에 귀양에서 풀려 나온 이후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書畵)에 몰두하다 54세에야 겨우
태인현감으로 관직을 시작했고 상주목사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으며 추강 남효온선생처럼 장흥 땅을 인연하였기에 예양서원(오현사)에서 배향해오고
있다.
■ 신잠 선생이 유배하여 거주하였던 곳?
관산록(冠山錄)자료에 의하면 동문(東門 : 前 장흥극장 앞~
장흥중앙교회 사이의 언덕배기, 내리막길)밖, 예양강 동쪽언덕(東岸)의 봉명정을 비켜가는 동화(桐華)모옥이었다. 그곳은 죽림(竹林)이 있는 곳으로
장녕성(장흥읍성) 북쪽 예양강변, 며느리 바위가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고증하기는 어렵지만
개연성이 높은 내용을 영천 신잠 선생의 문집 관산록(冠山錄)에서 찾을 수 있다.
1521년 겨울에 영천 신잠이 장흥으로 처음 귀양 왔던
곳은 예양강(탐진강) 옆 동화동(桐華洞)이 아니라, 해원촌(海原村:현재 회령진성 주변)이라는 바닷가였는데, 다음해인 1522년 1월 12일 밤에
장흥도호부(府) 관아 아전 참봉 이지번(李之蕃)이 장녕성(장흥읍성)안의 동화동으로 유배지 우거(寓居)를 옮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천
신잠 선생은 정약용선생보다 더 불우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40세에 유배되었으나, 이미 중앙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유배기간에도 외갓집 해남윤씨에
의지하여 마음껏 학문을 닦았으며 귀향하여 부인과 가족을 재회하였다.
그러나 영천 신잠 선생은 3~40대 황금나이에 천리타향으로 유배되어
아내와 자식은 유배기간 중에 생을 이미 마쳐버려 후사를 이을 아들도 없었다.
■ 그 당시 봉명정의 위치는 어느 곳인가?
신잠 선생이 유배생활하고 있는 장흥읍성 북쪽 예양강가에는
죽림(竹林)이 무성했다고 관산록(冠山錄)에 기록되어 있고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어 죽실(竹實)을 먹고 산다 고 하여 봉명정(鳳鳴亭)이라는 이름이
연유했던 것일까?
봉명정은 동문(장녕성)밖, 예양강 동쪽언덕 동안(東岸)에 자리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추강 남효온
조대기(釣臺記)자료를 살펴보면 동정(東亭)은 수령천이 예양강으로 전환되는 지점에 봉명정이 자리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 최근 건립된 봉명정
▼ 안양면 기산마을 봉명정
안양면 기산마을에서 1km떨어진 뒷골에는
오래전에 서당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 서당주변에는 나무가 울창한 깊은 산속이여서 밤이 되면 사나운 짐승들이 드나들었다. 마침내 이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던 접장이 호식(虎食)을 당해 조선말엽에 500m쯤 떨어진 마을 쪽으로 서당을 옮기고 봉명재(鳳鳴齋) 라고 이름하였다.
그 당시
봉명재는 이름 있는 서당으로 알려져 중종과 선조 때 많은 후학을 남겼으나 한국전쟁으로 훼철되어 그곳에 유허비를 세우고
철거하였다.
마을에서는 옛 봉명의 명칭을 남기기 위해 1986년에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마을 앞 정자나무 밑에 봉명정을 짓고
그 당시 장흥향교 전교님의 판액(版額)으로 봉명정(鳳鳴亭)이라고 현판을 걸었으며 그 옆에 봉명정 건립기념비를 세웠다. (출처:
안양면지:1998년 발간)
▼ 장흥군청 옆 주자장 부근 봉명정
2010년 1월10일에 장흥군 도시 숲 조성사업으로 건립했다.
녹지면적이 열악한 장흥읍 주택밀집지역에 희망과 행복을 테마로 한 정남진 행복숲을 조성하면서 봉명정을 재건(再建)하여 현판과 옛 문인의 한시를
봉명정(鳳鳴亭)새김(서각)하여 게첨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창건했던 봉명정(鳳鳴亭)을 재건(再建)했던 현재 위치에 게첨된 한시 내용에 걸맞은
당시 주변풍광 이였는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예양강(汭陽江: 현재 탐진강) 동안(東岸:동쪽언덕) 풍광과 관련하여 당시 장흥선비들은 중국
악양루. 황학정. 등왕각에 비교하면서 봉명정 풍광과 관련하려 한시를 지었기 때문이다.
▼ 장흥읍성 동문정 (東門亭)
장흥읍 동동리 일명 삐비정이라고 부르는 곳에 장흥군에서 2008년도
건립하였다. 장흥읍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탐진강(예양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장흥읍성의 망루가 있던 자리로 일제 강정기와
한국전쟁동란 당시에도 이곳에 망루가 있어 전쟁에 활용했었던 자리이다. 장흥읍성의 동문에 위치한다하여 동문정(東門亭)이라 이름
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장흥도호부 장녕성 동문(東門)밖, 예양강 동쪽 언덕(동안:東岸)에 자리했던 봉명정(鳳鳴亭)의 위치를
윤수옥(전 장흥문화원장)은 예강교(장흥동교다리)가 있는 곳(현재 강변도로: 탐마루 근처)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바 있다. 아직 확인 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박림소가 내려다보이는 곳(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