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29년)
1929년,
중국의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중국의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만주지역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안에 있었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계파를 초월한 유일당으로 통합운동도 중단되었다.
4월 중회민국정부에서 반포한 ❰성,현 2급제 신관제 조직법❱에 근거하여 연길현공서를 연길현 정부로 고치고 현 지사를 현장으로 바꾸었으며 연길현을 1등 현으로 규정하였다.
4월 협의회 중심 세력인 정의부는 참의부 일부세력과 신민부 민정파와 합쳐 국민부(현익철, 양세봉)를 조직하고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직했다. 국민부는 5월에 길림성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산하에 민사•경제•외교•군사•교육•법무•교통위원회와 중앙호위대 및 8개 중대의 군대를 조직했다. 12월에 이당치국, 12월, 이당공작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민부를 영도하기 위하여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발족시켰다. 이 때 독립군은 조선혁명당 산하 군사위원회 지도를 받는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5월에 혁신의회는 해체되고 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만 남았다. 이후 김좌진은 북만주, 지청천은 동만주, 김승학은 남만주로 가면서 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도 쇠퇴하였다. 그 뒤 홍진, 김좌진, 지청천, 황학수, 이장녕 등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연합하여 한족총연합회로 발전하였다. 북만중학기성회를 조직하였으며 10월에 산시에 정미소를 설립했다.
7월 10일 봉천군벌의 수장 장학량이 소련 소유의 철도인 중동철도를 전격적으로 환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12월에 소련군과 봉천군벌 사이에 봉소전쟁이 발발하였다. 봉소전쟁의 패배로 장학량은 우수리스크 의정서와 하바롭스크 의정서에 사인을 하고 중동철도를 7월 10일 이전 중소 공동관리 상태로 회복시켜야 했다.
10월 24일에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식가격 폭락과 함께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이 일제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발단은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던 통학기차 안에서 일본 학생들이 조선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학생들과 조선학생들 간에 충돌이 있었는데 일경이 일본 학생들의 편을 들자 한국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는 서울, 개성, 평양으로 번졌으며 북간도 용정에 까지 번졌다.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중학교,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등이 광주학생 시위에 동참하는 시위를 1930년 초까지 계속 이어갔다.
정재면이 은진학교 교목으로 일하면서 민족의 독립과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 계몽지 ⌜비닭기⌟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다.
요녕성에 ❰안산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연길 ❰길림성립제4사법학교❱에 간민교육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길림성교육청에서 성정부에 ❰영변조선인사립학교 관리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였다.
1929년에 세워진 학교는 용정의 ❰개산툰소학교❱ 한 곳이다.
1929년에 세워진 교회는 자료 부족으로 확인할 길이 없고 연변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152쪽에 보면 조직교회 35개, 미조직 교회 55개, 기도처 61개로 교회 총수가 151개이다.
전 해보다 25개가 줄어든 것은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문을 닫은 교회가 속출하였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북대지교회❱가 설립되었다.
2026년 4월 2일 목요일 오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