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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회사에서 보고서를 쓰고 있다. 전자레인지 중소기업 마케팅 부에서 일하고 있는 33살
의 노총각인 그는 투버튼 검은색 정장을 입고 검은색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상
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어이, 김성흔 씨. 아직도 신제품 보고서 못 올렸나?"
그러자 성흔이 대답했다.
"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끝날 것 같습니다. 지금 막.."
성흔이 말을 들은 체 만 체 한 상사가 꾸짖었다.
"말로만 된다 그러고 도대체 하는게 뭐야? 너 이새끼 그것 밖에 안돼?"
"죄송합니다. 바로 올리겠습니다."
"너 임마 집에 있는 네 가족들 밥줄 끊기기 싫으면 똑바로 해. 알아들어?"
성흔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오전 업무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마케팅 부 사람들이 식사를 하러 나가자 성흔도 벗어
놓은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상사가 말했다.
"넌 밥먹지 말고 일해. 먹을 가치도 없는 놈이 뭘 따라나와? 보고서 올리기 전까지는 밥먹을 생
각 말어."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뭐가 그렇지만이야?"
성흔은 결국 다시 자리에 앉고 말핬다. 그는 자신의 책상의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주시하고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지끈 거렸다. 그의 옆으로 직장 후임들이 지나쳐가며 소근거렸다.
"왜 저런대. 안 짤리나?"
"일다운 일을 해야지. 하지도 못하는 것이 뭘 한다고 말이야."
"곧 짤리겠지?"
"그럼, 저런 사람이 있어서 뭐해? 상사 같지도 않은게."
두 사람은 말을 주고 받으며 식사를 하기 위해 회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흔은 머리를 잡
고 잔뜩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다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성흔은 보고서를 오늘 중으로
마무리 하려고 했지만 저녁시간이 가고 퇴근 시간이 가까이 와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회사 동료들이 하나 둘 씩 퇴근하고 상사가 성흔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직도 못 끝냈어?"
상사는 성흔이 컴퓨터로 쓰고 있는 A4용지를 성흔에 얼굴에 뿌리며 던졌다. 상사가 말했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회사가 성장을 못하는 거야. 아주 사라져 버려."
상사는 회색 정장 마의를 걸쳐 입고 퇴근했다. 성흔은 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려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9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작업 중인 보고서를
컴퓨터에 저장한 후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성흔은 걸
음을 걷던 중에 슈퍼에서 빵 하나와 흰 우유를 사서 먹었다. 그리고 한 숨을 푹 내쉬었다. 11월
의 한기가 몸으로 느껴졌다. 하얀 달이 떠 있는 검은 하늘에는 바람이 조금씩 불어와 그의 몸을
들썩이게 했다. 추위로 인한 현상이었다. 그는 걸음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늦게 퇴근하는 회사
원들과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지하철역으로 걷고 있을
때 였다. 또각 또각 하는 구두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소리는 성흔이 걸음을 빨리 재촉해도
여전히 그를 쫓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무언가가 숙덕이는 소리가 났다.
"일도 못하는게 무슨 회사에 다닌데?"
"놔둬. 얼굴에 철판 깔고 다니는 거지 뭐."
"손해 아닌가?"
"뭐가?"
"그러면 회사만 큰 손실 아니야? 월급만 제 때 받고 하는 일도 없고."
"알아서 해고 되겠지."
연거푸 들려오는 말에 성흔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엇다. 갑
자기 편두통이 밀려왔다. 성흔은 근처 약국에 들러 두통약을 사서 물과 함께 먹었다.
그는 걸음을 계속 걸었다. 밤거리는 네온사인이 밝혀진 건물들과 그 곁을 지나는 사람들 그리고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들에 둘러싸여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둠 속에서 막 피어
난 악마의 조롱에 가까운 것이었다. 성흔의 발 뒷꿈치에서 통증이 전해져왔다. 구두를 신고 걷다
보니 생겨나게된 상처가 쓰라렸다. 성흔의 얼굴이 상처가 가죽구두에 부딫힐 때 마다 씰룩 거렸
지만 지나가던 행인이 그 모습을 볼까 두려워 그는 표정마저 감추었다. 뿌연 매연을 꽁무니에서
내뱉으며 차가 지나갔다. 성흔의 눈은 그 차를 쫓아가다가 시야에서 사라진 차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화가 안 된 것인지 위가 아팠다. 성흔은 가슴을 손으로 툭툭치며 길 가에 잠시 멈
춰섰다. 그의 주변에는 환락의 공기가 퍼져 돌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 뿐 사
람들은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는 공기를 한 번 들이 마셨다가 내 뱉었다. 몸이 하늘 위로 두
둥실 떠오를 듯한 기분에 주변의 사람과 사물들이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모르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외로운 관찰자가 되었다. 떼지어 다니는 학생들과 발걸음이 바쁜 회사원 들의 삶이
측은해 보이다가도 자신과 대조했을 때 행복해 보이기 까지 했다. 적어도 그들은 삶을 즐기며 사
는 부류임이 확실했다. 성흔은 걸음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손이 떨렸
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에 절어버린 야채같았다. 파뿌리 같은 머리카락과 허
름한 몰골로 시장이나 의류상가에서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 싸구려 옷을 걸친 유령처럼 남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라고는 그들보다 떨어지는 사회적응력과 일처리 속도와 사교성이었다. 그외에
그는 고스트다. 마스트 하나에 작은 돛을 달고 항해하는 스페인 함대에 격침조차 될 필요없이 부
딫혀 침몰하고 있는 쪽배를 타고서 그는 버티고 있었다. 이쯤되면 완벽한 고스트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 않은가? 그는 함대를 부수고 싶었다. 자신을 능멸하고 방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바
퀴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그들이 증오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다가도 그가 회사
원들과 말을 하려 입을 떼는 순간 비굴한 종자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그의 가슴은 그를 쉽게 무
릎 꿇게 만들었다. 그는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자신과 대립
되는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는 쓰레기들이 -자신이 부르는 말이다.-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서 고민
한다. 그리고 한계점에서 빌붙어 사는 남자가 되는 것을 매일 매일 실감한다. 성흔은 느끼고 있
다. 회사생활이 스스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현재 직업이 아니라면 투사가 되었을지도 모
른다. 또는 음식점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매니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는지 지금보다
는 나을 것이다. 그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일이 되면 사표를 제출하자. 그는 길
한 복판에 멍청하게 서 있다. 어린 학생들이 떼지어 몰려가며 그에게 돌을 던지고 키득거리며 지
나간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없다. 한 참 후에 그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버릇없는 녀석들을 쫓아
가나 이미 사라져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늘 한 걸음 늦는다. 그런 자신에게서 화가 치
어 오른다. 다시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예전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본다. 성장하면서 그가 겪은 일들에서 늘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무른 행동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끌지도 못했고 친구도 없었다. 학교에서 돈
이 없어진 사건에서도 그의 성격은 확연히 드러났다. 모자란 성적 때문에 가장 늦게 반에 남아서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는 다음날 한 친구가 전 날 실수로 책상 서랍에 넣고 간 학원비 이
십만원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그런 추궁을 받으면서도 어떤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말
한 것은 단지 난 아니야 라는 말 뿐이었다. 사건은 그 친구가 가방 속 주머니에서 돈을 찾아 잘
해결이 되었지만 그는 그들로 부터 어떤 위로도 친구들로 부터 사과도 받지 못했다. 그는 없는
존재였다. 그는 이런 화풀이 대상에 넌저리가 났다. 과거의 기억들이 겹쳐서 기억 속에 흐르면
죽는 날이 가까워 온 것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것일까? 그는 혼자만의 공상을 멈추고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안와가 움푹 패여 보였고 구두 때문에 뒷 꿈치가 아파왔다.
어두운 밤 하늘이 그를 노려 보는 듯 금색 별 빛이 밖혀 검은 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 그는 하
늘을 보며 고개를 쳐들고 걷다가 뒤에서 그를 모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경멸에 가까웠다.
"넌 그것 밖에 안돼는 놈이었어. 네가 회사를 그만두어야 서로에게 좋아."
성흔은 연달아 들려오는 말 소리에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
시 걸음을 걸었다.
"회사를 갉아먹는 벌레 같은 놈."
성흔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다 보았지만 역시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
다.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 때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
갔다. 잠시 뒤에 사람들이 그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왔고 신문지를 펼쳐 머리 위를 가리고 뛰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도로로 달려가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택시를 잡았다. 택시는
라이트를 깜박이더니 손님들을 태우고 사라졌다. 전조등이 너무 강해 방향지시등인 차폭등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는 시점을 건물 안으로 옮겼다. 한 어린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밖을 내다보
고 있었다. 아동용 원피스에 작은 빨간구두를 신은 아이는 비슷한 색상의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엄마, 조금 추워."
그러자 엄마가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이제 곧 집에 갈거니까 조금만 참아."
"오늘은 떡볶이 해줄거지?"
"그래."
"정말로 해줄거지?"
"정말이야. 그동안 일나가느라고 못해준 것 미안해. 오늘은 맛있게 해줄께."
"알았어."
"그래. 엄마에게 안겨봐."
"그래도 추워."
"많이 춥니?"
아이는 걱정스런 엄마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아니, 이젠 괜찮아."
"그래, 그럼 됐어."
아이가 성흔을 바라보았다. 성흔은 마음을 읽는 독심술사처럼 여겨졌다. 오랫동안 두 사람의 눈
이 마주쳤다. 그 침묵을 깨는 아이의 말이 성흔의 생각이 부질없는 하찮은 것이었음을 말해주었
다. 아이는 엄마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성흔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엄
마는 성흔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쁜 사람 아니야."
"정말?"
아이는 엄마의 품에 안기려 손을 벌렸다.
"안아줘.
"왜? 추워서 그러니?"
"무서워."
"뭐가 무섭니? 비가 와서 그러니? 하늘이 깜깜해서?"
"아니, 아저씨가 무서워."
"무서운 사람 아니래두."
그녀는 딸 아이를 품에 안고 건물의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흔은 밖을 바라보다가 사람들이 비를 피하려 건물안으로 들어가서 텅 빈 보도를 느끼고 있다.
악마가 저 세상을 빠져나와 거리를 활보 하는 듯 자동차의 급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귀가 찢어
질 듯한 소음에 사람들은 귀를 막았다. 비가 그치고 다시 거리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성흔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몇 블럭을 지났을 때 차도에서 사고가 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아까의 굉음이 충돌 사고의 파편임을 알 수 있었다. 경 자동차와 중형차간의 미끄러짐으로 인한
사고현장은 몰려든 사람으로 인해 시끌벅적 했다. 사람들이 구경하려 더욱 바글 거렸고 그 비좁
은 틈에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차체는 심하게 구겨져 있었고 경차 안에 갇힌 4명의 가족들
을 빼내기 위해 구급차와 경찰차가 도착했다. 앞서가던 중형차는 후미등이 깨지고 범퍼가 부서졌
고 뒷 부분의 일부가 일그러졌다. 차 안에서 한 남자가 경찰에 의해 구조되어 차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들 것에 실려 구급차에 탑승했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성흔은 사고현장을 지나쳐 걷다가 공원 놀이터의 허름한 녹색 벤치에 앉았다. 공원 놀이터 주변
의 에머랄드 빛 잔디를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공원 내의 놀이터에는 한 중년의 부부가 야외
코트 위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고 맞은편 벤치에서는 젊은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3명의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의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성흔은 그 아
이들을 바라보았다. 입에 사탕을 문 한 아이가 미끄럼틀 위에서 다른 아이의 등을 밀어주며 웃음
을 지었다. 미끄럼틀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아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놀이터의 밝은 분
위기를 이끄는 듯이 아이들은 때때로 기분을 반전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의 묘한 힘이 있는 것 같
았다. 성흔은 졸였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발을 구두에서 꺼내 양말을
벗었다. 뒷꿈치가 까져 있어 만질 때 마다 따끔 거렸다. 찬바람에 발을 내놓은 그는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와 헤어져 아쉬운 마음에 철봉에 매달려 올려다보는 하늘.
그런 느낌이었다. 마음이 아무 이유없이 뭉클해졌다. 아니, 이유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단지 잠시 벤치에 앉아 누워 쉬고 싶을 뿐이다. 그는 벤치에 누
우려 했지만 잠이 올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고 그만 두었다.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았다. 그림
자가 가로등 불빛에 끌려 길게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해체시키려는 마음 때문에 그림자 마저 나의 것이 아닌 것 처럼 어둡다. 마음이 그림
자 보다 더 어두워 지는 듯 또와리를 튼 뱀이 피리소리를 듣고 머리를 드는 것 처럼 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말 소리가 들려왔다.
"저 남자 곧 해고 당한다며?"
그는 놀란 마음에 고개를 들고 뒤를 살펴보았다. 뒤에는 젊은 여자 두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지
나가고 있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였어. 성흔은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던가? 모르는 사람이
던가? 왜 욕을 해대며 지나가는 것이지? 상대의 기분을 이렇게 뭉개버려도 좋다는 듯이 왜 그렇
게 나를 구타하는 것인가? 괴롭다. 성흔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 숨을 내 쉬었다. 신경이 예민해진
성흔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벤치에 등을 기댔다. 아이들의 환호소리가 들렸다.
미끄럼틀.. 그래. 성흔은 조금 전에 뛰어 놀던 아이들을 눈을 감고 생각한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고 해맑은 햇빛을 등에 짊어진 듯이 따스하고 유리처럼 여린 그 녀석들의 웃음 소리. 그는 기
분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의 맨발 밑에 무엇인가가 떨어졌고 그는 눈을 떠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셔틀 콕이었다. 배드
민턴을 치는 부부가 게임을 즐기던 중에 실수로 이 곳까지 라켓으로 밀어 친 것이겠지. 부부 중
에 남자가 성흔에게 다가와 셔틀 콕을 가져간다.
"아,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부부는 다시 게임을 즐긴다. 말을 하자 성흔의 긴장감이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자 머리가 아팠
다. 그는 가방에서 두통약을 두알 꺼내어 물도 안 마시고 삼켰다.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의 두 남
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들은 그를 쳐
다보더니 킥킥 거리며 웃어댔다. 성흔은 모욕을 당한듯이 기분이 나빠져 그들을 보며 악의에 찬
미소를 날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미친 사람 같애."
그러자 여자가 남자에게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 사람이네."
그들의 대화소리는 성흔에게 마치 들리라는 듯이 굉장히 컸고 비단뱀의 비늘처럼 매끄러웠다.
두 남녀는 서로를 마주보며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흔은 멀리서도 그들의 대화를 조
금 엿들을 수 있었다. 어제 산 옷이 마음에 든다는 둥, 주말에 야구장에 데이트를 하러 갈 수 있
게 됐다는 둥의 이야기였다.
성흔은 그들이 괘씸하게 여겨졌다. 그는 벗어놓은 양말과 구두를 다시 신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
하철역으로 향했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행동이 조금 부자연 스러웠다. 그리고 뒤를 돌아
다 보았다. 놀이터의 두 남녀가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희귀생명체를 보듯이 관찰하는
것이었다. 성흔은 사람들의 놀림감이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는 건물
벽을 주먹으로 세게 때렸다. 그러자 조금은 화가 풀렸지만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성흔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내고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집으로 가기위한 지하철역이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거리위에 놓여있는 벙어리가 된 것 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자에게는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그렇다고 소리내어 울 수는 없었다. 한 해가 지나갈 때 마다 자신에 대한 믿
음이 소멸해가는 기분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양 손에 도끼를 들고 걷고 있
다.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자신을 책망하는 채찍과도 같은 로마 시대의 검
투사처럼 상대를 향하는 검으로 사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수함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걸음을 걸었을까? 거리에서 우는 남자아이를 볼 수 있었다. 5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아이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누나를 부르고 있었다. 성흔은 그 아이에게서 측은함을 느
꼈다. 더 말하자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도와야 하는 것인가? 말아야 하는 것인가?사람들은 모두 그 아이를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래, 돕자. 속사정을 듣지 않고서는 아이가 왜 우는지를 알 수 없다. 다가가자. 그리고 아이에
게 이유를 물어보자. 성흔은 용기를 내어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왜 우는거니? 엄마를 잃어버렸니?"
아이는 딸꾹질을 하며 울음을 멈추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듯 보였다. 성흔은 아이의 등을 토닥
이며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이가 안정이 될 때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울
음이 그치자 성흔이 다시 물었다.
"왜 울고 있었던 거니?"
하지만 아이는 말이 없다. 순간 그는 남자아이가 벙어리가 아닌가 의심했다. 성흔이 또 다시 물
었다.
"말할 줄 모르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말을 하지 않는거지?"
아이는 손바닥을 비비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누나가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성흔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널 도우려고 하는거야. 나쁜 사람이 아니야. 왜 길 한복판에서 울고 있었는지를 말해
줄래?"
"누나를 잃어버렸어요."
"누나?"
"네. 백화점을 갔다오는 길에 없어졌어요."
"그래, 누나 핸드폰 전화나 부모님 핸드폰 전화번호 기억하는 거 있니?"
"엄마, 아빠는 안 계세요. 누나 핸드폰 번호도 모르구요."
"그럼 파출소로 가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께."
"좋아요."
"이름이 뭐니?"
"강연호예요."
성흔은 연호라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근처 파출소로 향해 걸어갔다. 10분쯤 걸었을까? 그리 크지
않은 지역 파출소가 눈에 보였다. 그는 파출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파출소 내부에서는
취객들과 수갑을 찬 동네 건달들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그 틈에서 한 여자가 파출소 직원과 이
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이는 18살 정도 되어 보였다. 연호는 여자를 발견하더니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성흔에게 말했다.
"우리 누나예요. 아저씨."
여자가 성흔을 쳐다본다. 아이가 말했다.
"저 아저씨가 누나를 찾아준다고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
여자가 대답했다.
"그랬니?"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잃어버리는 줄로만 알았어요."
여자가 아이를 안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성흔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성흔이 말했다.
"찾아서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잠깐만요. 편의점에서 음료수라도 하나 드시고 가세요. 제가 살께요."
"아니요. 괜찮아요. 시간이 늦어서요. 연호야 다시 누나 잃어버리지마. 아저씨 갈께."
그러자 연호가 말했다.
"네, 아저씨 고마워요."
성흔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그는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며 주
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40분이었다. 그는 지하철 역을 발견하고 계단
을 따라 내려가 개찰구를 교통카드로 찍어 통과했다. 성흔의 걸음에 맞춰 지하철이 들어왔고 기
다리지 않고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지하철 안은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과 학원 수업이 끝난 뒤 집
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 뒤꿈치와 손의 통증은 심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
지와 mp3의 이어폰을 귀에 꽃고 잠을 자는 학생 그리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직
장인 둘이 그의 주변에 앉아있었다. 불안감에 주변을 둘러보고 안도감을 느낀 순간 피로감에 눈
이 감겼다. 그는 그대로 잠에 빠져 버렸다. 여러개의 방문이 있는 통로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성흔이었다. 통로의 시작과 끝은 길이 막혀 있었고 좌우로 문이 4개씩 있었다. 그는 첫 번째 문
을 열었다. 그 곳에서 그는 칼을 휘둘러대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검은 양복을 입고
한 사람을 향해 칼을 들이 밀고 있었다. 놀란 그는 남자를 말리려 등 뒤에서 그를 붙잡았지만 엄
청난 힘에 밀려 바닥에 나뒹구려지고 말았다. 그 남자는 이제 고개를 돌려 성흔에게 달려들고 있
었다. 그는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밖을 빠져나와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허둥지둥대며 다
른 출구를 찾아 문을 열었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마지막 끝의 문을 열고 안으로 겨우 들어간 그
는 문을 닫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버러지 같은 놈."
"회사 안 짤리나?
"너 같은 놈이 있어 성장을 못하는 거야."
"사라져버려!"
"상사같지도 않은게."
"넌 아무 것도 못해."
"이젠 끝이야. 끝!"
그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욕소리에 귀를 두 손으로 틀어 막았다.
"그만! 그만! 그만해!"
그가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
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한 직장인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뭐야? 기가 막히는 군."
직장인 남자는 입을 삐죽이며 그를 벌레보듯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성흔은 그 남자의 시선에
강한 분노를 느껴 자신을 희롱하는 저 두 눈을 손으로 찌르고 싶었다. 그는 두려움과 절규가 한
데 섞인 가슴을 억누르고 두 손을 꽉 움켜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자 감정
을 감추려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지하철 방송에서 다음역을 알
려주는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내릴 역이었다. 성흔은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내려야
한다. 침착하자. 그는 몸을 일으켜 문 앞에 섰다. 몸이 경직된 듯 여전히 부자연스러웠다. 지하
철이 멈췄고 문이 열렸다. 성흔은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역을 빠져 나왔다.
성흔은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손에 쥔 가방에서 두통약을 꺼낸 그는 물 없이 입에
털어 넣고 그대로 삼켰다.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서 내린 조치였다. 그는 심한 두통 때문에 약을
더 먹을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꿔 가방을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주변은 더욱 깜깜해진 밤이었
다. 길바닥의 차가운 아스팔트를 밟아갈 때 마다 벌레를 구두로 짓이기고 지나는 듯 기분이 나빴
다. 신경이 곤두선 그의 모습은 가까이서 보면 두 눈이 충혈되고 초췌해서 매섭게 보였다. 그 때
그의 뒤에서 터벅 터벅 걸어오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뒤에서 보도를 지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성흔은 이번에는 귀를 손으로 막아 닫고 싶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시니컬한 조롱
에 마음이 찢기고 말았다.
"멍청한 자식. 넌 객사할거야."
"너 같은 자식은 벌써 사라져야 했었다구."
"사회는 너를 원하지 않아. 그저 넌 해충같은 벌레일 뿐이야."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뒤에서는 한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걸어오
다 그의 어깨를 부딫히고 멈춰섰다.
"뭐야?"
남자는 성흔을 잠시 노려보고 발걸음을 떼어 걸어갔다. 성흔은 주먹을 움켜 쥐었다. 주먹에 손
톱자국이 깊이 나서 상처가 날 때까지. 심장 고동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하늘이 빨개지고
괴로운 절규가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그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기절할 것 같았다. 한숨을
몰아쉬고 숨을 고른 후 그는 다시 걸음을 걸었다. 소리에 마취된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끌고
있었지만 압박당해 질질 기어가던 그는 걸음을 재촉하다가 생각했다. 나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지껄여대며 고문하는 그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내 팔과 다리는 말로 인해 썩어가고 퀭해진 눈으
로 바라 본 나의 세상은 깨진 유리잔 처럼 산산히 조각나 부서져 버렸다. 나의 의지는 마비가 되
어 출구가 없다. 이제 마지막 나의 인내의 한계를 느낀다. 그는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대형
마트로 향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그는 주방용품을 고르는 곳에서 잘드는 식칼을 하나 골라 계
산대 앞에 섰다. 늦은 시간이라 가게 안은 한산했다. 계산을 하던 젊은 여종업원이 그를 쳐다보
더니 수상한 듯이 얼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 이천원 입니다. 저기 그런데.."
성흔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종업원에게 주자 그녀가 물었다.
"혼자 사세요? 음식하시려고 사시나 봐요. 밤이 늦었는데?"
그러나 성흔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칼을 에어캡에 둘둘 말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다시 집으
로 걸음을 옮겼다.
가로등의 노란 불 빛이 드문 드문 거리 위를 비추어 주고 있었다. 성흔은 잔뜩 웅크린 야수와
같은 몸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놓고 있었다. 손을 뻗어 앞의 공허한 세계를 헤쳐나가면서 바싹 마
른 입으로 작게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살려줘. 타들어가는 입술로 말한 고요한 외침은 그를 다
람쥐 쳇바퀴에 넣고 돌리는 다른 손이 있는 듯한 반복의 울림이었다. 영원히 그는 그 속에서 돌
고만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에 그의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집까지 무사
히 걸어가야해.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현기증이 일어나자 보도가 일그러져 보였다.
그는 남은 두통약을 모조리 입에 털어넣고 삼켰다. 급하게 삼킨터라 목이 막혀왔다. 그는 기침을
해서 약들을 뱉어냈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등 뒤에서 두 사람의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성
흔은 귀를 막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두 남자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머저리 같은 놈. 빨리 안 죽나?"
"저런 사회악은 사라지는게 모두를 위해 좋아."
"그러게 말이야. 나라를 좀 먹고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인간이잖아."
"자기도 귀가 있는데 알아서 사표쓰겠지 뭐."
"사라져 버려야 돼. 저런 놈은."
성흔은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 힘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를 향한 소리는 뾰족한 창에
몸이 관통당하는 것 처럼 쓰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에어캡에 쌓인 식칼을 꺼내 두 사람이 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성흔은 두 사람이 자신의 바로 등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뒤돌아 한사람의 배에 두어차례 칼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아파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들은 것은 분명 남자의 목소리이지 않았던가? 뭔가 착오가 있
는 것이 분명했다. 여자가 칼을 맞고 길바닥에 쓰러지자 한 남자아이가 울며 소리쳤다.
"누나!"
성흔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뜻 밖에도 잠시 전에 자신이 파출소에 데려다
준 길잃은 아이인 연호였다.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저희 누나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길 가의 집들 창문 너머로 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대문을 열고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
다. 그 중 한 남자가 칼에 맞은 여자를 보며 핸드폰으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성흔은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죽어가는 여자와 그녀를 붙잡고 앉아 울고 있는 연호
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암흑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