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chap.1~9]
1.
책 속 야만인들이 사는 구역은 정말 끔찍해 보인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더러운 방에서 제대로 빨래를 했을 것 같지도 않은 옷가지들을 걸치며 살아가는 현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삶. 여성이 직접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세상에 사는 내가 봐도 이들의 삶은 너무나도 야만적이다. 그러나 ‘신세계’에서는 (알파와 베타 계급에 한해) 모두가 행복하고 깨끗하고 최고급의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그들은 완벽히 발전된 문명의 선두에 서서 그 모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근데 정말 모두가 다 행복할까? 그들은 행복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타인에 의해 주입된 행복을 진정한 행복으로 생각할까? 아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이 본질적인 행복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본인의 삶이 줄곧 그래왔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편안하게 생각하는 ‘comfort zone’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편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생각의 틀을 깨야 한다. 자신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아는데도 편하기 때문에,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결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외면하면 편하니까 외면한다. 잊어버린다.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사고 방식은 포기하고 그냥 남들이 살아가는 데에, 딱 거기에 만족해 버린다.
꼭 다수가 행하고 있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수’에 밀려버려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보편화 되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처럼 보여서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조차 어려울 수 있다. 자신의 답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타인의 답이 무조건적으로 수용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만의 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다. 나만의 ‘어휘’를 찾아가야 한다. 나만의 답이 있어야 나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타인에 의해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나에 의해 주체적으로 움직여지는 삶. 왜 어른들이 인생은 답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인생은 본래 정해진 답이 없으니, 우리가 맘대로 살아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는 거다.
꼭 사회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대로 살지 않아도 삶은 어찌저찌 살아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길을 걷지 않았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마약을 하는 사람도 잘만 살고 있는데 왜 나는 못 살겠는가? 물론 삶에 ‘질’적인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어쨌든 모두가 자신의 방법대로 살 수 있다.
생각해보면 결국 이 세상은 소수의 권력자, 강자들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의, 나의 사회적인 위치를 확인해 보면 뭐가 없다. 이 광활한 우주의 조그만 지구에서도 나는 뭐가 없다. 만약 우리가 사회적인 성공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간다면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미 이 시스템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고 있고 나는 내가 그 소수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지 누군가를 부릴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물론 0.0001%의 확률로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을 사회적인 지위, 돈에만 올인하고 싶지는 않다. 0.0001%의 삶을 위해서는 내 모든 걸 돈과 사회적인 지위에 맞바꿔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누구는 자신은 그 정도의 출세는 원하지 않고 경제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경제적인 안정,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이 또한 내 생각의 comfort zone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고 방식이 아닐까? 내가 정말 중요시하는 게 내 삶의 경제적인 기반일까 아니면 내 사회적 체면일까? 통장 잔고에 돈이 두둑히 쌓여 있다고 해서 내 생활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까?
남들이 형성해 놓은, 강자를 위해 돌아가는 이 사회가 형성해 놓은 ‘comfort zone’을 깨고 정말 나만의 답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그 나만의 답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신념대로 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갔으면 좋겠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한 번쯤은 한 발짝 물러서서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고 수용할 건 수용하고 버릴 건 과감히 버리는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만의 답’을 형성할 수조차 없는 신세계라면, 나는 차라리 야만인이 되어버리겠다.
2.
이들은 극강의 효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망할 효율 때문에 더 중요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이들은 ‘늙는 것’을 꽤나 경계한다. 물론 젊음이 여러모로 사회에 큰 도움이 된다. 팔팔하니 일도 잘하고 외모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결점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갑자기 어느 순간 팍 죽어버린다.
천천히 다가오는, 맞이하는, 준비하는 죽음. 우리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기에 겸손해 질 수 있다. 삶의 유한성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동기부여를 ‘죽음’ 으로부터 얻는다. 또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결점까지도 품어줄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존을 배울 수 있다.
조금 더디더라도, 기다려줘야 한다. 빨리빨리, 극강의 효율을 추구해가다 보면 중간중간 놓치는 게 너무나도 많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천천히 곱씹으며 나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끔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가지는 것도 좋다. 개개인의 성장 속도를 용납해 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포용력이 필요해 보인다.
원주민 존이 신세계에서 무얼 느끼고 올지 다음 챕터가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