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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73. [역경의 열매] 이동원 (1-32) 고생 모르고 자란 어린 시절… 과보호 속 독서에 빠져
수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출생
조부모와 증조모 사랑 속에 자라며
운동 대신 많은 책들 마음껏 읽어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가 1947년 어머니 이봉후 권사와 함께 찍은 사진.
나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시절 수의학을 공부한 수의사이셨다. 아버지는 해방 이전 경기도 수원 근교 오목천 화산목장(이후 축산기술연구소)에서 목장 지배인으로 일하기도 하셨다. 나는 그 목장에서 해방 직후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말을 타고 다니셨고 사냥을 즐기셨다. 내 머릿속에 남겨진 부친에 대한 이미지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에 취하시기만 하면 가곡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를 구성지게 부르셨다. 그러다 갑자기 내 어린 시절의 별명인 “목동아”(현재 나의 아호)라고 소리치며 부르셨다.
목장에는 소와 말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양이 들어온다고 해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며칠간 목장에 들어온 양들을 세심하게 지켜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냄새가 지독했고 깨끗하지도 않았다. 양들은 목장 밖으로 나가면 집을 찾아오지 못했다. 후일 청년 시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이런 양의 실존으로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성경의 증언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사 53:6) 양의 실존이 바로 죄인 된 나의 실존이었다. 냄새나고 더럽혀지고 길에서 방황하는 죄인 된 내 모습이었다.
이후 부친은 관공서와 중앙방역연구소 등지에서 일하시다 사설 가축병원을 운영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하시던 일이 잘못되어 잠시였지만 구치소에 가시고 재판을 받는 일이 생겼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한 역경이었다.
공교롭게 친구의 부친이 그 사건 담당 판사였기에 친구 아버지에게 우리 아버지를 선처해 달라고 엎드려 읍소한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자존심에 깊은 상처와 모멸감을 느꼈다. 이후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스스로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나는 수원이란 시골에서 비교적 명문으로 알려진 서울 경복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린 나이에 가정교사를 하면서 내 공부도 챙겨야 하는 역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외아들인 부친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조부모, 증조모와 함께한 사랑의 추억이 가득하다. 그런 과보호 속에서 나는 밖에 나가지 못했고 운동을 몰랐다. 대신 우리 가족은 내 방에 적지 않은 책들을 갖다 놓고 마음껏 읽게 했다. 삼국지와 각종 위인전, 그리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뮈의 ‘이방인’ 같은 소설책도 있었다. 나는 독서에 빠져들었다. 학교 공부보다 독서가 더 즐거웠던 나는 그때부터 책 한 권을 독파하면 맨 뒷장에 한 페이지로 내용을 요약하곤 했다. 이 습관 덕분에 이따금 독후감 대회에 나가면 입상하는 즐거움을 선물 받았다. 후일 나를 설교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었다고 회상한다.
약력=1945년 출생, 미국 사우스이스턴침례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M.Div.),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선교신학박사(D.Miss.), 지구촌교회 창립·원로 목사, 지구촌목회리더십센터 대표,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 및 국제코스타(KOSTA) 창립, 저서 ‘너희는 광야로 진군하라’ ‘쉽게 풀어 쓴 누가의 예수 이야기 1·2’ ‘아들아, 씨유 인 헤븐’ 등.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 고생 모르고 자란 어린 시절… 과보호 속 독서에 빠져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 간섭 없는 삶 원했던 성장기, 복음 통해 하나님 만나다
* [역경의 열매] 이동원 (3) 교회 모임 간증 계기로 법대에서 신학대로 진로 전환
* [역경의 열매] 이동원 (4) 미국서 목사 안수 받고 귀국… 영원한 동역자 아내와 결혼
* [역경의 열매] 이동원 (5) 한국선 처음 시도한 '가정생활 세미나'… 큰 반향 일으켜
* [역경의 열매] 이동원 (6) 학생들과 직장인 기초사역 통해 복음의 영향력 실감
* [역경의 열매] 이동원 (7) 본격적 목회 시작한 서울침례교회… 목회의 애증·부흥 경험
* [역경의 열매] 이동원 (8) 한인교회 담임 맡아 달라며 평신도들까지 찾아와
* [역경의 열매] 이동원 (9) 주님 응답 받고 미국행… 목회 섬기며 틈틈이 신학 공부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0) '열린 목자훈련' 개설… 균형잡힌 성도의 제자훈련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1) 평신도 리더들과 함께 제자 훈련… 영적 성숙과 진보 이뤄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2) 코스타 열어 한국 유학생들에게 위로·은혜의 시간 제공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3) "코스타 운동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선물"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4) 강남 4인방 동역의 은혜, 놀라운 사역의 에너지로 폭발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5) 대형교회 담임 초빙도 받았지만 한국서 개척 도전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6) 10년 만에 고국 땅 밟아… 선교 책임감으로 333비전 구상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7) 외환위기와 종말론 소문도 막지 못한 부흥의 열기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8) 다양한 단계식 제자훈련으로 성도들의 영적 요구 충족
* [역경의 열매] 이동원 (19) 개척 7년 만에 안식년… 하나님의 임재와 평화 경험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0) 안식년서 복귀하며 셀 교육과 중보기도 사역 강화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1) 셀 목회로 폭발적 교회 성장… 3만명 목표달성 눈앞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2) 전도와 이웃사랑 실천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3) 은퇴 후 사역지로 영원의 모태 같은 필그림하우스 구상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4) 천로역정 분위기와 구도적 영성 소원담은 '필그림'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5) 기독교 교육의 대안 '글로벌 홈스쿨링 아카데미' 열어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6) '블레싱 도시 전도' 사역 부흥… 지구촌 사역 마무리 준비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7) 은퇴 예배서 "풍성·충만한 교회 영광을 다시 나눔으로"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8) "목사님의 설교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으시겠습니까"
* [역경의 열매] 이동원 (29) 부족함에도 불구, 상급으로 격려와 위로해 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이동원 (30) 은퇴 후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고통의 시간 찾아와
* [역경의 열매] 이동원 (31) 은퇴 후에도 설교·후학 지도·성지 순례 등으로 바쁜 일정
* [역경의 열매] 이동원 (32·끝) 남은 인생, 순례길 걷다 그 길 종착점에서 주님 만나리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동원 (2) 간섭 없는 삶 원했던 성장기, 복음 통해 하나님 만나다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던 부친 찾으려고
채권자들 몰려와 닦달하는 상황 겪으며
법조인으로 사는 삶을 꿈꾸었지만 실패
이동원(왼쪽) 목사가 1963년 경복고 졸업 기념으로 첫 번째 남동생인 이동형 장로와 사진을 찍었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유형 검사 ‘MBTI’를 하면 활동가(ENFP) 유형으로 나온다. 하지만 나는 외향성(E)과 내향성(I)의 거의 중간에서 약간 외향형에 치우친다. 외부 활동을 하다가도 금방 집의 조용한 평화 분위기로 후퇴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 밖 소식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밖을 기웃거리게 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기질로 따지면 전형적 다혈질에 점액질이 혼재된 것으로 나타난다. 행복한 흥분을 추구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조용한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갈등이다. 그래서 갈등과 관련해 누군가와의 추억이 별로 없다. 이런 내 모습이 지금까지 인생과 목회를 만들어오지 않았나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간섭받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담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성장기에 내게 주어진 가장 큰 부담은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려 빚을 지고 아버지가 도피하신 일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까지 부친의 채권자들이 찾아와 “아버지가 계신 곳을 알려달라”며 닦달한 상황은 청소년기 시절 최대의 상처였다. 당시엔 정말 죽고 싶었지만 죽을 용기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자식들의 생존을 해결하기 위해 친지들에게 적지 않은 빚을 얻어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키던 어머님의 재주를 비난할 용기도 없다.
나는 세상에 복수하고 판단 받는 대신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고자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남은 시간 동안 입시를 준비해 법과대에 입학하려던 꿈은 실패로 돌아갔다. 1년간 재수하려고 고향 수원으로 돌아갔다. 낮의 무료함을 달래려던 차에 김장환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님과 인연을 갖게 됐다.
당시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시고 미국인과 결혼해 한국에 귀국한 김장환 목사님이 함께 내한한 친구 선교사님들과 영어를 가르치던 라이프 클럽(Life Club)과 10대 청소년 모임인 십대선교회(YFC)에 출석하게 됐다. 나는 아직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구적 분위기에 적응하며 복음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 그 이상이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그해 가을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며칠간 이 말씀과 씨름한 것 같다. 나의 어떤 도덕적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나는 이미 율법을 깨트린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를 보내시고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만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었다. 회심한 날, 구원을 얻은 날, 거듭남을 확신한 날이었다. 내가 머리를 이고 있는 하늘과 땅이 모두 새롭게 보였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3) 교회 모임 간증 계기로 법대에서 신학대로 진로 전환
우수한 성적으로 한국성서대 수석입학
유학 갈 때까지 YFC 간사로 일하며
수많은 학생들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
미국 떠나기 전 우명자 자매와 약혼
이동원 목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72년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우명자 사모와 약혼식을 하는 장면.
성경이 너무 재밌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10대 청소년 모임인 십대선교회(YFC)의 토요 모임에서 간증할 기회가 생겼다. 솔직히 간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간증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의 새로운 삶에 대한 시적 증언과 함께 논리적으로 말한 내용이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 누님이 “미스터 리(Mr. Lee)는 연설에 은사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아무래도 신학을 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조언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나는 자아상의 고양과 함께 신학에 대한 동경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법대를 포기하고 신학대에 진학하기로 인생 계획을 전환했다. 교단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이듬해 당시 김장환 목사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진학하던 한국성서대에서 입학시험을 봤다. 성경을 뺀 다른 과목에서 우수했던 나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나의 신학적 갈망을 채우진 못했다. 다만 학장이셨던 강태국 박사님의 나라 사랑, 농촌 사랑, 성경 사랑에 대한 담백한 설교는 내 영혼을 깊이 만지고 있었다. 김장환 목사님은 “미스터 리는 아무래도 유학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며 유학 갈 때까지 YFC 간사로 일할 것을 권면하셨다. YFC 간사로 여러 중·고등학교를 뛰어다니며 수많은 학생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며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러다 갑자기 본격적으로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직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지만 복음이 내 안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목회자가 없는 경기도 화성의 한 감리교회에서 사역을 도와줄 수 있냐는 뜻밖의 제안을 받아 입대 전까지 사역하게 됐다. 30명 남짓한 시골교회가 1년 만에 60명 이상의 교인들로 배가되는 것을 보고 목회에 대한 미래를 꿈꾸며 헌신했다. 나의 ‘첫사랑 교회’로 지금까지도 이 교회 교우들과 교제하고 있다.
신학교 배경으로 나는 강원도 양구군의 한 이동외과병원에서 근무하는 ‘영현계’로 군 배치를 받았다. 영현계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화장하고 유골을 집까지 인도하는 업무를 한다. 군 생활을 하며 죽음을 삶 가까이에서 느꼈다. 삶의 허무함과 영혼 구원의 소중함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주한군사고문단(KMAG)에서 통역으로 일하다 제대한 뒤 다시 수원에 돌아왔다. 김장환 목사님이 섬기는 수원중앙침례교회와 YFC, 기독봉사회 등에서 일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사범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우명자 자매와 YFC에서 인연을 맺었다. 우리는 김장환 목사님댁 정원에서 사모님이 준비하신 따뜻한 촛불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약혼식을 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허무함의 정원’에 아가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나의 술람미,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였다. 하나님 다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된 날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4) 미국서 목사 안수 받고 귀국… 영원한 동역자 아내와 결혼
약혼자 명자 자매의 격려로 미국 유학길
‘학교 첫 한국인’ 책임감으로 열심히 공부
최대의 영예인 ‘그 해의 설교자상’ 수상
이동원 목사와 우명자 사모가 1975년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결혼식 화촉을 밝히고 있다.
낮에는 기독봉사회와 10대 청소년 모임인 십대선교회(YFC)에서 일하고 저녁엔 한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직도 휘청거리는 가난한 집안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약혼자 명자 자매의 격려가 유학을 결단하도록 했다. 기독봉사회 책임자였으며 미국 국제기독실업인회(CBMC) 회장을 지내신 실업가 예거(Yeager) 장로님의 도움으로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다.
자동차 도시인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자리 잡은 작은 신학교인 디트로이트 바이블 칼리지(후일 윌리엄 틴데일 칼리지)에서 첫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신학교 규모는 작았지만 교수진은 탄탄했다. 후일 댈러스신학교 부총장이 된 웬델 존스톤, 탈봇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헨리 할러먼 교수, 세계적 변증학 교수가 된 노먼 가이슬러가 가르치고 있었다. 학교 사상 첫 한국인이라는 책임감으로 열심히 공부해 우등생 반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학교 최대의 영예는 졸업반 학생 중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뽑아 채플 설교를 하도록 한 뒤, 한 학생을 선정해 ‘그 해의 설교자(Preacher of the year) 상’을 주는 전통이 있다. 졸업식에서 그 상을 받았는데 후에 설교자로 살아갈 내게 큰 격려가 됐다.
내친김에 계속 신학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우선 귀국해 일하다 다시 공부할 수 있다고 하신 김장환 목사님의 권고를 따랐다. 유학 생활에서 느낀 향수, 사랑하는 약혼자와의 결혼 문제도 시급했다. 사실 처음 유학을 떠날 땐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충실하게 전할 전도자로서의 준비만 생각했지 목회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에베소와 골로새서를 비교연구 했다. 둘은 쌍둥이 서신으로 교회론을 다루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영광이 마음을 크게 두드렸다.
김 목사님과 상의한 나는 미국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했다. 1975년 여름 1차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청년 사역을 시작하면서 수원중앙침례교회 부목사로도 사역했다. 물론 여러 해 기다려준 명자 자매와 교회에서 김장환 목사님 주례로 결혼했다. YFC 제자들이 신혼 가방에 개구리를 잡아넣어 첫날 밤을 개구리 소동으로 밤을 새운 것도 역경이라 할 수 있을까. 신혼여행은 당시 YFC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도시들을 돌며 학생 집회를 겸했다.
나는 다시 학생 전도에 매달리며 교회를 섬겼다. 이전과 달랐던 것은 아내와의 동역이 제공하는 심리적 안정감과 행복 덕분에 사역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숙한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잠언 기자의 증언(잠 19:14)을 경험했다. 처가에서 막내였던 아내는 여섯 명의 시동생, 층층으로 웃어른이 있는 가난한 집의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아내는 온갖 어려움을 말 없는 인내와 기도로 감당하며 나의 든든한 응원자가 됐다. 한 여인과의 동행이 이렇게 삶을 바꿀 줄은 정말 몰랐다. 아, 행복한 동행이여!
***[역경의 열매] 이동원 (5) 한국선 처음 시도한 ‘가정생활 세미나’… 큰 반향 일으켜
유학 중 가정생활과 크리스천 삶 다룬
세미나 참여, 가정사역의 가능성 경험
그 후 여러 가정 세미나 자료들 정리
이동원(오른쪽) 목사와 우명자(왼쪽) 사모가 2013년 사역 초기 영적 부모 역할을 해준 김장환(왼쪽 두 번째) 목사, 트루디 사모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 유학 생활에서 가장 도전받은 부분은 신학적 준비 이상으로 가정 사역의 가능성을 경험한 점이다. 예거 장로님의 인도로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코보홀을 방문했다. 수천 명이 한 주간 내내 가정생활과 크리스천 삶의 실제를 다루고 있었다. 빌 가서드의 세미나 ‘청년들의 갈등을 넘어서기’를 듣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당시로써는 이 세미나가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참석자들이 한 주간 동안 날마다 삶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이 제공하는 풍성한 삶의 데이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때부터 신학교 공부 외에도 여러 가정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자료들을 정리했다. 귀국 후 한국에서 이런 세미나를 하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된 것이다. 그 소망대로 나는 귀국한 뒤 10대 청소년 모임인 십대선교회(YFC)를 비롯해 죠이선교회(JOY) 등 선교단체, 영락교회 충현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새 생활 세미나’란 이름으로 대규모 가정생활 세미나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도된 가정생활 세미나가 교계 안에서 반향을 일으키는 모습을 목격했다. 몇 년 후 서울침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나는 유관순기념관을 빌려 한 주간 열리는 세미나를 기획했다. 2000석 이상이 만원을 이룰 정도로 성황리에 끝났다. 특히 참석자들이 세미나 바인더를 들고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일대에서 유관순기념관으로 모여드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교회에서 이런 유형의 대중적 가정 세미나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친구인 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가 “등록비를 받고 진행하는 게 가능하겠냐”며 염려해줬다. 후일 그는 두란노서원을 통해 가정 사역 관련 바인더를 만들었으며 한국교회의 세미나 시대를 열기도 했다. 하이패밀리 송길원 목사님은 경기도 양평에서 센터를 열어 가정 사역을 하며 크게 이바지하시는데 나를 한국교회 가정 사역의 원조로 기억해줘 고맙기만 하다.
몇 년 후 나는 보다 전문적인 연구자들에 의해 가정 세미나가 진행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 목회 현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정 사역은 잊을 수 없는 내 첫사랑 사역의 마당이었다.
2020년 국제변호사를 하던 둘째 아들을 천국으로 보낸 나는 지난달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 ‘상실 극복 3일 순례의 길’ 세미나를 열었다. 이런 슬픔을 겪은 이들과 함께 울고 함께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시도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가정 사역을 졸업하지 못한 듯하다.
유학 후 돌아온 나는 설교 사역 등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독립 사역의 필요를 느꼈다. 김장환 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내 은사를 살려 나만의 목회 현장과 사역의 광야로 떠나기로 한 것이다. 사역 초기에 ‘영적 아비’ 역할을 해주신 김 목사님에게는 한없는 은혜의 빚을 지게 됐다.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한 트루디 사모님도 나와 아내의 ‘영혼의 어미’ 같은 분이시다. 두 분이 부디 건강하게 장수하시길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6) 학생들과 직장인 기초사역 통해 복음의 영향력 실감
고려병원과 한국은행 직장선교회에서
성경공부 인도하며 복음 전도에 일조
전문가 재능기부… 100여명 함께
LG유플 ‘착한 가게’로 선정·지원
경기도 수원 산상교회 모습. 이동원 목사가 복음주의적 비전을 갖고 첫 목회를 시도한 곳이다. 산상교회 제공
유학 생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시작한 사역 가운데 직장 사역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매주 목요일 한국은행 직장선교회(FMB)에서 점심시간을 활용해 성경공부를 진행했다. 이 모임은 아마 한국 직장 사역의 효시가 아니었나 싶다. 성경공부는 당시 적지 않은 직장인들이 모여 서로 믿음을 북돋울 뿐 아니라 믿음이 없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성경과 기독교에 노출할 수 있는 복음 전도의 기회였다. 시간이 흐른 뒤 이 모임에 다녀간 인근 다른 직장인 그리스도인들이 비슷한 모임을 만들면서 직장 성경공부 모임이 퍼진 듯하다. 5년 이상 인도하다 박영선(현 남포교회 원로) 목사에게 인계했다.
당시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서도 매주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특히 열심 있는 간호과장, 병원 임원들의 열성으로 수년간 이 모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 등 기독교 절기에는 병원장 등도 참여했다. 후일 조운해 원장님 가족이 신앙인이 되게 하는 일에도 일조했다.
아직 젊은 전도자였던 나는 두 곳의 직장 모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직장 모임들을 인도하면서 무엇보다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과 평신도 선교사 양육 비전을 체득할 수 있었다.
내가 독립적으로 책임을 맡았던 유신고 교목 사역과 산상교회 사역도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다음세대를 대상으로 한 ‘첫사랑’ 사역으로 매주 채플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다만 군인 출신의 이사장님과 세례 방식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나는 성령의 인도를 통한 순수한 자의적 믿음의 고백 근거 위에서만 세례(침례)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번 부활절에 몇 명 세례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사장님의 선교적 충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내 목회철학과는 맞지 않았다. 주일에 빈 곳이었던 아름다운 채플실(건축상을 받은 작품)을 인근 일반인에게 공유해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며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기쁨이었다.
경기도 수원 산상교회에서 고등학교 교사, 아주대 교수 등 여러 사람이 신앙인이 됐으며 이 중에서 후일 목회자나 선교사가 된 분들도 적지 않다. 이 교회에서의 사역 기간은 짧았지만 복음주의적 비전을 갖고 첫 목회를 시도한 곳으로 마음의 고향 같은 교회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유신학교나 아주대 출신들을 만나는데 이분들이 이때 믿음을 갖게 돼 하나님 나라 사역에 헌신하게 됐다는 고백을 들을 때마다 복음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거두게 하심을 믿는다.
학생들과 직장인을 세운 초기 사역을 회상하면서 내 마음을 설레게 한 말씀은 시편 126편 5~6절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어찌 아멘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경의 열매] 이동원 (7) 본격적 목회 시작한 서울침례교회… 목회의 애증·부흥 경험
부임 당시 침체돼 노인뿐이었던 교회
학생 선교단체와 젊은이들 모이면서
부임한지 2년여 만에 교회 가득 채워
강해설교 진행하며 가정 사역 본격화
이동원(원 안) 목사가 1980년 서울침례교회에서 열린 ‘새소망예수 1980 한미 전도대회’를 마친 뒤 교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본격적인 목회를 경험하며 초기 사역을 수행한 곳은 ‘침례교회 일번지 교회’로 불리던 서울침례교회였다. 여기서 4년 남짓 사역하면서 목회의 애증을 실감나게 경험했다. 출석 교인 300여명이 2000여명 이상 증가하는 부흥도 경험했다.
1979년 6대 담임목사로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출석 성도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본래 이 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미군 중 침례교인들의 헌금을 모아 건축한 곳이었다. 건물을 새로 지어 헌당한 뒤 서울메모리얼처치(Seoul Memorial Church)로 불리고 있었다. 오랜 역사 가운데 여러 목회자가 목회를 감당했지만, 역사적 교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침체해 있었다.
그러나 여러 학생선교단체와 청년들이 모여와 부임한 지 2년이 지나자 청년들이 많은 교회로 바뀌고 있었다. 처음 예수님을 믿는 청년들의 결단, 제자로 헌신하는 청년들의 눈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후일 이 교회에서 목회자와 선교사로 헌신한 청년들이 60여명을 넘어섰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해마다 유관순기념관을 빌려 ‘새 생활 세미나’를 열면서 가정 사역을 본격화했다. 세미나 후속편은 교회를 중심으로 열었다. 그때만 해도 이름이 생소한 ‘강해 설교’를 설교 때마다 진행했다. 성경 강해의 흥미를 더하고자 수요 예배 땐 프로젝트를 활용했다. 수요 저녁 예배 시간에도 서울에 사는 교인뿐 아니라 여러 신학생,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운집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는 성경책별 강해 설교와 주제별 강해 설교를 시도했다. 설교자 개인 취향에 따른 강의나 에세이 스타일이 아닌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고 삶에 말씀을 적용하도록 하면서 설교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금요 철야예배는 저녁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 말씀이 제공한 기도 제목과 성도들의 개인 기도 제목을 두고 밤새 기도하는 금요일 밤은 불야성을 이뤘다.
그러나 오랜 역사가 있는 교회들처럼 일부 리더 교인들을 중심으로 상호 대립하던 구조적 갈등을 넘어서지 못했다. 교회 건물로는 넘쳐나는 교인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교회 후면에 있는 제일병원에서 교회 건물 매입에 대해 타진했다. 매입 조건이 너무 좋아 당시 개발되던 강남으로 교회가 대탈출 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단 일번지 교회를 옮길 수 없다며 완강하게 주장하는 일부 교인들과 다툴 자신이 없었다.
본래 갈등을 싫어하고 평화지향형 리더십을 가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했다. 출구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마침 미국 워싱턴에서 연합 집회를 인도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교회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마음이 무거웠던 나는 해외 집회를 인도하며 안식하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를 찾고자 했다. 오랜만에 출국한 나는 초기 사역의 순간순간을 헤아리면서 감사와 도전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8) 한인교회 담임 맡아 달라며 평신도들까지 찾아와
미주 워싱턴 ‘복음화 대회’서
순수한 복음 전도 설교에 은혜 받은
제일한인침례교회 담임 김 목사가
후임으로 모시고 싶다며 읍소하는데…
1983년 미국 이민 목회를 시작한 이동원 목사가 사역 초기 시절 제일한인침례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30대 중반의 청년 전도자였던 나는 미주 워싱턴 연합집회를 인도했다. 미주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얻어 감사했다. 당시 ‘복음화대회’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보다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보편적인 한국교회 관습인 듯했다.
실제로 복음화대회 명칭과 달리 믿음이 없는 이들의 참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여러 교회가 연합한 단합대회와 비슷한 성격의 복음화대회를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자 그대로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전도 차원의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다. 교포 사회의 특수성으로 불신자나 신앙의 확신이 없는 교우들의 참석이 예견됐기 때문이다.
감사한 점은 이런 메시지가 불신자들의 결신을 이끌었고 성도들에게도 영혼 구원의 감격을 일깨운 계기가 된 듯했다. 모임을 주관한 임원 목회자들이 “오랜만에 원색적 복음이 전해진 좋은 기회였다”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을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후회할 필요 없는 전도자의 소명임을 확신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연합 집회 후 발생했다. 당시 제일한인침례교회를 담임한 김현철 목사님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시면서 시간이 가능하면 이 지역의 대표 침례교회인 제일한인침례교회에서 말씀을 좀 더 나눠달라고 하셨다. 집회 후 며칠 쉴 예정이던 계획은 급조된 또 다른 말씀 사경회로 이어진 것이다.
그 집회 마지막 날 김 목사님은 자신과 같은 사람의 리더십은 이민 온 한국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미국 사회의 정착을 돕는 사회봉사 중심의 목회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런 목회를 하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말씀 중심의 목회가 교포 사회에 필요한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김 목사님은 “미국 남침례교회 행정을 담당하는 교단 본부에서의 사역을 생각하고 있다”며 갑자기 나에게 제일한인침례교회 담임이 되어 줄 수 있냐고 읍소하셨다. 생각지 못한 제안에 일단 거절했다. 그런데 다음 달 김 목사님과 함께 찾아온 평신도 지도자들이 “제일한인침례교회 담임을 맡아주시면 김 목사님을 교단 본부로 보내드릴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시는 게 아닌가.
다시 거절했지만 기도라도 할 수 없냐고 하셨다. 기도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번 미국행에 하나님의 또 다른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표가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었다. 고국 교회로 돌아온 나는 김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이동원 목사가 미국행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으니 (담임목사 청빙이) 가능한 일”이라며 기도 부탁을 하신 뒤 사임, 남가주 침례교단의 행정 사역을 위해 떠나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교회 청빙위원회가 구성돼 나를 정식으로 청빙하기 위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청빙위원회 대표가 한국으로 나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당했지만 이 일의 배후에 있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9) 주님 응답 받고 미국행… 목회 섬기며 틈틈이 신학 공부
이민 목회 여부 결정을 두고 고민하다
한 집사님 발언 통해 주님의 뜻 수용
10년 간 워싱턴 대표 교회로 성장 노력
이동원 목사가 1983년 8월 미국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취임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1983년은 이민 목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고민스러운 기도와 함께 시작됐다. 미국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후일 워싱턴 지구촌교회)를 대표해 한국에 오신 이상훈(연변과학기술대 부총장 역임) 집사님의 간곡하고 진솔한 호소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지만 내게는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 필요했다.
기드온처럼 미국에 가서 목회하는 게 주의 뜻이라면 사인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내가 제일한인침례교회에서 청빙 받고 있다는 사실이 당시 시무하던 서울침례교회 제직회에 알려지면서 제직 회의가 열렸다. 평소 회의 석상에서 발언하지 않으시는 한 과학자 집사님 한 분이 의외의 발언을 하셨다.
최근 워싱턴에 갔는데 그 교회의 모든 교우가 이동원 목사의 청빙을 위해 간곡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한국의 교회에선 이 목사님이 가시면 안 된다는 담론만 요란할 뿐, 기도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하는데 아무래도 이 목사님을 보내드리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닌가” 하는 발언이었다.
갑자기 장내는 숙연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그 집사님의 말이 내가 기다리던 응답의 사인임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미국행 준비를 해서 8월 초 뜨거운 여름에 워싱턴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나는 그때부터 꼭 10년을 채우며 이민 목회를 했다. 친구인 고 하용조 목사가 “자주 사역지를 옮기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10년을 채우라”고 한 충고도 도움이 됐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경복고 선배인 김상복(현 할렐루야교회 원로) 목사님을 만났다. 그는 워싱턴 벧엘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로 섬기며 신학교에서 가르치셨는데 따뜻한 점심을 사주시며 환대해주신 것을 잊지 못한다. 김 목사님을 비롯해 중앙장로교회 고 이원상 목사님, 그리고 이웃교회 김원기 목사님과 마음을 열고 교제하면서 워싱턴 복음화를 위해 아름답게 연합한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도 아내와 나는 목회다운 목회, 창의적 목회를 실험할 수 있었던 행복한 10년을 추억한다. 부임 당시 장년 400여명, 청소년 300여명이 모이던 교회는 출석 2300명을 넘기는, 워싱턴을 대표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이민교회가 처음일 수 있는 단기선교팀 파송, 전도폭발 사역, 단계적 제자훈련(목자 훈련), 중보기도 및 ‘사랑의 순례’ 가정 사역 등을 교회에서 펼쳤다. 이 교회 성가대는 워싱턴 케네디센터, 뉴욕 카네기홀 등에서 매년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며 문화적 영향력을 끼쳤다. 열정적인 찬양사역자 손형식 목사님과의 동역도 잊을 수 없다.
미국에 올 때 나는 못다 한 신학 연구를 하도록 교회의 협력을 요청했다. 목회하면서 내가 속한 교단인 사우스이스턴 침례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과정, 시카고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과정을 마치도록 허락한 교회의 배려도 잊을 수 없다. 공동체는 지도자의 성장만큼 성장한다고 하지 않는가.
***[역경의 열매] 이동원 (10) ‘열린 목자훈련’ 개설… 균형잡힌 성도의 제자훈련
극단 선택하는 기독교 운동의 위험 인지
하나님 나라에선 보수나 진보 영역보다
자유, 정의, 기쁨, 평화가 더 높은 가치
이동원(오른쪽) 목사가 2019년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상하고 있다.
나는 신학 연구를 한 다음 목회하면서 그 연구를 차분하게 목회에 적용하는 수순을 밟지 못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뒤 사역에 헌신하다 사역 현장에서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다시 신학을 연구하다 사역에 뛰어드는 식이었다. 가정환경이 차분하게 공부만 할 수 있는 정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 연구도 목회나 전도의 실제적 관점에서 진행됐다. 형이상학적 신학 이론보다 실천신학에 더 마음이 이끌렸다. 설교학 전도학 선교학 리더십 교회성장학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거쳐 간 몇몇 신학교는 신학과 목회의 건강한 균형을 갖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 연구를 하지 않고도 영적 거목으로 쓰임 받은 이들을 알고 있다. 설교자 찰스 스펄전과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가 그렇지 않았는가. 신앙 지도자를 평가할 때 마치 신학 연구만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펄전과 무디 역시 많은 책을 읽었으며 영적 지도자들과 교제한 것을 바탕으로 신학적 성장을 한 것도 간과해선 안 된다.
내가 공부한 사우스이스턴 침례신학교는 당시 미국의 6대 침례계열 신학교 중 가장 진보적이었다(지금은 다시 보수적으로 회귀). 나는 침례교 신학교에서 문서설(성경이 다양한 전통의 자료들이 모여 편집되고 수정돼 현재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가르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견해의 신학 수업은 나도 모르게 신학 지평을 넓히고 있었다. 목회하면서 풀타임으로 박사 과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시카고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트리니티)를 선택했다.
당시 트리니티는 풀타임 박사 과정이 개설되지 않았기에 최고의 선택이 선교학 박사 과정이었다. 전도학으로 세계적 영향을 끼치던 로버트 콜만과 상황화 선교학의 헤셀 그레이브 등이 그 학교 교수로 있었다. 세계적 선교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폴 히버트도 여기서 가르치게 된다는 소식은 복음적인 소식처럼 반가웠다.
트리니티에 머무는 동안 성경의 권위를 굳건히 지지하면서도 신학의 여러 향방에 열려 있는 넓은 복음주의가 마음에 들었다. 극단은 언제나 위험한 선택임을 확신했다. 이때부터 정치적 극단을 선택하는 기독교 운동의 위험성을 인지했다. 하나님 나라는 보수나 진보 영역보다 훨씬 더 높고 넓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자유 정의 기쁨 평화(샬롬)의 가치임을 알고 그런 신학적 지평에서 좌도 우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성도의 제자훈련을 단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열린 목자훈련’ 과정을 개설해 구속사의 전망, 성경적 리더십, 성경 교리론, 평신도 사역론 등을 가르쳤다. 우리 교회 성도뿐 아니라 이웃 교회에서도 참가하도록 문턱을 넓혔다. 이민자들은 피곤한 일상 중에도 제자훈련에 참여했다. 심지어 먼 지역인 버지니아에서도 100여명에 가까운 이들이 참여했다. 제자훈련을 받은 이들 중 20여명은 후일 평신도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그 시절 내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였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11) 평신도 리더들과 함께 제자 훈련… 영적 성숙과 진보 이뤄
교회 리더들이 행정에만 매달려
영적 리더십 발휘 못하는 모습에
매주 토요일 함께 성경공부하면서
말씀 통해 제자 된다는 의미 나눠
이동원(오른쪽 네 번째) 목사가 미국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취임 직후인 1983년 김두화(오른쪽) 목사 등 동역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미국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후일 워싱턴 지구촌교회) 사역 기간에 리더들의 제자 훈련 사역을 하며 잊을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그동안 나는 평신도 리더들이 교회 행정에만 매달리고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늘 물음표였다. 그래서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리더들에게 앞으로 3년간 교회 밖 사역을 절제하고 매주 토요일 오전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성경 공부하며 제자 훈련을 하자고 요청했다.
토요일마다 이른 아침에 한 시간 이상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의미를 함께 나눴다. 이후 교회에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교회 회무를 처리했다. 이런 시간을 꾸준히 가지니 평신도 리더들의 영적 성숙과 진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2년 후부터 그분들이 교회에서 주일에 단계식 제자훈련반을 인도하도록 했다. 기대했던 대로 교회 전체가 제자 훈련을 하는 영적 분위기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3년간 제자 훈련을 하시며 12명 제자에 이어 70명의 제자를 전도하도록 내보내셨다. 나중엔 이들을 땅끝까지 제자 선교사로 파송, 세상의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 일을 하셨다. 이처럼 신약의 모델을 따라 교회 제자 훈련을 할 수 있음이 축복이었다.
당시 박사 과정에 있던 나는 제자 훈련 사역을 하며 느낀 보람을 제자 훈련의 대가 로버트 콜만 박사와 나눴다. 콜만 박사는 내가 이런 보고를 할 때마다 마치 자신의 사역처럼 기뻐했고, 교실에서 큰 소리를 내면서 사역을 축복하는 응원 기도를 해줬다. 이제는 제자 훈련의 가능성을 현장에서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훈련된 리더들은 한 가정 한 가정씩 세계 선교의 현장으로 나아갔다. 그때 함께 공부한 리더 중 70%는 모두 선교에 헌신해 선교지로 나갔다. 특히 여러 가정이 중국 연변과학기술대에서 섬겼다.
그 무렵 우리 교회는 미주 이민교회 사상 처음으로 여름철 해외 단기선교 파송도 시도했다. 당시 국제선교단체인 OM선교회에서 훈련받은 김두화 목사가 선교 목사로 교회 청년들을 훈련한 뒤 스리랑카 필리핀 등 선교지로 매년 나갔다. 성도들은 단기선교를 다녀온 뒤 선교 보고를 했는데 워싱턴 이민교회에서 처음 있는 일에 여러 교회에서 관심을 가졌고 청년들의 선교 간증에도 큰 반향이 있었다.
워싱턴 중앙장로교회 등도 우리 교회처럼 단기선교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또 우리 교회가 다녀온 스리랑카의 한 마을에 중앙장로교회가 교회당을 지어주기로 하는 등 선교 협력도 이뤄졌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하나님 나라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교파의 경계선이 있을까. 나는 워싱턴에서 교파를 초월한 연합 사역의 아름다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이 워싱턴이라는 도시가 내게 준 가장 큰 선교적 선물이었다. 워싱턴은 하나님 나라의 모자이크 미학을 경험하게 한 영적 추억의 도시이기에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지금도 가슴 설레는 감사와 기쁨이 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12) 코스타 열어 한국 유학생들에게 위로·은혜의 시간 제공
미국교회로 흩어져 신앙생활을 하던
한인 유학생들과 벅찬 집회 마친 후
신앙생활에 목말라하던 이들을 위해
코스타 한인 유학생 선교 사역 시작
이동원(오른쪽) 목사가 1988년 미국에서 코스타 집회를 가진 뒤 강사로 섬기던 동역자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옥한흠 김두화 이승장 홍정길 하용조 오정현 목사(왼쪽부터).
지금 회고해 보면 미국 제일한인침례교회(후일 워싱턴 지구촌교회) 시절에 가장 의미 있는 사역의 탄생은 국제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펼치는 코스타(KOSTA·Korean Students All nations) 유학생 선교 사역이 아니었나 싶다. 1985년 이민 목회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때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한국 유학생들로부터 집회 인도 요청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한인교회는 주로 도시 지역에만 있었고 지방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한인교회를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지역의 한인 유학생들이 미국 교회를 빌려 놓고 집회를 요청한 것이다. 사흘여간 보람찬 집회를 마친 뒤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와 새벽기도를 할 때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 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미국 교회로 흩어져 신앙생활을 할 그들이 제대로 신앙을 유지하고 있을까.’ 갑자기 한국에서 여름철이면 여러 교회와 선교기관 주최로 열리던 뜨거운 수양회 현장들이 뇌리를 스쳤다. 1년에 한 번이라도 유학생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한다면 은혜를 받고 1년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제일한인침례교회 안에 유성회(유학생 성서연구회)가 있었다. 교회 스태프, 유성회 회원들과 이 문제를 두고 의논했더니 전폭 지지한다고 했다. 이 안건을 다시 교회 제직회에 올리니 모두 기뻐하면서 교회가 후원하겠다고 했다. 집회 중에는 김치가 고픈 학생들에게 김치를 공급하고 집회 후엔 워싱턴 관광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86년 6월 제일한인침례교회에서 1시간 20여분 걸리는 수양회관에서 첫 번째 코스타가 열렸다. 나는 이 모임이 우리 교회만의 행사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워싱턴 지역의 이원상 김원기 목사님과 의논했다. 한국으로 전화해 내 믿음의 형이자 과거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섬긴 홍정길 목사님과도 의논했다. 간헐적으로 보스턴을 위시한 지역에서 유학생들을 만난 홍 목사님도 너무 좋다 하시면서 함께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강사들이 강사비를 안 받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원할 수 있는 조건으로 한국에서 오셨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유학생들은 결국 한국으로 귀국할 인재들 아닌가. 그리고 LA의 오정현 목사님에게도 연락했다. 과거 한국 내수동교회에서 여름 수양회를 인도하며 뜨겁게 찬양을 인도하던 그의 매력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기독학생회(IVP) 총무를 하던 송인규 교수님도 함께하기로 했다. 막강 강사진으로 시작된 코스타는 3년 만인 1988년 1000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등록해 초만원 사례를 이뤄 우리는 더 넓은 장소를 고민해야 했다.
88년 코스타에는 소중한 동역자들인 옥한흠 하용조 목사님 등이 오셨고 세계적인 복음주의 석학인 칼 헨리 박사도 참석해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 큰 도움을 주셨다. 그 시절 한국의 대학가는 연일 데모하다가 목숨을 바치는 청년들의 희생으로 술렁이고 있었고 민족의 장래는 불안하기만 했다. 쿼바디스 도미네(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역경의 열매] 이동원 (13) “코스타 운동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선물”
미주 유학생 대상으로 시작한 코스타
소식 번지며 일본 등 20개국으로 확산
중고등학생 위한 Youth Kosta도 시작
많은 동역자들 헌신으로 열매로 승화
김두화(왼쪽 아홉 번째) 목사가 1988년 미국 한인교회에서 열린 코스타 집회에서 성경을 봉독하고 있다. 김 목사 오른쪽이 이동원 목사.
코스타(KOSTA·Korean Students All nations) 사역은 미주 유학생 이 중에서도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처음 코스타는 ‘Korean Students In America’의 약자였다. 태극기와 미국을 뜻하는 별을 포함하는 로고로 채택했는데 아내가 로고 디자인을 맡았다.
코스타 소식이 퍼지면서 사역이 일본과 유럽에 이어 중국 필리핀 러시아 캐나다 등 20개국에까지 확산됐다. 대학원생과 대학생에 이어 중·고등학생을 위한 유스 코스타(Youth KOSTA)도 시작됐다. 최근엔 나라별 디아스포라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집회로 그 지경이 넓어졌다. 야베스의 기도가 생각난다. 작은 수고와 고통은 말로 할 수 없는 열매로 승화됐다. 이 집회로 인해 이용규 선교사 등의 선교 열매를 맺었고 수많은 나라의 선교 지도자와 목회자들의 헌신이 일어났다.
여러 믿음의 전우 동역자들의 헌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주 코스타 사역 초기 10년 이상 참여하며 좋은 강의와 지도로 가르침을 주신 손봉호 이만열 교수님, 이승장 목사님, 코스타에 한 번 오자마자 그 불꽃에 감염돼 나보다 더 열심히 헌신한 김동호 목사님, 강준민 김창근 유기성 목사님 등의 초기 헌신을 잊지 못한다.
우리는 코스타에 오는 학생들의 건강한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는 큐티(QT·말씀묵상)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김양재 우리들교회 목사님(당시 집사님)을 초빙했다. 가정과 일터를 세우고자 가정사역자 박수웅 장로님, 송길원 목사님, 주명수 목사님(당시 변호사), 박성수 이랜드 회장님, 방선기 목사님, 그리고 선교 동원을 도우신 이태웅 정민영 목사님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코스타는 코스타를 통해 은혜받은 이들(코스탄)의 헌신 때문에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다. 코스타 총무로 오래 헌신한 곽수광 목사님과 유임근 목사님의 수고도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 국제 코스타 후원 이사장으로 말없이 큰 헌신을 하신 권경섭 전희인 장로님의 사랑과 헌신도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유학생을 보내기 시작한 때는 구한말 고종 말기였다. 역사는 유길준을 최초의 재미 유학생으로 기록한다. 이후 개화기 유학생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선진 학문을 배우고 귀국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유학생 출신이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이 나라 건설에 이바지한 사실은 유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한 유학생 복음화를 주목한 코스타 운동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축복이라고 믿는다. 누가 시작한 것은 중요치 않다. 누가 이 운동을 지속해서 승화시킬 것인가가 더 중요한 과제다. 지금 한국교회는 다음세대의 세대 전수가 끊어져 고민 중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을 두고 “주의 권능의 날에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고 노래했다. 그 세상이 그립기만 하다. 그런 부흥을 어서 속히 주소서!
***[역경의 열매] 이동원 (14) 강남 4인방 동역의 은혜, 놀라운 사역의 에너지로 폭발
배경 다르고 교파도 다른 강남 4인방
젊은이 사역으로 사역을 시작한 점과
복음주의 목회에 대한 공감으로 상통
본격적 학생 선교의 협력사역 이끌어
이동원(왼쪽) 목사가 1995년 평생 가까이한 동역자인 고 옥한흠 하용조(왼쪽 두 번째·세 번째) 목사, 홍정길 목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국제 코스타(KOSTA·Korean Students All nations) 사역에서 가장 잊지 못할 모임은 1988년이다. 평생 가까이 동역한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목사님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강남 4인방’으로 불렀다. 우리가 지은 이름은 아니다. 나는 강남에 살아본 일도 없고 사역지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분당 수지지구 ‘촌교회’로 소개했었다.
사실 우리 네 사람의 교제는 인위적인 의도로 된 것도 아니고 그냥 하늘의 인연(섭리)이라고 말하고 싶다. 네 명의 배경과 교파가 다름에도 동역의 은혜를 누린 것은 그분의 인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우리의 공통점은 청년 사역으로 사역을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복음주의적 목회에 대한 공감이었다.
우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에 소개된 소위 국제 학생선교단체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홍정길 하용조 목사님은 CCC(빌 브라이트, 김준곤), 나는 10대 청소년 모임인 십대선교회(YFC·토리 존슨, 빌리 그레이엄, 김장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옥한흠 목사님은 네비게이토선교회의 제자훈련을 기초로 본인만의 제자훈련 전략을 키워가고 계셨다.
1960년대에 이미 학생 선교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연합의 필요성이 제기돼 연합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각 선교단체의 대표 격 지도자들이 미온적이어서 몇 번의 교제로 끝났다. 성도교회 대학부를 지도하던 옥 목사님, CCC에 헌신하던 홍·하 목사님, 그리고 죠이선교회 이태웅 목사님과 교제를 이어갔다. 후일 한국에 귀국해 지구촌교회를 개척하면서 본격적인 협력 사역들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맏형격인 옥 목사님이 “우리 만날 때가 되지 않았나?”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하며 안부를 물으며 시시때때로 점심 자리를 준비해 주셨다. 그렇게 만나 서로 고해성사를 하며 교제하던 자리가 자연스럽게 복음 안에서의 교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발돋움의 사역이 되지 않았나 싶다. 코스타 사역을 필두로 선교한국 학원복음화협의회 한국해외선교회(GMF) OM선교사역 등 대각성 전도 운동, 강해 설교 등에 우리는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영웅적 선배들과의 만남보다 이 교제를 통해 많은 배움을 가질 수 있었다. 맏형 옥 목사님에게서 솔직하고 투명한 자기 드러냄, 그리고 사역에 집중하는 고결함의 도전을 받았다. 이 목사님에게는 진지함과 정확함, 홍 목사님에게는 인생을 사는 깊고 넓은 멋과 맛을 배웠다. 거의 동년배인 하 목사님에게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창조성의 불꽃에 감염됐다.
오늘날 상담 이론가들은 어떤 유형의 상담보다 효율적 상담을 ‘친구 상담’이라고 한다. 물론 옥한흠 홍정길 이태웅 목사님은 모두 한참 형님들이지만 이분들은 나와 하 목사님을 항상 친구처럼 대하고 격려해주셨다. 거기서 나온 우정의 시너지는 놀라운 사역의 에너지가 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15) 대형교회 담임 초빙도 받았지만 한국서 개척 도전
교회 리모델링과 훈련된 교사 세우는 등
몸담은 교회 미래 사역 위한 준비 마쳐
기사입력 2023.10.12 03:08 기자명김아영
이동원 목사의 이민교회 사역 막바지 시절 리모델링한 미국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예배당 전경.
1993년, 가장 먹먹하고 무거운 가슴으로 새해를 열었다. 이미 92년을 마무리하며 제일한인침례교회에서의 10년 사역을 결산할 시간이 가까움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내 나이도 어느덧 48세. 쉰 살을 넘기면 한국 사역은 어려울 것이라 직감했다.
지난 몇 년간 교회에서의 사역 마무리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거의 신축에 가까운 예배당 리모델링을 했는데 이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다목적 대강당을 봉헌했다. 이 덕분에 1200여명이 참석한 대형 집회도 은혜 가운데 치를 수 있었다. 교회가 속한 미국 남침례교 스타일로 장년 제자훈련을 위해 40여개 교실을 확보했으며 제자훈련을 통해 훈련된 성숙한 교사들도 세울 수 있었다. 이제 미래 사역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갖춰지고 있었다. 이제 나는 한국에서 내 생애 마지막 사역에 도전할 때가 임박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 초빙을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목회는 힘들어도 개척하고 싶었다. 성경에서 배운 교회상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기 위해 백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회 평신도 리더들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나눈 뒤 한국에서의 개척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교회 전 교인 투표를 통해 이런 개척 안에 지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목사님이 한국의 큰 교회로 가시는 게 아니고, 우리 교회를 베이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함께하지 않을 수 있냐”며 지지했다. 교회에 이 비전을 공유하고 당분간 제일한인침례교회와 (개척될) 한국교회가 공동 사역을 하자는 제안까지 했다.
한국교회를 토대로 미국에 교회를 세운 일(미주 영락교회, 미주 충현교회 등)은 있었지만, 이민교회를 토대로 다시 한국에 개척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에 가까웠다. 교회 회중의 다수 지지로 공동 목회안을 승인하고 새로 탄생할 한국교회와 미국 이민교회가 비전을 함께한다는 의미로 교회 이름도 ‘지구촌교회’를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요 축복이었다. 문제는 가족 동의를 구하는 일이었다. 아내는 나와 평생 함께 길을 걷기로 한 터라 걱정하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문제였다. 당시 큰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둘째 아들은 중학교 3년이었는데 한창 10대 소년의 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예배를 드린 뒤 회의를 했다. 아빠이자 교회 리더로서 한국교회 복귀에 대해 그동안 기도한 내용을 나눴다. 두 아들에게 아빠 없이 미국에 남아 대학 진학할 때까지의 시간을 감내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 동의를 강요하지는 않으며 얼마간의 시간을 가진 뒤 기도 후 대답해달라고 했다.
2주가 지난 후 다시 가족이 모였을 때 아들들은 아빠의 한국행을 응원한다고 했다. 다만 자신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엄마가 지원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대답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16) 10년 만에 고국 땅 밟아… 선교 책임감으로 333비전 구상
수지 분당 지역을 개척 목회지로 정하고
인구 30만중에 10분의 1인 3만명 전도
기사입력 2023.10.13 03:02 기자명김아영
1993년 11월 14일 이동원(원 안) 목사가 개척 준비 예배에 모인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선교신학 박사 과정 중 제자훈련의 대가 로버트 콜만 박사는 자기 인생의 성구를 선택하고 남은 인생의 사역 비전을 한 페이지로 제출하라고 했다. 내가 선택한 구절은 빌립보서 2장 13절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거룩한 소원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이 성구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한국에서 후회 없이 전도하고 목회하다 하나님 앞에 서고 싶었다. 개척 목회지를 두고 기도하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와 용인시 수지구 지역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과거 목회하던 서울 강북 지역과는 떨어져야 했고 지인들이 건강한 목회를 하던 강남 지역과도 거리가 필요했다.
남은 선택은 강남 아래 위치한 수지 지역이었다. 당시 수지는 개발 직전이었고 수지가 이웃한 분당은 개발 초기인데 인구가 30만명 정도였다. 기도하고 도전할 만한 지역이라 생각했다.
개척을 두고 함께 기도하던 분들과 ‘333비전’을 만들었다. 인구 30만명 중 10분의 1인 3만명을 전도하고 이 중 10분의 1인 3000명 평신도 전도자를 세우며, 이 중 10분의 1인 300명을 타문화권 선교사로 파송해 복음의 빚을 갚고 싶었다.
교회성장주의자는 아니지만 지역 사회에 교회가 심어질 때 선교 책임만은 다하고 싶었다. 그것이 333비전으로 구상됐고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도 비전의 불을 댕겼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 비전은 ‘민족 치유, 세상 변화’ 모토로 정리됐다.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대한 바를 요약하면 결국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의 가장 큰 명령(Great Commission)인 복음 전도(제자 삼기)와 가장 큰 계명(Great Commandment)인 이웃 사랑으로 이 비전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내 나이 48세, 한국교회의 통상적 기준으로 70여세까지 목회한다면 최초 10년은 복음 전도와 선교에 헌신하고 나머지 10년은 이웃 사랑(사회 복지)에 헌신하는 목회를 하고 싶었다. 이런 선교의 주체는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여야 한다고 믿었다. 평신도 지도자를 육성하는 마당으로 ‘소그룹 셀 목회’를 강조하고 모든 성도에게 평신도 선교사의 비전을 심고자 했다.
과거 나와 목회 마당에 있었거나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분들이 나의 귀국을 고려한다는 소문을 들은 뒤 함께 교회 개척을 갈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이민 목회 10년을 마무리하고 1993년 10월 말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교회 개척을 위한 기도회를 시작했다.
마침 내 친척이 전무로 있던 수지에 위치한 선경(SK 그룹 옛 이름) 스마트 복지관 건물 5층에서 65명이 모여 한국 지구촌교회 개척을 위한 기도회를 시작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온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강점과 약점을 공부하며 우리가 기대하는 건강한 교회의 비전을 나눴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17) 외환위기와 종말론 소문도 막지 못한 부흥의 열기
수지에서 분당의 새 건물로 이사 온 후로
매년 1000명이상 교인 늘어 5000명 근접
1998년 발간된 이동원 목사의 책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 표지.
처음 지구촌교회 개척 장소인 경기도 용인 수지 선경(SK 그룹 옛 이름) 스마트 복지관이 있던 공장 건물은 여러 가지로 열악했다. 예배 장소가 5층에 있었는데 승강기가 없어서 불편했고 여름이면 테이프 만드는 공장 화학물질 매연으로 숨쉬기 편치 않았다. 한 교우는 매 주일이 마지막 방문이라는 심정으로 출석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매주 등록 교인들이 늘어 개척한 지 1년이 지난 무렵 1000여명이 출석했다.
우리는 예배 장소를 물색하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지하 공간이 있는 신축 건물을 타교회 교인이 짓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건물 주인에 연락해 지하를 본당 형태로 만들고 두세 개 층을 교육관으로 임대했다. 개척한 지 1년 수개월 만에 우리는 수지에서 분당의 새 건물로 이사했다. 지하 본당은 수년간 부흥의 다락방이 돼 매년 1000명 이상 새 교우들이 몰려왔다. 1998년 봄이 되기 전 좁은 지하 본당을 중심으로 주일에 여러 번 예배를 드렸는데 당시 출석 교인이 5000여명에 근접해 있었다.
교회가 한창 부흥 가도를 달리고 있던 1997년 말 뜻밖의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거의 패닉 상태였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스스로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다’라고 말한 목사였는데 기도라도 안 하면 숨 쉬지 못할 것 같아 2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선포했다.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라는 주제로 ‘지금은 기도할 때’ ‘기초부터 다시 쌓을 때’ 등 소제목으로 매일 설교했다.
첫날 새벽 기도하러 교회에 온 나는 눈을 의심했다. 너무 많은 교인이 출석해 차량이 얽혀 말이 아닌 상태였다.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로 새벽을 열고 있었다. 경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결혼예물, 아기 돌반지 등을 팔며 애국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시 뜨거운 기도의 열기로 선포된 말씀은 성도들의 요청으로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생명의말씀사)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됐다. 책에는 현장 설교의 열기를 모두 담아내지 못했지만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설교문이 담겨 있다.
IMF 외환위기와 함께 2000년이 다가오면서 종말론의 불안한 소문이 겹치는 중에도 교회는 질적·양적으로 부흥을 지속하고 있었다. 예배 장소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그때 수지 신봉동 1번지 산 위에 신학교를 짓다 만 건물이 매매로 나왔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당시 수지에는 아파트 건설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산 위 건물이 유일했다. 현장을 가보니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공사업자들이 항의차 써놓은 격문들로 도배돼 있었다. ‘설마 이런 건물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이 건물이 내 기도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꿈에 이 건물이 보였는데 건물 한복판에 샘이 솟아 있었고 그 샘이 강을 이루는 모습이었다. 길 좌우 아파트가 밀림을 이루고 있었고 사람들이 수영해서 건물 안으로 밀려왔다. ‘여기 세워질 아파트 주민을 전도하라는 뜻인가.’ 놀라서 깨어 기도하는데 마음에 큰 평안이 임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18) 다양한 단계식 제자훈련으로 성도들의 영적 요구 충족
목사 설교에만 의존하는 교회가 아닌 평신도 선교사를 세우는 목표로 훈련
기본 필수 과정부터 총 3단계 과정으로 다 마치려면 최소 3년 이상 시간 걸려
2000년대 초반 당시 경기도 용인시 지구촌교회 수지채플 전경.
1998년 4월 지구촌교회의 ‘수지 신봉동’ 시대가 열렸다. 당시 수지 캠퍼스는 한 독립신학교 건물이 신축하다 재정난으로 공사가 중단된 건물이었다. 교실이 많아 학교 스타일의 제자훈련을 하기 적합해 보였다. 미국 이민목회에서부터 시도한 남침례교회의 장년 주일학교 훈련에 적합했다.
옥한흠 목사님이 ‘동굴 파기’ 제자훈련을 하셨다면 하용조 목사님은 다양한 영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백화점식 프로그램 훈련을 하셨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중간 스타일을 추구했다. 제자훈련 전체가 통일성을 갖고 평신도 선교사를 세우는 궁극적 목표 속에서, 성도들의 여러 영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단계식 제자훈련을 디자인했다.
지구촌교회가 결코 이동원 목사의 설교에만 의존하는 목회 사역을 하지 않길 소원했다. 그런 목회 철학으로 사역하니 교육 훈련이 좋아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본 필수과정이 1단계, 양육훈련 과정이 2단계였으며 마지막 3단계는 평신도 선교사로 살게 하는 훈련 과정이었다. 모두 마치려면 최소 3년여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3년간 훈련한 성경 사례를 보며 그 모범을 따르고자 했다.
당시 수지 교회당 주변은 아직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진흙탕 수렁이 많았다. 주차 시설도 미비했다. 제대로 된 아스팔트 길이 없어 질척한 길로 수많은 차량이 오가며 주일마다 광야의 길을 만드는 장관을 이뤘다. 수지 예배당을 리모델링하고 주일예배 횟수를 5회까지 늘렸지만 교인들을 수용할 공간의 부족을 느끼고 있었다.
수지 예배당 주변은 초기의 황량한 광야 대신 대도시 아파트단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때 출석 성도가 1만명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때 자주 묵상한 말씀은 다음과 같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사 54:2~3)
1999년의 막이 오르면서 교회는 여러 계층을 대표하는 전문가들로 ‘비전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나는 평신도 대표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다. 교회 리더로서 그들이 가진 꿈과 한계, 비전을 나누며 공동체의 비전을 가다듬었다. 교회 창립 주일에 21세기 교회 비전과 사명을 나눴다. 그때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두 단어를 ‘치유와 변화’로 정했다.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사명을 여러 영역에서 점검하고 보완했다.
교회는 전도 사명과 이웃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다시 확인했다. 2000년을 맞이한 지구촌교회는 또다시 공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기도를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마음의 소원에 다시 주목해야 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19) 개척 7년 만에 안식년… 하나님의 임재와 평화 경험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과 치유 필요해
워싱턴 근교 영성 센터 프로그램 등록
상처받은 내면의 모습 보이기 시작
영적 경험 계기로 치유기도에도 관심
지구촌교회는 개척 7년을 넘기고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또다시 수지캠퍼스 성전 포화를 경험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목회적 과제를 안고 있었고 무엇보다 신체적 탈진에 직면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었다. 교회와 의논한 뒤 2001년 한 해를 안식년으로 보내기로 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교회 회무를 처리하기로 하면서 말이다.
영성 작가인 마르바 던의 책 ‘안식(사진)’을 갖고 비행기에 올라 고향과도 같은 미국 워싱턴으로 떠났다. 책은 우리가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라며 “내가 모든 것을 간여하고 간섭하지 않으면 마치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당분간이라도 교회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두 맡기기로 했다. 쉼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동안 목회 여정에서 가장 결핍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봤다.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은 기도였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자 교제다. 워싱턴 근교에 있는 초교파적인 한 영성센터 1년 프로그램에 아내와 등록했다. 이전에 워싱턴에서 목회하며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고든 코스비 목사의 구세주의교회(세이비어교회)에서 추천하는 영성 프로그램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지금까지 깊이 경험하지 못한 내적 여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목회 성공이 아닌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남은 인생의 더 중요한 목표임을 알게 됐다. 때로는 수도원에서 2주간 조용한 침묵 속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과 해후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현존’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다.
통성기도 못지않게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침묵 기도의 중요성도 일깨울 수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평화를 경험하며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모르게 상처받은 내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영적 경험을 계기로 성경적인 치유 기도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한국에 귀국하며 접목하기 시작한 중보기도에 치유 기도도 함께하는 훈련을 했다. 내 건강이 곧 우리 교회의 건강이자 나와 함께하는 성도들의 건강이기 때문이다.
치유 사역에 대해 닫혀 있던 신학적 편견을 한 해 동안 많이 극복하고 성도들의 전인 건강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것은 은퇴 후 중요 사역이 된 경기도 가평 필그림수양관 건립과 사역의 계기가 됐다. 통성기도도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주의 얼굴 앞에 조용히 머무르며 그의 음성을 기다리는 훈련 역시 얼마나 중요한가.
본래 영성이란 단어는 기독교에서 먼저 시작됐지만 타종교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 단어를 피하는 현상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기독교 언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지 않은가.
***[역경의 열매] 이동원 (20) 안식년서 복귀하며 셀 교육과 중보기도 사역 강화
셀 목회가 모든 목회의 중심이 되게 하고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중보기도 시행
2003년 4월 입당한 지구촌교회 비전센터 전경. 현재는 지구촌교회 분당채플로 불리고 있다.
안식년에서 복귀한 나는 두 가지 목회 방향을 보완하고 수정했다. 첫째는 목사 혼자 하는 목회가 아닌 ‘셀 목회’를 방편으로, 함께하는 목회를 본격화하기로 했다. 둘째는 ‘중보기도’를 통해 치유가 일어나도록 지도하는 목회였다.
지구촌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소그룹을 중시하는 셀 목회를 했다. 이제는 셀을 가진 교회(church with cells)가 아니라 ‘셀 중심의 교회’(the cell church)로 전환, 셀 목회가 모든 목회의 중심이 되도록 한 것이다. 개척 초기부터 강조한 중보기도도 강화하기로 했다. 중보기도실에서 개인적인 중보기도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는 중보기도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두 개 사역을 한국교회와 나누기 위해 해마다 셀 콘퍼런스, 중보기도 콘퍼런스를 준비했다. 두 개 사역 콘퍼런스에 2000여개 한국교회가 다녀갔으며 해외 동남아시아, 미주 교회들과도 이 사역을 나눴다.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셀 교육 및 중보기도 사역을 강화했다. 수지 예배당의 수용 인원이 한계에 달하면서 우리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중보기도에 돌입했다. 그때 누군가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미금역에 뉴코아·킴스클럽 빌딩이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그런데 매입 가격이 1000억원에 가까웠다. 제직회에서 논의했지만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었다. 건물이 목회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1년 뒤 기독교 기업 이랜드에서 연락이 왔다. 1년 동안 건물 가격이 반값인 500억원으로 떨어졌고 마침 두 개 건물로 된 빌딩을 이랜드아울렛과 지구촌교회가 반으로 나눠 매입하면 어떻겠냐는 문의였다. 연락받는 순간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1년을 기다리게 하셨구나’라는 기쁨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심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2003년 4월 지구촌교회의 ‘분당 비전센터’가 열렸다. 우리는 수지와 분당 두 곳에서 동시에 예배드리는 교회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멀티 캠퍼스 사역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이 같은 모델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광케이블로 두 개 캠퍼스를 연결해 마치 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소통하고 설교를 동시에 청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이것을 ‘두 날개 성전 시대’라고 불렀다. 큰 건물을 확보하지 않았어도 적절한 두 개 건물을 하나로 연결하며 한 건물처럼 사용하는 기적의 시대가 시작됐다.
나는 지나치게 큰 건물을 짓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그리 크지 않은 건물들을 연결해 하나처럼 사용한다면 훨씬 효율적이라고 믿었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21) 말씀처럼 말이다. 한국 대형교회들이 여러 큰 시련에 직면한 이때 멀티 캠퍼스는 또 하나의 선교적 대안이라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1) 셀 목회로 폭발적 교회 성장… 3만명 목표달성 눈앞
교회 모든 시스템 셀 중심으로 재편성
수지·분당 양 날개 성전 각각 6부 예배
매년 콘퍼런스 열어 셀 교회 비전 나눠
지구촌교회는 수지·분당 캠퍼스 공간을 확보하면서 두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셀 목회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모든 시스템을 셀 중심으로 재편성했다. 그냥 소그룹을 강조한 게 아니라 전도 지향적인 셀(목장) 교회가 되게 한 것이다.
목장의 한 지체가 전도대상자 명단(VIP 명단이라 부름)을 제출하면 그때부터 모든 목장원이 그에게 관심을 두고 기도하며 그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전도 열매를 맺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처럼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일어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교회학교도 교사가 주일에 한 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한 주간 내내 관심을 두고 돌보게 하며 교육 목자 중심으로 삶을 나누게 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목장을 통해 전도하게 했다. 이런 셀 목회를 교회 안에 시스템화하니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교회 성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전도폭발’이라는 훈련 프로그램의 의미를 실감했다. 사실 오래전에 기독 출판사인 생명의말씀사를 통해 전도폭발 교재를 ‘현대전도’(사진)라는 이름으로 번역해 한국교회에 소개한 바 있었다.
교회를 개척할 때 우리는 분당과 수지 인구에 해당하는 30만명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명을 전도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었다. 개척 13년을 눈앞에 두고 출석 교인은 이미 1만5000명을 넘겼으며 등록 교인은 이미 2만명을 돌파하고 있었다. 수지와 분당 성전에서 각각 6부 예배를 드리던 지구촌교회는 이제 3만명 성도가 눈앞에 보였다.
이제 우리는 이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한 교회만 부흥한다고 한국교회의 선교적 비전이 성취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년 셀 콘퍼런스를 열어 한국교회와 셀(목장) 교회 비전을 나눴다.
나는 셀 교회란 이름 대신 ‘가정’ ‘다락방’ ‘순’ 등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우들이 작은 단위로 교회의 ‘생명’(bio)을 경험하고 진정한 가족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성장하는 교회의 약점을 극복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셀 모임(목장모임)은 주일예배의 복사판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중에도 성도들이 삶을 나눌 수 있으며 삶의 고통을 기도로 나누는 중보기도야말로 초대교회 코이노니아(교제)를 이루는 본질이 아니겠는가.
지구촌교회는 부교역자를 통한 전략적 교회 개척도 본격화했다. 이런 과정으로 부교역자들이 개척해 20여개의 교회가 탄생했다. 나는 이웃 교회들에 대한 피해가 없도록 타교회에서 오는 교인들의 등록을 안 받는 운동을 선포했다(이 운동은 후임자들을 통해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때는 불신자 전도만으로도 충분히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도를 포기하는 것은 교회 존재를 포기하는 이유라고 여겼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2) 전도와 이웃사랑 실천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
개척할 때 주 앞에서 품었던 소망인
전도·이웃 사랑의 명령 수행에 최선
교단 내 선교사 가장 많이 파송하고
사회복지재단 설립, 사회 약자 섬겨
이동원 목사가 최근 방문한 경기도 성남시 분당노인종합복지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명령은 전도와 이웃 사랑이라 믿는다. 48세에 귀국해 교회를 개척한 나는 처음 10년간은 전도 명령에 충실한 교회, 이후 10년은 이웃 사랑의 명령에 응답하는 교회를 세울 소망을 품었다.
지구촌교회를 개척하고 9년이 됐을 때 교단에서 가장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했다. 선교사도 가장 많이 파송하는 교회가 됐다. 지구촌교회를 통해 파송된 선교사는 100명이 넘었고 협력 선교사들의 숫자까지 헤아리면 300여명이 되었다. 개척 당시 주님 안에서 교회가 품었던 소원을 그대로 이뤄주셨다.
이제는 이웃 사랑의 명령을 순종할 때가 됐다. 물론 개척 초기부터 각각의 목장에서 두 개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단에서 계속 강조했다. 작은 목장교회도 교회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니까. 그래서 목장원들이 보육원 사역을 비롯해 독거노인 장애인 교도소 사역 등을 활성화하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두게 했다.
이런 사역에 눈을 뜨게 하는 데 도움을 주신 손봉호 교수님과 믿음의 형인 홍정길 목사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두 분의 도움으로 10년 가까이 밀알선교회 이사장으로 섬기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군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편애하신다는’ 교육이 목회에서 이런 복지 사역을 가능하게 했다.
개척 9년이 되던 해 우리는 사회복지를 전공한 동역자를 중심으로 지구촌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동역자가 될 지역 사회와의 협력을 도모했다. 경기도 용인·성남 관할 시청에 가서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 복지를 하고 싶은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다. 관에서는 교회의 이런 접근에 기뻐하며 그때부터 좋은 동반자가 됐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사회복지기관이 12개가 됐다.
처음 수지에서 시작한 지구촌 노인복지센터와 장애인을 고용해 제빵 사역을 하는 지구촌보호 작업장, 대규모 분당노인종합복지관, 성남시 율동생태학습원(장애인 원예치료, 생태 체험) 등이 있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구에는 장애인을 위한 동탄아르딤복지관과 화성아름장애인보호작업장이 있고, 수지 지역의 수지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용인시 사랑의집,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그리고 장애인과 탈북민 등의 직업 알선을 위한 포이에마 로스터스, 블레싱 식당과 카페를 운영한다. 식당과 카페의 수익은 모두 다시 사회복지 기금으로 쓰인다.
이 기관의 대부분은 모범 사역장으로 전국에서 벤치 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제빵 기술을 가르치는 한 교수님의 멘트가 생각난다.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는 일반인보다 3배 정도 힘이 드는데, 일단 배우고 나면 기계처럼 정확해요.” 한 장애인 부모가 아들이 월급을 타온 모습에 감정이 북돋아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3) 은퇴 후 사역지로 영원의 모태 같은 필그림하우스 구상
두 성전 급성장 할 때부터 은퇴준비 시작
설교와 리더십, 영성훈련에 초점을 두고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 훈련 가능한 곳 꿈꿔
이동원(오른쪽) 목사가 2011년 한국을 방문한 달라스 윌라드 박사와 지구촌교회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한때 옥한흠 목사님 등 몇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한국교회 목회자의 은퇴 연령에 대해 대화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다 한국에 오니 대부분 사회 계층이 60세 즈음에 은퇴하고 대학교수가 65세에 은퇴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목회자만 70세에 은퇴하는 게 사회적으로 덕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화두를 던졌다.
옥 목사님은 “당신이 내 나이가 안 되어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하셔서 나는 “죄송합니다. 옥 목사님을 의식하고 한 말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대화를 나누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옥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옥 목사님은 한 달 전 나의 이야기에 일리가 있다고 하시면서 “사실 조금 일찍 은퇴하고 미국의 오정현 목사를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다. 당신도 잘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옥 목사님은 2003년 말 은퇴를 실행에 옮기시면서 은퇴예배에서 축사해달라고 하셨다. 그때야 나도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두 날개 성전(캠퍼스)을 준비하고 교회가 급성장을 하던 시점부터 남몰래 은퇴 기도를 시작했다. 당시 제일 큰 과제는 ‘요즘은 건강 관리만 잘하면 70대가 젊은 나이일 수 있는데 무엇을 하며 소일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생겼다.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후학들에 대한 설교와 리더십 훈련이었다. 2000년대부터 나를 사로잡기 시작한 영성에 대한 목마름이 영성 훈련의 필요를 느끼게 했다. 그 무렵 ‘레노바레 모임’을 통해 만난 달라스 윌라드 박사나 리처드 포스터 등의 영향으로 내 목마름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같은 목마름이 있는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과 소통한 결과, 한국교회가 그동안 여러 유형의 국제대회들을 경험했는데 외적 부흥만 강조할 게 아니라 내적 여행에 초점을 둔 부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2007년 10월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으로 당시 이철신 영락교회 목사님의 협력으로 영락교회에서 모이게 됐다. 달라스 윌라드, 리처드 포스터 등 해외 외부 강사가 초청됐으며 6000여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함께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이때부터 은퇴 후 사역지로 필그림하우스를 꿈꾸기 시작했다. 설교 리더십 영성훈련 세 가지에 초점을 두고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할 수 있는, 크지 않지만 아늑하고 정스러운 영혼의 모태 같은 곳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한국교회 일각에 ‘영성’이란 단어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극단적 성향의 지도자들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성은 본래 기독교에서 먼저 시작된 단어인데 그것을 다른 종교에 빼앗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내가 추구한 영성훈련은 결코 다원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복음주의적인 것이었다. 미국의 대표적 복음주의 목회자인 존 파이퍼 목사도 “복음주의의 미래는 영성적인 기도를 발전시키는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내 마음속에 분명한 영성센터의 그림이 탄생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4) 천로역정 분위기와 구도적 영성 소원담은 ‘필그림’
타 교회 성도 등록 거절 선언 후
등록 교인 중 80%가 불신자들
전도 지향적 셀 목회 가능성 발견
이동원 목사가 최근 경기도 가평 필그림하우스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타교회 성도 등록 거절 선언’ 후 2007년 말 교회 등록자를 조사했다. 한 해 3000여명의 성도가 등록했는데 이 중 80%가 기독교 배경이 없는 이들이었고 나머지 20%는 과거 신앙생활을 하다 낙심한 성도들, 그리고 귀국한 뒤 교회를 정하지 않은 성도들이 주를 이뤘다.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이렇게 해도 목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전도 지향적인 셀 목회의 열매임에 감사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 있을까.
지구촌교회의 ‘목장’ 모임에는 빈 방석이나 종이로 만든 포도송이가 있다. 거기에 전도해야 할 VIP(전도대상자) 이름을 적고 기도한다. 기도의 주인공이 마침내 그 자리에 앉도록, 혹은 포도송이에 그 이름이 기록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이다.
2008년 경기도 가평에 필그림하우스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설계자에게 이곳은 한국의 전통적 기도원과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때 기도원이 한국교회 영성의 젖줄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전통적 방법으로는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이 가진 영성의 목마름을 채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수도원 분위기를 내되 수도원으로 짓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중세 수도원의 부활을 시도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수도원이랄까. 기도하고 싶고 조용한 침묵 속에 나 자신을 만나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내달라고 했다. 이런 까다로운 주문으로 필그림하우스가 지어졌다.
그리고 내가 처음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울 때 선물로 받은 책 ‘천로역정’의 분위기가 담기길 원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구도적 영성을 자극하면 좋겠다는 소원도 담았다. 여기서 ‘필그림’ 이름이 유래했다. 우리는 결국 필그림 곧 순례자들이니까 말이다.
2009년 지구촌교회 창립 15주년을 맞아 숫자 ‘15’의 의미를 살린 특별한 섬김 축제를 시작했다. 15곳 선교지의 우물을 팠고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15명의 수술과 치료를 전담했다. 허물어져 가는 낡은 집 15곳을 선정해 개보수하는 사업, 장애인기관 15곳을 돕고 장애인 680명을 초청해 지구촌교회 성도 3120명이 함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 탄천길을 걸으며 청소하는 날도 기획했다. 당시 한국교회의 기록으로 남은 8226명의 성도가 장기기증 서약을 했으며 200명 이상이 헌혈에 참여했다.
교회의 긴 역사가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사명을 다하는 교회, 존재 이유를 다 하는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15년 기념 사역이 또 하나의 촉매가 돼 30년 45년 60년에도 그 사명을 다하는 소금 같은 지구촌교회로 쓰임 받길 간절히 기도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4, 16)
***[역경의 열매] 이동원 (25) 기독교 교육의 대안 ‘글로벌 홈스쿨링 아카데미’ 열어
교회가 합력 공동체 교육에 적극 참여
문제가 되는 진화론, 동성애 사상에서
우리 자녀를 보호, 하나님 자녀로 양육
이동원 목사가 2009년 주일 예배 때 ‘글로벌 홈스쿨링 아카데미’에 참여하고 있는 한 어린이의 간증을 듣고 있다.
지구촌교회의 사역 중 2008년 시작한 ‘글로벌 홈스쿨링 아카데미(GHSA)’가 있다. 본래 지구촌교회도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에 근거한 대안학교를 시작할 뜻이 있어 사역연구팀(TFT)을 결성해 한창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동안 누군가 “한국에 있는 많은 대안학교가 정부로부터 정식적인 교육 기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교육을 하는 것이 맞느냐”고 이의를 제기해 우리 교회는 홈스쿨링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미국에서는 200만명 이상이 합법적으로 홈스쿨링을 하고 있고 이에 대한 역사도 100년 이상이나 된다. 현재 우리 기관에서는 5~19세까지 약 200여명이 등록해 홈스쿨링 교육을 받고 있다. 홈스쿨링은 문자 그대로 가정에서 이뤄지지만 교회가 합력해 공동체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현재도 교회가 6명의 스태프를 지원하는데 사실상 기독교 교육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다. 아마 국내 홈스쿨링 기관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교육을 감당하고 있다고 본다.
홈스쿨링은 공교육에서 문제 되는 진화론, 동성애 사상으로부터 우리 자녀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우리 시대 기독교 교육의 대안으로 꼽힌다. 이따금 교회에 갔다가 밝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청소년들이 있어서 알아보면 홈스쿨링을 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동안 많은 기독교 대안학교들이 탄생했는데 홈스쿨링은 한국교회가 연구할 또 하나의 교육적 대안이 아닐까 싶다.
2009년 미국에 있는 공식적인 침례 교단 소속 6개 신학교 중 하나인 골든게이트(현 게이트웨이) 신학교에서 ‘헤스터 렉처’ 특강 강의를 부탁받은 일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존재 가치가 조금씩 미국 교단과 신학교에도 알려지면서 미국이 한국에서 선교한 나라이지만 이제는 거꾸로 미국 신학교에 영향을 끼칠 한국인 설교자를 찾다가 내가 추천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주어진 특별한 기회에 두 개의 강의 주제를 선정했다. 하나는 ‘성령과 설교’라는 주제였고 나머지는 ‘포스트모던 시대와 강해 설교’였다. 두 강좌를 통해 나는 미국교회와 미국 신학교, 그리고 미국 선교사와 설교자들에게 받은 은혜의 빚을 다소나마 갚는 보람을 느꼈다.
‘성령과 설교’에서 나는 성령의 역할과 우리 책임의 균형을 강조했다. 설교는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의 인간적 작업이지만, 설교 텍스트인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임을 믿는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둘째 강좌에서는 포스트모던이란 우리 시대의 특성을 알고 청중들에게 민감하게 다가갈 줄 알면서도 시대와 함께 변할 수 없는 말씀의 영광과 권위를 드러내야 한다고 설교했다.
강의를 듣던 한 교수님의 반응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한국 선교사로 한국 신학교에서 강의하던 분이 강의가 끝나자마자 연단으로 다가와 포옹했다. 그러면서 그분은 “오늘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성숙함을 확인한 자리였다”고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격려해주셨다. 그분의 격려를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듯하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6) ‘블레싱 도시 전도’ 사역 부흥… 지구촌 사역 마무리 준비
국내외 흩어져 진행해온 여름 단기선교
한 도시에 집중, 순수한 전도 집회 가져
2010년 4월 지구촌교회 수지·분당 성도들이 경기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부활절 예배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2009년 여름 지구촌교회는 그동안 지속해온 ‘블레싱 도시 전도’ 사역의 매뉴얼을 만들었다. 여름이면 국내외 여러 곳으로 흩어져 진행한 단기선교를 한 도시에 집중하자는 취지로 펼친 사역이다. 지역 기독교연합회와 협의해 도움이 필요한 미자립교회들을 한 주간 섬긴 후 주중 저녁(수요일)에는 도시의 시립체육관이나 운동장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다. 우리가 섬긴 교회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역주민들을 초청했다.
매년 이 사역에 50여개 교회들이 신청했다. 지난해와 올해에는 제주와 전주에서 60여개 교회를 섬겼다. 특히 올해의 경우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사흘간에 걸쳐 도시 연합 전도 부흥회를 했다. 이 사역을 할 때 4000여명 성도들이 여름 휴가를 반납하고 구슬땀을 흘리며 참여한다.
이런 섬김으로 평균 3000여명의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결신의 열매를 맺고 있다. 인구 10만명 단위의 도시 경우 우리가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가지 않고 현지에서 조달하면 도시 전체에 소문이 났다. 그동안 이런 방식으로 14개 국내 도시들을 섬겨왔다.
2010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연초에 ‘담임목사 청빙위원회’를 구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교회의 여러 계층에 있는 분들과 소통하고 리더들과 의논한 끝에 청빙위원회가 아닌 ‘비전연구팀’을 구성했다. 단순히 리더십 교체만이 아니라 그동안 교회가 이동원 목사를 리더로 펼쳐온 비전을 더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공동체적으로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비전연구팀에게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기대를 솔직하게 나눴다. 리더 선출에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중보기도만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리더가 선출되면 최소한 3년은 동역의 시간을 갖고 새로운 리더와 호흡을 맞추며 리더십을 코칭하겠다고 했다. 새로운 리더와 동역한 3년까지 합하면 나의 지구촌교회에서의 사역은 정확하게 20년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이후 나는 필그림하우스를 통한 사역과 한국교회 대내외 선교 사역 섬김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2010년 부활절을 앞두고 내 마음에 간절한 한 소원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수지와 분당 두 개 예배당에 주일 7부 예배까지 진행하며 성도들을 섬겨왔다. 그동안 지구촌교회 성도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의 집합된 회중으로 한 번도 모인 적이 없었다. 교회 리더들과 이런 소망을 나누며 부활절 예배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드리기로 했다. 총동원 축제로 한자리에 모이기로 한 것이다.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3만명 이상의 성도를 비롯해 교육 목자를 포함한 3000여명의 소그룹 리더들, 300여명의 타문화권 선교 동역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뜻깊은 날이었다. 지구촌교회가 그동안 펼쳐온 ‘333 비전’의 실현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미래 동역 비전을 다시 선포했다. 지구촌 사역 네트워크를 통한 선교 동역으로 하나님 나라 가치를 구현하고, 창립 리더십과 승계 리더십의 동역으로 하나님 나라 비전을 구현하자는 등 5개 비전을 나눴다. 모든 것이 은혜의 결실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7) 은퇴 예배서 “풍성·충만한 교회 영광을 다시 나눔으로”
‘셀교회’를 통해 평신도 선교사 세워
민족 치유와 세상 변화시켜 달라 호소
은퇴비 책정을 두고 의견 분분하자
“전 한 푼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동원 목사가 2010년 12월 26일 은퇴 예배에서 5가지 참회 내용을 말하고 있다.
담임목사 사역의 마무리를 3개월 앞둔 시점에서 에베소서 강해를 마지막 강단 메시지로 선택했다. 지구촌교회를 개척했을 때 7주간 요한계시록 2~3장을 통해 7개 소아시아 교회의 장단점을 살피며 건강한 교회의 비전을 나눴다. 그때 처음 다룬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다. 에베소서의 핵심은 교회론이다. 에베소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풍성’과 ‘충만’이었다. 충만하고 풍성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영광을 다시 나눔으로 교회에 대한 기대를 부탁하고 싶었다.
당시 지구촌교회 찬양사역자인 김영표 목사가 지은 찬양 ‘우릴 사용하소서’(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를 매주 불렀다. 성도들과 함께 눈물로 찬양했다. 그리고 지구촌교회의 핵심 가치인 ‘셀교회’를 통해 평신도 선교사들을 계속 세워감으로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로 존속하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여러 부서와 목장교회를 통해 동역한 수많은 이름 모를 나의 ‘두기고’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2010년 가을 어느 날 나의 은퇴를 준비하는 평신도 행정팀에서 은퇴비 책정을 두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들과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한 뒤 물었다. 은퇴 후 생활비 같은 것을 배려하고 있는지를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매월 생활비가 제공되고 교회에서 제공한 사택이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저에게 은퇴비를 한 푼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목회의 결론이 돈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돈과 상관없이 은퇴할 수 있었던 것에 지금도 감사하다.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도 나와 아내의 사용이 끝나면 교회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모든 목회자가 나처럼 은퇴할 필요는 없겠지만 목회의 결론 지점에서 돈의 시비로 목회가 얼룩지는 한국교회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목회의 전 여정에서 단 한 번도 사례비를 가지고 교인들과 시비해 본 일이 없다. 꼭 한 번 사례비 책정이 너무 많다고 깎아달라고 사정한 일은 생각난다. 소명으로 목회의 장에 선 사람이라면 돈 문제만큼은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드디어 12월 26일 마지막 주일에 은퇴 예배가 드려졌다. 나는 그때 5가지를 참회했다. 첫째 청년 시절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아무 이바지를 하지 못한 것, 둘째 교회 내 소외되고 연약한 성도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것, 셋째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면서도 언행일치를 보이지 못한 것, 넷째 교회 기득권층에 대해 그들이 상처받을 게 두려워 제대로 책망한 설교를 하지 못한 것, 다섯째 의도하지 않았으나 부주의한 말과 행동으로 성도들을 섭섭하게 한 소소한 일상의 부덕함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마지막 부탁으로 내게 한 것처럼 후임자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지구촌교회가 사명을 실현하는 교회로 걸어가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8) “목사님의 설교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으시겠습니까”
지구촌 교회 교우인 경기대 총장의
부탁으로 경기대서 설교 봉사로 헌신
첫 목회 할 때의 꿈, 성경 전체 설교
미강해의 본문들 강해하며 소원 풀어
이동원 지구촌교회 목사가 지난 2011년 경기대학교 채플에서 설교하고 있다.
은퇴(Retirement)라는 영어 단어는 ‘자동차 타이어를 바꿔 다시 달린다’는 뜻이 있다. 나는 은퇴가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도식의 계절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나이와 건강, 위치에 어울리는 자리에서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와 우리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님 같은 분이 자신의 재능으로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아름답기만 하지 않는가. 내가 은퇴할 때 지구촌교회 교우이신 당시 최호준 경기대 총장께서 이런 부탁을 하셨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으시겠습니까. 경기대 학생들, 그리고 경기대 주변에 새롭게 이사 오는 많은 이들에게 말씀으로 경기대 강당에서 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한 끝에 후임자와 의논하고 교회가 모든 행정적 섬김을 하고 나는 오직 설교 봉사만 하기로 했다. 그동안 섬기던 지구촌교회에는 담임목사의 초청이 있는 교회 행사에만 일 년에 몇 차례 섬기고, 지금까지 매 주일 경기대 강당에서 말씀으로 섬기고 있다.
내가 처음 목회사역에 헌신할 때 하나님이 주신 꿈은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치열한 담임목회의 목회적 필요에 이끌려 설교하다 보면 성경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많은 본문이 있었다.
그동안 다룰 수 없었던 미강해 본문들을 경기대 강당 예배에서 차분하게 설교할 수 있음은 나의 석양의 행복이다. 예를 들어 최근 구약의 민수기 신명기 에스라 말라기 하박국 등을 강해하는 기쁨을 누렸다. 초기 목회 시절 성경을 다 강해하고 죽게 해달라는 소원의 기도를 드린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강해하지 못한 신구약 책들이 꽤 남아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이런 유머를 나눈다. “나는 아직 살아야 할 날들이 꽤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하지 못한 성경 본문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 설교자들이 주제 설교 혹은 제목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아무래도 설교자 의도에 따른 주관이 더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강해 설교의 강점은 ‘본문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설교 준비가 시작된다. 내가 오늘 무엇을 설교하고 싶은지에 대한 의도를 갖고 이에 맞는 본문이나 성구를 찾는 것으로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해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훨씬 더 말씀 되게 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그렇다고 강해 설교가 오늘날 청중의 상황이나 적용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상적인 강해 설교는 본문 해석과 본문 적용을 각각 절반씩 구성하는 게 좋다고 믿는다. 바울의 로마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을 보면 원리적 교리 해설이 처음 절반, 그리고 청중에 대한 적용이 다음 절반을 차지하지 않는가. 오래전 이런 설교 철학을 책 ‘청중을 깨우는 강해 설교’에 담았다. 이 책은 아직도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29) 부족함에도 불구, 상급으로 격려와 위로해 주신 하나님
미드웨스턴침례신학교총장 초청으로 학교 졸업식 설교 후 총장 특별상 수상
2014년엔 새로운 채플 지어 봉헌하면서 나의 이름 딴 ‘다니엘 리 채플’로 명명
이동원 목사가 2014년 제이슨 앨런 미국 미드웨스턴침례신학교 총장으로부터 이 목사의 영어 이름을 딴 ‘다니엘 리 채플’을 봉헌한 내용을 담은 기념패를 받고 있다.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가 히브리서 11장 6절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선진들의 장엄한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내는 삶의 대전제는 그가(하나님) 계심을 믿어야 하고 그를 지속해서 찾아야 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 존재를 이론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그분의 현존을 날마다 확인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이 어디 계신지,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영성적 실존이라 믿는다. 물론 내 삶은 아직도 하나님 기준에서 한없이 멀리 있다. 그래서 마음 아프게 날마다 회개하며 그의 존전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 부족함을 보시고 나를 징계하신 삶의 족적도 적지 않게 경험했다.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대하지 않은 상급으로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셨다. 이런 상급은 뜻밖에 내가 은퇴한 이후 주어졌다.
2011년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나의 친구이자 동역자로부터 격려받았던 일이 있었다. 당시 미국 미드웨스턴침례신학교 총장인 필 로버츠 박사가 나를 학교 졸업식 설교자로 초청했고 그 자리에서 총장 특별상을 줬다. 총장은 한국교회의 말씀 사랑, 기도와 선교의 열정에 대해 언급하며 “이 상은 한국교회를 향한 우리의 감사”라고 말했다. 한국교회를 대신해 받은 셈이다.
2014년 미드웨스턴침례신학교가 새로운 채플을 봉헌하면서 그 강당을 내 영어 이름인 ‘다니엘 리 채플’로 명명했다. 물론 우리 교회도 작은 헌금으로 동참했다. 총장 제이슨 앨런 박사로부터 2019년 ‘스펄전 강해 설교자상’의 8번째 수상자로 상을 받았다. 현재 이 학교에는 800여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201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크 포레스트에 있는 모교 사우스이스턴 침례신학교 총장 다니엘 에이킨 박사가 나를 초청해 채플 설교를 하게 했고 그 날을 ‘아시아의 날’로 선포했다. 인근 한국교회 목회자들까지 초청해 점심 정찬을 제공했다. 백인 우월주의 색채가 강한 미국 남부 지역에서 동양인에 대한 보기 드문 환대였다. 이곳에서도 ‘총장 특별상’을 받았다.
2019년 내가 선교학 박사과정을 한 유서 깊은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가 졸업식 설교자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내게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여했다. 모든 것이 한국교회에 대한 인정이라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30) 은퇴 후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고통의 시간 찾아와
결혼 후 직업 정리하고 영어 사역자로 새로운 삶 살다 정신질환 생긴 큰아들
국제 변호사로 일하며 운동 좋아하던 둘째 아들은 대장암 투병 중 세상 떠나
1990년대 초반 촬영한 이동원 목사의 가족사진. 큰아들 이황 목사와 2020년 세상을 떠난 작은아들 고(故)이범 집사, 이 목사, 우명자 사모(위로부터 시계 방향).
국민일보 칼럼 제목이 ‘역경의 열매’다.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슴 아픈 고통의 시간은 은퇴 후 찾아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대할 수도 없었던 먹구름과 같은 시간이 밀려왔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냥 “왜”라는 대답 없는 물음을 허공에 던질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야속하기만 할 뿐이다. 이것은 두 아들에게 찾아온 불가사의한 고난이었다. 그동안 성경 인물 욥이 경험한 것처럼 ‘욥의 친구들’ 같은 이들이 나를 찾아와 “이것은 아비의 죄 때문”이라며 정죄하고 참소하기도 했다. 물론 나름대로 금식기도하며 회개했고 30권이 넘는 신정론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답을 찾아보기도 했다.
어느 날 큰아들에게 정신적 질병이 찾아왔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맏아들은 미국의 릭 워렌 목사가 저술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다 자신의 소명을 느꼈다. 그래서 직업을 정리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집은 미국 남가주로 옮겼으며 인근 교회에서 영어 사역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믿음이 없던 큰 며느리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집을 가출하는 일이 생겼다. 큰아들은 미국 신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시골에서 박사 논문을 쓰며 자신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적 공황이 찾아온 것이다. 며느리의 가출 충격이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국과 한국의 여러 의사를 만났지만 진단은 모두 달랐다.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완전한 쾌유는 어렵다고 진단받았다. 그런 가운데 홀로 삶을 개척한 아들은 나의 한국어 설교집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거쳐 7권이 출간됐다. 문자 그대로 역경의 열매들이다. 이 책들로 인해 내가 미국 교계에 소개돼 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병난 아들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를 두고 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차남에게는 대장암이 찾아왔다. 지금부터 3년 전 일이다. 미국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한동대 법률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제 변호사가 됐다. 한국에서는 법무법인 ‘율촌’, 미국에서는 ‘EA스포츠 법률회사’ ‘AT&T’ 등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갑자기 암이 발병된 것이다. 건강하고 스포츠를 좋아한 그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만 42세라는 인생의 절정에서 암과 투병하게 된 둘째 아들. 2020년 10월 암 진단 후 수술하고 치료를 받은 지 꼭 7개월 만에 세상을 그렇게 떠났다. 나와 아내가 미국 LA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가족이 출석하던 미국 토렌스조은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김우준 담임목사님은 물론 인근에 계신 고창현 이종용 목사님의 도움이 컸다.
아들을 화장하고 ‘천국 환송 예배’를 기다리던 내게 하나님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말씀을 주셨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소화하기 벅찬 말씀이었지만 믿음으로 말씀을 받으니 비로소 열 가지 감사 제목이 떠올랐다. 그래서 당시 국민일보(2020년 10월 19일 30면) 등 여러 언론에 소개된 ‘가슴 아픈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31) 은퇴 후에도 설교·후학 지도·성지 순례 등으로 바쁜 일정
경기대 강당에서 두 번의 주일 설교 사역
필그림 하우스에서 연 10회 세미나 인도
부흥사경회 인도와 후학 박사과정 지도
이동원(둘째줄 가운데 모자) 목사가 지난 4월 독일 작센주 괴를리츠지구 헤른후트 도시의 경건주의 사적지를 탐방한 뒤 최성은(이 목사 오른쪽 선글라스) 목사 등 함께 순례한 이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은퇴 후 하는 일을 정리하니 다섯 가지 사역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주일마다 경기도 수원 경기대 강당에서 하는 두 번의 주일 설교, 두 번째는 1년에 10회 정도 경기도 가평 필그림하우스에서 설교와 리더십, 영성을 주제로 한 세미나 인도, 세 번째는 국내외 교회와 기독교기관 요청에 따라 한 달에 한두 번 부흥사경회 인도, 네 번째는 국내외 신학교(주로 목회학 박사 과정)에서 설교와 리더십을 중심으로 후학 지도, 마지막은 국내외에서 매년 한 차례씩 기독교 사적지를 탐방하고 안내하는 사역이다.
나는 아직도 매우 바쁘다. 아내는 내게 “진짜 은퇴한 것이 아니라 가짜 은퇴를 했다”며 “이제라도 공식적으로 다시 은퇴하라”고 말한다.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없다며 말이다. 아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여든 고개가 눈앞에 있으니 일정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별수 없이 나이 드는 인생이니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역 중 의미 있게 추억되는 사역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뼈저리게 실감한다. 미국 사우스이스턴침례신학교 재학 시절 학교 프로그램으로 여름 방학 기간에 지도 교수와 성지 고고학 연구를 떠난 일이 있다. 그때 성지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이후 이스라엘을 22차례, 튀르키예를 16차례 방문했으며 때로는 팀을 이끌고 성지 인도를 수행했다.
그것이 관광이 아닌 성서연구의 기회가 되도록 사전 세미나로 철저히 공부하고 현지에서도 의미 있는 예배와 설명으로 영적 탐구의 시간이 되도록 인도해 왔다. 나의 성지순례 인도는 자못 인기가 높아 교회 주보에 광고가 나면 불과 몇 십 분 내 마감이 되곤 한다.
이외에도 그리스, 유럽 종교 개혁지, 영국의 기독교 성지들, 그리고 체코 독일을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 사적지, 일본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순교지들을 여러 지체와 여러 차례 순례했다.
그동안 해외에서도 몇몇 신학교의 목회학박사 과정을 꾸준히 인도했다. 대만 가오슝의 성광신학교에서 10년 동안 매년 한 주간씩 시간을 내어 강의했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버티신학교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감창엽 박사님을 도와 설교와 리더십, 그리고 사역론을 중심으로 10여 년에 걸쳐 강의했다. 특히 지난 10여 년간 미드웨스턴침례신학교 특임교수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모교인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목회학박사 과정에서도 설교학 강의를 인도했다.
목사 한 사람, 설교자 한 사람이 바로 서면 결국 교회가 새로워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특히 목회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보람되고 즐겁다.
수년 전 이동현 미얀마 선교사님의 노력으로 ‘미얀마 선교 200주년’에 초빙된 적이 있다. 1만여 명이 모인 목회자 대회에서 ‘교회 성장의 비전’에 대해 도전을 나눈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목회자가 살면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나면 세상이 변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역경의 열매] 이동원 (32·끝) 남은 인생, 순례길 걷다 그 길 종착점에서 주님 만나리
평신도 선교사로 키우는 것이 목회 소명
필그림하우스 내에 ‘천로역정 순례길’
이동원 목사가 최근 경기도 가평군 필그림하우스 내에 있는 ‘천로역정 순례길’을 걷고 있다.
제일 좋아하는 두 개 단어가 있다. 하나는 ‘길’이고 또 다른 단어는 ‘순례’다. 제일 좋아하는 두 개의 복음 찬송 중 하나는 ‘나는 순례자’이고 또 다른 것은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이다. 지구촌교회에 있는 제자훈련의 단계별 훈련 과정은 모두 ‘길’이란 명칭이 붙어 있다. ‘새 생명의 길’ ‘새 가족의 길’ ‘새 공동체의 길’ ‘목장교회의 길’ ‘성경 교리의 길’ ‘구속사의 길’ ‘경건의 길’ ‘사역의 길’ ‘성경적 리더십의 길’ ‘세상 중보의 길’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길’ 등이다.
이처럼 지구촌교회의 성경공부는 ‘길 공부’라 할 수 있다. 제자를 목자로 키우고 궁극적으로 평신도 선교사로 키우는 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예수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라면 그들이 ‘목장 소그룹’에 들어가 맡겨진 양들을 섬기는 목자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제자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파송된 가정과 직장, 더 나아가 다른 문화권에서도 복음화의 사명을 다하는 평신도 선교사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나의 목회 이유였고 소명이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훈련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길 되신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은퇴한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같은 비전을 수용하는 지도자들에게 이런 길을 소개하고 함께 그 길을 걷고자 한다.
20대 초 선교사님과 영어 성경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 영어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었다. 대부분 고어 영어 문장들이었던 탓에 너무 어려웠다. 며칠 읽는 시도를 했지만 다섯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이렇게 포기하면 영어를 끝내지 못할 것 같아 다시 책을 들었다. 웹스터사전과 영한사전 등을 펴놓고 모르는 단어를 쓰다 보니 아는 단어보다 모르는 단어가 더 많았다.
힘든 도전을 계속하면서 4개월 반 만에 책 1권을 독파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어 읽어서 그런지 내용이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때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런 이야기의 내용을 공원처럼 만들어 천로역정의 길을 걷게 하면 구도자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이지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 텐데….’
이때 품었던 생각과 꿈, 기도가 무려 50년 만에 경기도 가평군 필그림하우스 내에 있는 ‘천로역정 순례길’로 응답됐다. 이 순례길은 그저 구경하는 길이 아니다. 40여개에 달하는 지점마다 메시지를 받고 기도하며 걷는 순례길이다. 10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걸으면 곁에서 영적 가이드가 영성 훈련을 잘 안내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아마 필그림하우스에서 인생의 남은 시간을 순례자들과 함께 순례자로 길을 걷다 순례길의 종착점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그때까지 그 길에서 이렇게 노래할 것이다.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혹은 이 노래도 계속 읊조리게 될 것이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그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새웠네.” 둘째 아들 범이 그곳으로 떠난 후 그곳은 내게 멀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