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시대 주요인물 간략정리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 그는 헬라의 사상과 이상에 깊이 젖어 그 영광을 추구하였다. 그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고대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대의명분이 있었다. 헬레니즘의 전도자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BC 175-164) Antiochus Epiphanes 4세: 하스모니아 왕조와 가장 직접적 관련이 있는 왕. 셀류커스 왕조의 왕.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톨레미 왕가의 땅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나서 BC 169년 강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성전 기구들, 금향로, 촛대, 제단의 컵들을 노략질했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성전의 보화를 가져갔다.
- 예루살렘 성전 파괴했다. - 성전 기구 빼앗았다. - 성전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등 거룩성을 파괴하였다. - 예루살렘 약탈과 방화, 여자와 어린아이 잡아갔다. - 이스라엘 유일신 사상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 율법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죽임을 당했다. -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여인들을 제단위에서 죽였다.
하스모니안 BC 166-BC 67. 당대 이스라엘은 프톨레미 왕가와 셀류시드 왕조 사이에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 - 가이사의 조카였다. - 매우 관대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 가이사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 나를 왕이라 부르지 마시오. - 이웃 나라를 정복한 다음 원로원에 모든 권세를 되돌려 주었다. -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 아우구스토스 )라는 칭호를 주었다.
.기타 ) Pax Romana: 로마가 무력으로 진압한 것을 평화로 미화하였다.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 Client King (Vassal King 가신왕, 예속된 왕) 출신: 이두매 (에돔 출신) Antipater의 아들. 1)헤롯은 매우 교묘한 정치가 (Master of Intrigue). 술수의 달인이었다. Octavianus와 Antony가 서로 적일 때 양쪽으로 모두 줄을 대었다. 안토니가 패했을 때 옥타비안을 잘 설득해서 자신이 로마의 충성된 사람임을 입증하였다. 2)하스모니안 가문을 모두 숙청하였다. 자신의 정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정권을 장악한 후 Hyrcanus, Mariamme(자신의 아내), Alexandra (장모), 모두 죽였다. 3)영토 확장 북동 지역, Transjordan 지역으로 확장하였다. 4) 가장 정열적 건축가 헤롯 성전 (권력을 강화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을 건축했다. 사마리아를 재건축하는 등 요새지들을 강화했다. 가이사랴. 항구도시.
아켈라우스 BC 4-AD 6 (마 2:22).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폭정, 야만적이었다. 그의 나쁜 평판은 마리아와 요셉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나사렛으로 가게 하였다. 그의 형제의 아내와 결혼함으로 끊임없이 오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의 학정을 로마에 보고했고 아켈라우스는 추방되었다.
헤롯 안티파스 Tetrarch. BC 4 -AD 39(갈릴리 베뢰아의 분봉왕) 예수님의 사역지와 매우 공통된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는 매우 허영심이 많고 오만한 통치자였다. 그는 나바티안의 왕인 Aretas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졌다. 헤로디아는 그의 형제 빌립의 아내였다. 헤로디아와 결혼하려 하자 Aretas는 노발대발하였고 안디바와 전쟁을 하였다. 안디바는 전쟁에 패하였다. 이 사건이 막 6:17-29에 기록되었다. 세례요한의 죽음을 유도한 사람이 바로 헤로디아이다. 눅 23:12. 빌라도와 안티파스가 이 사건으로 친구가 되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빌립 눅 3:1 갈릴리 북동쪽 분봉왕. BC 4-AD 34 - 그는 널리 칭송 받은 사람이었다. - 개인적 야망을 자제하고 사치스런 건축을 절제하였다. - 가이샤라 빌립보 지었다. 마 16:13-27. - 37 년 통치하고 자연사하였다.
요세푸스 (Josephus AD 37/8-94/5): 유대 역사가
생애 1)37/8 년 귀족가문 출생., 하스모니안 출신의 제사장이었다. 2)그는 바리새, 사두개, 엣센파 등 세 철학 학파를 방문해서 경험해 보았고 바리새파에 속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그 자신이 바리새파 출신이다. 3)AD 66-70 년의 유대 반란 중 열심당이 자제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러나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운동에 참가하였다. 갈릴리에서 군대 지도자로 섬김. 40 명의 결사대에 참여. AD 66년. 조타파타 Jotapata 전투. 4)로마 군대와 전투 중 마지막 남은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항복할 것을 제안.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하고 살아남았다. 5)로마에 사로잡혀갔다. 6)베스파시안 장군의 호의를 얻음. 플라비우스에 의해 양자가 되었으며 그는 Flavius Josephus라 불렸다. 7)로마에 가서 많은 저술을 남김. AD 94/5 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1 세기의 유대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신약 배경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요세푸스의 개인적 자부심: 유대 전쟁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과장하고 있다. 2)친 로마적 경향성. 하나의 시각에서 쓰였다. 요세푸스가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이다. Court historian. pro-priestly, pro-Hasmonean. 3)Jewish boosterism: 일종의 국수주의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 4)헬라적 편견: 유대 사회와 철학을 헬라적으로 주조했다. 5)명백한 바리새적 편향성.
Philo. (BC 20-AD 45) 초대교회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 1)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 (그의 가문은 유대 지배층에 속하였다). 2)그의 저술: 구약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였다. 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원조. 유대적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많은 철학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3)Philo의 의의 풍유적 해석을 발전시켰다. 풍유적 해석이란: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초월하여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표현들 뒤에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Text의 문법적 역사적 의미와 관계없이 본문을 해석하게 되었으며 Text보다는 해석자가 더 중요한 관건으로 등장하였다. 해석자의 무제한적인 해석이 시작되었다.
풍유적 해석의 목적: 신앙변증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구약성경을 변증하고 히브리사람의 믿음을 변증하는데 있었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풍유적 해석을 할 필요가 있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