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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東京 옥중에서 봄을 기다리며
-2·8독립선언의 주역 근촌 백관수 선생 옥중 시집 『동유록東幽錄』의 의미
양 왕 용
(1)
백관수白寬洙 선생(1889-1961)은 본관은 수원이고 호는 근촌芹村이다. 1889년 1월28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서 백도진白道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한문을 익혀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 청년 시절에는 인촌 김성수(1891-1955), 고하 송진우(1887-1945) 등과 교유하였다. 1915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대학(明治大學)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도쿄(東京)에서 유학생 중심의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대표가 되었다.
이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동이 되어 1919년 2월8일 도쿄의 재일본조선YMCA 회관에서 동경유학생학우회 임시총회라는 명목으로 학생회를 개최하여 개회 즉시 회의 내용을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로 변경하여 춘원 이광수가 지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 2.8선언의 주동인물 11인은 최팔용, 백관수,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이광수, 송계백, 김철수, 김상덕, 최근우, 서춘 등이었다 그 뒤 600여명의 유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들어 가려하자 대기한 경찰대에 의해 저지, 강제해산 되었으며 주동자 30여명이 검거 투옥되었다. 이광수의 경우 미리 상해로 피신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주관지 《독립신문》 창간의 주역이 되었으며, 2·8선언서는 국내에 전달되어 3·1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투옥된 30여명 가운데 백관수, 최팔용, 김도연, 윤창석, 송계백, 서춘, 김상덕, 이원군 등 8명은 길게는 1년, 짧게는 3개월, 출판법 위반혐의로 징역을 살아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독립운동 사상 식민지 유학생들이 적지 수도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은 2·8 독립선언 말고는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관수 선생은 1920년 3월 출옥한 이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의 일제강점 상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제1회(하와이, 1925) 제2회(하와이,1927), 제3회(일본 경도,1929) 태평양회의 조선대표로 참석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1926년 《조선일보》편집인 겸 영업국장, 1932년 《동방평론》을 창간하였으며, 1933년에는 이충무공공적보존회 대표로 한산도 제승당을 중건 낙성했으며, 1937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1940년 강제 폐간 후에는 구금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한국민주당의 산파역으로 참여하여 1948년 5.10 선거에서 고향 고창의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법제사법위원장이 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 했다. 1950년 6월 26일 원남동 자택에서 공산당에게 강제납북 되었으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1961년 3월 평안북도 선천의 결핵요양병원에서 생애를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고향에는 그의 빈 무덤이 아직도 북한 어딘가에 묻혀 있을 시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으로 볼 때 그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건국기에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아온 애국자이며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인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의해 자행된 6·25 전쟁 때에 납북되어 이 세상 최후의 모습과 어디에 어떻게 묻혀 있는가가 정확하게 확인 안 된 많은 납북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고창군 편>, 백순 편 백관수 옥중시집 『동유록』<2019.2.8.시산맥사> 등 참조)
(2)
20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는 비록 100년 전의 그 장소와는 다소 떨어져 있으나 이전하여 마련되어 있는 한국YMCA 회관에서 광복회원과 2·8독립선언 유가족, 유학생 대표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행사는 재일한국YMCA가 국가보훈처와 2·8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후원을 받아 개최하였다. 같은 날 서울 YMCA 회관에서도 400여명의 회원들이 참석하여 2·8독립운동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2월 9일에는 일본 동경의 같은 장소에서 2·8독립운동100주년 기념 세미나가 있었다. 이 세미나는 이광수의 「무정」을 일본어로 번역한 하타노 세츠코 니가타현립대 명예교수가 주축이 된 일본 내 한국문학연구회의 주관으로 개최되었는데 일본인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주제발표자로는 미국 인디아나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 시립대학교와 미국 올드 도미니언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친 최연홍 교수가 「2·8독립선언서 100주년 기념, 미국의 독립선언서와의 비교」라는 제목으로 2·8독립선언문과 미국독립선언문을 비교 분석했다. 최연홍 교수는 연세대 재학시절인 1960년대 초 박두진 시인으로부터 《현대문학》에 추천받은 원로 시인으로 한국어와 영어로 시를 창작하고 두 언어로 시집도 많이 내었으며 미국 국회 도서관에 초빙되어 시낭송회를 한 저명 시인이다. 최 교수는 “토마스 제퍼슨이 초안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독립선언인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춘원 이광수가 초안한 한국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2·8 독립 선언문은 143년의 시차가 있고 다른 대륙과 다른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리만큼 유사점이 보인다고 역설했다.
다음으로는 백관수 선생의 둘째 아들인 백순 박사가 그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백관수 선생의 동경 옥중 한시 71편을 손수 한글과 영어로 번역하여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에서 편찬한 『동유록東幽錄』(2019.2.8. 서울, 시산맥)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동유록, 근촌 백관수의 대춘보-봄을 기다리는 마음」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백순 박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오아이오 대학교와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 취득 후 연방정부 노동성의 선임경제학자에서 은퇴하고 현재 워싱턴버지니아대학교에서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 문예지에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여 시집과 평론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백 박사는 ”선친은 감옥에서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을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한시에 담아 표현 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마음은 3·1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어 1945년 해방을 가져온 한 디딤돌이 되었으리라 믿는다“고 역설했다.
(3)
이제 백관수 선생의 시 몇 편을 소개하여 보기로 한다. 편의 상 한시와 한글 번역시만 소개하고 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기로 한다.
우선 71편 가운데 첫 편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正當二月時 春色尙何遲
三疊幽窓下 他吾獨不知
-「正當」 全文
정녕 때는 2월이건만
봄 기운 아직도 어이 더딘가
세 다다미 크기의 감방 창 아래에서
역시 나 홀로 모름이런가
-「정녕 때는」 전문
이 작품은 백관수 선생이 2·8독립선언을 하고 바로 그날 일본 경찰에 잡혀 감방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창작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적으로 형상화에 성공한 부분은 우선 ‘봄’이라는 계절의 상징성을 들 수 있다. 계절적으로 2월이라는 물리적 시간이지만 봄이 더디다는 것은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현실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이어 창작된 몇몇 작품에서도 봄의 오지 않음이 반복되면서 깊은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감방 창’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한시에는 유창幽窓이라는 표현에서 백관수 선생의 시적 역량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유幽는 ‘가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1)그윽하다. 깊다. (2)어둡다. (3) 숨다. 등에 이은 네 번째 뜻이다. 그리고 (5)저승 이라는 뜻도 있다. ‘감옥’이라는 ‘옥’獄을 쓰지 않은 것에서 충분한 문학성과 다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시집의 제목 『동유록東幽錄』 역시 ‘동경 감옥에서의 기록’이라는 설명적인 제목보다 훨씬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행 ‘나 홀로 모름이런가’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독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백관수 선생보다 18년 늦게 태어난 시인 윤동주(1917-1945)는 1919년보다 23년 뒤인 1942년 동경 입교대학에 유학하면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쉽게 쓰여진 시」 1 연) 그리고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6연) 하는 시를 남기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목숨을 거둔다. 이렇게 볼 때 백관수 선생의 옥중 시는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생들, 특히 윤동주 시인 같은 시인의 고독체험의 원체험라고 볼 수 있다.
幽籠遠出彼城邊 困鳥生涯堪自憐
飮啄從人時掬淚 起居無爾夜難眠
雖然鵬步惟圖海 終是鶴鳴能聞天
一片檄羽何有誤 自由他日凱歌傳
-「幽籠遠出」 全文
깊은 새장 저 성 변방에 멀리 나와 있어
어려운 새의 가련한 삶 스스로 견디고
사람 따라 물 마시고 먹을 때 눈물 훔치고
일어나 할 일 없어 밤에 잠 못 이루네
허나 붕새 걸어서 오로지 바다를 건너려 하고
마침내 학 울음소리 하늘에 들리네
한 장의 격문(2·독립선언문) 뿌린 게 무슨 잘못 있는가
자유의 그 날 개선가로 전하여지리
-「깊은 새장 멀리」 전문
앞에 인용한 작품 「정녕 때는」은 4언 절구絶句의 형식으로 비교적 단순한 극적구조(기승전결起承轉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인용한 「깊은 새장 멀리」는 완벽한 7언 절구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극적구조도 미묘하고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시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글 번역시를 중심을 살펴보기로 한다. 백순 박사는 기와 승에 해당하는 1, 2 구와 전과 결에 해당하는 3,4 구를 각각 독립된 연으로 나누고 있다.
이 작품 역시 감옥을 ‘깊은 새장’(유롱幽籠)으로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첫 연에서는 백관수 선생 자신을 새장 속에 새로 비유하여 자기 처지를 다분히 감상적感傷的으로 인식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적 어조는 둘째 연에서는 사라지고 결연한 의지가 피력되어 있다. 자기 자신과 동지들을 붕새라고 하여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큰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유학생들의 저항의지와 행동을 학 울음소리로 비유하여 결코 일회성에 끝날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마지막 결구(3,4행)에서 2·8 독립선언이 죄가 아님을 밝히면서 이것이 일제강점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우 개선가로 전해질 것을 예견한다. 2·8독립 선언 100주년이 지난 지금 백관수 선생의 이 예견은 옥중에서 쓴 한시들이 한글과 영어로 번역되고 한권의 시집으로 발간되어 배표됨으로써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불굴의 의지들로 인하여 광복 74년이 지난 이 시점에 대한민국은 비록 분단의 비극은 해소도지 않았지만 세계 10권의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仰而不愧 俯亦不愧
俯仰不愧 有何悔
大義討敵 順其人道
道義旣明 有何誤
-「自慰歌」(1) 全文
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음이여
밑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음이여
굽어보든 우러러보든 부끄러움이 없으니
무슨 뉘우칠 일 있으리오
커다란 옳음으로 적을 꾸짖었음이여
사람의 도리를 따랐음이라
도의가 이미 분명하거늘
무슨 잘못 있으리오
-「자위가(1) 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음이여」 전문
이 작품은 백순 박사 역시 동경 발표에서 언급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번역시집 『동유록』 끝 부분 마지막 작품(「자위가」<2>) 바로 앞에 수록된 작품이다. 따라서 감옥 석방을 앞 둔 백관수 선생의 심경과 일 년 넘게 감옥에 머문 것에 대한 선생 자신의 생각과 앞으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살아갈 각오를 다짐한 작품이다. 백순 박사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 역시 윤동주의 「서시」의 첫 부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끄러움’과 비교될 수 있다.
백관수 선생은 위 아래라는 표현으로 종교적 색채는 중립적이지만 하늘과 땅이라는 이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유학생들의 저항은 대의명분이나 인간의 도리로 보아 결코 부끄러움이 없다는 단호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감옥살이는 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아울러 밝힌 셈이다. 이러한 각오로 선생은 석방 후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여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해방 전에는 민족대표로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간부와 경영자로서 언론인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유적인 한산도 제승당을 중건하여 민족의식을 헌창했다. 특히 이광수나 최남선 등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손수 작성한 사람들이 친일이라는 멍에를 쓴 데 반하여 그는 일말의 흠도 없는 애국자가 되었다. 그리고 해방공간과 건국기에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는 산파역으로 민주주의 지향성을 가진 지도자로서 좌익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일제 말의 창씨개명이라는 만행 때문에 일본 유학을 하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 상황과 1918년이라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유학생 백관수 선생과는 다른 시대상황 즉 중일전쟁(1937), 대동아공영권(1940)이라는 일본의 망상, 태평양전쟁(1941년) 발발의 조짐 등이라는 세계사적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 하는데서 나온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간은 원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부끄러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부끄러움이다.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윤동주 역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았고 일본제국주의 패망(1945.8.15.)을 6개월 앞 둔 1945년 2월 16일 새벽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아가는 생체실험 도중, 외마다 소리를 지르고 목숨을 거두었다.
(3)
백관수 선생의 옥중시집 「『동유록東幽錄』(2019,서울 시산맥)에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동경 유학생, 그것도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유학생의 가치관과 상황의식이 나타나 있다. 선생은 대한민국의 광복은 ‘봄처럼 더디 올 것이지만 확실히 올 것’이라는 신념을 옥중에서 길렀다. 그리고 그들의 결행이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그렇다는 신념도 길렀다. 이러한 신념으로 그는 오로지 일제강점기 동안 나라와 민족 해방을 위하여 일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민주주의 국가 건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선생은 또한 그보다 18년 늦게 조국도 아닌 간도 땅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의 고독과 부끄러움의 원체험자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즉, 백관수 선생과 같은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윤동주에게 부끄러움과 고독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8선언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 해에 백관수 선생의 옥중시집 『동유록』이 출간된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뜻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그리고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절명한 윤동주 시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그의 절명연도와 광복연도가 같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윤동주 시집을 다시 한 번 읽기를 당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