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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방형의 석실.
이 곳은 평소 절정사태가 무공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정사태가 아닌, 한 사내가 기묘한 자세로 눈을 내리감은 채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는 진일문이었다.
아무튼 취하고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그가 무공을 연성하고 있는 것만은 한 눈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절정사태의 명에 따라 백일 연공에 들어간 것이다.
절정사태는 그동안 외부인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일체 금했다.
그것은 백하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무공의 연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 집중이라 할 수 있었다.
심기가 심해(深海)처럼 잠잠해져 있을 때만이 그 진정한 진보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절정사태는 이런 명령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또한 이에 힘입은 듯 실제로 진일문은 하루가 다르게 폭넓은 진경을 보이고 있었다.
만만신공은 범어(梵語)로 되어 있어 요결을 일일이 해석해서 이해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점도 절정사태가 전적으로 나서서 도왔다.
진일문의 학문과 자질도 충분한 밑바탕이 되긴 했지만 그가 나날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은 그녀의 조력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개인 연공실을 내준 것은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비취암의 제자들도 아직 그런 혜택까지는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진일문은 더 할 나위 없는 감격에 이르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은연 중 절정사태를 위하는 일이라면 분골쇄신하겠노라고 결심이 서 있는 터였다.
연공실 내의 벽에는 도합 열장의 도해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만만신공의 열 가지 기본 자세를 알려주는 그림들이었다.
즉 인체 혈도의 상세도로써 벌거벗은 뚱뚱한 화상이 각기 다른 자세로 그려져 있었다.
그 중 한 가지 자세를 익히는데 보통 십일이 소요된다.
절정사태는 그에게 백일 연공을 지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놀랍게도 진일문은 한 가지 자세를 익히는데 불과 오일이면 족했다.
사십일이 지났을 때, 그는 정확히 여덟 개의 도해를 정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성취는 절정사태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진일문은 어느덧 모습까지도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이제 오관이 정비되거나 근골이 자라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변화였다.
그의 눈에서는언제부터인가 맑고도 깊숙한 혜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동작 또한 전에 없던 은은한 현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기오막측한 현상이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첫번째로, 그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졌다는 것을 느꼈다.
약간만 뛰어올라도 천정까지는 쉽게 도약할 수가 있었다.
두번째로 그가느낀 현상은 며칠이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다는 점이었는데, 진일문은 이 면에서는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되었다.
세번째로는 기억력과 오성이 이전에 비해 수 배나 발전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굳이 외우려 애쓰지 하지 않아도 열 장의 도해를 완벽하게 머리에 담을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기억 속에 음울하게 접혀 있었던 학문도 자자구구 떠올랐으며 예전에는 미처 오의에 도달하지 못했던 난해한 문구들이 비로소 확연히 깨달아지기도 했다.
'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진일문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껴안은 채 자신의 앞에 펼쳐질 새로운 인생을 넌즈시 건네다 보았다.
확실히 그것은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와는 극단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절정사태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그 분은 내게 있어 어머니이자 사부나 다름없는 분이다.'
절정사태는 세심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써 주었다.
매일 같이 찾아와 그의 진경을 보살피는 것은 물론 어려운 부분은 직접 시전을 해보이기도 했다.
진일문은 이제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성의만은 늘 겸허하게 받아 들였다.
그는 아홉번째그림이 지시하는 연공에 들어갔다.
그의 신체 각 부분에는 기이한 힘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껏 시달려왔던 통증이나 열기도 어느 덧 순하게 다스려져 의도하는 대로 한 곳에 모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경팔맥이나 임독이맥으로 활발히 흐르는 진기는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아무 곳이나 자연스럽게 유도되고 있었다.
만만신공은 토납지법(吐納之法: 호흡법)과 더불어 유가술의 각종 자세를 통해 혈기 유통을 인위적으로 이끄는 등의 두 가지의 수련법을 병행하는 것이었는데, 아홉번째 그림은 거꾸로 선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운행법은 이러 했다.
우선 벽에 기대어 다리를 활짝 벌리고 양손으로 머리의 백회혈(百會穴)을 감싼 채 중단전에 모은 진기를 백회혈로 이끈다.
또한 백회혈에모인 진기는 다시 두 손바닥으로 접인했다가 다시 반대로 백회혈을 거쳐 중단전과 하단전까지 유도한다.
진일문은 이를시행하는 동안 내부에서 형성된 진기가 점점 단단하게 응어리지는 것을 느꼈다.
삼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주먹만한 덩어리로 응결되어 혈맥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을 절정사태에게 고하자 그녀는 약간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네 성취가 구성에 달했다는 증거다. 아미타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역시 빈니가 기대한대로 네 자질은 천고에 보기 드문 것이구나."
차분하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에는 약간의 흥분기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면은 종전보다 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만만신공이 아무리 속성을 위주로한 무공이라 해도 구성에 이르려면 최소한 육십 년 이상을 연마해야 했다.
실상 절정사태가 이 수위에 달한 것도 그녀의 나이 오십오 세였을 때였다.
기연을 만나지못했다면 진일문으로서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금정홍을 복용한 데다가 절정사태의 비상한 약력까지 투입되자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의 체내에서흩어져 있던 진기는 그야말로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이 그의 내공으로 화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진경은 절정사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자신의 감정을 굳이 감추려 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은연 중 마음 한 구석으로부터 한 가닥 두려움이 치밀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절정사태는 거꾸로 선 자세로 진기 운행에 몰두하는 진일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놈은 이대로 수년만 더 지나면 아마도 무림의 후기지수 중 제일인자가 될 것이다. 말 그대로 후환 덩어리인 셈이다.'
그녀의 미간이슬쩍 찌푸러 들었다.
'더욱이 왕중헌이 다시 거둬들여 무공이라도 전수한다면 무림에는 또 하나의 거마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한 절정사태는 안색을 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몹시도 차가운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빈니가 더 이상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니.......'
이윽고 절정사태는 진일문을 향해 위엄있게 말했다.
"빈니도 네가 이 정도까지 성취를 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덕분에 백일의 연공기간을 오십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으니 더욱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연공이 끝나면 이것을 당겨라."
진일문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기에는 손잡이가 달린 하나의 끈이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있는 곳과 연결된 신호용 줄인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대답하자절정사태는 두 말 없이 휑하니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늘 그랬듯 그녀의 뒷모습은 비정하기 그지없었다.
진일문은 진즉부터 이를 느꼈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풍기는 분위기야 어떻든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부모와 왕사부 다음 가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이틀후.
진일문은 마침내 아홉번째 그림의 연마를 마쳤다.
그의 내부에 있던 주먹만한 진기 덩어리는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다행이다. 사태의 기대를 헛되게 하지는 않은 것 같구나.'
그는 흡족한 심정으로 마지막 그림의 자세를 들여다 보았다.
아울러 이제까지의 예로 보아 별 문제가 없으리라는 자신감도 가졌다.
그런데 그가 막 수련에 임하려 할 때였다.
스르르.......
연공실의 문이살며시 열리더니 누군가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쉿!"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붙이며 긴장된 표정을 짓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백하련이었다.
"누님께서 어떻게 여기를......?"
진일문은 놀라는 한편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백하련은 불안한 듯 바깥의 동정을 살피더니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동생,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요."
"대체 무슨......?"
진일문은 되물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표정이 몹시도 긴박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록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추악했으나 그에게는 벌써 미추의 개념을 떠난 정겨운 얼굴이었다.
백하련이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동생의 진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이제 막 열번째 단계로 접어들려는 중입니다."
"정말?"
백하련의 얼굴에는 일순 경이감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만만신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성취가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것인지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하련은 웬지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내심에서는 바로 이런 탄식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아! 동생의 자질이 이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구나. 금정홍까지 취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겠지. 하지만 동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야 가혹한 시련 뿐이니.......'
그녀의 눈이 연민으로 인해 심한 흔들림을 보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진일문이 비로소 정색을 지으며 물었다.
"누님, 왜 그러시오? 무슨 일인지 어서 내게 말해 보시오."
백하련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심각한 어조로 대꾸했다.
"물론 동생에 관한 일이에요."
"나에 관한?"
"그래요. 동생은 한시 바삐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진일문은 언뜻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빠져 나가다니,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동생은 송아지에게 좋은 여물을 먹이는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요?"
"그야 잘 자라라고......."
"그러나 그 궁극은 뭐죠? 바로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동생의 처지가 지금 그래요.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육되고 있는 종우(種牛)나 다를 바가 없어요."
진일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무, 무슨 뜻인지... 나는 도무지......."
백하련이 탄식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처음부터 사부님이 노렸던 것은 오직 동생의 몸 속에 담겨있는 금정홍의 약효였을 뿐이에요. 그것을 내공으로 전환시켜 모조리 빼내려는 속셈이지요."
"아!"
진일문은 흡사뒤통수를 거대한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백하련의 말이 계속 그의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사부님이 동생에게 그토록 잘 대해 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어요. 믿고 싶지 않겠지만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에요."
진일문은 일시지간에 머리가 텅 비는 듯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배신감이 그의 가슴을 한 차례 쓰리게 훑고 지나갔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분노라기 보다는 차라리 허탈감이었다.
'결국 그것이었나? 단지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를 지켜보는백하련의 눈에도 고통이 배어 올라왔다.
그녀는 이 순간, 그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 역시도 절정사태에 관해 이와 비슷한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었다.
타인으로부터 멸시와 고초를 당하던 가운데 절정사태에게 거두어 졌는데, 이후로는 그저 명령만을 받드는 편리한 도구로 활용되어졌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사제지간의 정 따위는 단지 꿈에서 그쳤을 뿐이고 이제는 목숨까지 내맡긴 처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진일문 쪽이었다.
"누님께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
백하련은 흠칫했다.
착 가라앉아 있는 그의 음성에서 또 다른 그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절제와 인내를 통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자의 모습이었다.
백하련은 이 사실을 두고 눈물까지 머금을 정도로 기뻐했다.
'컸구나! 그 동안에 동생은.......'
이신전심이랄까?
진일문은 그녀의 말없는 희열을 대하자 곧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누님께선 제가 어찌 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는 무조건 백하련이 하자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그것만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는 현재 하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절망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만도 그로서는 벅찰 지경이었다.
백하련은 문득수줍은 기색을 보였다.
진일문의 빛나는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곱게 접어두었던 그녀의 여성성이 내부로부터 슬며시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얼마 전의 더럽고 병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이 고약한 순간에조차 눈이 부실 정도로 헌앙한 미장부였다.
"동... 동생이 신공을 성취하면... 사부는 분명 독기를 빼준다는 명목으로 동생의 내공을... 흡수하려 들 거예요."
백하련은 자신이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진일문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채 경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법은 단 두 가지 뿐....... 한 가지는 이대로 달아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때였다.
밖으로부터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들려온 것은.
"련아! 네가 감히 사부의 명을 어기고 이 곳을 함부로 드나들다니, 어서 썩 나오지 못할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절정사태의 음성이었다.
백하련의 안색은 일시에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마치 염라대왕이라도 본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 사부님, 전 다만......."
그러자 절정사태의 음성이 부드럽게 답했다.
"알고 있다. 네가 그 아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대공을 성취하는 순간이니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아니된다. 너도 이쯤은 알고 있지 않느냐?"
백하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마치 목을 잡혀 끌려나가는 짐승처럼 처량한 모습이 되어 걸어나갔다.
진일문은 뭐라고 말을 할 듯 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어 그는 곧바로 벽에 걸린 열번째의 그림을 향해 정좌했다.
그는 그림을 따라 손바닥을 하나는 단전에 붙이고, 하나는 수평으로 뻗었다.
그러는 사이, 그림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아우성과도 같은 불꽃이 이글거렸다.
닷새라는 기간이 또 흘러갔다.
진일문은 그 동안 수련을 완전히 끝마쳤다.
만만신공의 오의는 이제 그의 것으로 모두 소화되어 있었다.
만만신공은 마음먹기에 따라 내공의 기를 무형, 또는 유형의 강기로 발출시킬 수 있는 신비기공이었다.
이를 습득한 그는 물론 체내의 진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주먹만한 진기의 구(球)는 그의 마음이 움직이면 어김없이 함께 움직여 주었다.
특히 마지막 그림의 구결에 따라 운용하면 손바닥에 응집시켜 외부로도 사출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진일문으로서는 이러한 변화들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 다.
무엇보다 백하련의 안위를 생각하면 그는 단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가장 걱정인 것은 절정사태가 과연 자신과 그녀와의 대화를 들었는지의 여부였다.
정황으로 미루어 어쩌면 그로 인해 백하련이 생명을 잃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한쪽벽에 늘어져 있는 끈을 바라보았다.
그 손잡이를 당김으로써 그는 스스로 생의 최후를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초조해하는 이유는 역시 다른데 있었다.
'절정사태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
내 입장에서야 목숨을 내건 일이지만 그 쪽에서는 필경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내 목숨쯤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여길테니.......'
그 담판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백하련을 위한 것이었다.
사실 그의 심중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부르짖음이 맴돌고 있었다.
'누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죽어 가면서도 왜 죽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절정사태를 은인이라고 생각했겠지. 최
소한 나로 인해 그런 악인의 손에 누님을 희생당하게 만들 수는 없다.'
마침내 진일문은 벽에 매달린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멀리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종소리가 그의 귀에도 전해져왔다.
어쩌면 그것은 생사를 가름하는 유부(幽府)의 판관이 울려내는 소리와도 같았다.
진일문은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준비는 되었느냐?"
절정사태의 얼굴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일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자."
진일문이 비로소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낭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절정사태의 냉엄한 얼굴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는 한 동안 그를 쏘아보더니 물었다.
"그건 왜 묻느냐?"
"그 분은 저와 형제의 지교를 맺었습니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절정사태는 눈에서 매서운 안광을 발했다.
"그랬었군. 네가 어떻게 그 곳까지 들어갔나 했더니 바로 련아가 한 짓이었구나."
진일문은 그 순간, 절정사태의 눈가에 맺히는 기운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것은 냉막하기 그지없는 살의(殺意)였다.
'그러고 보니 이 여승이 바로 독랄하기 짝이 없는 도화림의 주인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깜빡 잊었었구나. 매 순간마다 불문의 인물답지 않다는 것을 느꼈으면서도.......'
진일문은 자책과 탄식이 어우러진 가운데 얼마 전 백하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에 의하면 자신이 살아날 길은 오직 두 가지 뿐이라고 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이미 선택할 기회를 놓쳤고 다른 한 가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채 하지 못했던 말을 위해 백하련이 저지르게 될 행동이 그를 두려움으로 몰고갔다.
절정사태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련아는 지금 이 곳에 없다. 네 몸 속의 독기를 몰아낸 후에 만나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진일문은 피식웃고난 후, 결연한 어조로 응수했다.
"저는 그 전에 필히 누님을 만나야 합니다."
절정사태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은인이 저로 인해 희생을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외다."
가슴을 편 채 당당하게 말하는 그의 자세에서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사나이의 기백이 느껴졌다.
'흐음?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지 않은가?'
절정사태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상황을 돌이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차갑게 내뱉았다.
"대체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사태께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셔도 좋으니 누님만은 절대 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절정사태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기가 매달렸다.
"너는 과연 빈니가 제자를 해하리라고 보느냐? 갑자기 그런 생각은 왜 하게 되었지?"
진일문은 드디어 부딪쳐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저는 당신이 애써 키운 신과를 망쳤을 뿐더러 당신이 가져야 할 복을 가로챘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되돌려 받으려 한들 나쁘게 생각할 자격이 없습니다."
"너, 너는 알고 있었구나!"
절정사태의 안면이 처음으로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다.
그에 반해 진일문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저는 세상에 살아 있어 봐야 무엇도 도모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모든 기회로부터 차단된 채 살아 왔으니 사태를 위해 제물이 된들 이제 와서 아쉬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목숨을 접기 전에 책임을 져야할 일만은 확실히 매듭짓고 싶습니다."
"책임이라고?"
"그렇습니다. 이 불행한 자를 상대로 참다운 인간대접을 해준 이가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백누님이지요. 저는 그녀가 향후로 여하한 불행도 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절정사태의 얼굴에는 그녀답지 않은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기꺼이 빈니가 시키는 대로 하겠단 말이냐?"
"믿고 안 믿고는 사태의 자유입니다. 다만 진실을 말해서 늘 고초를 겪어왔던 멍청한 자가 저였다는 것을 알려 드리겠소이다."
진일문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절정사태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것은 마치 진일문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의 모습을 꺼내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빈니도 더 이상은 너를 속이지 않겠다. 련아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애초부터 나는 너에게 얻을 것만을 염두에 두었었다. 하지만 빈니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네가 내 십 년 공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으니까."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소이다. 저는 단지 백누님이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흠, 어디 네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두고 보자. 련아를 풀어 주겠다. 그러나 일단 나를 배신한 이상 내 곁에는 둘 수 없다. 죽이지는 않지만 축출하겠다는 말이다. 이 정도만 해도 빈니로서는 크게 아량을 베푼 것이다. 지금까지 죄과를 용서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너는 정말로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느냐?"
진일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물론이외다."
"후후...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절정사태는 비웃음이 담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연공실에 혼자남게 된 진일문은 가슴으로 한 가닥 비애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군.'
생각해 보면 그의 생은 짧은 동안에 너무도 많은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행복이란 자신과 도통 인연이 없다고 단정짓기에 이르렀다.
일시적이나마 희망을 가져 보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욱 비참해져버린 그였다.
"후후후... 나 같은 놈은 차라리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진일문은 암울함이 깃든 시선으로 벽에 걸려있는 열 장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무학이라는 것,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내게도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것으로 착각했었지."
그런데 이 때였다.
"안돼... 동생, 포기하기는... 아직 일러."
등뒤로부터 한가닥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뜻밖에도 백하련의 음성이었다.
진일문은 경황 중에도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님......."
그가 돌아서자그 곳에는 추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 전보다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 동안 고초를 겪은 모양이었다.
진일문은 가슴이 뭉클해져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사했었군요, 누님."
백하련의 이지러진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진일문의 가슴에 머리를 가만히 기대왔다.
"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거예요?"
진일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누님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목숨이었소. 예정에서 그리 빗나가는 일이 아니니 마음 쓰지 마시오."
"아니, 동생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백하련은 고개를 반짝 쳐들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동생은 이렇게 주저앉아서는 안 되요. 그건 결코 나를 위하는 일이 아니에요. 나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동생은 반드시 살아서 이 곳을 나가야 해요."
진일문은 고소를 지었다.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오."
"그럼 나는요?"
백하련은 그의손을 잡더니 자신의 얼굴로 갖다댔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얼굴로 세상을 살아 왔어요. 사실 나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남만 못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지요. 화마로 인해 이토록 흉하게 망가진 이후로 내 인생은 갑자기 달라져 버렸어요."
그 말은 진일문을 꽤 당혹하게 만들었다.
백하련의 몸매나 음성에서 그녀가 한 때 미인이었리라는 추측을 해본 적은 있으나 이런 고백은 듣느니 처음이었다.
백하련은 음울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죽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죽음이 두려워 체념과 친해졌을 뿐이에요. 그러다가 동생을 만났어요."
"으음......."
"동생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깨달았어요. 세상에는 나처럼 불행한 사람이 많으며,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동생의 한탄은 역으로 내게 지혜가 되어 주었던 거예요."
"누님!"
"듣기만 해요. 나는 지금 동생만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백하련의 유난히도 반짝이는 눈이 진일문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동생이 나를 누님이라고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 동안의 고통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어요. 아울러 그 때에 나는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것은 바로 동생을 구해내는 것이었지요."
그녀의 눈빛은강렬한 일면 몹시도 따사로왔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에 진일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시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오."
백하련은 언뜻미소를 지었다.
미소라고 해야 엉그러붙은 얼굴의 근육이 양 옆으로 약간 움직인 것에 불과했지만.
"동생은 지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내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 지도 알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요."
"무슨 뜻이오? 그건......."
"동생은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를 잘 모르고 있어요. 과연 사부가 동생과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리라 믿나요?"
진일문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사태의 성품이 그 정도로 악랄하단 말이오?"
그는 말을 해놓고는 쓴 입맛을 다셨다.
"불문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백하련은 자조가 깃든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죠. 훗! 동생은 사부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모르고 있어요. 나를 이 곳에 보내기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진일문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사부는 나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내게 당신을 설득해 만만신공을 이전하도록 하랬어요. 그렇게 해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즉 무공을 폐지시켜 추방하겠다고 했어요. 어때요? 그것이 바로 그녀가 베푸는 최대의 관용이라는 것이죠."
"맙소사!"
진일문은 그만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너무도 기가 막힌 나머지 자신의 심정을 채 말로 쏟아내지도 못했다.
'무공을 못쓰게 만든다면 살려주나 마나가 아닌가? 누님과 같은 상태에서 무공을 잃는다는 것은 그나마 살아갈 희망조차 빼앗기는 셈이거늘, 내 목숨을 담보로 한 결과가 겨우 그 정도라니....... 절정사태는 자신 이외에는 인간의 값어치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구나.'
백하련이 담담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동생이 나를 위해 치르려고 하는 그 희생이란 사부가 보기에는 단지 바보짓에 불과할 거예요."
진일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찌 하면 좋겠소?"
마침내 그로서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인심이 이러할진대 최소한 어리석어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선의 방책은 역시 도주예요. 함께 라면 더욱 좋겠지만......."
백하련은 말끝을 흐렸다.
그 안에 포함된 의미가 또한 자기희생이란 것쯤은 진일문도 능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니되오."
그는 미간을 좁혔다.
"사태의 무공으로 미루어 섣불리 움직였다간 우리가 다 함께 목숨을 잃을 공산이 크오."
그것은 사실이었다.
백하련의 의도는 모험이라도 해서 진일문을 살려내려 한 것이지만 절정사태가 지키고 있는 이상 성공할 확률은 거의 전무했다.
"누님께선 이 길로 사태에게 가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라고 전하시오. 어떻게 하든 먼저 그녀를 안심시켜야 할 것이오."
지금 당장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때를 보아 임기응변이라도 구사해보는 것밖에는............
하지만 기회가 주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첫댓글 즐감요
감사
감사합니다
즐감 감솨 *^^*
그럴것 같드니만 역시나..
늘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ㅈㄷㄱ~~~~~~~~~~``````````````````````
감사합니다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즐.독.........
즐독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