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왜성에 올라
시월 끝자락 주말이다. 잠을 깬 새벽녘이면 으레 그렇듯 몇 줄 글을 남기고 책을 펼쳐 읽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현관을 나서 텃밭으로 향했다. 전날 심어둔 양파 모종에 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둠 속에 도청 광장을 거쳐 법원 청사에서 창원 축구센터 뒤 텃밭으로 올랐다. 이웃한 광쇠농장 친구가 먼저 나와 둠벙의 물을 퍼 날라 마늘을 심으려 만든 두둑에다 물을 주고 있었다.
텃밭 단지에서 유일한 한 곳의 둠벙도 이제 물이 말라갈 정도로 가뭄이 심하다. 밤새 채워진 물의 양이 적어 나는 전날 심은 양파에만 물을 주고 무와 배추는 줄 처지가 못 되었다. 먼저 나왔다고 둠벙 물을 바닥 나게 다 퍼 주면 나중 나타날 이웃 텃밭 지기들이 실망할까 봐 일부는 남겨 두었다. 집에서 찬거리로 삼을 땀방울만큼 귀한 물방울로 키운 무와 배추를 몇 포기 뽑았다.
무와 배추와 함께 가뭄에 힘들게 키운 케일도 몇 잎 따 모았다. 서리가 왔을 텐데 호박넝쿨의 잎은 아직 파릇했지만 이제 생육을 더 기대할 수 없을 듯해 늙은 호박을 한 덩이 찾아 챙겼다. 가을 푸성귀와 호박을 챙겨 친구와 함께 텃밭을 내려와 법원 근처에서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찬거리는 현관을 열어 부려 놓고 행선지를 진해 갯가로 삼은 산책을 나서려 곧장 되돌아섰다.
외동반림로 반송 소하천을 따라 걸어 원이대로 창원수영장 앞으로 나갔다. 거리의 가로수와 레포츠파크의 정원수에서는 단풍이 물들어 가을이 깊어 감을 도심에서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창원대학에서 진해 용원으로 가는 757번 직행버스를 타고 도심을 벗어나 안민터널을 지났다. 진해구청에서 대발령을 넘어 웅천과 웅동을 거쳐 문제의 사학 재단이 가까운 의곡마을에서 내렸다.
안골포를 거쳐온 남파랑길로 들어 마천공단 앞에서 영길마을로 갔다. 대장동과 가까운 영길만 갯가에는 그 마을 출신 작사자가 남긴 ‘황포 돗대’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대중가요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발바닥으로 버튼을 눌렀더니 귀에 익숙한 이미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비에서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흰돌메공원이었다. 백석산의 공원이라고 시민 공모로 흰돌메라 붙여졌다.
흰돌메공원에서 남문지구 아파트가 들어선 사도마을로 향하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한 사내에게 웅천왜성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와성마을 앞에서 개울을 건너 왜성으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 숲길을 따라 얼마간 비탈을 오르니 웅천왜성 정상이 나왔다. 용원 신항만에 이어진 제덕만까지 드넓은 평야와 같은 매립지 건너는 거가대교 연륙교가 보였다.
420여 년 전 조선을 노략질한 왜구는 남동 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았다. 내가 교직 말년 머문 거제에도 왜성이 있었다. 안골포왜성은 허물어 해안 매립지 토사로 채우면서 사라져버려 속이 후련하다. 웅천왜성은 울주 서생포왜성에 버금할 만큼 석축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웅천왜성 정상에서 발을 디디고 거가대교를 바라보니 내가 3년간 수없이 오간 다리라 감회가 새로웠다.
제덕만은 좁은 물길로 낚싯배와 요트 계류장 정도만 남기고 매립되었다. 웅천왜성에서 내려와 광활한 매립지에 건설되는 골프장을 지나 제덕마을 한식 뷔페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이제 막 점심 영업을 마치려는 즈음이었는데 내가 마지막 한 손님이 되어주어선지 종업원과 주인이 무척 친절했다. 나는 느긋하게 맑은 술을 반주로 곁들어 비우고 자리를 일어나 남은 여정을 수행했다.
진해 바다 70리 길의 중간쯤에 해당할 삼포를 지나니 그곳에도 역시 노래비가 있었다. 작사가가 한때 그곳과 인연이 닿아 남긴 내력의 대중가요였다. 영화로도 제작된 같은 제목의 소설과는 무관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은 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의 애환을 다루었더랬다. 삼포에서 명동에 이르러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장천동에서 창원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22.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