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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기를 잡으러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데 철도 아닌 매에 복숭아 꽃잎이 강물 위로 떠내려오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어부는 꽃잎을 따라가다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만났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보니 산 속으로 계곡 입구가 있고 바깥에선 잘 보이지 않는 호리병 같은 곳을 지나자 홀연히 큰 마을이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속세를 피해 들어간 뒤 수 백년 동안 외부세계와 교섭 없이 살고 있었으며 평화롭고 풍요롭게 보였다.
또한 그곳은 불로초와 장생 불사약 등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었고 생로병사와 근심걱정을 모르는 지상낙원 같은 곳이었다.
어부는 그곳에서 크게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이 소문을 들은 고을의 태수가 사람들을 시켜 그곳을 찾게 했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천도복숭아가 만발해 있고 신선들이 산다고 해서 "무릉도원"이라고 불렀다.
'도연명'의「도화원기」.그런 곳이 우리 나라에도 과연 있을까?
어느 해였던가.
만발한 살구꽃이 달빛에 비쳐 요사스런 분위기를 연출하며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던 봄날 밤.
울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보따리를 챙겨들고 서울을 탈출하는 열차에 무작정 몸을 실은 적이 있었다.
오밤중에 느닷없이 감행한 짓이었기에 특별한 행선지나 목적도 없는 여행길이었다.
휘황한 보름달 빛이 열차의 차창 밖으로 줄곧 따라오며 나에게 손짓한다고 느꼈을 때 어느 산골 간이역에서 내렸다.
수려한 산자락을 굽이쳐 흐르는 강물에는 예의 그 유혹하듯 흔들리는 달빛을 가득 품에 안고 있었고, 그 빛을 따라 몽유병 환자처럼 강가의 갈대 숲을 헤치며 하염없이 걸었던 적이 있었다.
강변마을로 통하는 길가에는 복숭아나무 가로수가 흐드러지게 핀 꽃잎을 머금은 채 줄지어 피어 있었고, 점점이 흩날리는 꽃잎들을 온몸으로 맞은 추억이 있다.
그 여행 이후, 세월이 흐르고 그때의 일이 아련하게 느껴지던 얼마 전, 다시 그곳을 찾았다.
복사꽃이 허기에는 한참이나 이른 시기였지만 그 환상의 강변길이며 가로수 복숭아나무가 너무 터무니없는 감상적인 꿈길이 아니었을까하는 의구심과 혹 현실이었다면 그때의 그 감동을 또 한번 느끼기 위한 여행길이었다.
그 마을은 공교롭게도''무릉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무릉리 마을의 옆 골짜기에는 또 하나의 그럴싸한 마을이 있다.
때묻지 않은 맑은 강물을 십리쯤 따라가다 보면 어느 좁다란 계곡이 나오는데 골짜기 입구가 워낙 협소한 탓에 안쪽의 풍경을 쉽사리 짐작키 어려운 곳이다.
개울 옆의 우거진 숲과 아직도 비포장으로 남아있는 즙은 산길 양쪽편의 풍광은 무척이나 소담스럽고 포근한데 마치 몇 백년 전의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 온 느낌이다.
이곳이 "도원리"다.
무릉과 도원리.
'도연명'의「도화원기」에 나오는 지명이 실제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계곡 양켠에는 유난스럽게도 야생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복사꽃이 만발한 봄날 이곳을 가노라면 선경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세상의 찌들고 힘들었던 기억을 까마득하게 잊을 수 있는 환상적인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두고 필자 한 사람만이 감탄에 감탄을 연발한 것은 아니다.
약 3백년 전 조선 영조 때, 실학파의 거유 ''이중환''도 그의 불멸의 명저「택리지」에서 이 산골짜기 마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적악산(치악산)은 흙으로 된 산이다.
그러나 산 안에는 깊은 골과 계곡이 많고 동쪽에는 이름난 마을이 많다.
또 산에 영검이 있어 이 산에서는 사냥꾼이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한다.
적악산(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맑은 물의 계곡이 30리에 뻗쳐 있으며 그것이 곧 주천강의 근원이 된다.
그 산 남쪽에 있는 무릉동과 도원동은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시냇물이나 샘물이 모두 맑고 좋아서 복지라 전해지며 특히 속세를 피해서 살기에 좋은 곳이다'라고 했다."
무릉리 가는 길.
주천강이 크게 태극의 원을 그리며 마을 앞 들판을 휘돌아 나가며 유유히 흐르는 데 이 깊은 산중에 이토록 넓은 논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한데, 사방의 산들이 들판을 포근히 감싸안고 강물이 그 가장자리를 휘감듯이 흘러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도 그 풍요로움과 넉넉함에 절로 탄성이 나올만하다.
흡사 안동의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는 마을 터다.
「택리지」는 시냇가에 살만한 터로 다시 한번 이곳을 이야기한다
"주천강(강웓도 영월군 주천면)은 아주 두메에 속하지만 들판이 제법 틔였다.
산이 대체로 높지 않으며 물도 매우 맑고 푸르다.
주민들은 기장과 조를 심어 생활한다.
'서쪽은 적악산이 하늘에 치솟아서 인간세상과 격리되어 있고 난리를 피하거나 세상을 피해서 살기에 알맞다"
고 새삼 강조한다.
이곳의 역사를 알기 위해 무릉리 노인정을 찾았다.
↑무릉리 미을
열 명 정도의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가 필자가 들어서자 매우 반가워했다.
"젊은 사람이 우리 마을의 역사와 풍수를 배우려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오다니 기특하고 고맙네."
하며 올해 82살 되신 좌상어른이 필자의 손을 아프도록 꼭 잡는다.
82세의 나이에 비해 놀랄 만큼 정정한 이동석 옹은 13대째 이 곳에만 살아온 마을역사의 산증인 같은 존재였다.
필자가 가지고 간 5만 분의 1지도에 나와있는 깨알같은 글씨들을 돋보기도 쓰지 않은 채 막힘 없이 정확하게 읽었고 해박한 지식과 기억력은 젊은 필자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총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자식들은 모두 외지에 보내놓고 노인들만 오롯이 남아 200평이 넘는 대지 위에 지은 기와집은 허허로움이 있었다.
이동석 옹은 40년 넘게 일기를 쓰고 있다.
''1961년 10월 15일.
첫서리가 오다.
널어놓았던 벼를 거둬 낫가리를 쌓았다.
요즘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앞집 이덕균씨 5,000환 빌려가다. 지출, 막걸리 닷 되, 고등어 두 손'".
누렇게 빛바랜 40여권의 일기장을 펼쳐 보면서 한세월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치밀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숙연한 마음과 함께 절로 존경심이 간다.
이동석 옹과 함께 올해 80세 되신 원용성 옹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논리 정연함에 그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두분 뿐 아니라 그곳에 모여있는 다른 노인들도 거의 80살이 넘는 분들이었는데, 60세 환갑 되신 분들은 이곳에서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한다.
우선 80노인 앞에서 아들 뻘 밖에 안 되는 환갑노인들은 담배를 못 피 우게 되니 자연스럽게 노인정은 80노인들의 사랑방이 됐다는 것이다.
↑요선정
법흥사는 무릉리의 진산인 사자산 골짜기 안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과의 본산으로 이름을 떨치던 큰 절인데, 한 때 승려수가 2000명을 헤아렸으며 이 절을 알리렸으며 이 절을 알리기 위한 석탑이 충북 제천, 주천, 요선정까지 수 십리까지 세워져 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있게 한다.
↑징효대사보인탑비
↑법흥사 적멸보궁
그런저런 전설을 간직한 주변에서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풍치가 계곡의 퓽치가 일품인데다가 법흥사를 품고 있는 사자산 자락의 범상치 않은 은밀한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것을 느낄 수있다.
사자산에서 발한 서쪽으로 뻗었다가 다시 몸을 돌려 동쪽의 낮은 구릉을 만들었었는데, 그 골짜기를 볼때마다 "아아~정말 좋은 자리구나!!"
하고 부르짖개 만드는 신비한 에너지룰 갖추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무릉리의 원용성옹은 조선 중엽의 예언가 이자 "격암유록"의 저자이도한 "남사고"선생이 이 근방어디에 천하명당을 점지했었다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사자산의 은밀한 기운이 한 사람의
전설적 인물을 탄생케 한다.
오른편 삼거리에 백덕산 아래에는 "박득술" 골 이란 골짜기가 나온다.
지금부터 70년 전에 박씨 성을 가진 남자가 홀연히 나타나 이곳에 움막을 짓고 도를 닦았는데 차력술, 축지법 등 고난도의 술법을 자유 자재로 구사했다고 한다.
법흥리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어른들이 박술골로 장기를 두러가면 잠깐 기다리라 해놓고는 축지법을 이용하여 주천 시장에 가서 생선이나 고기를 사다가 찾아온 손님을 융숭히 대접했다고 한다.
또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상위에다 부적을 태운 뒤 시간이 지나면 풍성한 술상이 차려지곤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법흥리 주변 사람들은 그를 박 朴 하늘천 天자 아들 자子 (하늘이 내린 사람), 또는 도술을 얻은 사람이므로 박득술이라 불렀고 따라서 골짜기 이름도 "박득술"골이라 불렀다.
↑ 충북 구인사룰 창건한 박상월대조사
박득술은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오자 기거하던 움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1945년 충북 단양소백산 연화봉밑에서 도를 닦다가 "억조창생 구세중생"의 기치를 내걸고 천태조의 총본산인 ''구인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즉 이곳 무릉리와 법흥리 주민들의주장은 구인사를 창건한 박상월 대조사가 바로 박득수골에서 도술를 닦던 "박천자"라는 것이다.
어떻든 법흥리 주변 골짜기를둘러보면 충분히 그런 위인을 배출할 그신비한 기운을 느낄수 있다.(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