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산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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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은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의 유래가 되는 고도 121m 전형적인 노령기의 나지막한 구릉이다. 대구의 남북을 관류하는 신천(新川)이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으로 유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생긴 모양이 다듬잇돌을 닮았다고 해서 '침산(砧山)'이라고 하였다. 한편 침산의 봉우리가 다섯 개로 구성되어 있다하여 '오봉산(五峰山)'이라고도 한다. 1906년 대구읍성을 허물기 시작한 대구 군수 겸 경상관찰사 서리였던 친일파 박중양의 성을 따고, 별명을 더하여 '박작대기산'으로도 불렀다. 조선시대 대구 출신인 유학자인 서거정의 '대구십영(大丘十詠)' 중 제 10영인 '침산만조(砧山晩照,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는 침산을 대상으로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내가 어릴 적 50년대에는 산을 오르는 초입 당집부근에만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대부분이 민둥산이었다. 여름철 그 나무의 진을 빠는 풍뎅이, 나비, 심지어는 벌까지 있어 풍뎅이를 잡으려다 벌한테 쏘이기도 하였다. 일봉에는 중턱에 탄광시추공인가, 방공호인가 큰 구멍 둘이 있었고, 첫 봉우리 꼭대기에 일소봉(一笑峯)이란 비석이 서 있었다. 여기에서 저 멀리 바라보면 성내(城內), 그때는 시내 쪽을 예전 대구성을 지칭하여 그렇게 불렀다. 성내(城內)로 나가는 신작로가 보이고 벌마(벌 마을로 금호강의 사행천이 부근에 늪을 이룬 곳), 경마장 터, 막 공장들이 들어설 때라 높다란 굴뚝도 보였었다. 1봉 사면의 공동묘지에 봄철이면 붉은 클로버가 무리지어 피며 들리는 뻐꾸기 울음소리에 봄이 무르익어 갔다. 일봉을 지나 2봉 쪽으로 가면 이 부근은 표토가 얇아서 온통 풀밭이었고, 여름철엔 잽싸게 날라 가는 풀무치를 잡았고 색도 칙칙한 송장메뚜기를 보면 재수 없다며 침을 내 뱉었다. 3봉에는 이산의 주인인 박중양씨의 잘 만들어진 선조 봉분이 있었는데 나중 이장을 하였다고. 5봉의 끝자락은 경사가 급한 곳으로 이런 곳에 간신히 서있는 키 작은 나무에도 매미와 풍뎅이가 많았다. 내가 커다란 지네를 본 곳도 이곳. 여기에서 반대편으로 금호강도 보이고 백사벌(白沙伐), 우리는 뱃사부리라고 불렀지만. 무태, 금호강이 조망되었다.
이렇게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이면 60년대 중반 나의 선친과 같이 동네 뒤 침산을 올랐던 생각이 난다. 당시 선친은 침산의 파출소, 아마 수당 한 푼도 못 받는 공의이셨는데. 한낮에 순경이 급하게 찾아왔다. 부탁하기가 계면쩍은 표정을 짓고는“원장님 저랑 어디 좀 가셔야겠어요. 말인즉슨 침산에 있는 시신 한 구를 검안해 주셔야 합니다.” 마침 의과대학 여름 방학을 맞아 대구 본가에 내려와 있는 나에게 “석희야, 나랑 같이 가자”해서 아버지를 따라갔었다. 비록 가야할 곳은 산 중턱에 불과하였으나 부자가 순경을 앞세워 비지땀을 흘리며 도착한 곳에는 새카맣게 타서 신원을 구별할 수 없는 시신 한 구가 놓여있었다. 얼굴에도 튀어 나온 부위, 즉 코나 귀 같은 것은 모두 타버렸고, 배는 팽팽하게 불러 있었다. 아무리 사망이 확실하다 하여도 의사의 사망진단서, 여기에서는 사체검안서가 없으면 변사 처리도 되지 않는다. 신원은 다행히 사고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자 않는 자그마한 바위위에 돌로 눌러 놓여있는 주민등록증으로 쉽게 알 수가 있었고, 종이에 연필을 꾹꾹 눌러 쓴 유서 한 장의 내용은 힘든 세상을 살아 왔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의지할 가족도 없습니다. 시신을 거두게 하여 죄송합니다.’ 이걸 보고 순경이 한숨을 내쉬며 “이 친구는 죽기 전 좋은 일하나 하였네요.” 즉 신원이 불확실한 변시체는 그걸 일단 확인하는데 아주 힘이 든다. 이 경우처럼 손도 타버려 지문 채취도 어려울 때는 정말 처리가 곤란 하다. 48년생으로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 전혀 다른 인생행로를 겪으며 얼마나 고달픈 삶을 살았을까? 하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온다. 이 청년은 죽기 전 신나 통을 들고 산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순경은 선친을 따라와서는 사체 검안서를 받아 가며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였다.
십 여 년 전 대구에서 고혈압 학술대회가 열렸다. 첫 시간의 특별강연 좌장을 영어로 마치고 나니 기분이 홀가분하다. 잠시 틈을 내어 오래 동안 벼루고 벼렸던 어릴 적 놀던 침산을 찾아 갔다. 택시를 타고 침산으로 가자하니 기사가 “오봉 네거리 말입니까?” 이윽고 택시는 선친이 학교 교의로 계셨고 동생들 둘이 졸업한 침산초등학교를 지난다. 우리 형제들은 시기에 따라 형은 수창, 나는 달성, 막내는 형편이 풀려 자가용타고 등하교를 한 사립 개성초등 출신. 길 건너에 있던 이재민사택은 6.25직 후에 대충지은 간이주택으로 지금 그걸 보면 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동네의 유일한 공동수도가 있었던 곳으로 선친이 군에 복무를 하며 야간개업을 하실 때. 의료 기구를 끓여 소독을 하려면 반드시 이 물로 하여야 주사기에 물때가 끼지 않아 주전자를 들고 물을 받아 가곤하였었다. 그리고 길 건너의 어머니 쪽 친척으로 큰 직물공장인 청흥공장의 화재는 어린 가슴을 얼마나 놀라게 하였던가. 이런 것들은 평소에는 절대로 생각나지 않고 이 동네에 와서만 생각이 든다. 바위를 캔 자리에 만들어진 인공폭포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무료하게 노인들만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다. 거기를 올랐더니 산 이름은 오봉산 공원으로 바뀌었고, 안내표지를 보니 여기도 유행 따라 무슨 둘레길이다. 오르다 부근에 당집이 있을 자리에는 소각장 시설물이 들어서 있고. 꼭대기의 비석은 없어지고, 그 아래쪽에 침산의 유래가 적혀있는 작은 돌이 서있네. 마지막 봉우리에 근사한 정자가 한 채 지어져 있어 한번 올라가 본다. 정자를 내려와 옛날을 회상하며 혼자서 조용한 뒷길을 걷는다. 부친이 주치의이었던 박중양씨 댁은 한옥 고가로 넓은 배껏 마당이 있었던 그 좋던 커다란 기와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골프연습장으로 바뀌었다.
첫댓글 나도 개업 초기 몇년은 사체검안도 여러번 해 보았고, 부검도 두 건 했었습니다. 돈은 없습디다.
목을 맨 경우, 기차에 깔린 경우, 연탄깨스 자살, 원인 미상, 두개강내혈종, 디엔씨 사고 등등...
디엔씨 사고는 의료사고이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지요. 80년대 초부터 의혐 기존공제 심사위원으로 30년 이상을 심사하였는데.초기에는 디엔씨 사고가 많았고 환자 측에 시달리던 인천의 여의사는 자살로 끝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