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대탈출(大脫出)
"제 구도(九圖)의 자세를 기억하느냐?"
절정사태의 안색은 엄숙하기 그지 없었다.
"너는 지금부터 단전에 형성된 진기를 구주천 한 후, 도인의 방법에 따라 장심에 모아 빈니에게 전해야 한다."
연공실.
절정사태와 진일문이 대좌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은은히 구토가 이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여승이 보여주고 있는 무공에 대한 무서운 집착이 그로 하여금 못내 역겨움을 유발시킨 것이었다.
연공실을 휘감고 있는 괴괴한 분위기도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주인을 닮은 듯 계속하여 진일문의 숨통을 조여왔다.
마치 어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듯.
"준비되었느냐?"
진일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절정사태는 더욱 차가운 음성으로 내뱉았다.
"다른 마음을 먹어 보았자 소용 없을 것이다. 생명이라도 부지하려면 너는 내 말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 수가 더 남아 있소?"
"나는 직접적으로 네 영혈(靈血)을 취할 것이다."
진일문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들었다.
"내 피를 마시겠다는 것이오?"
"그렇다. 현재 네 피는 보혈(寶血)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섭취하면 금정홍의 영효를 고스란히 얻을 수가 있지. 빈니가 그렇게 쉬운 방도를 두고도 이처럼 어려운 쪽을 택한 것에 대해 너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진일문은 일순가슴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애써 억누르며 간단히 대꾸했다.
"정녕 눈물겨운 자비심이시오."
그는 혐오감을담고 노려보는 절정사태의 시선을 느끼며 서서히 진기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진일문의 공력은 그간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 활용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임의로 사용할 수 없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는 공력을 일주천시켰을 때 벌써 단전에 기단(氣丹)이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이어 구주천에 이르자 그의 전신에서는 날아갈듯 상쾌함과 더불어 무한한 힘이 넘쳐흘렀다.
절정사태는 유심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대해 오던 순간이 목전에 도래하자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제일 고수로 도약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인 것이다.
이윽고 절정사태의 눈에 비친 것은 진일문의 코로부터 백색의 운무가 흘러나오는 장면이었다.
그의 이마에서도 수증기와 같은 하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절정사태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오! 설마하니 이 아이의 내공이 그 동안 화경(化境)에 접어들어 있었을 줄이야.......'
충격을 받은 듯 그녀의 눈썹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그녀 자신도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수십 년간 노력해 왔지만 그녀의 내공성취는 칠성에 불과했다.
그런데 진일문이 보여주는 경지로 말하자면 구성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절정사태가 가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히는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희열과 탐욕에 비하면 이는 또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절정사태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아! 이 아이의 내공만 흡수한다면.......'
그녀의 뇌리에는 곧 무림에서 대종사(大宗師)로 부상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과 비취암이라는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는 광경 등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그녀의 미간에악독한 기운이 떠오른 것은 그 찰나였다.
'무릇 인간사에서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이 놈의 진기를 모조리 빨아 들인다면 나는 불사지체에까지도 능히 이를 수 있으리라. 안되었지만 이 놈을 살려두려던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해야겠다.'
진일문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서서히 담홍색의 기운이 서렸다.
만만신공의 정화인 기단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었다.
이어 그것은 다시 하나의 고형체로 응축되더니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이탈되어 나왔다.
그것을 본 순간, 절정사태는 재빨리 구결을 암송하며 양손을 마주 뻗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진일문의 손바닥에서부터 나오는 기단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도 가혹한 운명의 유전이었다.
이로써 진일문은 이제 진기를 전부 이양하는 것은 물론 원양지기까지 상실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될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우우웅-- 웅--!
기이한 음향이연공실 안을 울렸다.
진일문의 최후를 부르는 소리, 즉 그가 기단을 통해 절정사태와 공력을 융화시킴으로써 발해지는 소리였다.
기단은 어느 덧 두 손으로 감싸야 할 정도의 크기로 변해 있었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붉은 광채는 흡사 노을인양 연공실의 모든 경물들을 은은한 홍색으로 물들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일문은 계속하여 전 내공을 쏟아내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현재 상태에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외부의 방해를 받는다면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절정사태까지도 주화입마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그 덕분에 기단은 곧 진일문의 장심에서 한 자 가량이나 사출되어 나왔다.
이는 일반의 고수들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혹여 취하려 욕심을 부렸다간 중상을 입거나 즉사를 면치 못한다.
기본적으로 양자가 만만신공을 익히고 있어야만 상호 융합이 자유로와 도인할 수가 있었다.
그로 미루어 만만신공이 불문의 무학을 사칭하면서도 얼마나 악랄하고 편격한 무공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이를 악용하는 자가 있다면 더욱 그러할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실제적인 예도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천축의 한 지파에서 만만신공의 이런 면을 이용하여 개세의 고수가 출현한 적이 있었다.
그는 무려 일곱 명의 기단을 흡수하여 고금제일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징계인지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수많은 고수들의 협공을 당해 형체도 없이 죽어갔다.
천축의 고수들이 연합하여 그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만만신공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불문의 도와 어긋난다 하여 하나의 금기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인지 중원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절정사태가 연성한 것이다.
이후로 괴팍한그녀가 제자들을 열심히 키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지난 역사를 재현해 자신의 공력을 높여보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달성되지 못했다.
그녀의 기대만큼 월등한 자질을 갖춘 제자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음양천도신과였다.
약력을 빌어서라도 대공을 완성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또한 무위로 돌아갔으나 지금의 그녀는 오히려 그보다 더한 효과를 거둘 수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일문의 존재가 그녀의 모든 염원을 한꺼번에 이루어줄 것이므로.
담홍색의 기운이 짙어질수록 절정사태의 눈에서는 희열의 빛이 강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드디어 만만신공의 구결 가운데 흡자결(吸字訣)을 운용해 서서히 기단을 흡수해갔다.
한 순간, 절정사태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이 무슨!'
장심을 통해 들어오던 만만신공의 기가 갑자기 역으로 무섭게 빨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내공까지도 그 여파로 인해 맹렬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절정사태는 황급히 공력을 끌어올려 그 막강한 힘에 대항했다.
그녀는 살기 띈 눈으로 진일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스르르 눈빛을 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산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진일문은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엄숙하게 눈을 내리감고 있었으며 그의 정수리에서는 여전히 김이 무럭무럭 토해지고 있었다.
'우직한 놈!'
절정사태는 그가 전력을 다해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내심 실소했다.
더욱이 담홍색의 광채는 종전보다 더욱 찬란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절정사태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 기현상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진일문에게 흡자결에 대해 한 마디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아니, 근본적으로 진일문은 스스로 공력을 운용할 능력조차 없는 처지였다.
"흐음......."
절정사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해냈다.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는 사이에 그녀의 안색은 벌써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진기가 와중에서도 주인의 의지를 무시한 채 마구 빨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둑이 터지면 물을 전혀 다스릴 수 없듯 진기의 흐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단 노도처럼 쏟아져 나간 진기는 어떻게도 다시 거두어들일 재간이 없었다.
절정사태는 당금 무림에서 최절정급에 속하는 고수다.
심력을 정비하자 흐트러진 진기는 곧 다시 수습되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할 이상의 손상을 입은 것은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돌발적인 사태는 실상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진일문은 앞서도 말했 듯 진기를 운용할 줄 몰랐다.
다만 전력을 다해 신공을 끌어올리다 보니 공력이 무섭게 증폭되었고, 그 결과로 공력을 빼앗기기는커녕 반대로 상대의 진기를 흡수하게 된 것이다.
만만신공이 지닌 잔인한 원리, 즉 강한 쪽이 약한 쪽의 공력을 남김없이 흡취하게 되는 방식은 이 순간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었 다.
말하자면 절정사태는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녀의 과오는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진일문의 탁월한 자질이나 금정홍의 신효까지도 감히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었다.
더구나 흡자결또한 자신만이 알고 있는지라 진일문의 공력을 빼앗아 오는데 있어 이런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절정사태의 눈에서 새파란 섬광이 일었다.
'죽이리라!'
상황이 뜻대로되어지지 않자 최후로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그녀의 미간에는 어느 덧 음독한 살기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러나 절정사태는 작정과는 달리 막바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진기의 흐름도 간신히 막고 있는 처지이고 보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할 판국이었다.
이래저래 더욱처참해진 것은 진일문의 입장이었다.
공력을 내주던지, 혹은 그녀의 손에 당하던지 그로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차피 그의 목숨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으음!"
절정사태는 일순 이를 악물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다시금 욕망이 고개를 치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라면 한 번 더 공력 흡수를 시도해 보자. 그러다 안되면.......'
그녀는 실패를각오하되 위기의 순간이 도래하면 양패구사도 불사할 심산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서서히 진기를 주행시키며 예의 흡자결을 운용해갔다.
이 때였다.
문 밖으로부터한 줄기 중후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사태! 어찌 하여 왕중헌의 제자를 거두어 들인 것이오? 삼천공(三天公)의 추궁을 감당할 자신이 있소?"
비록 낮았으나진기가 실린 그 음성으로 인해 연공실의 석벽이 진동을 일으켰다.
"우욱!"
절정사태의 입에서 왈칵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결정적인 순간에 심기가 흔들리는 충격을 받자 기혈이 역류해버린 것이다.
'이 음성은!'
그녀는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중요한 시기에 외부의 침입을 받은 것은 그렇다 치고,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뜻밖에도황룡보의 보주인 사운악이었다.
'저 자가 어찌 이 곳에.......'
절정사태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어 천지가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런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맥없이 뒤로 벌렁 쓰러졌다.
이른바 주화입마하고 만 것이다.
펑--!
굉음이 울리며연공실의 석문이 부서져 내렸다.
그 뒤를 이어 하나의 인영이 나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그는 절정사태의 짐작대로 황룡보주 사운악이었다.
사운악은 연공실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사태!"
사운악은 급히쓰러져 있는 절정사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어떤 사태에 직면해 있는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여차직하면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되고 말 상황인 것이다.
이쯤 되자 다른 것은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눈부신 속도로 절정사태의 혈도를 찍어갔다.
그는 남녀유별은 물론이거니와 상대가 비구니라는 것도 잊어버린듯 했다.
사운악은 계속하여 그녀의 중극(中極), 석문(石門), 기해(氣海), 수분(水分) 등의 혈도를 연달아 찍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발출되는 강렬한 공력이 흩어진 그녀의 진기를 속속 모아 주었다.
한편.
진일문은 심혼이 뒤흔들리는 충격 가운데 무상무념에서 깨어났다.
기혈이 엉켜 욕지기가 나오는 것은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연공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자 이내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백누님이다!'
그는 사운악의출현을 두고 이렇게 생각했다.
우연만 가지고는 결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이 곳은 더구나 절정사태의 개인 연공실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사운악이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하나의 서신을 받고서였다.
거기에는 수개월 전에 실종되었던 진일문의 거취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그 문제로 말미암아 줄곧 전전긍긍해 오던 사운악이었다.
책임추궁이 돌아오면 어떻게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사운악은 반가운 일면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진일문이 비취암에 머물고 있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가 절정사태로부터 무공을 전수받고 있다는 사실에는 정녕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운악은 그 길로 당장에 말을 몰아 이 곳으로 왔다.
그 서신을 보낸 사람인즉 절정사태의 제자인 백하련이었다.
그러므로 그 진위는 가릴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웬만한 일 같았으면 그도 나름의 품위나 평소의 교분을 의식하여 개인 연공실까지 찾아드는 실례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사태는의외의 국면으로 발전되었다.
사운악의 출현은 절정사태의 주화입마를 불렀고, 이는 곧 진일문에게 있어 다시없는 사활(死活)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
진일문은 내심처절하게 부르짖으며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머뭇거리다가는 또 다시 그 저주스러운 영어의 생활로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운악으로 말하자면 무림에서 손가락 꼽히는 명숙이다.
아무리 경황 중이라고는 하나 진일문의 도주를 허용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벼락 같이 한 손을 뻗어내며 호통 쳤다.
"어림없다! 네 감히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위잉--!
그의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 번쩍 하고 날아갔다.
그것은 한 자루의 소검(小劍)이었다.
황룡사가의 검법은 천하의 으뜸이다.
뿐만 아니라 암기술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이루고 있는 터였다.
사운악의 소매를 떠난 검은 빛살보다도 빠르게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진일문이 이를 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니, 그는 자신의 등으로 검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안돼--!"
한 가닥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자색 인영이 날아든 것은 그 때였다.
그 인영은 자신의 몸으로 검을 막아냈다.
"아악!"
뾰족한 비명이그 뒤를 이었다.
털썩!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인영은 바로 백하련이었다.
검은 그녀의 등에 깊숙이 꽂혀 그 끝이 가슴까지 비어져 나와 있었다.
"누님--!"
진일문은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 것도 의식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달아나지않으면 영원히 탈출할 수 없다는 것도, 그녀의 희생조차 헛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도 모두 잊고 말았다.
"누님!"
그는 몸을 돌리더니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땅에 쓰러져 있는 백하련을 끌어안았다.
다행히도 백하련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눈을 치뜨며 그를 다그쳤다.
"어서!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진일문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어찌 해서 이런 방법을......?"
"이 방법 이외에는 없었으니까. 사보주님을 끌어들인 것은 내가 생각해도 명안이었어. 그리고 나는... 기뻐. 이렇게 동생을 위해 죽을 수 있어서. 그러니 어서......."
백하련이 이번에는 제 풀에 말을 끊었다. 혼절한 것이다.
"누님......."
진일문은 울컥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진기를 미처 다스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심적 충격까지 겹치게 되자 또 다시 기혈이 거꾸로 치솟았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그녀를 안고 치달렸다.
쇄애액--!
그의 등뒤로부터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울리며 뼈를 에일 듯한 예기가 쏘아져왔다.
또 한 자루의 검이 날아온 것이다.
진일문은 그것을 무시한 채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기혈이 역류한 바람에 진기가 계속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은오히려 그의 목숨을 부지시켜 주는 행운으로 화했다.
왜냐하면 진일문의 도약을 염두에 두고 날렸던 사운악의 검은 반대로 그가 추락해버리자 단지 어깨를 살짝 스치는 데서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섬뜩한 전율이전류처럼 온 몸을 핥고 지나간 직후, 진일문은 가슴이 온통 피로 물든 백하련을 바라보며 다시금 신형을 띄웠다.
그의 눈에서는 어느 덧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누님은 이대로 죽을 수 없소! 절대로......."
진일문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인생에 대한 회의와 인간에 대한 환멸, 그리고 백하련에 대한 연민 등이 마구 뒤엉켜 그는 금시라도 폭발해버릴 듯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뗑! 뗑뗑--!
급촉한 종소리가 그의 고막을 찢어 놓을 듯 울려왔다.
그것은 비취암에 변고가 일어났을 때, 이를 알리는 경종 소리였다.
과연 얼마쯤 가니 불호소리와 함께 한 여승이 나타나 진일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미타불... 멈춰라!"
그녀는 절정사태의 일곱번째 제자로써 정진(靜進)이라는 법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합장을 하듯 쌍장을 앞으로 뻗어냈다.
그러나 진일문은 그녀를 아예 보지도 못한 듯 달리던 여세를 몰아 그대로 부딪쳐갔다.
"감히!"
정진은 싸늘하게 외치며 쌍장을 날렸다.
펑--!
"악!"
굉음과 함께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놀랍게도 입과 코로 피를 뿜으며 저만치 날아가 떨어진 것은 정진이었다.
즉사한 것인지 그녀의 몸은 이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실로 극적인 반전이었다.
진일문은 여전히 무공에는 백지였다.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기혈이 뒤틀려있다 보니 응결되어 있던 기단도 그의 혈도를 따라 제멋대로 휘돌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어깨의견정혈(肩井穴)에 기단이 이르렀을 때 마침 정진의 장력이 그 곳을 가격하게 되었고, 그녀는 만만신공의 웅후한 반탄지기를 감당하지 못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진일문은 정진여승이 왜 잠잠해 졌는지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연구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그는 마침내 담장가에 이르렀다.
담장의 높이는언뜻 보기에도 이장이 넘을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뛰어 넘으려는 엄두조차 못냈을 터이지만 그는 흡사 마력에라도 이끌린 듯 그대로 몸을 날렸다.
휘익--!
진일문의 신형은 곧장 허공으로 높이 떠올랐다.
제 풀에 놀라버린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해 그만 기우뚱하고 말았다.
그 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절정사태의 다섯번째 제자인 정흠여승이 비조처럼 날아오르며 그를 향해 일장을 내쳤다.
그녀의 손에서 바위도 으깰 만한 벽공장력(劈空掌力)이 날아갔다.
펑--!
마치 가죽북이터지는 듯한 음향이 울렸다.
장력은 정통으로 진일문의 등에 적중했다.
그 반동으로 인해 그의 신형은 더욱 높이 날아올라 담장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상황은 진일문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내장이 으스러져 버리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허공 중에서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쿵!
땅에 처박히는충격이라 해서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또 한 차례 격렬한 고통이 그를 엄습해왔다.
덕분에 죽을 힘을 다해 안고 있던 백하련이 몸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안돼--!'
진일문은 자신의 정신에 스스로 호소했다.
몽롱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우욱!"
진일문은 선혈을 왈칵 토해냈다.
내장이 극도의 상처를 입은 채 제 자리를 이탈하여 빚어진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응혈을 토해냄으로써 오히려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도 한결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진일문은 몸의상태가 호전되자 즉시 백하련에게로 달려갔다.
그녀의 안색에서는 이미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그녀를 안아들었다.
'누님을 살려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는 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가 떨어져내린 곳은 바로 도화림, 즉 진세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난감해진 그의귀로 어디선가 주인을 찾는 듯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소리였다.
'추려다!'
진일문은 내심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길게 휘파람 소리를 불어냈다.
삐익--!
그러자 도화림안으로부터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왔다.
역시 그의 생각대로 그 말은 비쩍 말랐으나 대완산(大宛産) 한혈마인 추려였다.
"추려, 나를 데려가 다오."
추려는 이전부터 진일문의 말을 알아 들었던 유일한 친구였다.
과연 추려는 그를 등에 올려 태우더니 길게 울부짖으며 흡사 천마(天馬)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히히힝! 두두두두--!
도화림의 진세따위도 명마 특유의 비상한 감각을 가진 추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진일문은 추려의 등에 납짝 엎드려야 했다.
그의 곁으로 사물이 휙휙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추려의 속도는 그만큼 빨랐다.
실제로 추려는한 번 발굽을 놓을 때마다 무려 수장여를 도약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산과 언덕, 그리고 내가 순식간에 그들 곁에서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었다.
북쪽 지방에는추위가 유난히 빨리 온다.
시월의 다 지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나무는 잎을 잃은 지 오래였고, 산하는 어느 새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백간산(白干山).
이는 섬서성(陝西省)과 요하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었다.
만리장성을 넘으면 곧바로 악이다사고원(鄂爾多斯高原)에 이르게 되며 그 곳에 방대하게 펼쳐져 있는 대사막은 서북풍이 불 때마다 자욱한 모래바람을 실어 하늘을 온통 뒤덮곤 했다.
백간산 기슭의이름 없는 산동(山洞).
이 곳에는 며칠 전부터 일남일녀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해 그 안에서 거의 칩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청년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가끔 동굴을 나오는 적은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나마 동굴에서 한 발자국도 내놓지 않았다.
휘이이-- 잉--!
스산한 한기를동반한 추풍이 나뭇잎을 우수수 떨구어냈다.
그 바람에 동굴 입구에는 금세 나뭇잎이 수북히 쌓였다.
검은 옷을 입은 예의 청년이 동굴에서 나오더니 나뭇잎을 긁어모았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동굴로부터 연기가 흘러 나왔다.
"이것이... 절정삼식(絶情三式)의 마지막 초식이에요......."
꺼져들 듯한 여인의 음성도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동굴 안.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넓고 아늑했다.
그 곳에서 한 쌍의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모닥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사슴의 허벅다리가 한창 불에 구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어찌 보면 매우 운치 있고 정겨워 보이는 풍경이다.
하지만 웬지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비감한 기운이었다.
여인은 몸을 가눌 수 없는지 줄곧 벽에 기대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자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또한 여인은 몹시도 추악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정도가 지나쳐 세상에 이런 얼굴도 있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남자의 모습은여인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헌칠한 키에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한 마디로 그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어쨌든 여인은손을 들어 허공에 원을 그려 보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그저 평이한 동작에 불과 했다.
청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이들 두 남녀는 바로 진일문과 백하련이었다.
추려로 인해 비취암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 그들은 역시 추려의 도움으로 황룡보의 세력권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여기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백하련.
그녀는 그 당시 사운악의 비검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다행히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검이 요혈을 약간 빗나갔기 때문에 뽑아 내고 어느 정도 조치를 취하자 살아났다.
그렇다고 해서쾌차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환부는 나날이 썩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은 진일문이 까맣게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백하련이 그에게 일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생명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내내 함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간산산동에서의 생활은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서로를 아끼고 존중해 주기에 그러했다.
이제껏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수모를 겪었던 그들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상대의 배려에 똑같이 감사할 줄도 알았다.
백하련은 진일문보다 나이가 두 살 더 많았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면이 그에 비해 당연히 넓고 깊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연구를 해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애고아이자 그나마도 쫓기는 처지다.
이 점으로 미루어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통해 진일문에게 일신에 지닌 무공들을 차례로 전수하고 있었다.
'내가 죽고 난 후에는 동생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히려 온 천하가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
가는 곳마다 위험이 따를 터인즉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무공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백하련의 생각이었다.
다행이라면 진일문의 내공이 벌써부터 화경에 접어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공을 시전할 수만 있다면 동대(同代)에서는 가히 최고봉에 이를 수가 있었다.
"문제(文弟)......."
진일문은 사슴고기를 손칼로 썰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흠칫 했다.
백하련의 눈에 이슬이 맺혀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누님!"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언뜻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백하련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의외로 잔잔한 미소였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몽롱한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 같이 추한 계집에게 이렇듯 다정하게 대해준 사람은 동생이 뿐이에요.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누님......?"
진일문은 그녀의 미소에 가리워진 무언가를 느끼고는 안색이 일변했다.
불길한 예감은 더욱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백하련의 건강이 좋아졌다고는 믿지 않았 다.
그녀가 자연치유를 주장하는 것에 되려 가슴이 쓰렸다.
의원을 부를 처지도 못되니 더욱 그러했다.
"혹시 상처가......."
불안한 그의 음성에 백하련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는 영원히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진일문은 급기야 떨리는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왜... 그런 말을......."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주겠어요?"
백하련의 음성이 속삭이듯 낮아졌다.
그 음성에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수줍음이 배어 있기도 했다.
늘상 손윗 누이와 같이 의연한 자세를 보여왔던 그녀가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달라진 것이다.
진일문은 비로소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동생에서 당신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를... 하련이라고 불러 주면......."
진일문은 그만멈칫 굳어지고 말았다.
그도 이 점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감정의 출발이 그렇다 보니 애정으로 전환되는 일이란 그리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하련의 얼굴에는 이내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역시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렸나 봐요."
그 말을 듣자 진일문은 문득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전신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뇌리에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전날에 사영화를 연모하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었던, 치열하다 못해 절박했던 당시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진일문의 입술이 일순 마음과 동시에 백하련을 향해 열렸다.
"하련......."
그 순간, 백하련은 마치 벼락을 맞은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는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나요?"
그녀의 흉한 입술은 말을 한다기보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듣고 싶다면 더 부르겠소. 하련."
진일문은 그 길로 다가가 그녀의 가냘픈 지체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화살 맞은 참새 마냥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당신은 내게 있어 연인, 아니 그 이상의 존재요."
이것은 스스로도 뒤늦게야 깨닫게 된 진심이었다.
아울러 내면을 토로한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제 그의 뇌리에는 더 이상 불필요한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두 개의 영혼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감명만이 뜨겁게 차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백하련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전신을 축 늘어 뜨렸다.
진일문이 깜짝 놀라 외쳤다.
"하련! 왜 그러오?"
얼떨결에 흔들어 보았으나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후였다.
"하련......?"
진일문은 재빨리 백하련의 몸을 눕히고는 옷을 벗겼다.
사실 그 동안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상처를 돌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도시 수락을 하지 않아 안타까움만 더해 왔다.
"이... 이럴 수가! 이렇게 되도록 왜......?"
백하련의 상세를 확인한 진일문은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피와 고름으로 엉긴 내의를 일부 뜯어내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환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당신은... 바보요."
진일문은 떨리는 손길로 연이어 그녀의 내의를 제거해 나갔다.
곧 그녀의 소중한 부위인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 곳도 역시 피와 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실로 기막힐 정도의 화농 상태였다.
아마도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싸고 있어 더욱 악화된 모양이었다.
"아!"
진일문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넋나간듯 굳어지는 것만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러기를 한참여.
정신을 수습한진일문은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물에 적신 후, 백하련의 상처에 엉겨 붙은 피고름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의절망은 그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갔다.
썩을 대로 썩어버린 상처는 회생의 가망이 전혀 없었다.
백하련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그 날, 밤이 깊어서였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옷이 벗겨져 있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그녀는 몸을 움직여 보려 시도하다가 그것도 체념한 듯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보았군요?"
그녀의 음성은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다. 그에 반해 진일문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말을 하지 않았소?"
백하련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포기해야 되었었기 때문이에요. 사보주의 비검술은 무림에서도 독보적이니까요."
그녀는 그윽한시선으로 진일문을 올려다보았다.
"전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당신이 걱정될 뿐......."
진일문은 그만참담한 심경이 되고 말았다.
'이 지경이 되고도 나를 걱정하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백하련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몹시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문랑(文郞) 혼자서 살아가야 해요."
진일문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입을 열자니 울부짖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를 살려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사양치 않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러한 각오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백하련의 몸은신열로 인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는 그녀 자신도 충분히 느끼고 있는 바였다.
그녀는 오늘 밤 안으로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조용한음성이 진일문의 귓전에 밀려왔다.
"무엇도 포기해선... 안돼요. 문랑은 제 몫까지 살아야 하니까요. 꼭... 부친을찾으세요. 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꿋꿋하게 버텨나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계속 되었다.
진일문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져 있는 그녀의 몸을 안은 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
"향후로도 난관은 수없이 닥칠 거예요. 그 때마다 제 말을 생각하고 이겨내셔야 돼요. 그래야만 저도 지하에서나마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부족하나마 제가 일러드린 무공을 계속 연습하세요. 그것은 비취암의 무공으로 강호에서도 꽤 유수한 절기이니 쓸모가 많을 거예요. 하지만 웬만하면 특별한 경우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게 나을 거예요. 그 무공을 알아보는 자가 나타나면 문랑이 다시 위험해지니까요......."
진일문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백하련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만일 제가 예전의 얼굴과 건강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문랑과...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진일문의 눈에눈물이 고여 올라왔다.
그도 역시 손을 내밀어 백하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 같이 많았으나 막상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한 마디를 쏟아놓았을 뿐이었다.
"하련, 당신은 영원한 내 연인이오."
백하련의 얼굴에 일순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눈에서는 기쁨의 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아름답고 착한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전... 이렇게 당신의 품에 안겨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요."
"하련......."
진일문은 그녀의 몸이 다소 식어 가는 것을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제게 입맞춤을......."
진일문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여 온기가 사라져 가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백하련은 손을들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손에서는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어느 순간에 이르자 그녀의 손은 아래로 툭 떨어졌다.
"하련--!"
비통에 찬 부르짖음이 산동 안을 가득 메웠다.
첫댓글 즐감요
눈에 물이 맺히기는 살다 처음이요.
하나의 인연이 끔나면 다음 인연이 또..
인생사 그러하거늘..모두가 인정하기 싫은....
늘 감사합니다.
ㅈㄷㄱ~~~~~~~~~~~~``````````````````````
감사합니다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두사람 참 안타깝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