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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치국(以正治國)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바름과 정의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당위를 담고 있다.
以 : 써 이(人/3)
正 : 바를 정(止/1)
治 : 다스릴 치(氵/5)
國 : 나라 국(囗/8)
출전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57장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57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 다음 구절이 이기용병 이무사취천하(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다. 기묘한 전략으로 군사를 움직여야 하고 일삼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취한다는 의미다.
이 장에는 이밖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많다. 천하에 하지 말라는 규제가 많을수록 백성의 삶은 피폐해지고, 법령이 많아질수록 도적이 늘어날 것이란 말도 있다.
'일삼지 않는다'는 의미는 이 장의 후미에 '일삼지 않으니 백성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욕심을 버리니 백성들이 저절로 순박해진다'는 구절을 볼 때, 백성의 삶에 권력이 일일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규제와 법령이 많을수록 백성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고달파진다고 한 것은 현대 국가에 적용해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노자는 정치에 작위(作爲)가 가능한 개입하지 않아서 물 흐르듯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덕경 8장에서 말한 상선약수(上善若水)와 비슷하다. 한마디로 무사(無事)요 무위(無爲)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요즘 돌아가는 정국을 보면 이정치국의 반면교사를 늘어놓은 연극무대 같다. 권력자들이 겉으로는 바름(正)을 말하지만 속으론 자기 이익과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돼 있다.
검찰개혁을 위한 것이라는 공수처법은 권력형 범죄 수사를 가로막는 방패로 쓰일 요량이다.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각종 '공정경제법'은 결국은 규제와 법을 많이 만들어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도둑만 더 늘릴 것이란 우려를 낳고 있다.
노자가 가장 이상적 정치로 생각한 것은 바른 정치 이전에 정치가 백성의 삶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무위치국(無爲治國) 쯤 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 지경엔 이르지 못할 바이니 차선책으로 바름과 정의로써 다스리라는 이정치국(以正治國)을 설파한 것이다.
◼ 이정치국(以正治國)
57장은 두 가지 방식의 통치, 즉 어떠한 과업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인수하는 무위(無爲)의 통치와 사회를 불안케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유위(有爲)의 통치를 대조시키고 있다.
훌륭한 통치는 소박함에 근거한다. 그것은 단순한 방식의 지배로써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하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49장과 55장에서 말하듯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無知)한 상태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어린이나 갓난아기와 같이 되게 한다. 백성들을 우쭐거리게 하지 않고 가혹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군주의 의무란 백성들로 하여금 자연 상태 속에서 어떠한 이기적 욕망도, 물론 식욕(食欲)과 같이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는 제외하고,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군주 자신이 무욕(無欲)의 상태에 있을 때에만, 군주는 오로지 백성들이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다.
군주가 만약 욕망을 내보이게 되면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한 욕망들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군주가 어떤 종류의 지배나 규칙을 도입하게 되면 군주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조화와 소박함을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군주가 사회를 더욱 복잡하게 하면 할수록 질서를 유지하기란 더욱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규칙이 많다고 해서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많이 다투게 할 뿐이다. 줄일수록 늘어난다는 것이야말로 도가적(道家的) 통치술의 핵심이다.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하니, 일삼음이 없음으로 천하를 취하는 것이다.
(注)
以道治國則國平 以正治國則奇正(兵)起也 以無事則能取天下也.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평안해지고,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기병(奇兵)이 일어나니, 일삼음이 없음으로 하면 천하를 취할 수 있다.
上章云; 其取天下者, 常以無事, 及其有事, 又不足以取天下也.
상장(上章; 48장)에 이르기를, 천하를 취하는 것은 늘 일삼음이 없음으로 하니, 일삼음이 있게 되면 또한 천하를 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故以正治國, 則不足以, 取天下而, 以奇用兵也.
그러므로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천하를 취하기에 부족하여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한다고 한 것이다.
夫以道治國, 崇本以息末; 以正治國, 立辟以攻末; 本不立而末淺, 民無所及.
대저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근본을 받들어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이요,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법을 세워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니, 근본이 서지 않으면 말단이 천박해지고 백성들이 미칠 곳이 없다.
故必至於, 以奇用兵也.
그래서 반드시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하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天下多忌諱而民彌貧, 民多利器, 國家滋昏.
내가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 때문이다. 천하에 꺼리고 피해야 할 것이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국가는 더욱 혼란해진다.
(注)
利器, 凡所以利己之器也, 民强則國家弱.
이기(利器)는 무릇 자신을 이롭게 하는 기물이니 백성이 강하면 국가는 약해진다.
人多伎巧(智慧), 奇物(邪事)滋起.
사람에게 지혜가 많아지면 사악한 일이 더욱 일어난다.
(注)
民多智慧則巧僞生, 巧僞生則邪事起.
백성에게 지혜가 많아지면 교묘함과 거짓이 생기니, 교묘함과 거짓이 생기면 사악한 일이 일어난다.
法令滋彰 盜賊多有
법령이 많아지면 도적이 늘어난다.
(注)
立正欲以息邪而奇兵用, 多忌諱欲以恥(止)貧者也而民彌貧, (多)利器欲以强國者也而國愈昏多(弱). 皆舍本以治末, 故以致此也.
바름을 세워 사악함을 없애려 하나 기병(奇兵)이 사용되고, 꺼리고 피해야 할 것을 많게 해서 가난을 그치게 하려 하나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이로운 기물을 많게 해서 나라를 강하게 하려 하나 나라는 더욱 혼란스럽고 약해진다. 이 모두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故, 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欲無欲而民自樸.
그러므로 성인은, 내가 무위(無爲)하면 백성이 저절로 교화(敎化)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삼음이 없으면 백성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무욕(無欲)을 바라면 백성이 저절로 소박해진다고 했다.
(注)
上之所欲, 民從之速也. 我之所欲, 唯無欲而民亦無欲而自樸也. 此四者, 崇本以息末也.
윗사람이 원하는 것을 백성은 재빨리 따른다. 내가 바라는 게 오로지 무욕이면 백성 또한 욕심을 없애고 저절로 소박해진다. 이 네 가지는 근본을 숭상하여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 노자 도덕경 제57장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바름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바르지 못함으로서 병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오히려 바른 것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바르지 못한 것으로서 병력을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취한다. 내가 어떻게 그러함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이것 때문이다.
天下多忌諱而民彌貧.
통치자가 바름으로서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면서, 그 자의 판단에 따라 바르지 못함을 규제해서 세상에 꺼리고 기피하는 것이 많아지면 백성은 활동의 영역이 줄어들어 빈곤이 계속된다.
民多利器國家滋昏.
통치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든다면서 앞장서 좋은 기능의 물건들을 만들어서 세상에 편리하고 이로운 그릇이 많아지면 백성들은 서로 가지려고 다투게 되어 국가는 더욱 어두워진다.
人多伎巧奇物滋起.
국가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든다면서 좋은 기능의 물건을 만드는 기교를 지닌 자를 우대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에게 기교가 많으면 기괴한 물건들이 더욱 생기게 된다.
法令滋彰盜賊多有.
국가가 세상을 바르게 한답시고 규제를 많이 하여 법령이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뚜렷해지면 오히려 그 법령을 앞지르는 도적이 많이 있게 된다.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나는 억지로 하는 바가 없이 자연스럽게 두는데도 백성들은 스스로 변화한다. 나는 바르게 살라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고요함을 좋아하는데도 백성들은 스스로 바르게 된다. 나는 바른 정치를 한다고 규제하거나, 잘사는 나라를 만든다면서 일을 벌이지 않는데도 백성들은 스스로 부자가 된다. 나는 도덕교육을 강화하고자 함이 없는데도 백성들은 스스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산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표로 하는 보통의 통치자들이 나라 안에서는 질서를 잡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바른 행위를 강요한다(以正治國). 이때의 바른 행위는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여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하는 정당한 수단으로 출세 성공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나라 밖으로는 침략 등 바르지 못한 행위를 쉽게 한다. 이때의 바르지 못한 행위는 올바르지 못한 수단을 써서라도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하며, 예를 들어 타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를 만드는 경우이다.
이때의 바르지 못한 수단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자국민(自國民)에게는 부국강병을 위한 진출(進出)이라 하고, 지배 받는 타국민(他國民)에게는 선진문화를 전수(傳受)한다는 명분을 세운다.
비유하면, 자기집 식구들에게는 도덕, 윤리의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집을 통째로 빼앗아 버리는 일을 쉽게 하고도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병법(兵法)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고, 이기는 자가 정의(正義)이기 때문이다(以奇用兵).
노자는 이런 일(以正治國 以奇用兵)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천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以無事取天下).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그러함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이것 때문이다(吾何以知其然哉 以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내린 바름의 판단에 따르게 된다.
그런데 통치자의 판단은 자기가 통치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바른 것이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르지 못한 것으로 분류되기 쉽다. 그리고 이 기준에 따라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는 하라고, 방해가 되는 것은 하지마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 명령은 바른 것이라고 교육하게 된다.
통치자는 이러한 명령과 교육을 통하여 백성들을 여러 가지로 규제하게 된다. 백성들은 여기에 따라 꺼리고 기피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백성들이 꺼리고 기피하는 일이 많아지면 더욱 가난해진다(天下多忌諱而民彌貧)고 노자는 말한다.
이것이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니 공산주의 국가가 떠오른다. 공산주의 국가는 경제적 평등과 인간소외를 해결하는 바른 방법이 모든 생산 수산을 공유화하는 길이라고 여겨 그것을 제도화한 국가이다. 그래서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하고 기초적인 소비품은 배급제를 하고 있다.
이것을 위해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원칙 하에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중앙의 규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으니, 백성들은 열심히 일해도 그 대가(代價)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니 경제활동을 꺼리고 기피하게 된다. 결국 경제는 위축되고 다함께 가난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법령이 불어나서 백성들에게 더욱 뚜렷하게 전달되면 백성들 중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法令滋彰盜賊多有).
여기에 비해 자본주의 국가는 생산수단과 분배수단을 개인이나 개별조직에 맡기고, 생산자가 소비자와 자유롭게 만나는 시장경제를 한다. 생산자나 소비자가 모두 자유롭게 만나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하다보면 시장에서 가격과 생산량은 자동으로 조절된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좋은 물건들을 많이 지니는 것을 이익이라고 믿고, 여기에 몰두하면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공동체의 이익보다 개인이나 개별공동체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에 지역이기주의에 따른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국가는 더욱 어둡게 된다(民多利器國家滋昏).
그리고 자본주의는 좋은 물건을 만드는 기교가 뛰어난 기술자를 우대해서 이기심에 물들은 백성들을 유혹하는 물건이 더욱 생기게 된다(人多伎巧奇物滋起). 이러한 물건들이 많아지면 질수록,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의 격차는 심해지고, 만족하는 자의 숫자는 줄어들면서 행복지수는 떨어진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을 강조하는 노자의 시각에서 보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공산주의는 강병(强兵)을, 자본주의는 부국(富國)을 우선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공동체가 개별보다 우선이라서 바름에 맞추어야 하는 규제가 많고, 자본주의는 개별이 공동체보다 우선이라서 자유경쟁에서의 승리를 바름보다 더 중시한다.
노자는 바름을 강조하는 공산주의나 승리를 강조하는 자본주의가 모두 인위적(人爲的)인 이분법(二分法)의 분별심(分別心)에서 발생한 유(有)의 철학이 만들어낸 산물(産物)로 본다.
그래서 노자는 이것의 근원적인 해결방법으로 무(無)의 철학에서 나온 산물을 제시한다. 통치자가 무위(無爲), 호정(好靜), 무사(無事), 무욕(無欲)하면, 백성들은 자화(自化), 자정(自正), 자부(自富), 자박(自樸)한다(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 나라를 다스리는 9가지 도리
군주와 신하, 백성, 친척, 이민자의 관계 ... 노나라 임금 질문에 공자가 대답
1801년, 순조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발표했다. "중용(中庸)에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도리(九經)가 담겨있다. 그 여섯 번째 항목에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이를 해석하기를 '백성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여 보살핀다는 뜻으로…(중략)… 어버이가 그 자식을 양육할 때 병에 걸리면 반드시 구원하는 법이니, 임금도 이와 같이 백성을 간곡히 어루만져주고 구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순조는 전격적으로 공노비 해방을 선언한다. "왕이 백성을 대할 때는 신분의 귀천이나 내외를 가리지 않고 고루 균등하게 자식처럼 여겨야 한다. 노비라 하여 따로 구분하는 것은 모든 백성을 동포로 여기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 과인은 왕실에 소속된 노비 3만 6974명과 각 관청에 소속된 노비 2만 9093명을 모두 해방하여 양민으로 삼을 것이다. 승정원은 노비문서를 거두어 들여 돈화문 앞에서 불태우도록 하라." (순조1. 1.28).
부모가 자식이 고통 받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 것처럼, 노비라 하여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더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순조는 9경 인용해 ‘공노비 해방’
여기서 순조가 언급한 '구경(九經)'은 중용 제20장에 나오는 개념으로, 유교정치사상에서 매우 중요시된다. 노나라의 임금 애공이 공자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큰 나라가 될 수 있습니까?"고 묻자 공자는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도리가 있으니 ①자신의 몸을 수양하고 ②어진 이를 존경하며 ③가까운 이를 살피고 ④대신을 공경하며 ⑤뭇 신하들을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고 ⑥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며 ⑦온갖 기술자들이 몰려들게 하고 ⑧이민자들을 부드럽게 포용하며 ⑨제후들을 회유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애공이 다시 왜 그래야 하는지를 질문하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임금이 수신을 해야 나라의 도가 바로 서고, 어진 이를 존경해야 미혹됨이 없으며, 가까운 이를 잘 살펴야 원망을 사지 않고, 대신을 공경해야 간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신하를 내 몸처럼 여겨야 그들이 나라를 위해 보답을 하고, 백성을 내 자식처럼 사랑해야 백성들이 근면할 것입니다. 온갖 기술자들을 모으면 나라의 재정이 풍족해질 것이요, 이민자들을 부드럽게 포용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회유한다면 천하는 모두 노나라를 경외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구경'에 관한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우선 "임금이 수신(修身)을 해야 밝게 보고 공정하게 들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성종24. 8.22) "수신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구별하고 쓸 만하고 버릴 만한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은 없다." (성종2. 윤9.27) "수신을 통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힘도 갖출 수 있게 된다." (연산3. 8.1).
수신은 마음의 중심을 확립하고,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도덕성을 확보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권위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존현(尊賢)은 인재 등용과 관련된 부분이다. 무릇 나라는 임금 혼자서 다스릴 수 없다. 각 직임에 걸맞은 최고의 인재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라가 번영하고 정치와 학문이 흥하게 되는 여부는 모두 존현에 달려 있으니,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퇴출시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숙종14. 12.2)
임금이 어진 이를 존경하고 우대하면 너도 나도 자신의 포부와 능력을 펼치고자 조정에 출사할 것이다. 반대로 임금이 어진 이를 홀대하고 간신을 선호하면, 인재들은 조정에 실망하고 낙향하여 숨어버리게 된다.
친친(親親)은 친인척 관리와 관련된 부분이다. “살피고 돌보아주되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성종18. 6.10). 임금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전횡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경대신(敬大臣)은 원로 대신들의 경륜과 지혜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세종은 즉위 후 아버지 태종의 신하인 황희와 허조, 맹사성을 모두 중용했다. 세조도 자주 세자를 불러 재상들과 인사시키며 대신들을 공경하라고 당부한다(세조13. 8.3). 왕이 국정을 맡아 처리하는 데 있어 대신들의 경험과 전문적인 조언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체군신(體群臣)은 군신 간의 신뢰 문제이다. 신하가 탐탁지 않으면 애초에 그 직책을 맡겨서는 안 된다. 이왕 직임을 맡겼다면 임금은 신하를 자기 몸처럼 믿고 아껴야 한다. 다른 일을 걱정하지 않고 생활에 부족함이 없이 오로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주어야 한다. 임금이 나를 정말 위해준다고 생각해야 신하도 임금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중종23.3.7).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자서민(子庶民)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식을 보살피듯 임금은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운 점을 살피고 헤아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백성도 임금을 믿고 복종하며, 임금이 이끄는 대로 따라오게 된다.
도를 미리 준비하면 곤궁하지 않아
이 밖에 내백공(來百工)은 기술자를 우대하라는 뜻이다. "공인(工人)은 자기의 몸을 수고롭게 하여 천하가 편리하도록 만들어 주는 자로 그 공이 크니, 대우를 알맞게 하고 노고를 보상하여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한다." (중종18. 윤4.18). 유원인(柔遠人)은 이 나라를 찾아오는 자들을 잘 대해줌으로써 국가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넓히라는 가르침이다.
이민자를 융합하여 발휘되는 다양성의 힘은 국가의 인적 영토를 확장시킬 수 있다. 끝으로 회제후(懷諸候)는 이웃국가와 화합하는 것이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오는 리스크를 줄이고, 국가 간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9가지 도리는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염두에 두고 꾸준히 노력하며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구경' 바로 뒤에 이어지는 중용의 구절이 경계하는 바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이룰 수 있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말할 바를 미리 준비하면 차질이 없고, 일할 것을 미리 준비하면 어려움이 없고, 행할 것을 미리 준비하면 결함이 없고, 도를 미리 준비하면 곤궁하지 않을 것이다."
■ 두 얼굴의 고종(高宗)
1. 중추원 의관 안종덕, 조정이 청렴하지도 근면하지도 공정하지도 신의도 없음 지적 상소!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고 있었다. 5월 21일에 고종은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 하였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관청을 세우고 직무를 나누며,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오직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중략) 그런데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에 있을 뿐이다. 청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재산을 산처럼 늘리고, 근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생업에 힘쓰며, 공정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풀리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신의로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령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아는 법이다.
(중략) 짐이 왕위에 오른 40여 년 동안 덕이 없어서 선대 임금들의 크나큰 도리를 빛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위한 생각 한 가지 뿐이었다.
그러나 안으로는 각 부서의 신하들이 안일하게 지내면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길로 나를 바로 이끌어 주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지방 관리들이 탐욕에 젖어 나에게 백성들의 정상을 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잔학하게 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근심과 고통을 호소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종종 생계를 잃고 앙상하게 여위어서 어느 순간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질지 모르게 되고, 심지어 도적이 되어 노략질을 제멋대로 해대는데 농사를 망쳐 기근이 든 해이면 더욱 심했다.
(중략) 짐이 우선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면서 그에 기초하여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대한 내용으로 여덟 자의 글을 직접 써서 내려보내니, 이것을 가지고 경계하고 힘써라. 아! 여러 신하들은 이것을 걸어 놓고 해와 달처럼 밝히고, 이것을 받들어 쇠와 돌처럼 굳게 지킬 것이다.
청렴한 지조를 지켜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며, 직무에 근면하여 성의를 다하며, 마음을 공정하게 가짐으로써 한쪽에 편중하는 일을 없애며, 명령에서 신의를 지켜 법과 기강의 날을 세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질적인 병통을 없애고, 도적이 사라지게 하며, 의식(衣食)을 넉넉하게 하고, 예의의 기풍을 일으켜 세워, 백성들이 안락을 누리게 하라. 만일 감히 어기는 경우는 나라의 법이 있을 것이다.
백성들도 각기 자기의 본분을 생각하고 농사와 상업에 힘씀으로써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고, 학업에 힘씀으로써 어진 마음을 회복하고, 충성과 공경, 효성과 우애를 다하라. 아버지는 아들을 권면하고, 형은 아우를 권면하고, 벗은 벗을 권면하고, 이웃은 이웃을 권면하여, 모두 안락의 경지에 이르도록 도모하면서 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 모든 관리들과 모든 백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짐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나라와 더불어 밝은 세상을 같이 이룩하여 태평 성세의 복을 길이 누려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칙유한다."
아울러 고종은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뢰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라(廉勤公信 以安斯民)"는 여덟 글자를 친필로 써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고 관청에는 현판에 새겨서 걸도록 하는 조령(詔令)을 내렸다.
"옛날 우리 영조 때에 임금이 직접 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는 내용의 여덟 글자를 각 관청의 벽에다 걸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훌륭한 글이 해와 달처럼 빛을 뿌리고 있다.
짐이 지금 이처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하면서 '염근공신 이안사민(廉勤公信 以安斯民)'이라는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내려보낸 것도 선대를 잇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들에 신칙(申飭)하여 이 글을 새겨 청사의 벽에 걸어 놓고 늘 보며 조심하면서 그대로 지켜나가 어김이 없도록 하라." (고종실록 1904년 5월 21일)
이로부터 두 달 정도 된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安鍾悳)이 조정이 청렴하지도 근면하지도 공정하지도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2.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상소
1904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은 조정이 '청렴하지도 근면하지도, 공정하지도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대략이다. (고종실록 1904년 7월 15일)
"5월 21일에 내린 칙서(勅書)를 삼가 보니, 빛나는 586자의 말은 간곡하기 그지없고 엄정하면서도 측은하게 여긴 것이었는데,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며 신하들을 신칙(申飭)한 내용은 마치 해와 달처럼 밝고 쇠나 돌처럼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중에서도 직접 쓴 여덟 자의 글은 50년 동안 성인(聖人)의 학문을 닦는 과정에서 심오하게 터득하여 도출된 것임을 더욱 알 수가 있었습니다. (중략)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의리와 예의의 틀이고 근면이라는 것은 지식과 행동의 용기입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어진 이의 큰 덕이며 신의라는 것은 덕을 세우는 기초입니다. 이것은 횡(橫)으로 보면 《맹자(孟子)》의 사단(四端)인 것이고 종(縱)으로 보면 '중용(中庸)'의 삼덕(三德)입니다.
만일 사사로운 욕망을 깨끗이 털어 버리고 하늘이 준 덕을 환하게 닦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두 손으로 받들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읽어보고 크게 탄복하였습니다. 아! 대단하시고 훌륭하십니다. 만약 청렴과 근면과 공정과 신의, 이 네 가지가 시행되면 역사에 기록된 훌륭한 황제가 다섯이던 것이 여섯으로 늘 것이며, 명철한 임금이 셋이던 것이 넷으로 늘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가만히 보면 폐하가 임오년(1882) 이후부터 수십 년 동안 환난이 생길 때마다 밝은 조서를 내린 것이 몇 천 몇 백 마디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애통해하고 측은해하는 뜻이 언제 오늘날의 조서처럼 절절하지 않은 적이 있었으며, 자신을 반성하고 아랫사람을 격려한 것 역시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일하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관리들의 탐오 행위와 착취는 이전과 같아지고, 온갖 일을 게을리하고 안일하게 지내는 것도 전(前)과 같아졌으며, 법률이 사사로운 목적으로 인해서 굽혀지고 공정치 못한 것도 이전과 같아지고 , 정령(政令)이 자주 뒤바뀌어 신의를 잃게 되는 것도 전과 같아졌습니다. 격려하고 갱신한 보람은 하나도 없고 아래로만 흘러 내려가는 강물처럼 세도(世道)는 점점 낮아지기만 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말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얕고, 마음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깊다고 합니다. 말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은 말을 통하여 표현되기 때문에 '주역(周易)'에는, '마음과 일치하는 말은 그 냄새가 난초 향과 같다'고 하였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이 울어도 그 새끼가 화답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말이란 자신에게서 나와서 백성들에게 미치며 가까운 데서 시작되어 멀리서 시행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과 행동은 군자(君子)가 천지를 움직이는 수단이므로 군자는 말을 할 때는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을 할 때에는 말을 돌아보니,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은 것입니다.
중국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삼가 침묵을 지키며 도리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중도에서 나라를 부흥시키는 교화를 이룩할 수 있었고,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날고뛰며 울며불며하지 않고도 오패(五覇)의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폐하(陛下)께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말로 한 것이지,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중략) 그런데 신이 폐하께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말로 하였지,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신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 하나 진술하겠습니다.
3. 매관매직은 나라를 망치는 길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이 올린 상소는 계속된다.)
대체로 아래에서 위를 따르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풀이 바람이 부는 대로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윗사람이 청렴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탐오하며, 윗사람이 근면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게으르며, 윗사람이 공정한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사(私)를 챙기며, 윗사람이 신의가 있는데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속이는 짓을 하겠습니까?
지금 폐하는 청렴한 것을 좋아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탐오 행위를 한 오점을 가지고 있고 지방의 백성들은 생계가 거덜 났다는 탄식이 많습니다. 뇌물이 성행하여 관청의 법도가 문란해졌으며, 탐학한 자들이 도처에 넘치고 도적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이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은 폐하께서 청렴에 착실하게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청백하고 검소한 것이니, 깨끗하여 외람되거나 흐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중략) 무릇 탁지부(度支部)의 정공(正供)은 모두 폐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또 무엇 때문에 별도로 내장원(內藏院)을 설치(1895년에 설치됨)하고 거두어 들이기 잘하는 신하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해서 탁지부에 들어가야 할 일체의 공전(公田), 사전(私田), 개인 토지, 산과 못, 어장과 염전, 인삼포(人蔘圃), 광산 등을 떼어내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탁지부의 경비가 바닥나 녹봉과 급료, 공사비로 줄 비용이 없으면 대뜸 내탕전(內帑錢)이라 하여 바꾸어서 충당하게 하고는 뒤따라 나라 빚을 독촉하듯 보상하라고 요구합니다.
근래에는 또 나라 안의 언덕과 들판, 산림과 강이나 바다, 제방과 방죽, 어장과 사냥터로서 개간해서 곡식을 심고 확장해서 정리할 만한 것들을 탁지부에 넘기지 않고 특별히 어공원(御供院)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내장원에서 관할하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임금에게 올릴 중한 공물(貢物)을 꼭 이런 묵인 땅이나 황무지 같은 몹쓸 데서 나는 물건들로 바쳐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백성들에게 청렴치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풍속이 어떻게 아름다워지며 백성들이 어떻게 탐욕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이 밖에도 차마 말 못할 문제도 있지만 폐하께서 전부를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으므로 폐하에게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대체로 벼슬을 파는 문제로 말하면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중국 한(漢) 나라의 서쪽 후원(後苑)에서 벼슬을 팔고, 진(晉) 나라의 개인 집에서 벼슬을 팔던 일이 모두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차마 그 전철을 몸소 밟으십니까? 대체로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리들로 말하면 하늘이 준 벼슬이고 임금이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어찌 공공연히 사거나 팔아먹을 물건이겠습니까?
저 간교한 토호들과 아전(衙前)들이 완악하고 염치없는 마음으로 감히 요행으로 폭리를 얻어 볼 생각을 품고, 부유한 자는 재산을 털고 가난한 자는 이리저리 빚을 내어 먼저 10배 값을 실어다 주고서 밑지는 장사로 수령(守令) 자리를 사는데, 그런 그가 나랏일을 위하겠습니까? 자신을 위하겠습니까?
빚을 갚고 제가 차지할 이득을 장차 어디에서 짜내며, 부임한 날부터 머리를 싸매고 하는 짓이란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게다가 사적으로 뇌물을 받아먹는 행위가 계속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본전을 놓칠 것이니, 이런 형편에서 그가 하는 정사가 과연 청렴한 것이겠습니까, 탐욕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남의 자식의 살을 베어 그 부모의 좌우 사람들을 먹이면서 자기도 그 나머지를 먹는 데도 부모는 좌우 사람들이 배불러 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도마 위에 오른 제 자식을 구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 폐하의 자식된 사람들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의 약탈로 나라 것이건 개인 것이건 몽땅 거덜나고 탐오와 횡령 행위가 꼬리를 물어 감옥이 늘 넘쳐나며 창고의 재산이 늘 모자라고 군사를 동원해도 토벌할 수 없으니, 장각(張角)이나 갈영(葛榮)의 난과 같은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략) 다행히 폐하의 생각이 이 문제에 미치어 요즘 엄하게 막아 좌우 사람들이 뇌물을 받아먹지 못하는 지가 몇 달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또 교묘한 말과 그럴듯한 참소(讒訴)로 폐하를 눈멀게 하고 벼슬을 주는 관리들과 내통해서 다시 구태를 답습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는 오로지 한마음 깨끗한 것을 굳게 지키고 폐하의 명령 중 렴(廉)이라는 한 글자를 밝히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4. 안종덕, 근면에 대하여 근본적 질문을 던지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안종덕은 고종에게 근면에 대하여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지금 폐하께서는 근면한 것을 좋아하지만 조정에는 게으른 습성이 있어 무슨 일이나 성사될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정부의 회의는 모여 앉자마자 헤어지고 각부(各部)의 출근에 대해서 여러 번 주의를 주었음에도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령이 결원되어 있으나 해가 지나도록 임용되지 않는 것은 전형을 맡은 관리들이 태만한 탓입니다. 죄수들이 옥에 갇혀 있어도 계절이 바뀌도록 심리하여 판결하지 않는 것은 법관들이 태만한 결과입니다. 학교에는 글 읽는 소리가 없고 전야(田野)에는 놀고먹는 백성들이 많으며, 온갖 일이 해이되고 풍속이 나빠지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니,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은 데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근면이란 수고로이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서(尙書)'에는 '너의 높은 관리들에게 경계하노니 공로를 높이는 것은 뜻에 달린 것이요, 위업을 넓히는 것은 근면에 달린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제왕들의 근면은 관리들이 수고로이 힘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 힘쓰며 인재를 얻은 다음에는 모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나랏일이란 하루에도 만 가지를 처리해야 되는 데 인재를 얻어 적절한 벼슬에 임용해 놓으면 신하 스스로가 아래에서 수고하므로 임금은 위에서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요(皐陶)의 노래에는, '임금이 모든 일을 다 맡아보니 고굉지신(股肱之臣)들은 게을러져서 만사가 그르쳐지는구나'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다 맡아본다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서는 것이 근면한 듯하지만 신하가 게을러지고 일이 그르쳐집니다.
근면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결과는 이처럼 상반됩니다. 진시황이 직접 계(啓)를 꼼꼼히 살피고 수(隋) 문제(文帝)가 직접 호위 군사들에게 밥을 먹인 것은 해당 관청에서 할 일이었지 제왕이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 폐하께서는 황위에 오른 이후 놀며 편안하게 즐긴 적이 없고 음악과 여색을 즐긴 적도 없으며, 날 밝기 전에 옷을 입고 정사를 보러 나가고 날이 저물어서야 밥을 들면서 날마다 바쁘게 지냈으니,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임금입니다.
하지만 걱정이 지나쳐서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고 근심이 깊어서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여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였습니다. 하찮은 일들까지 살폈기 때문에 큰 원칙이 허술해졌고 남이 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참소(讒訴)가 쉽게 들어왔습니다. 큰 원칙이 허술해지니 소인들이 폐하를 기만하게 되었고, 참소가 들어오니 대신들이 자주 교체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나선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석공이나 목공의 권한까지 쥐고 나면 아래서는 밭 갈고 길쌈하는 노비의 직분까지 잃게 되기 때문에 일을 주관해야 할 모든 신하들이 형세상 제한을 받게 되어 감히 일손을 잡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전형을 맡은 관리들이 명령만을 기다리게 되고 법을 맡은 관리들도 명령만을 받들게 되니, 임금의 팔다리 노릇을 해야 할 관리들이 어찌 게을러지지 않으며, 만사가 어찌 그르쳐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놓고 신은 감히 폐하의 근면이 근면의 마땅한 도리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근면의 마땅한 도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오로지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일 따름이니, 명철한 폐하는 널리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안종덕은 고종이 하찮은 일들까지 살피는 근면 때문에 신하들이 나태해졌다고 상소한다. 국가 지도자에게 근면이란 무엇인가? 안종덕은 국왕의 근면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5. 공정인가? 사리사욕인가?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안종덕은 고종의 공정에 대하여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금 폐하는 공정한 것을 좋아하나 조정에는 사리사욕이 넘쳐나고, 관리들 간에는 당(黨)이 갈라졌으며, 벼슬을 얻어 나가려는 자들은 대궐 안의 비호 세력과 결탁하고 세력에 끼려는 자들은 외세에 의지합니다. 재주도 없이 턱없는 과분한 벼슬을 지내는 것은 모두 세도 있는 집안의 인척들이고, 죄를 지고도 요행수로 면하는 것은 모두 권세 있는 가문의 청탁 결과입니다.
임용해야 할 벼슬자리가 있으면 비천한 자들을 사대부들보다 먼저 앉히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도적보다 더 심하게 빼앗아 냅니다. 천하에 잘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사익을 채우는 일 한 가지뿐이니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폐하(陛下)의 공정(公正)함이 진실한 공정함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신이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공정이란 천리(天理)의 바른 것입니다. 추호도 욕망의 사사로움이 없어야 그것을 공정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극히 은밀한 본심을 보존하기는 어렵고, 중국이 오랑캐들을 내쫓기는 쉽지만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없애기는 어렵다고 한 선현의 말씀은 매우 크나큰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모르기는 하여도, 폐하께서는 한가로이 홀로 있을 때나 조용히 사물을 대할 때 마음속에 공정만 있을 뿐 추호라도 욕심의 싹이 없었습니까? 이것은 폐하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정령(政令)과 하는 일들로 미루어 폐하의 마음을 더듬어 보면 순전히 공적인 마음에서만 출발한 것이 아닌 것도 있는 듯합니다. 갑오경장 이후에 이른바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의 구별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위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의 관보를 보니,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의 벼슬이 매번 가까이 돌면서 사적인 총애를 받거나 점쟁이나 이단(異端)의 무리들에게 내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두 무리들에도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명철하고 너그러운 임금들치고 이러한 무리들에게 높은 총애와 신임을 베푼 임금은 없었습니다. 대체로 이 무리들로 말하면 안팎으로 연계를 맺고 어디에서나 구애받지 않으며 간사한 술법을 숭상하여 심지가 간교한지라, 안으로는 남을 헐뜯고 시비를 전도하며 밖으로는 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권세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없는 시속 무리들이 앞다투어 추종하며 저마다 아부하여 편당을 만들고는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쫓아냅니다. 이런 형세가 필경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야 말 것이니, 어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중앙과 지방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대부분 지조가 없고 턱없이 벼슬을 차지한 자들입니다. 약간이나마 염치가 있고 조금이나마 절개를 지닌 사람들은 임용되자마자 바로 쫓겨나고 벼슬에 나서자마자 물러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폐하의 공정한 마음을 헤아려서 왔다가 나중에는 이 무리들의 배척을 받고 떠나버립니다.
옛날의 어진 임금들은 저물녘에는 편히 쉬고 아침이 밝으면 정사를 보는 자리에 나가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면류관을 바로 쓰고 남면(南面)하여 앉아 너그러운 마음과 편안한 몸으로 하루에 세 번씩 어진 관리들을 접견하여 위로는 중국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리를 논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곤궁을 걱정하였는데, 말하는 것이 공정하며 임금은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훌륭한 임금이 마음을 닦아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는 방도입니다.
대궐 안의 일은 알아서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신이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듣건대, 폐하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아침 식사를 들자마자 벌써 날이 저물어 버린다고 합니다.
6. 안종덕, 사적 총애를 경계하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공정에 관한 안종덕의 상소는 계속된다.)
가만히 듣건대, 폐하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아침 식사를 들자마자 벌써 날이 저물어 버린다고 합니다. 대문이 열리면 행랑(行廊)이 마치 시장 같아지고 항간의 잡된 무리와 시골의 부정한 무리들이 밀치며 꼬리를 물고 달려들어서는 폐하 앞에서 버릇이란 전혀 없이 부산스레 들락날락하니, 말하는 것이란 무엇을 꾀하는 것이며 도모하는 것이 무슨 일이겠습니까?
폐하를 보좌하여 일을 주관해야 할 높은 관리들과 폐하를 위해 생각도 하고 논의도 해야 할 경연(經筵) 신하들은 해가 지나도록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하고 그저 문서나 받아 처리하며 녹봉이나 축내면서 구차하게 벼슬자리나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판이니 그 속에서 나오는 계책과 온 나라에 시행되는 정사가 과연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사적인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명철한 임금이 정사를 베푸는 원칙에 손상을 주는 것 일뿐 아니라, 옥체를 조섭하는 도리에도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신은 폐하께서 정사의 도리에 마음을 집중하고 옛 문헌들을 널리 보았으므로 옳고 그른 것과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것이라든가, 정사가 잘 되고 못 되는 것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가까이에서 맴돌며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이 조정의 벼슬을 널리 차지하고, 불순하고 이단을 숭배하는 자들이 대궐에 드나드는 것은 폐하의 덕에 누를 끼치고 성세(盛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가 있다 하여 없애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여러 번 난리를 겪고 나니 조정 신하들의 용렬함을 굽어보다가 귀찮다는 마음이 생기고, 변란이 끝없음을 깊이 걱정하다가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마침내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두고, 계책과 술법을 쓰는 자들을 은밀히 찾아 위급한 난국에 대처하자는 것인지요? 폐하(陛下)의 생각이 이런 데서 나왔다면 그것은 오히려 공정한 도리가 아닙니다.
(중략)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벼슬을 맡기며 마음을 터놓고 공적인 것을 시행하며 누구나 똑같이 어질게 대하고 누구에게나 전심으로 대한다면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어찌 폐하의 팔다리 노릇을 하지 않고, 온 나라 군사와 만백성이 어찌 폐하의 자식 노릇을 하지 않으며, 불행하게 위태로운 때를 만난들 어찌 폐하를 위해 한 목숨 바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도모하지 않고 사적인 총애만 오래 하다보면,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몇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먼 사람이 될 것이니 폐하의 소유가 어찌 적어지지 않겠으며 폐하의 형세가 어찌 외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이란 어려운 때에는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공적인 도리를 널리 시행하여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을 내쫓고 신망 있는 사람을 널리 등용하소서. 무슨 대책을 세울 때에는 조정에 묻고 개인들과 의논하지 말며, 관직을 맡기기 위해서 인재를 선발하는 경우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지조 있고 충직한 선비들 속에서 구할 것이요, 연줄을 대어 결탁하는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들 속에서 찾지 말 것입니다.
하늘이 준 지위와 직책을 어진 사람들과 함께 지켜나가며 감히 개인적인 은혜를 베푸는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면 해와 달이 다시 빛나고 만방이 다 우러르고 조정이 깨끗해지고 온 나라가 기뻐 감복하여 임금의 교화가 크게 시행될 것이니 폐하께서는 굽어살피소서.
7. 안종덕, 고종에게 신의를 강조하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의 안종덕의 상소는 신의(信義)로 이어진다.)
지금 폐하께서는 신의를 좋아하지만 주변의 신하들은 속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유언비어가 떼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애통조서(詔書)를 여러 번 내렸으나 온 나라가 감격하는 효과가 없고, 엄격한 칙서(勅書)를 자주 내렸으나 탐관오리들이 조심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심지어 도적 떼가 교화를 해치지만 토벌하고 무마할 방책이 없고, 외교에 있어서는 신망을 잃어 온갖 비난을 다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은 폐하의 신의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신의라는 것은 성의이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며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신의가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서지 못하고 신의가 없으면 하늘의 도리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신의가 없으면 제 몸도 수행할 수 없으며 신의가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군대를 버리고 양식을 버릴지언정 신의는 버리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군대를 버리고 양식을 버릴 지언정 백성의 신의가 없으면 잠시라도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양식을 풍족히 하고, 군사를 풍족히 하고, 백성이 믿게 해야 할 것이다(足食 足兵 民信之矣).' 이러자 자공이 말하였다. '반드시 부득이해서 버린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대를 버려라(去兵).' 자공이 다시 말하였다. '나머지 두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버려라(去食). 백성은 신의가 없으면 잠시라도 설 수 없는 것이다.' 신뢰는 정치의 근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여론조사에 민감하는 것이다.)
(안종덕의 상소는 이어진다.)
가만히 보건대, 폐하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말을 가지고 하지 마음을 가지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나 신의가 별로 없습니다. 조서나 칙서(勅書)를 내릴 때마다 신의를 다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시행되는 것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실천되는 일이 없습니다.
대궐을 깨끗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외람되고 잡된 무리들을 쫓아낼수록 잡된 무리들이 더 나오고, 잡세(雜稅)를 폐지한다고 말하지만 강제로 긁어내는 관리들이 소환되었다가는 곧바로 또 파송됩니다. 탐오(貪汚)를 징계한다고 말하지만 관청에서 규탄하는 계(啓)를 올리면 덮어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핀다고 하시지만 대책을 조사해 올리면 아예 덮어두고 묻지 않습니다.
사람을 위해 벼슬을 고르다 보니 대신(大臣)이나 협판(協辦)을 장기짝 옮겨 놓듯 교체하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데로 따르다 보니 관찰사나 군수가 여관집에 다니듯이 오고 갑니다. 직제(職制)는 어제 변경시켰는데 오늘 또 고치고 법률은 중한 쪽으로 쏠렸다가 경한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조정의 명령이 어떻게 신의를 보이겠습니까?
더구나 관직 제도는 너무나 복잡합니다. 탁지부가 있는 이상 내장원은 둘 필요가 없는 것이며, 군부(軍部)가 있는 이상 원수부(元帥府)는 승격시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외부(外部)가 있는 상황에서 예식원(禮式院)은 또 무엇 때문에 설치하며, 경무청(警務廳)이 있는 상황에서 경위원(警衛院)은 또 무엇 때문에 둡니까?
법부가 존재하는 만큼 온 나라의 형벌에 관한 정사를 전일적으로 보아야 하겠는데 군법원(軍法院)에 권한을 나눠준 것은 무엇 때문이며, 궁내부(宮內府)가 있어 대궐 안의 정원을 몽땅 관할하는데 비원(祕苑)을 별도로 세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한성부 재판소가 권한을 독차지한 상황에서는 경윤(京尹)은 필요 없는 관리이고, 평리원(平理院) 재판장이 겸직(兼職)인 이상 법관은 전임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보건대 한 번은 나누었다가 한 번은 합하고, 한 번은 없앴다가 한 번은 두는 것이 모두 법을 문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법이 문란하면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되고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의 마음에 신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8. 안종덕,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를 한탄하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안종덕(1841∽1907)의 신의(信義)에 대한 상소는 이어진다.)
폐하는 오랜 도리를 가지고 정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어진가 어질지 못한지를 환히 꿰뚫었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벼슬길에 나오기는 어렵고 악한 사람이 승진하기는 쉬웠으니, 이것을 놓고 보면 폐하의 마음이 남에게 믿음을 보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등용하지 못했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내쫓지 못한 것이 바로 춘추시대 곽나라가 망한 까닭이니, 이것은 남이 권해서 될 일이 아니라 폐하 자신이 힘써 해야 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혼군(昏君)은 간신의 말을 믿고 충신을 쫓아내었으니 나라가 망한 것이다.)
외교의 경우에는 더구나 신의가 중요합니다. 항간의 보통 사람들도 신의가 없이는 교제를 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나라와 나라 간에 교제를 하는 경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세계가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대한제국은 피폐하여 무력과 재력을 가지고서는 물론 겨루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지켜야 할 것은 신의뿐인데, 신의란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저들이 저들의 강함을 이용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의리(義理)를, 저들이 저들의 부유함을 이용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인애(仁愛)를 가지고 우리 자신이 우리 일을 시행하면서 두려워하거나 의지하는 마음을 없애 버린다면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가 강하기는 하였지만 추(鄒)나라와 노(魯) 나라보다 더 강하지 못한 것처럼 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삼천리 강토와 500년 왕업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 독립 자주권을 잃고 있으며, 세력을 믿고 달래며 위협하는 자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습니다. 북쪽 나라에서 오면 북쪽 나라에 빌붙어 나라의 이권을 경중도 헤아려 보지 않고 그들에게 넘겨주고, 동쪽 나라에서 오면 동쪽 나라에 빌붙어 나라의 주권을 존망도 생각해 보지 않고 그들에게 넘겨줍니다.
날마다 치욕을 당하지만 감히 막지 못하고 강요가 끊임없건만 감히 거절하지 못합니다. 이러다가는 장차 국내 정사와 대외 실무가 모두 남에게 넘어가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근원을 따져 보면 신의가 서지 못한 데 있습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권세 높은 사람이 재능에 관계없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면 백성들이 본업을 저버리고 외세를 구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을 놓고 보면 이 말이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폐하께서 깊이 살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지금 나라가 가난하기 그지없지만 탁지부의 연간 수입이 그래도 6, 7천만 민(緡)은 됩니다. 우선 내장원을 없애어 탁지부에 소속시키는 동시에 각궁(各宮)과 내수사(內需司), 훈부(勳府) 등의 저축까지 합하면 거의 수 억만민은 될 것입니다. 옛날 영조 대왕은 양역(良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함께 각궁에서 사적으로 받는 세금을 모두 거두어 균역청(均役廳)에 넘겨 삼군영(三軍營)의 비용에 보태게 했는데, 백성들이 지금껏 그 덕을 보고 있습니다.
만일 조종(祖宗)의 뜻을 체득하여 절약하며 신의를 베푼다면 수 천만의 군사를 키우고도 남을 것이니, 한 필지의 토지나 한 부대의 군사보다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예를 연마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가르치면 무엇을 지킨들 고수하지 못하겠으며, 누구와 싸운들 승리하지 못하겠습니까?
나아가서는 여러 나라들과 패권을 다투고 물러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강토를 보위할 있을 것입니다. 안에서 재물을 저축하면서 무익한 소비를 없애는 것이 밖에서 나라를 위축시켜 망국의 화를 재촉하는 것에 비해 그 이해 관계가 어떠하겠습니까?
재물을 풍부하게 할 수 있고 군사를 강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형편이 이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이겠습니까? ”
9. 1904년 대한제국의 운명은?
(1904년(고종 41년) 7월 15일에 63세의 안종덕(1841-1907)은 상소를 이어간다.)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한제국에 인재가 없다고들 하는데 과연 인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짓고 있지만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폐하의 마음에 신의가 부족한 것이 더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하가 한 번 신의를 세우기만 하면 위에서 말한 청렴과 근면, 공정 세 가지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시행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못하고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다'고 하였으며, 또 '쉽게 수락하는 말에는 틀림없이 신의가 적고 자꾸 고쳐 말하면 일이 잘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늘 말을 곱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말에 신의가 없고 또 늘 쉽게 수락하였다가 번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의가 적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반드시 먼저 마음속으로 이 일이 청렴한 것인가 탐욕스러운 것인가, 근면한 것인가 게으른 것인가, 공정한 것인가 사사로운 것인가를 요량해 보고 청렴한 것이면 나아가고 탐욕스러운 것이면 물리치며, 근면한 것이면 힘쓰고 게으른 것이면 경계하며, 공정한 것이면 시행하고 사사로운 것이면 그만두면서 한결같이 신의를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사가 잘 되지 않고 나라가 진작되지 못하며 재력이 넉넉해지지 않고 군사가 강해지지 못하여 주변 나라들이 불복한다면 신을 기만한 죄로 처단하소서.
아!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믿어 준 다음에야 간하는 법이다. 그 임금이 믿지 않으면 자기를 헐뜯는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가까운 처지도 아닌 데다 하찮은 사람으로서 폐하에게 믿음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그저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직임에 있다는 이유로 감히 폐하의 높은 위엄을 범하며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틀림없이 비방하였다는 의심이 초래되어 분수를 어긴 죄에 대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의 허리가 작두에 잘려도 부족하고 신의 목이 도끼에 찍혀도 모자라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잘 알면서도 감히 이처럼 망령된 말을 하면서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어찌 정신병에 걸려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위태로운 때에 폐하가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근본으로 삼으리라 마음먹고 여러 신하들이 간하지 못한 데 대해 추궁하였으니, 이야말로 어지러운 것을 싫어하여 잘 다스릴 것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전환시켜야 할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숨김없이 모두 말한 것은 대체로 새로운 정사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될 것을 기대한 것이지, 자신에게 미칠 화나 복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의 마음을 살피시고 만일 티끌만큼이라도 비방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면 당장 처단함으로써 공경치 못한 신하들을 경계시키소서. 그러나 만일 충성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것이라면 부디 살펴보고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신의 몸이 주륙을 당하더라도 드린 말씀이 시행된다면 신은 죽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겠지만 혹시 덮어둔 채 살피지 않아, 마치 전날에 신하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을 때처럼 죄도 주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남을 것이고 또 그것은 폐하가 아랫사람을 신의로 대하는 도리도 아닐 것입니다. 오로지 명철한 폐하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이 지내는 중추원 의관 벼슬을 속히 체직(遞職)하심으로써 죽어서 고향에 묻히려는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이러자 고종은 단촐하게 비답하였다. "말은 물론 옳다. 그렇지만 시의(時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고종이 언급한 시의(時宜)의 의미는 무엇일까?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7월 대한제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국운은 기울고 있는가?
한편 안종덕은 1882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영덕현감 등을 역임했고 1901년부터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하였고 1906년에는 청송군수를 하였다. 한편 안종덕의 상소는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실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