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쪼아 먹물을 들여 글과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입묵(入墨)이라 하고 몸에 입묵하는 것을 문신(文身), 얼굴에 입묵하는 것을 경면이라 했다.「위지(魏志)」에 왜국 사나이로서 문신 경면하지 않은 자가 없다 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왜국의 사나이들은 모두가 얼굴과 몸을 쪼아 입묵을 하고 어느 부위에 입묵했는가와 그 크기로 신분의 상하와 귀천을 가린다 했으며 「진서(晋書)」에는 왜인들은 잠수하여 고기를 잡는데 몸과 얼굴에 문신을 함으로써 물짐승의 해를 막는다 했다.
이미 일본 고대문헌에 원수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의 두 팔에 아무개 누구 몇 살 몇 년월일에 토사(討死)한다고 문신했으니 결사 임전에 문신했음을 알 수 있다. 「희유소람(嬉遊笑覽)」이라는 일본문헌에 보면 이미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악소배(惡小輩)들이 몸에 고기나 용 선녀 귀신 수목 꽃 문자 등을 문신하는 버릇이 있었으나 도요토미가 집권했던 시대까지는 야쿠자사회에 문신은 없었으며 가네야라는 관동 협객(俠客)의 팔에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글자를 문신한 것이 일본 야쿠자 문신의 처음이라 했다. 그 후에도 주로 「일심(一心)」이란 한자를 결의(結義)문신으로 선호했을 뿐 그림문신은 근대의 일이라 했다.
삼한시대의 마한이나 진한에서도 어부들이 문신을 하고 물에 들었는데 큰 고기의 해침을 막기 위함이었다 했으니 문신은 고대 바닷가의 공통된 습속이었던 것 같다. 조선 초에는 도둑의 팔에 도(盜)자를 문신하여 전과를 나타내는 문신형이 있었으며 종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낙동 이노(駱洞 李奴)」하는 식으로 팔뚝에 문신했다. 연비(聯臂)라 하여 연인끼리 사랑의 영속을 맹서하고 문신하는 풍속도 있었는데 그 유명한 탕녀 어을우동(於乙宇同)의 팔에는 여섯 사나이의 이름이 문신돼 있었다 한다. 18세기의 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젊은이들끼리 결의 약속을 다질 때 문신을 했으니 버려야 할 악습이라 했다. 교과서를 왜곡하고 어장을 빼앗는 등 악감정이 첨예화되고 있는 작금, 일본 야쿠자 문신까지 들여와 500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일본그림의 전신 문신이 유행하고 있다는데 불길한 정신문화의 썩어가는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언짢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