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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책임자. 해보기나 했어?"
- 정주영을 상징하는 유명한 어록.
현대그룹의 창업자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경제인, 그리고 현대그룹의 명예회장.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고 현대가(家) 특유의 기업 문화 때문에 왕회장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8년에 소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2]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6남 2녀 중 첫쩨이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향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병원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남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3]
송전소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4]
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으며[5],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판단은 틀렸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 없는 말도 아니었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6]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후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7]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속에서 이루어낸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다. 또한 어느 기업인들보다 청렴하고 국민들이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다.
미군정 말기인 1947년, 서울에서 건설회사를 차렸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사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정주영 본인의 성실함과 근성에 한국전쟁 시기에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손아랫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미군 관련 공사를 거진 싹쓸이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한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UN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받았다.
점점 사업 규모를 확장하여 현대그룹을 만들어낸다. 특히 한국의 건설업계 역사에서 이 사람의 행보는 그야말로 신화적이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 당시 박정희는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지시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정희가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라고 했다 한다. 아래의 일화는 박정희의 조임에 견디다 못해 해외 온갖 곳을 돌며 허풍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인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모래밭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지폐 한 장을 보여주며 "한국은 영국이 배를 만들 때 세계 최초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나라입니다"라는 말을 해 신용을 얻어 차관으로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현대그룹도 그 이야기를 잘 써먹었다...만, 사실은 한국 정부가 국가 보증을 서주었기 때문에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자서전을 보면 저 일화만 들어서 말한 게 아니라 서류도 치밀하게 준비해 갔다. 당시 '판매처를 확실히 해야 돈을 빌려주겠다'는 영국 측의 입장 때문에 계약이 막판에 허무하게 가라앉을 뻔 했다. 정주영은 오나시스[8]의 처남 리바노스와 독대하여 수주를 따냄으로써 계약을 살려내었다. 가격을 매우 싸게 쳐줬다 하더라도 "우리 배를 사겠다고 서명해주면 그 계약서를 들고가 은행에서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겠다."는 말도 안되는 일을 실현했다. 당시 상황을 보지 않고서는 리바노스가 왜 배를 구입해줬는지 알 수가 없다.[9]
서산간척지 공사 당시 특유의 뻘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되자 큰 폐선 두 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해 매립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판매한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 되었을 때[10]나 홍수시 긴급 제방을 만들때 등으로 응용되었다.
알파엔진을 개발할 때의 일화도 유명한데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로얄티 반값 할인을 조건으로 연구소를 닫으라 요청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여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엔진인 알파엔진이 탄생했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해 볼만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후일 밝힌 바 있다.
당시는 오일쇼크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였다.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선두에 현대건설이 있었다. 타국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되는 40만, 30만을 적어내는 식으로 공사들을 따냈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 오일머니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수주 금액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대형 공사였다. 정주영 회장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서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했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들을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를 달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얼마든지 난파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이 계획이 잘 실행되었다. 일이 잘못되었으면 현대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낸 일들이 많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하다. 당초 경쟁 도시는 일본의 나고야로서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홍보를 했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면서 홍보를 했다. 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다음날 리셉션에서 각국 IOC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측 유치단에 관심을 보여서 일본 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는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결국 최종 투표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1988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당선 이전)의 자서전에서 정주영은 사업가 시절에 정치인들이 기업인들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 기업인을 무시한다고 깊이 상심했으며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해 이러한 인식을 바꿔보겠다고 말한다. 참고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은 걸프전 발발로 인한 이라크 건설공사 수금 미수로 물러나고 드라마 '야망의 세월'로 얻은 인기를 발판삼아 정주영이 미워하던 민자당에 입당, 같은 14대 총선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정주영은 이명박에 대해 시사저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
사실 사람은 그렇다. 기용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으면 재능이란 것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 내가 서울대 출신의 많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가 그 분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작가의 장난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명박씨가 소양강댐이다 뭐다 해서 다 한 것처럼 나오고 박대통령 앞에 가서 으르렁으르렁 거린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소양강 댐을 만들 때 이명박씨는 간부도 아니었고 참여도 하지 않았다. 설계에서부터 설계 시공에 이르기까지 전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출신들이 했다. 모두 이씨의 (회사)선배이다.
현대건설이 65년에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들이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칼을 든 폭도들이 금고를 열라고 요구했으나 이명박씨 혼자 끝까지 금고를 지킨 무용담이 있는데 이씨는 사실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현대건설은 생긴 지가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현대건설 초반기에 맡았던 공사에 그 분이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드라마상으로는 조선소 건설이나 자동차 등등 다 그 분이 한 것처럼 나오니까 사내에 보이지 않는 위화감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밑의 직원이 매스컴에 나오면 그걸 좋게 보지만 같은 동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 때 저 밑에서 서류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다 한 걸로 나오고, 그건 좋은데 중동 건설도 다 자기가 한 것처럼 나오니, 그 때 이명박씨는 참가할 자격도 못 됐다. 서울대 (회사)선배들이 다 한 건데 서로 말은 못해도 회사 내에서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그 분이 떠날 분위기를 자초한 거다.
2011년 위키리크스는 이명박이 처음 현대그룹에 입사했을 때, 박정희가 정주영 회장에게 당시 이명박 사원에 대한 편지를 보내 "(위험한 인물이니)잘 지켜보라"라고 했는데, 정주영 회장이 이를 "잘 봐줘라"라고 오인해 이명박이 현대그룹 내에서 승승장구 했다는 비화가 담긴 문서를 폭로(이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 검증된건 없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서 박정희의 친서 그 자체나 관련 당사자들이 직접 작성한 문건이 폭로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2007년 당시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당시 대선후보였던 이명박에 관한 뒷소문들을 조사하여 미 국무부에 전달한 문서가 폭로된 것이다.[11][12][13]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라고 TV 간담회에서 대답. 진실은 저 너머에.
1987년, 명예회장으로 은퇴한 정주영은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권 말기부터 갑자기 역대 정권에 바친 비자금을 공개하면서 슬슬 레임덕 증상을 보이던 노태우 정권을 곤경에 빠뜨리더니만,[14] 마침내 통일국민당을 조직, 이주일을 영입하는 등 노력 끝에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얻는 의미있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 임직원과 가족을 노골적으로 동원하여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다른 재벌들의 경계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마침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금전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며 낙선하였다. 개표 직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인데 득표수가 400만(정확히는 388만 정도)이라니 우리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15] 안습. 정주영 회장은 현대 직원들이 모두 자신을 찍고,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만 설득하면 실제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특히,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의 '우리가 남이가' 발언으로 인해 14대 대선이 유례없는 지역감정 싸움이 되어 타격을 많이 입었다. '주영 찍으면 (표가 갈려서) 대중된다'는 교묘한 흑색선전에도 시달렸다.
특히, 당시 노태우 정권은 총선 당시 보여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경계하여, 공권력을 동원하여 현대그룹 직원들의 부정선거 사례를 대대적으로 폭로하고, 비자금을 폭로하는 등 현대그룹을 압박하여 정주영 선거운동 조직의 손발을 잘랐다. 울산 같은 대표적인 현대그룹의 도시에서 현대 임직원 수보다 적은 표가 나오자 정 회장이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컴퓨터 선거 조작이라는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증거가 불확실하여 DJ(더구나 당시엔 정계 은퇴를 선언했었다.)도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대선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주영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그다지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가난하였다 하더라도 재벌 출신인 그가 얼마나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을지 의문부호가 붙었다. 또한 기업 경영에서의 성공과 국가 운영, 즉 정치는 매우 다른 분야임이 자명한데 경제계 출신이 어찌 정치를 할 수 있겠냐는 인식이 많았다. 정주영이 그나마 400만 표를 득표할 수 있었던 것도 민자당 지지층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으로 김영삼계, 김종필계, 노태우계가 한 당이 되었는데 사실 이 세 세력은 전혀 다른 지지기반을 가진 별개의 세력이었다.이전에 김종필계(신민주공화당), 노태우계(민주정의당)를 지지하던 국민들은 김영삼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정주영에게 표를 던지는 외도를 하게 된다. 즉 김영삼도 싫고, 그렇다고 김대중을 찍기는 더 싫은 보수파가 대안으로 정주영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다. 어딘가 익숙하다면 훗날의 안철수 현상과 매우 흡사하다.
14대 대선이 끝난 뒤 선거운동을 도왔던 아들 고 정몽헌, 정몽준 회장과 함께 비자금 사건 때문에 수사를 받으며 모진 고초를 겪고 난 후 정치에 손을 떼었다. 대선 출마 이후로 대북사업으로 다시 활력을 얻기까지 현대그룹은 침체기에 빠져 안타까움을 샀다.
이 무렵 현대그룹이 겪은 정치 보복 일부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2년간 현대의 돈줄을 묶어놨다. 오직 미국계 시티은행만이 현대에 대출을 계속해주어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둘째, 세무조사를 '대선 1년 전'인 1991년 말(1300억원 추징. 노한 왕회장이 "그 돈 뜯기느니 출마 한 번 하겠다"라 했다고 함)에 이어 2연타로 먹였다. 2번째 조사 때는 현대 직원들이 "더 보여줄거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할만큼 탈탈 털렸다는 후문. 이런 조치들은 정권 내에서도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나왔다고는 하나, 당시 지지율 94%라는 기적을 이뤄내며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문민정부의 기세였던지라 브레이크는 없었다. 하지만 1995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기업은 2류...정치는 4류' 발언으로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베이징 발언"). 세무조사에 대출제한으로 어려운 와중에도 삼성그룹을 제치고 재계 정상자리를 탈환한 것. 그리고 문민정부의 보복에 격분한 왕회장은 본격 DJ 후원을 시작, YS가 IMF 사태로 휘청이는 와중에 DJ가 대통령 당선에 성공해, 정주영 역시 재기의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북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북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16], 이후 여러번 더 방북하며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켜 11월 18일 첫 출항하였다. 1999년에는 현대건설이 평양에서 체육관 건설 기공식을 가졌고 정주영 사후인 2003년에 완공한 뒤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2000년 5월 건강을 이유로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편안하지 못했다.
사유는 바로 자녀다. 순서대로 정몽필(전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사장, 1934-1982), 정몽구(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근(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정몽우(전 현대알루미늄 사장, 1945-1990), 정몽헌(전 현대그룹 회장, 1948-2003), 정몽준(현대중공업 대주주, 전 FIFA 부회장, 전 한나라당 대표), 정몽윤(현대해상화재 회장), 정몽일(현대기업금융 회장)등 8남 1녀(정경희). 바로 장성한 자녀들이 불화를 일으킨 거다. 이를 현대(기업)판 왕자의 난[17]이라 부른다. 뉴스에도 나오고 한동안 시중의 화제거리를 독점했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불화를 해소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죽기 직전에는 "3부자 동반퇴진"을 통해 이사회,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천명하였으나 그 직후 2001년 봄,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이때가 향년 85세. 그리고 현대가는 현대, 현대백화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사분되었다. 이는 세 아들 편에 각각 줄을 섰던 여러 가신들의 농간이 크게 작용하였다. 차남이자 현대자동차를 이끌고 있는 정몽구는 이를 증오하여 선대의 가신을 모두 가차없이 쳐냈고, 상당한 기간 동안 어떤 가신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일명 무원칙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매년 그를 기리며, 그의 기일에 생전에 머물던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서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고[18],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학원 등에서도 추모식을 한다.
2015년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했는데, 기념식에서는 사실상 장남인 차남 정몽구가 가족대표 인사를 했다.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3번) | - | 당선 | 1993.2.9 사퇴(정계은퇴) | |
1992 | 3,880,067 (16.3%) | 낙선(3위) |
120살까지는 살겁니다. 그 때까지 일할 수 있다면 해야지요. 아직 은퇴하기에 나는 너무나 젊습니다.
- 1999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남북이 통일된다면 내 고향 통천으로 돌아가서 남은 삶을 보낼겁니다.
- 1999년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서
1999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120세까지는 살 것이다라고 하였고 죽을 때까지도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1년 운명하였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광수의 소설 '흙'[19]을 보고 자신도 변호사가 되어 억울함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20]응시, 2번 떨어졌다고 한다.
어릴 때 가출을 4번이나 했는데, 첫 번째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서 원산 근처의 고원군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 탄광촌 근처에서 철도 공사가 한창이어서 막노동을 했었다. 두 번째는 금강산이었으나 일도 못 구하고 사기만 당하고 아버지에 끌려왔다. 세 번째는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서 서울로 가서 부기학원에 등록했으나 또다시 끌려왔다. 네 번째는 소학교 친구 중에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와 같이 가출했으나 또 끌려왔다. 이후 오인보는 나중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멤버가 된다.
대기업의 회장답지 않게 매우 검소한 삶을 사는 구두쇠로 잘 알려져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구멍난 양말 기워서 신고 다니는 부자가 바로 정주영이다. 젊은 시절에 서울에서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 시절에 나무 장작 값을 아끼기 위해 하루 한 끼(저녁)만 더운 밥을 해먹었고 다음 날 아침밥은 전날에 지었던 찬밥을 그냥 먹었다고 한다. 출근할 때는 전차 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평생 담배도 피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배도 안 부른데 뭐하러 그 연기 뻑뻑 피워서 돈을 쓰느냐"였다고. 배우 최불암도 그의 검소함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최불암이 정주영의 자택에 초청받아 갔을 때, 재벌집인데도 욕실 타일이 낡아서 깨져 있는걸 그대로 쓰는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그가 이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될 줄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퇴직금을 지급받았다. 2000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을 퇴임하며 지급받은 것인데, 현대건설을 비롯하여 현대자동차,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 총 24개 계열사에서 총 217억이 지급되어 총액 1위를 기록하였으며, 그 중 현대건설이 지급한 액수가 157억으로 역시 단독법인 퇴직금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현대건설의 경우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창립연도인 47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한 것을 근거로, 퇴임 직전 3개월 평균 월급여에 연간 상여금을 12로 나눈 금액을 더한 뒤 총 근속 연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계산하고, 대표이사의 경우 근속연수에 4배를 곱해준다. 따라서 정주영 회장이 1947년 5월 창립 때부터 53년간 대표이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평균월급(상여금포함) 7,400만원에 가산 근속연수 212년(53x4)을 곱한 157억원의 퇴직금을 지급받았다.
사실, 재벌총수들은 퇴직금의 지급을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저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퇴직금의 지급은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자금사정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더군다나 이 퇴직금은 당시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여 억 원을 지원받은 현대건설의 입장에선 더욱 부담되는 일이었고, 현대건설에선 내심 퇴직금 수령을 SKIP해 주시길 바랬으나 그런 거 없다. 그리고 이 퇴직금은 이후 왕자의 난 당시 현대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있던 MH를 지원하기 위해 기타 계열사 주식을 처분한 자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주식의 매입에 사용되었으나,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처하자 모두 처분한 후 현대건설의 회사채 매입에 쓰여졌고, 회사채와 기타지분을 매각한 자금이 출자전환과 유상증자에 투입되어 현대건설 주식으로 바뀌어졌다. 이 주식은 정주영 회장의 사망 당시 현대건설에 증여되었고, 감자되었다. 결국 돌고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선 출마를 겸해서 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 회장의 대선 출마는 완전 실패였다며 그의 자서전 제목을 따 '시련도 있고 실패도 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은 PR을 겸해 여기저기 무차별적으로 무료 배포되기도 했다. 당시 뉴스에 나왔을 정도.
노조를 무척 싫어하여 노조 만들면 죄다 빨갱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도 한다. 이는 그가 사망당시 몇몇 신문(한국일보 및 서울신문같은 중도적 신문 포함)으로 보도된 내용이다. 현대차 노조같은곳이 생긴게 참 신기하다 참고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도 노조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삼성그룹이나 계열사에는 별개의 노동조합이 없다.[21] 다만 노동조합에 대한 극단적인 적의가 꼭 정주영이나 이병철 개인의 특징은 아니고, 해당 시기의 기업인들 대부분이 '노조는 빨갱이들이나 만드는 것' 이라거나 '노조가 생기면 회사가 망한다'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사실 현대(2010년대 이후)에도 노동관계법의 정비로 인하여 사측이 노조 결성을 원천적으로 저지하거나 와해시킬 수 없게 된 것 뿐이지 기업인 및 친기업 입장의 언론 등에서는 여전히 노조에 대한 극단적인 적의를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22]. 이 측면에서 보면 흔히 라이벌로 여겨지는 이병철의 삼성그룹이 이건희로의 승계가 이뤄진 이후인 2010년대까지도(비판과 불법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무노조경영을 관철해온 데 비해 정주영의 현대그룹의 경우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사이 전투적 노동운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여겨지는[23] 현대중공업 노조가 탄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히려 당시 기업가 중에서는 노조 결성 운동을 강하게 탄압하여 억누르는 데 실패한 축에 속한다[24].
비밀도 아니지만 이 사람이 젊었을 시절에 만났던 여배우들에게서 나온 사생아들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실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있기는 분명히 있었고 여배우들이 돈으로 매수를 당해서 만났다는 설이 있었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주영 사망 이후 일주일도 안되어서 모친(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친자확인 소송을 냈고 DNA 검사와 상속절차 및 기타 잡다한 과정을 밟고 유산을 싹 챙겨 돌아갔다. 심지어 현재 범현대가 오너들 중 몇몇도 어머니가 다르다는 루머가 있다.[25][26]
중견배우 김 모 탤런트로 딸의 친자확인 소송을 했다는 이야기가 70-80대 노인들의 증언으로 나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주영의 딸을 낳고 친자확인 소송을 벌인 사람은 중견배우 김 모 씨가 아니라, 젊은 시절에 잠깐 배우 활동을 했던 60대 할머니였다. 결국 중견 배우 김 모 씨는 헛지목의 피해자였던 것. 링크
MBC 드라마 '전원일기'와 최불암의 열혈팬이어서 드라마에 농부역으로 출연할 뻔한 적도 있다. 또 최불암을 정치계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또한 최불암은 훗날 동사의 드라마 거부열전 - 정주영 편, 영웅시대 에서 정주영 회장(영웅시대에서는 작중 노년 천태산)역을 맡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최불암 항목 참조.
용자와 같이 기업을 일으키고 시련을 버텨내고 성공했으며 멋지게 세상을 살다가 간 풍운아이자 대인배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보기 민망한 주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당대 한국은 경제환경도 열악했던 데다 박정희, 전두환 등의 독재정권이 철권통치를 휘둘렀다는 점 등이 그에게 약간의 변명이 될 지도 모르겠다.
1999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20살까지는 살고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국내 일부 지방이나 시골마을에서 장수노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84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이 때까지만 해도 건강이 어느 정도 양호한 편이었고 120살까지 살게 되면 고향인 통천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의 만찬 이후 극도로 건강이 나빠지고 쇠약해져서 병원으로 통원 치료까지 한 적도 있었다가 2001년 3월 향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함으로서 끝내 120살까지의 장수는 이루지 못하였다.
여담으로 이런 농담이 있는데 정주영이 모르는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며, 둘째는 자기 자식 숫자가 얼마인지 모른다고.[27]
영화 국제시장에서 젊은 시절의 정주영[28]이 나오는데, 구두닦이를 하는 어린 윤덕수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거야'를 말하며 조선소 이야기를 한다. 이때 어린 천달구가 '왜? 자동차도 국산으로 만든다고 카제?'라고 하지만...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내인 변중석 여사는 조용한 내조로 유명하다. 며느리들에게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라'고 가르친다고 알려져 있다.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의 말씀을 잘 따라하고 있기 때문인지 현대家의 안주인들은 현정은 회장(정몽헌 회장 부인)이나 남편의 정치활동 지원을 위해 외부로 나선 김영명 여사(정몽준 전 의원 부인) 등을 제외하면 일반인에게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심지어 노현정 아나운서는 결혼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보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거기에 부창부수라고 변중석 여사 역시 결혼 이후에도 줄곧 욕심없이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재봉틀 하나와 아끼던 장독대가 내 재산의 전부"라고 말해왔다고 한다. 남편이 사준 자동차를 집에 놔두고 도매시장에 나가 채소나 잡화를 사서 용달차에 싣고 왔으며, 집에서는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이어서 집에 찾아온 손님들은 변 여사를 일하는 아주머니로 착각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현재 현대그룹에서 분가한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은 전부 군복무를 했다는 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평소 정주영 회장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해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정몽준 전 의원, 정몽헌 현대그룹 전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보험 회장 등은 모두 군복무를 수행했기 때문. 특히, 정몽구 회장은 육군 병장 만기 제대라는 특이점이 주목할 만한 부분. 정몽준 전 의원이나 정몽윤 회장은 학군사관(ROTC)으로 복무했다는데, 나머지 자세한 사항은 추가 바람.
정주영 아들들의 군복무 수행+사생아 논란때문에 16대 대선 당시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캠프와 주요 대권주자 중 하나로 손꼽히던 정몽준 캠프 사이에서 설전이 벌어졌던 사례가 있었다. 이회창 캠프측에서 먼저 '정몽준 후보는 고 정주영 회장의 적자가 아니다' 라고 인신공격을 시작하자 정몽준 캠프 측에서 '정몽준 후보의 형제들은 다 군대 복무를 무사히 끝마칠만큼 건강해서 굳이 밖에서 자식을 데려올 필요가 없다. 체중 미달로 군대에도 못 간 이회창 후보네 집안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이라고 받아쳐버린 것. 사실관계로 따지자면 정몽준이 혼외자녀인 것은 정설이지만 후보 본인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로 인신공격을 가한 것이 이회창 캠프쪽인데다 당시 이회창 후보 자녀의 병역 논란+정주영 일가의 높은 병역이행율이 국민 감정에 끼친 영향도 있었기 때문에 이회창 캠프 쪽이 망신을 자초했다는 평가가 많았던 편.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80년대 초 한국 경제 동향을 분석하면서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인사로 분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시절 부터 성격이 무척 급했다.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교할때 신발을 신는 시간이 아까워 발에 걸친채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삯이 없었다. 망설였지만 배가 있는데 타지 않는 것이 바보같아 돈도 없이 타버렸다. 목적지에 다다라 돈이 없는 것을 안 사공에게 따귀를 얻어맞았지만 오히려 배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일화에 따라서는 뱃사공이 따귀를 때리고 '후회되지?'라고 묻자 정주영은 '예. 후회되네요. 따귀로 배삯을 치를 수 있는줄 알았다면 진작에 탈 걸 그랬어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농부가 되기 싫어 집을 뛰쳐나온 그를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 결국 아버지에게 설득당해 귀향하기 전, 서울구경이나 하자며 창경원을 갔다. 입장료가 아까웠던 그의 아버지는 "나는 시골에서 호랑이 많이 봤어. 너 혼자 다녀와" 이랬다고. 심통이 난 정주영은 "그럼 나도 안간다"고 버텼고, 결국 부자(父子)는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물원 구경을 했다.
쌀가게에서 일하기 전에는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일을 하였다. 합숙소에서 인부들과 함께 잠을 청하는데 빈대가 들끓었다. 빈대를 피하고자 긴 탁자를 가져다 놓고 그위에서 잠을 자는데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와 피를 빨았다. 그래서 이번엔 냄비에 물을 떠다 탁자 다리를 담그고 잠을 청했다. 그랬더니 빈대는 포기하지 않고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점프하는 수법으로 피를 빨려고 들었다. 빈대에게서 끈기를 배웠다. 이 때문에 그룹 임원 중 일처리가 미숙하거나 근성 없는 업무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게 "에라이 빈대만도 못한 놈아"(...)라고 구박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아직 해방되기 전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때 였다. 한 직공의 사소한 실수로 불이 붙어 공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정주영은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었다[29][30].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 공장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정주영은 탄식했지만 곧 맘을 가다듬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까짓거 낡아서 헐어버릴려고 했어. 철거비 굳은 셈이지. 자 기운차리고 그 돈으로 막걸리 파티나 벌이자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박정희와 독대하던 때였다. 당시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느라 너무나도 피곤했던 정주영은 박정희가 말하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 후 화들짝 깨어나 박정희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너무나도 부끄럽고 두려웠다. 하지만 박정희는 정주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사장. 내가 미안하구료". 그 이후, 자신도 현장을 둘러보다가 졸고 있는 직원을 보면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포드와 합작해 자동차를 만들려던 때의 일이다. 한국에 온 포드쪽 사람들과 포드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가 고장이 났다. 포드쪽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차니 자신들이 고치겠다고 했으나 고장난 원인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정주영이 공구 등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고쳤다고 한다. 포드쪽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정주영은 자신이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때 포드차도 고쳤다고 말했다. 이것은 현대가 포드와 합작에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미포조선소를 지을 때에는 잠이 오지 않아[31]지프를 타고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시찰을 하다 물에 빠져 익사할 뻔 했었다. 이때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경비원에게 보답의 의미로 경비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도와주고, 그 회사에 현대 계열사의 경비를 모두 맡겼다고 한다.[32] 이 경비원의 말에 따르면 "빗속에서 분명히 쌍라이트가 보이길래 곧 차가 나타나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방파제 바위 근처에서 불빛이 사라지길래 이상하게 여겨 순찰을 나갔더니 누군가 물에 빠져 있었다"라고 한다. 정주영의 증언으로는 "거 누구요"라고 부르길래 "사람 죽어가는데 누군지가 중요하냐 밧줄 갖고 와"라고 소리질렀더니 자기인 줄 알더라고 한다.
1985년 당시 K-1전차를 제작할 때 K-1 전차의 차체에 균열이 가자 납품일자를 지키기 위해 미제 강철판을 구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당연히 미국 현대지사는 난리가 났고 미본토를 싹싹 뒤져 결국 고강도 강철판을 구하는데 성공했는데 문제는 이걸 배로 실어보내려니 1개월이란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터지자 아예 B-747기로 실어보내라라는 지시를 내렸고 결국 그렇게 K-1전차의 납품기일을 지킬수 있었다.
오일쇼크로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무렵 중동으로부터 수주가 왔는데 굳이 거기까지 돈을 벌려는 사업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정주영은 바로 중동으로 출국하여 현지를 살펴본 후 이렇게 보고 했다. "각하, 절호의 기회입니다. 중동은 1년내내 비가 오지 않아 쉬는 날이 없어 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낮에는 더우니 자고 밤에 공사하면 되고, 벽돌을 만들려면 모래가 필요한데 지천에 널린게 모래이며, 유조선을 동원하여 갈 때는 식수를 싣고 가고, 돌아올 땐 석유를 싣고 오면 됩니다."
모 계열사를 방문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였다. 발표자가 1시간 분량을 준비해 긴장타고 있는데 정주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10분만에 끝내." 발표자는 패닉에 빠져 어쩔줄을 몰랐고, 그걸 지켜보던 정주영은 바로 일어나 나가버렸다. 결국 발표자 및 부서의 책임자들은 모두 회사에서 짤렸다. 대체 왜 해고한거지
정주영과 관련된 책은 수도 없이 많아서 대충 인터넷 서점에서 뒤져도 부지기수로 나온다. 이 중 만화가 이현세의 기획으로 정주영의 전기가 만화로 제작되었다. 1992년 선거용으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의 만화판을 이현세 프로덕션에서 만들어 무료배포를 했던 적이 있는데, 이후 1998년에 정주영 자신이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새로 펴내자 그 내용을 기존 만화판에 증보하여 새로 펴낸 것. 정주영이 일궈낸 성과들과 정주영의 인생을 대충이나마 알고 싶다면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현세 사단답게 세세한 자료조사와 세밀한 작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현세 항목을 보고 이 문단을 본다면 눈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어떤 관상가는 정주영 회장의 관상이 용의 상이고, 하관 또한 넓직하기 때문에 복이 노년까지 이어져서 현대그룹을 일궈냈다는 평을 했다. 실제로도 왕회장의 이목구비를 동양의 용 그림, 특히 곤룡포 흉배에 수놓여진 용과 꼼꼼히 비교해보면 매우 흡사하다.
대재벌이었지만 소탈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생활을 고수해 현대 오너가의 아침은 매일 오전 6시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부 다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나온 메뉴는 미역국이었는데, 그 미역국은 왕회장의 부인 변 여사를 비롯한 현대가 며느리들이 새벽부터 준비한 것이다.
소탈함은 그의 일생 곳곳에도 드러나고 지금도 남아있다. 집무실 소파는 너무 오래돼서 시트가 많이 해졌고, 청운동 저택은 페인트 칠이 떨어져도 새로 칠을 안해서 그 자국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도둑들이 노리고 들어왔는데, 재벌집인데도 털어갈 물건이 없었다고. 게다가, 그들과 변중석 여사가 마주쳤는데 도둑들이 돈 되는 걸 내놓으라고 하자 건네준 게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정몽준의 아내를 위해 준비한 예물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현대그룹 사옥 특유의 아치형 디자인도 정주영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이었는데, 이렇게 지은 계동 사옥이 삼성 본관 건설비의 3분의 1밖에 안 들어서 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가 김우중의 대우자동차와 경쟁을 벌였다. 70, 80, 90년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현대자동차 vs 대우자동차의 대결을 주시하였을 것이다. 김우중이 대우자동차를 통해서 현대의 아성을 꺾기 위한 경쟁[34]을 한다면 정주영 역시 대우의 아성을 꺾기 위해 현대자동차의 모든 것에 사명을 걸며 김우중과 경쟁을 벌였다. 신차 출시에 있어서도 현대와 대우는 경쟁관계였다. 자동차 뿐 아니라 버스, 트럭 등의 대형 상용차, 중공업에서도 두 사람은 경쟁관계이기도 하였다. 자동차와 중공업에서 현대와 대우의 경쟁은 90년대에 가장 치열했다. 90년대에 존재했던 시내버스나 고속, 시외버스 중에서는 대우나 현대 브랜드 차량이 많았을 정도. 건설업서도 현대와 대우는 경쟁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 IMF가 터지면서 2000년 대우그룹이 해체하고 2001년 정주영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 두 사람의 경쟁과 현대와 대우의 자동차 경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삼성의 이병철은 정주영보다 5살 많다. 국내 최대의 재벌인 현대와 삼성의 대결은 국내에서도 경제적인 주목을 받아왔으며 반도체, 백화점(현대백화점 vs 신세계), 중공업, 건설업 등에서 경쟁을 벌였다. 이병철이 작고하기 전까지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는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 경쟁을 제외하면 정주영과 이병철의 경쟁은 경제계에서도 주목을 받아왔다. 1987년에 이병철이 세상을 떠나면서 정주영과의 경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현대그룹도 왕자의 난 등을 겪은데다 2001년 정주영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현대그룹도 현대자동차그룹에 밀려서 소(小)그룹으로 전락하였지만 삼성그룹은 여전히 건재한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병철의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장기 와병신세를 지고 있는데다가 2017년 그의 아들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에 연루되면서 삼성 역시 창립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백화점에 있어서는 신격호와도 경쟁자였다. 나이는 1915년생인 정주영이 1922년생인 신격호보다 7살 연상이며 일본의 영향을 받은 신격호와는 다르게 정주영은 오직 현대 하나만으로 토종형 기업으로 승부를 걸었다.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의 경쟁은 이 두 사람에게서도 주목을 받아왔으며 여기에 신세계를 세웠던 삼성 이병철까지 포함하면 삼각경쟁이기도 하다. 또한 건설업에서도 현대건설과 롯데건설을 통해서 신격호와 경쟁을 벌여왔다. 다만 현대가 식품사업에는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식음료쪽에서는 롯데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롯데는 자동차 사업에는 손대지 않았다. 비즈니스와 별개로 사적인 친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이 하루는 골프 약속을 잡았는데 눈이 내려 신격호가 걱정하자 정주영이 색깔 있는 골프공을 가져와서 눈밭에서도 골프를 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주영은 많은 명언들도 유명한데, 대체적으로 성실과 도전,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은 나쁜 운이란 없다.
무슨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외에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머리는 쓰라고 얹어 놓고 있는 것이다.[38]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다.[39]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다.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 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것은 없다.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보기나 했어?"[40] 사내에서 가끔 이 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보통 "그래서? 해봤어?" 라고 한다. 군대에는 좀 많은데
우리가 뒤떨어져 있는 분야라고 해서 주저한다든지, 미지의 분야라고 두려워한다든지, 힘들다고 피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패배주의이다.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와 자세에 달려 있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그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건설업은 즉각적인 결정이 중요하다.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무리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나는 결정에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일하는 한 내 권한을 양보도 안하는 대신 다른 이에게 책임 전가도 안한다.
농업은 세계의 산업 형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든 절대로 소홀히 해서도, 포기해서도 안되는 우리 인간의 필수 자산이다.
우리가 먹는 식량만큼은 어쨌든 우리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고혈을 짜내 호화장엄한 사치의 극을 이루었으니 혁명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이 자초한 것이었다.
사람은 의식주를 얼마나 잘 갖추고 누리며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얼마나 미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
위대한 사회는 평등의식 위에 세워진다.
10배로 일하는 사람이 10배는 피곤해야 맞는 이치인데, 피곤해하고 권태로워하는 것은 오히려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하는 이들인 것을 보면, 인간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열심히 절약하고 모으면 우선 큰 부자는 못 되어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다.
돈만을 목적으로 한 고리대금이라든지, 은행 이자만 타 먹으면서 재산을 불린다든지 하는 것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악성 자본주의이다.
지식은 쟁탈해서 분배할 수 없다. 하지만 재물은 쟁탈할 수 있다.
운이란 때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좋은 때 나쁜 때는 있다. 그러나 좋은 때라고 해서 손 놓고 놀아도 마당으로 호박이 혼자 굴러들어와 주는 것은 아니며, 나쁜 때라고 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때도 놓치지 않고 잘 잡아 쓰며, 나쁜 때는 더 더욱 부지런히 노력해 수습하면서 비켜가기 때문에 나쁜 운이 크게 작용을 못한다. 반대로 게으르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때가 와도 손이 늦어 붙잡지 못해 좋은 때를 나쁜 때로 만들고 나쁜 때는 운 탓만 하며 좌절 속에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항상 불운의 연속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젊을 때부터 새벽 일찍 일어난다. 그 날 할 일에 대한 기대와 흥분 때문에 마음이 설레어 늦도록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 날이 왔을 때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즐겁고 힘차게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지나치게 현명한 부인은 오히려 피곤할 수도 있다.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할 수도 없다.
여유가 없으면 창의가 죽는다. 나는 경험으로 그걸 체득한 사람이다.
폭 넓은 인간 교류는 나에게 유머를 잃지 않게 하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고,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공감대를 확대시키고, 그들의 정서를 흡수함으로써 사람이 빠지기 쉬운 사고의 경직을 방지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