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농사
김솜
수목장이 있는 숲길로 접어든다
발자국 소리가 쏘아올린 새떼
떡갈나무 우듬지 끝에 고물고물 놀던
햇살이 반짝,
몸을 턴다
스스럼없이 스크럼을 짜는 초록,
지금 절정이다
서로의 어깨를 감아올린 푸른 연대가 다분하고 다정하다
옥천 향수촌에 뿌리 내리고 살다 기어이 뿌리로 돌아가
나무가 된 아버지
지금도 농사를 지으실라나
삼천 평 이 한 평으로 줄었으니 수고는 좀 덜었을 거다
뿌리부터 초리까지 자연농법으로
벌레와 새들 모두 한 가족으로 단란하다
무릎 아래 조릿대 강아지풀도 돌봐가며
아기 담쟁이가 등을 타고 오르면 손 잡아주고
오색딱따구리가 몸을 두드려도 허허 웃어넘겼을 테지
무거운 옷 다 벗어놓고 대청호가 불러낸,
안개목욕을 즐기며 바람에 실려 온 성당 종소리를
눈감고 듣겠지
땀과 눈물 대신 햇빛, 비와 바람으로 짓는
그래서 마르지 않는 땅에 멀리 날아간 새가 씨를 뿌리니
아버지는 도처에 계신 것이다
필사
김솜
거주이전 했습니다
낯도 익히지 않은 낯선 곳
시의 숲과 바람과 노래를 복제했으니
이것은 내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부러진 꿈의 뼈를 이어붙이는 문장처럼
책을 폅니다
시공을 넘나드는 가장 간단한 대화법
책 속의 그는 젊습니다
요절이 의심됩니다
깊은 속내를 내가 먼저 들킵니다
한번은 죽어야 부활하는 문장처럼
그와 밀착합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탄식하며
족적위에 족적을 포갭니다
오늘밤 나는 그와 함께 뒹굴 수 있는
타다 남은 심지가 됩니다
검은 잉크를 구름처럼 많이 주세요
슬픈 비가 되어 문장 속으로 뛰어들겠습니다
젖은 숲은 소리 내어 울겠지요
필사적으로 불러낸 그와 함께 밤새 숲길을 걷겠습니다
불현 듯 새벽이 당도합니다
*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미들 -This, too, shall pass away*
김솜
진아는 진한 핑크 오버사이즈 후드티를 입고 훈남오빠네를 지나 회사가는길을 지나 남녀칠세부동산을 지나 머리잘헤어를 지나 오늘처럼네일을 지나 다소곳을 지나 더스틴HOF만을 지나 외로워도술퍼도를 지나 스타박씨카페를 지나 수학을수확하자를 지나 5000원찌개를 지나 낯선 골목에 도착했다
공중에서 자세 잡은 간판들은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조용한 세계, 눈빛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뒤태는 감추고 오로지 전면전이다
진화도 진한 무지 블루티를 입고 의리의리한집을 지나 싱글벙글떡집을 지나 삼팔광택을 지나 머리에봄을 지나 섬마을보리밭을 지나 부정부페를 지나 나,김문순대를 지나 오빠,우리집Beer를 지나 거시기밀면을 지나 놀랄만두하군을 지나 진아를 만났다
살아남거나 사라지거나, 진아네 아버지가 하던 골목수퍼 간판이 사라지고 웃던 진아도 사라졌다 가난은 허물없는 가족에게 허물이 되었다
내세울 간판이 없는 진화와 처음부터 간판이 없었던 진화가 만나자 진화의 발걸음도 멈췄다 반갑게 껴안았는데 진아는 키가 너무 크고 진화는 작았다 비극과 희극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지나간다 아는 사람을 지나 계층의 보이지 않는 층계를 지나 놓쳐버린 꿈을 지나 냄새와 가라앉는 기분을 지나 그럴리 없음을 지나 우크라이나 부상병들을 지나 국물도 없는 눈물을 지나 잎사귀의 그늘을 지나 눈과 눈을 지나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던 타인을 지나 휴식과 무식한 급식을 지나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을 지나 자유하지 않은 자유를 지나 이전과 나중에 사랑했던 사람을 지나 지나간 줄 모르고 지나간 길을 지나
* 솔로몬,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미네르바>2022 겨울호
김솜 시인
충북 옥천 출생. 배재대학교 유아교육과. 방송통신대학교 영문과 졸업.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 창작과정 수료. 2022 <열린시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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